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3 공연의 힘, 퍼포먼스의 힘–셰익스피어 숭배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3 공연의 힘, 퍼포먼스의 힘–셰익스피어 숭배
  • 조복행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4.18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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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공연법
(사진출처=Shakespeare Globe Theatre)
(사진출처=Shakespeare Globe Theatre)

영국에서는 세 차례 공연 관련법이 제정되었다. 첫 번째는 1737년의 공연허가법(Licensing Act 1737), 두 번째는 1843년 공연법(Theatre Act 1843) 그리고 1968년(Theatre Act 1968)의 공연법인데 1968년의 공연법은 과거의 공연법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정식으로 관련법을 제정한 것은 1737년부터이지만 실질적인 연극 규제는 이미 엘리자베스 1세 때부터 시작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정책을 알리고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는 데 굉장히 열심이었던 것 같다. ‘팸플릿 전쟁’을 통해 카톨릭을 비판하였고 무적함대 격파 등을 홍보해 국민들의 마음을 사고자 노력하였다. 팸플릿 전쟁이란 인쇄물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알리던 16세기 이후의 문화현상을 일컫는 말인데 여왕은 이를 활용하는 데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영국의 르네상스 연극은 그녀의 재위 시기에 꽃을 피웠는데, 이는 극장에 대한 우호적 정책 때문이었다. 그녀의 치세기간 중 영국에서는 셰익스피어를 비롯해 말로우, 벤 존슨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배출되었고 연극도 활발히 공연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극장을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생각했다. 그래서 1574년에 연예오락 담당관(Master of Revels)을 두어 극장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문화국장(Lord of Chamberlain) 밑에 소속되어 오락이나 행사 등을 총괄하던 책임자로서 극장의 공연허가나 검열, 벌금 징수 등을 담당하던 관리였다. 엘리자베스 치하에서는 극장에서 정치적 연극보다는 역사극이나 비극 등 비정치적 분야를 공연하도록 지도하였다. 셰익스피어의 드라마에는 사회비판적 연극은 없다.

글로브 극장, 셰익스피어가 활약한 극장으로 1598년 건립되어 1613년 화재로 소실. 1997년 복원하였다. (사진출처=Shakespeare Globe Theatre)
글로브 극장. 셰익스피어가 활약한 극장으로 1598년 건립되어 1613년 화재로 소실. 1997년 복원하였다. (사진출처=Shakespeare Globe Theatre)

1617년 제임스 1세는 <스포츠 선언>(Declaration of Sports, 또는 Book of Sports)을 발표하였다. 청교도와 젠트리(토지를 소유했던 영국의 중산층. 주로 카톨릭교도) 사이에 오락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자 일요일이나 성일에 해서는 안 될 오락의 종류를 규정한 것이었다. 활쏘기, 춤, 도약, 스포츠처럼 해롭지 않은 레크리에이션과 맥주 마시기, 모리스춤(영국 민속춤) 추기, 곰골리기, 황소골리기, 연극(Interlude) 등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 선언은 1633년에 찰스 1세가 다시 선포하였고 1640년에 폐지된다.

이어서 1642년에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고 극장은 폐쇄된다. 극장은 대중들의 정신을 좀먹는 오락이라고 생각한 청교도들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작용한 것이다. 1660년 왕정복고로 찰스 2세가 왕으로 복귀하면서 극장이 재개관하게 된다. 찰스 2세는 연극을 매우 좋아한 왕이었다. 그는 두 극단에 공연허가를 내준다. 하나는 토마스 킬리그루(Thomas Killigrew)가 소유하고 있던 킹스 극단이고 또 하나는 윌리엄 다비넌트(William Davenant) 소유의 듀크 극단이었다. 이들 이외에 다른 극단은 심각한(serious) 드라마를 제작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이들 허가받지 못한 극장들은 코미디나 판토마임, 멜로드라마 등을 주로 제작하였는데, 편법으로 드라마에 노래와 춤을 넣어서 제작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서로 경쟁하다가 1680년대에 통합극단을 만들기도 했지만 다시 분열한다. 1720년에 킹스 극단은 드루리 레인 극장에, 듀크 극단은 코벤트 가든 극장에 둥지를 튼다. 이들은 공연제작에 특별한 제약을 받지는 않았다.

