[더프리뷰 칼럼] KBS오케스트라와 30년 (5)
[더프리뷰 칼럼] KBS오케스트라와 30년 (5)
  • 황순룡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4.15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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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병정(獨逸兵丁)
황순룡 칼럼니스트
황순룡 칼럼니스트

독일인 지휘자 오트마 마가(Othmar Maga:1929~)! KBS교향악단 제4대 상임지휘자로 위촉된 첫 번째 외국인이다. 계약 기간은 2년, 1992년 4월부터 상임지휘자 역할을 맡기 시작하여 이후 두 차례에 걸쳐 계약을 갱신하며 1996년 12월까지 KBS교향악단의 포디움(Podium)을 지켰다.

체코슬로바키아 브르노에서 태어난 오트마 마가는 오르가니스트였던 조부의 영향을 받아 음악공부를 시작하였고, 1945년 독일로 이주하여 슈투트가르트 국립 음악대학(1948~52)과 튀빙겐 대학교(1952~58)에서 피아노, 작곡, 지휘법을 전공하였으며 파울 반 켐펜(Paul van Kempen:1893~1955), 페르디난트 라이트너(Ferdinand Leitner:1912~1996) 그리고 세르지우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1912~1996)에게서 지휘를 사사하였다. 괴팅엔 교향악단 수석지휘자(1963~67), 뉘른베르크 교향악단 수석지휘자(1968~70), 보쿰시 음악문화행정 총책임자이자 음악감독(1971~82), 이탈리아 포메리지 무지칼리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1983~87), 덴마크 오덴스 심포니 오케스트라(1987~91) 수석지휘자로 활동한 그는 베를린 필하모닉, BBC 심포니, 뮌헨 필하모닉, 베를린방송교향악단, 프랑스 국립관현악단 등 세계적인 교향악단을 지휘하였고 필하모니아 헝가리아, 프라하 심포니, 뉘른베르크 심포니 등과 슈프라폰 레이블로 낭만파의 음악과, 독일 현대음악 작곡가인 아롤트 겐치머의 작품 등을 남겼다.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를 물러난 후 독일을 중심으로 지휘 활동을 하였으나 지금은 고령과 건강을 이유로 음악 생활을 정리하였다.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재임 중 그의 별명은 독일 병정(獨逸兵丁)이었다. 그는 그의 별명만큼 강직했고 절도 있는 생활로 오케스트라 단원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인 팬들로부터 존경받았다.

그의 음악은 매우 섬세했고 정밀했다. 숨소리마저 멎게 할 피아니시모를 세밀하게 잘 이끌어냈고 이를 바탕으로 한 음악적 구성력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KBS교향악단의 연주력을 한 단계 향상시키는 주춧돌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그는 한국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사랑했다. 그리고 한국 음식을 즐겨 찾았다. 꼿꼿하고 당당한 자세로 무대에 나타나는 그의 모습과 함께 KBS교향악단은 보다 더 위엄과 품격을 갖추게 되었고, 그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음악은 관객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기억의 여운으로 남게 했다.

그러나 독일병정처럼 강인했던 그도 건강을 비켜가지는 못했다. 재임 중 독일에서 연주회를 갖던 그가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사무국에 비상이 걸리고 독일로부터 희망적인 소식이 오기를 뜬눈으로 새웠다. 마침내 의식이 돌아왔다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그의 한국에 대한 사랑을 담은 한마디가 곁들여졌다. 병상에서 의식을 차리며 뱉은 첫마디가 김치를 찾았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었고 특히 김치를 무척이나 좋아한 독일인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는 심장병으로 인해 몇 차례 더 쓰러지기도 했으나 자기 관리에 철저하였던 만큼 슬기롭게 위기를 넘기곤 했다. 이로 인해 KBS교향악단의 연주회에도 지장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독일병정이라는 별명처럼 냉엄하기만 할 것 같았던 그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사무국을 가장 먼저 찾아 선물 상자를 펼쳐 놓곤 했는데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를 대하는 것처럼 미소 지으며 흐뭇해하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KBS교향악단을 물러난 이후에도 몇 차례 더 KBS교향악단을 지휘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세밀하고 명료한 그 모습이 점차 흐려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 자신 스스로도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KBS교향악단은 더 이상 그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지휘자 오트마 마가는 KBS교향악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로 하여금 오케스트라에 음악적 색채가 입혀지기 시작했고 앙상블의 깊이가 더해 갔다.

KBS교향악단이 한 단계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해주고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 준 이가 바로 오트마 마가였다. KBS교향악단의 지난날을 이야기할 때 결코 그를 빼놓을 수 없다. 올해 구순(九旬)을 맞은 오트마 마가! 비켜간 세월만큼 그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는 것을 숨길 수 없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기회가 있다면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지난 세월만큼이나 크다.

애증(愛憎)의 지휘자 정명훈

우리나라 음악사에 있어 이 사람, 정명훈을 빼놓고는 완성되지 않는다. 싫든 좋든 그의 명성만큼 숱한 화제를 만들어내며 음악 마니아든 아니든 모든 국민의 우상으로서 한국 출신의 지휘자로 세계에 알린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에 대한 평판이 어떻든 정명훈은 클래식의 가장 중심지 유럽사회에서 세계속의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인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누이인 정명화(첼로), 정경화(바이올린)와 더불어 음악인 가족으로서도 명성을 알렸다는 점은 분명하다.

정명훈! 그는 어떤 존재일까? 아니 어떤 존재여야 할까? 그의 음악, 도덕, 사상과 삶 등에 대한 평가와 판단은 유보해야 할 것이나 그에 대한 호불호(好不好)가 뚜렷하고 음악계뿐만 아니라 모두의 관심이 작지 않기에 어떤 족적이 있었는지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정명훈처럼 애증(愛憎)을 가진 음악인도 없을 것이라는 내뱉음마저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1998년 1월,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 국립음악원 관현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있던 정명훈이 KBS교향악단의 제5대 상임지휘자로 위촉됐다. 계약기간은 3년, KBS교향악단의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 그리고 항공권 등 몇 가지 부속 조건들...

많은 음악애호가들의 바람이 마침내 이루지는 순간 KBS교향악단은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반열에 올라섰고 오랜 꿈을 이루는 희열을 맛보았다. 미루고 미룬 숙제를 해결했고 만성 두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KBS교향악단의 숙원이 풀렸고 많은 국민의 기대에 부응했으며 주위로부터 찬사가 끊이지 않았다. 그에게 거는 수많은 국민들의 기대와 열망은 이미 우리나라의 음악적 수준이 세계 최고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정명훈은 그로부터 불과 4개월을 채 넘기지 못했다..... (다음호에)

황순룡 칼럼니스트
황순룡 칼럼니스트
hsryong@kbs.co.kr
전 KBS교향악단 기획
안익태기념재단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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