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잔다르크' 정정화 일대기 그린 '달의 목소리'
'한국의 잔다르크' 정정화 일대기 그린 '달의 목소리'
  • 김영일 기자
  • 승인 2019.04.22 11: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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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과 다큐가 혼재된 극단 독립극장의 독특한 작품
창단 40년, 임시정부 수립 100년 맞아 특별공연
정경화. 장강일기로 영원을 살다. 연극 '달의 목소리'
정정화. 장강일기로 영원을 살다. 연극 '달의 목소리'

[더프리뷰=서울] 김영일 기자 = 1979년 6월 창단 이래 잊혀져 가는 역사와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일깨우기 위해 달려왔던 극단 독립극장은 일제와 맞서 싸운 '한국의 잔다르크' 고(故) 정정화 여사를 기리는 작품 <달의 목소리>를 오는 5월 4일부터 26일까지 정동 세실극장에서 선보인다.

현재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뭉친 이들이 열렬히 투쟁할 때 뒤에서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묵묵히 챙겼던 정정화.

작품은 배우가 왜 정정화 선생의 이야기로 연극을 하고 싶어하는지를 소개하면서 시작된다. 정정화라는 인물이 걸었던 시대를 쫓아가면서 독립이라는 역사적 명분 아래 인간이 선택할 수 있었던 가치와 의미, 그에 따르는 두려움과 감동, 시대의 정의에 대해 묻는다.

​정정화 여사가 처음 상하이로 건너갔을 때부터 독립자금을 구하기 위해 본국을 드나들었던 기록과 세계정세에 흔들렸던 조선의 위기와 독립 이후 국내 사정, 그리고 전쟁. 독립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았던 한 여인이 차디찬 철창 안에서 자신의 삶을 무너트릴 수 밖에 없었던 기록까지.

배우는 그녀를 세웠던 힘이 무엇이었는지 들여다보는 동시에 우리가 지금 무엇으로 나를 세우고 있는지 묻는데...

'한국의 잔다르크' 정정화 여사를 기리는 작품 '달의 목소리'

정의, 책임이라는 말이 어지러운 세상을 떠다니고 있다. 책임을 다했을 뿐 잘못은 없다는 사람, 자신의 과오를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람,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책임을 다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정의는 실종되고 책임에 관한 무책임한 말이 궤변처럼 난무하는 시대이다.

항일 독립투쟁을 축소하고 친일은 숨기며 왜곡된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현실 앞에서 정정화 여사의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한 연극 <달의 목소리>가 대한민국의 지난 날을 회고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 고취와 건전한 역사의식과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자문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극단측은 밝히고 있다.

공연은 ‘나’가 정정화 여사의 회고록을 읽어나가면서 시작된다. 현재의 ‘나’는 역사 속의 정정화로 분하며, 피아노, 첼로와 해금 선율 속에서 영상과 함께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재현을 통한 이야기 전달방식을 버리고 일인 배우의 출연만으로 담담히 관객과 대화를 펼쳐나간다.

무대는 사실적으로 역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과 기호들로 표현되며, 영상은 역사를 극적인 판타지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그 자체의 사실적 잔혹함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활용, 역사가 가상이 아닌 진실된 사실임을 증명한다.

​상징의 기호를 통하여 관객이 저마다 스스로 의미를 생산, 획득할 수 있는 열린 구조의 연극이 되도록 하며 다큐멘터리 기법을 통하여 올바른 역사인식의 중요성을 인지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 연출 의도.

 

독립운동가 정정화 여사를 기리는 '달의 목소리'

극단 독립극장은 1998년 <아! 정정화>, 2001년 <치마>, 2005년 <장강일기>로 정정화의 생을 끊임없이 되새겨왔다. 이번에 내놓은 <달의 목소리>에 대해 극단측은  종전 작품들과 달리 영상예술과 결합된 실험적 멀티미디어 시공간극으로 만들어낸 신(新)다큐 형식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정정화(鄭靖和, 1900-1991)

1900년 한성부(서울)에서 태어나 1910년 어린 나이에 김의한과 결혼했다. 남편은 구한말 고위 관료인 김가진의 맏아들이었다.

김가진은 1919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전격 망명했고, 정정화는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1920년 역시 상하이로 갔다. 연로하신 시아버지를 모셔야한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그녀는 감시를 덜 받는 여성이라는 점을 이용,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역할을 맡아 중국과 국내를 오가면서 10여년간 자금 모금책,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또한 중국 망명기간 27년 동안 자신의 가족 뿐 아니라 이동녕, 백범 김구 등 임정요인 및 그 가족들을 돌보며 임시정부의 안살림꾼으로서 임정 요인들이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했다. '한국의 잔다르크'라는 이름도 김구가 붙여준 것으로 전해진다.

1940년 한국혁명여성동맹(韓國革命女性同盟)을 조직해 간부를 맡았고 충칭(重慶)의 3·1 유치원 교사로도 근무했다. 1943년 대한애국부인회 훈련부장이 되는 등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여성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러나 광복 후 인생 행로는 순탄치 않았다. 미군정의 홀대 속에 1946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고, 오랫동안 임시정부에서 함께 활동했던 김구가 곧 암살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중남편 김의한과 안재홍, 조소앙 등이 납북되고, 남한에 남은 정정화는 부역죄로 투옥되면서 큰 고초를 치렀다. 회고록 <녹두꽃>(1987년 <장강일기>로 개정판 발간)을 남겼다. 독립극단은 이를 토대로 연극 <장강일기>와 <치마>, <아! 정정화> 등을 제작했다.

198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으며 1991년 타계,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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