(사진출처=Shakespeare Globe Thea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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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737년 영국 공연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공연허가법이 제정된다. 이 법은 당시 수상이었던 로버트 월폴이 주도한 법률로 공연에 관련된 권한을 문화국장(Lord Chamberlain)이 가지고 그가 공연 내용과 허가 등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당시 로버트 월폴은 ‘남해 버블사건’ 이라는 투자사건이 터져 사회적, 정치적으로 곤혹스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 연극인들은 연극을 통해 그를 공격했다. 1728년에 대히트한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Beggar's Opera)>는 월폴을 공격한 연극이었다(<거지 오페라>가 뮤지컬의 원조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오늘날의 쥬크박스 뮤지컬과 유사하다). 그리고 1729년에 존 게이는 <폴리>라는 작품을 통해 월폴을 다시 한번 비판한다. 공연허가법은 이런 상황하에서 나온 공연규제법이었다. 1843년의 공연법은 1737년의 공연허가법을 완화하는 것이었다. 신규 공연에 대한 신축적인 허가와 지방극장에서의 공연을 허가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진 것이다. 허가권자의 권한을 축소하고 새로운 작품들을 제작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1968년에 가서야 공연법은 폐지되었다. 1737년의 공연허가법은 도중에 약간의 변화와 완화조치가 있었지만 200년 이상 영국의 공연계를 지배한 법이었다.

(사진출처=Shakespeare Globe Thea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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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숭배

1737년의 극장규제법은 영국 공연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법은 매우 강력한 규제를 담고 있어서 공연 관계자들의 활동을 위축시겼다. 허가권자인 문화국장은 기존 연극의 수정을 명령할 수 있고, 새로운 연극의 공연을 불허할 수 있었다. 신규 공연은 허가받은 두 극장, 즉 드루리 레인과 코벤트 가든에서만 가능했다. 그리고 굳이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할 필요도 없었다. 사전 허가를 받지 않은 연극을 공연하면 극장주는 처벌을 받았다. 이 법은 실제 현장에서 잘 작동하여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졌고, 법의 취지를 충분히 달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예를 들면 프랑스 혁명 후에 영국에서도 정치적 논란이 있었지만 이를 잘 규제함으로써 혁명의 물결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법은 장기적으로 경쟁을 억제하여 공연시장의 건전한 발전을 저해했고 새로운 작품에 대한 투자가 부족하여 창작의 분위기를 저해하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런데 검열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셰익스피어 숭배(Bardolatry)’를 낳은 것이다. 이 말은 1901년 버나드 쇼가 만든 말인데 음유시인(bard)과 우상화 또는 우상숭배한다는 의미가 결합한 말이다. 버나드 쇼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철학과 사회적 비판의식이 부족하다고 비판하였다.

(사진출처=Shakespeare Globe Theatre)
(사진출처=Shakespeare Globe Theatre)

셰익스피어가 세계 최고의 문인으로 추앙을 받게 된 것은 그의 작품성과 함께 영국에서 연극을 생산하고 수용하던 방식, 정치사회적 상황, 문인들의 역할, 미디어의 역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사회비판적인 극이나 정치성을 띤 연극을 배제하는 당시 정권의 요구가 있어서 셰익스피어도 이를 따랐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1700년까지 몇몇 작품은 자주 공연되었지만 그렇다고 많은 작품이 공연된 것은 아니었다. 셰익스피어는 왕정복고 후 극장이 재개관할 당시만 해도 벤 존슨이나 프란시스 보몬트 등에 비하면 그렇게 인기있는 작가가 아니었다.

1709년에 니콜라스 로우(Nicholas Rowe)가 처음으로 셰익스피어 전집을 편집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이 전집이 공연량을 크게 증가시키지는 못했다. 그의 작품이 널리 공연되기 시작한 것은 1730년대에 들어와 출판전쟁이 생기고 작품가격이 현저하게 낮아지면서 대중들이 그의 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다. 그러나 특히 셰익스피어의 공연이 급격하게 증가한 것은 1737년 공연허가법이 발효되면서부터다(The Cambridge History of British Theatre Volume 2, pp. 69-70). 당시 공연허가법은 정극 중심의 연극을 요구했고, 정치적 풍자나 사회비판극을 엄격하게 규제했기 때문에 역사극이나 러브 스토리, 코미디 등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셰익스피어의 극이 많이 공연되게 된 것이다.

찰스 비처 호간이라는 학자에 따르면 1700년대 초반에 셰익스피어 작품은 6편중 한 편 정도였지만 1730-4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증가하였다고 한다. 셰익스피어는 이후 여러 문인들의 칭송을 받는데, 새뮤얼 존슨은 그를 ‘인생의 지도’라고 말했고,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와서도 콜리지, 존 키츠같은 문인들이 그를 초월적 천재로 묘사하면서 신격화한다. 칼라일은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말했다. 칼라일은 단테와 셰익스피어를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칭송하면서 그들은 성자의 반열에 올라섰다고 말한다. "셰익스피어의 통찰력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고 사물의 이런저런 측면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적 본질과 전반적 신비를 드러낸다. 그의 앞에서는 강한 광선을 쏘인 듯이 해체되며, 그는 그것의 모든 구조를 완전히 파악한다"(토마스 칼라일, 영웅의 역사, 173)

(사진출처=Shakespeare Globe Thea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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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개릭과 셰익스피어 신격화

셰익스피어 숭배의 탄생에 큰 기여를 한 중요한 인물은 데이비드 개릭David Garrick)이라는 배우 겸 극장경영인이다. 그는 영국 연극사에서 가장 뛰어난 배우 중 한 명이자 셰익스피어의 사도로 알려져 있다(Romantic Actors and Bardolatry, pp.17-40). 당시 영국에는 배우가 극장경영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액터 매니저라고 부른다. 16세기에 시작되어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된 이 제도는 연극제작의 전문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지속된 관행이었다. 배우는 연출, 극장경영, 연기 등을 담당한 그야말로 전천후 연극인이어야 했다. 셰익스피어도 액터 매니저였다. 일본 가부키에서도 최고참 배우가 연출을 겸하였다. 데이비드 개릭은 그 액터 매니저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배우 겸 극장경영인이었다.

그는 특히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전문적으로 연기하고 연출하였으며, 이를 통해 셰익스피어를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24편의 셰익스피어 작품을 연출했고, 1769년에는 셰익스피어의 고향 스트랫포드 어폰 에이번에서 탄생 200주년 축제를 개최한다. 셰익스피어 사원까지 건립한다. 개릭은 1741년부터 1776년까지 35년 동안을 드루리 레인극장에서 배우로 활약하면서 극장경영에도 관여, 드루리 레인의 경영을 안정시켰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리차드 3세로 데뷔한 명배우이기도 했다. 셰익스피어 작품의 모든 주인공을 맡았고 때로는 대본을 교묘히 각색하여 셰익스피어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개릭을 제외하고는 18세기 영국의 연극을 말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다. 많은 학자들이 개릭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렇게 표현했다. ‘무덤에서 되살아난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를 신의 위치로 끌어올린 개릭’. 개릭은 셰익스피어 신격화의 가장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사진출처=Shakespeare Globe Theatre)
(사진출처=Shakespeare Globe Theatre)

개릭은 셰익스피어와 교류하는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였다. 셰익스피어를 상업화하였고, 관객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시각적인 셰익스피어를 강조하였다. 고상한 셰익스피어보다는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셰익스피어였다. 개릭 이전의 연기양식은 청각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좋은 목소리, 목소리의 우수성이 중요했다. 그리고 이는 ‘포인트’와 ‘태도’로 연결되었다. 포인트는 긴 독백, 폐부를 찌르는 대사 등이었는데 이를 빅 스피치라고 불렀다. 오늘날로 치면 뮤지컬의 솔로와 유사한 것이었다. ‘태도’는 포인트를 전할 때 배우가 취하는 정적인 포즈로서 음성표현을 보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체적 표현은 음성표현의 보조수단이었고, 목소리는 가장 역동적인 악기였으며 감정은 배우의 목소리로 표현되었다.

‘과거의 연기’의 두 중요한 인물은 토마스 베터톤과 제임스 퀸이었다. 베터톤은 윌리엄 다비넌트에게 훈련을 받았는데 다비넌트는 셰익스피어를 알고 있었다. 음유시인의 연극적 유산을 직접 전수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목소리에 감정을 넣어서 대사를 전달하는 데 뛰어났다. 베터톤 시대 관객들의 일차적 행동은 ‘듣는’ 것이었다. 그러나 관객들은 서서히 베터톤의 연기에 식상해하기 시작했다. 구식이고 기계적인 연기처럼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출처=Shakespeare Globe Thea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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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릭은 그의 연기방식을 ‘캐릭터 연기’로 바꾸었다. 등장인물의 성격을 말보다는 얼굴표정으로 표현했다. 다양하고 섬세한 얼굴표정으로 그는 연기방식에 일종의 혁명을 가져왔다. 분노, 사랑, 후회, 야망, 공포의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그래서 그는 최초의 낭만주의적 연기자로 불리게 된다. 얼굴표정 뿐만 아니라 제스처의 사용도 다채로웠다. 개릭은 극장기술과 세트의 개량에도 힘을 쏟았다. 무겁기 그지없던 세트를 가볍게 만들어 막전환을 효율적으로 만들었고, 조명도 개선하였다. 필립 라우터부르그(Philip Loutherbourg)와의 만남은 무대세트에 큰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그는 매우 정교하고 과학적인 세트를 만들어서 ‘환영’(illusion)을 창조하는 데 기여하였다. 관객들의 관람방식도 바꾸었다. 무대 위 객석을 철수하였고(1767년) 관객의 뒷 무대 출입도 금지하였다.(1774년)

(사진출처=Shakespeare Globe Thea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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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탄생 200 주년 기념축제

개릭이 셰익스피어 숭배를 만든 또 하나의 결정적인 계기는 1769년에 개최된 셰익스피어 탄생 200주기 축제(주빌리, Jubilee)였다. 1767년 스트랫포드 어폰 에이번의 몇몇 인사들이 셰익스피어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사실 셰익스피어 탄생은 1564년이기 때문에 이미 200주년이 지났다) 대대적인 이벤트를 실시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를 실행할 인물로 개릭을 꼽았고 개릭은 수락했다. 이 도시는 그 때까지만 해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다. 2년여의 계획 끝에 1769년 9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 축제를 개최했다. 사람들은 몰려들기 시작했고, 숙소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마차에서 자야 했다. 셰익스피어의 초상화가 걸리고 오라토리오가 연주되었으며 저녁에는 대규모 파티와 무도회, 불꽃놀이가 열렸다. 그러나 저녁부터 폭우가 쏟아져 퍼레이드는 취소되었다. 9월 8일까지 비는 계속되었고 에이번 강은 범람하였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축제에는 셰익스피어 연극공연이 없었다. 그건 개릭의 의도적인 누락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를 아쉬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빌리는 개릭의 이름과 셰익스피어를 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주빌리는 셰익스피어 숭배를 낳은 ‘미디어 쿠데타’였다. 어떤 학자는 주빌리가 ‘제도화된 셰익스피어 숭배의 기원’이 되었다고 말한다.

셰익스피어는 18세기 들어 독일에 천재적 작가로 소개되기 시작한다. 괴테, 헤르더, 레싱 등 대가들이 그를 천재적 작가로 칭송하였고 연이어 많은 작품들이 번역되었다. 프랑스에 셰익스피어를 전파한 건 볼테르다. 그는 영국에 머물면서 셰익스피어의 여러 작품을 보았고, 프랑스에 그를 천재작가로 소개한다. 프랑스에 처음으로 <줄리어스 시저>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사진출처=Shakespeare Globe Theatre)
(사진출처=Shakespeare Globe Theatre)

사건으로서의 공연과 축제

셰익스피어 숭배는 다양한 요인들이 결합하여 발생한 것이다. 검열, 책의 출판, 번역, 문인들의 셰익스피어 경배, 공연, 축제 등. 검열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막스 베버는 칼뱅파 신교도들의 근검과 성실한 삶의 태도가 자본주의 정신과 친화성을 가지고 있어서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자본주의를 탄생시키는 요인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이를 ‘의도하지 않은 효과’라고 하였다. 영국의 공연검열은 의도하지 않은 셰익스피어 숭배라는 효과를 낳았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개릭에 의한 셰익스피어 공연과 200주년 기념축제였다. 개릭은 35년 동안이나 드루리 레인극장에서 활동하면서 공연이라는 미디어를 통하여 셰익스피어를 신격화하였다. 오늘날 어느 텔레비전 방송국이 특정인을 35년간 홍보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리고 그는 ‘주빌리’라는 또 다른 미디어를 통해서 ‘미디어 쿠데타’를 일으켰다.

공연과 축제는 사건(event)이다. 사건은 변화를 초래한다. 고요하던 호수 위에 던진 돌멩이가 호수에 물수제비를 일으키고 호수를 움직이는 것처럼 사건은 조용하던 삶에 던지는 파문이다. 그래서 사건은 삶을 존재(being)에서 행위(doing)로 전환시킨다. 들뢰즈는 사건을 사유한 철학자다. 파란 나뭇잎이 누렇게 변하는 것, 누가 어떤 자리에 오르는 것이 모두 사건이다. 그리고 사건은 의미를 생성한다. 사건은 순간적이지만 엄청난 효과를 발휘한다. 결혼식은 부부가 맺는 특별한 인연이자, 둘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의무를 지우는 사건이다. 나폴레옹의 머리 위에 왕관이 얹어지는 순간, 그 사건은 세계의 역사를 바꾸는 사건이 된다. 들뢰즈는 사건을 시뮐라크르로 규정한다. 사건이나 시뮐라크르는 원본을 변용하여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가는 것, 존재하는 것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공연은 생성(poiesis)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순간적인 사건들을 소홀히 해 왔다. 퍼포먼스 이론은 이런 순간적 사건, 우발적 사건, 그러나 역사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는 사건들을 강조한다.

개릭에 의한 셰익스피어 공연은 셰익스피어의 전체 역사에서 우뚝 솟아오른 사건이었다. 그는 셰익스피어에 생동감을 부여하기 위해 다양한 변화를 추구했다. 그리고 축제를 통해 또 하나의 거대한 사건을 만들어냈다. 때로는 계획적이고 때로는 우발적인 사건들, 그러한 사건들이 오늘날의 셰익스피어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사진출처=Shakespeare Globe Theatre)
글로브 극장 투어 프로그램 (사진출처=Shakespeare Globe Thea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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