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문화와 ‘떼춤’
클럽문화와 ‘떼춤’
  • 이종찬 기자
  • 승인 2019.07.21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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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은 사회이슈의 표현이 될 수 있을까
큐레이터 보고미르 도링게(Bogomir Doringer)
영상작가, 큐레이터인 보고미르 도링게(Bogomir Doringer)(사진=SNS 캡처)
영상작가, 큐레이터인 보고미르 도링게(Bogomir Doringer)(사진=SNS 캡처)

[더프리뷰=서울] 이종찬 기자 = 춤은 신체적, 물리적 힘을 사용해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한다. 이성의 논리보다는 직관의 논리와 충동에 의해 전개되며 이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공통된 어떤 것을 표현하는 힘이 있다. 특히 집단적으로 춤을 통해 무언가를 표현할 때 강력한 공감으로 거부하기 힘든 호소력을 갖기도 한다.

지금 오스트리아 빈의 무제움 카르티에(MuseumsQuartier Wien)에서는 <호소하는 춤(Dance of Urgency)>이라는 주제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지난 4월 25일부터 오는 9월 1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회는 정치적 저항이나 사회적 의사표시의 수단으로 사용된 사진. 비디오, 춤작품의 기록물을 기획, 전시한 것이다.

이 전시회의 큐레이터인 2014년부터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을 위에서 찍은 영상 프로젝트 <난 혼자 춤춘다(I dance alone)>를 진행했다. 그는 세르비아/네덜란드의 멀티미디어 아티스트로, 주로 클럽 안에서 춤추는 수 많은 사람들을 필름에 담는다. 미국 무용잡지 댄스 매거진이 도링게를 만나 정치적 저항으로서의 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혼자 춤춘다" 2014년 프로젝트, 암스테르담(c)Bogomir Doringer(사진bogomirdoringer.info)
"나는 혼자 춤춘다" 2014년 프로젝트, 암스테르담(c)Bogomir Doringer(사진bogomirdoringer.info)

당신은 영화와 멀티미디어를 공부했다. 무용에는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됐는지?
나는 유고슬라비아 전쟁 때 자란 세대이다. 여러 사회정치적 이슈에 일찍 빠져들었고 언제나 사람들, 그리고 그 신체들에 관심을 가졌다.

1999년 나토가 베오그라드(당시 유고슬라비아 수도, 현재 세르비아 수도)를 폭격할 때 우리는 학교도 없었지만 대신 자유로웠다. 난 16살이었고 인두스트리야(Industrija)라는 클럽에 들락거렸다.

춤은 미러링 효과가 있다. 즉 동작을 모으고 사람들의 동작을 반영한다. 사람들은 밀로세비치(당시 유고 대통령, 언론탄압과 인종탄압을 자행)에 반대했었지만 폭격에도 반대했다. 우리를 무섭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댄스 플로어를 거울로, 사회환경으로 보는 관점에 빠졌었다.

그래서 언제부터 클럽 춤을 촬영하기 시작했나?
2014년이다. 군중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면서다. 나는 군중들의 캐릭터를 이해하길 원했고 그 다양성을 이해하길 원했다. 즉 사람들이 춤을 다 같이 추든, 각자 추든, 언제 그 신체들이 동시에 똑같이 움직이는지를 보는 게 신기했다. 대개 각자 따로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일치된 동작을 보인다. 어떤 지시도 없이 그냥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환경이다. 이는 대단히 원시적이면서 제의(祭儀)적인 것이다. 이 사람들은 전문 댄서가 아니다. 그게 중요한 점이다.

정확히 어떻게 춤과 클럽문화가 사회정치적 운동이 되는가?
트럼프 이전에도, 미투 이전에도 여성참정, 성희롱, 포함/배제 등의 주제는 클럽문화의 여러 모임에서 논의되고 있었다. 나는 9.11을 사회변화의 촉발점으로 본다. 즉 이는 공공 공간을 정말로 변화시켰다. 춤의 맥락에서 보면 이는 개인 및 그룹으로서 안무 받는 방식, 춤추는 방식을 바꿔놓았다.

예를 들면?
상파울루에 있는 맘바 네그라(자유로운 춤모임 이름)가 그런 것이다. 그게 생기기 전, 클럽들은 대개 엘리트주의적이었다. 입구에서 체크해서 만일 흑인이면 들어갈 수 없었다. 지문을 제시해야 들어가는 테크노 클럽도 있었다.

그런 사회계층, 분열에 대한 반작용으로 좀 더 젊은 그룹들이 공터나 버려진 땅 같은 데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 모임이 맘바 네그라였다. 작은 그룹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수천명이다. 이는 꼭 정치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여간 일종의 반문화를 만들어냈다.

또 하나는 바시아니이다. 이는 조지아 트빌리시시(市)에 있는 클럽인데 일종의 실험적 공간이 됐고 보다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사회에 대한 정치적 저항을 만들어냈다. 작년 경찰이 클럽을 덮쳤을때, 사람들은 거리에 모여 항의를 했다. 이 항의는 거리에서 이틀간 춤추는 것이었다. 그리고 2주 후에는 베를린에서 파시스트에 저항하는 춤모임이 있었다. 레이브(rave) 파티는 이제 저항의 포맷이 됐다.

레이브 파티(Rave party)는 클럽같은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테크노 음악에 맞춰 밤새 춤추는 문화다. 1960-70년대 록문화와 달리 개인주의적이고 비정치적이다.

클럽댄스와 (정식으로 안무된) 무용공연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면?
우리는 춤을 무대나 박물관에서 볼 때는 예술로 생각한다. 그런데 많은 개인들, 그룹들이 댄스 플로어에서 춤을 출 때 아주 높은 예술적 표현을 보여줄 때가 있다. 그런 경험들이 가능하도록 큐레이팅해주는 클럽들이 있다. 조명, 음악, 스모크가 있고 롤 플레잉이 있다. 가면무도회도 있다. 이런 것들은 일반적인 예술공연에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요소들이다.

자유로이 춤추는 레이브 파티의 사람들(c) (사진=wiki commons)
자유로이 춤추는 레이브 파티의 사람들(c)Rick Doble(사진=wiki commons)

인터뷰 내용 중 “모든 사람이 각자 춤을 추다가 똑같이 싱크로를 보이는 순간”이라는 말이 흥미를 끈다. 우리 나라의 80-90년대 대학생들은 군사정권에 항의하는 집회를 위해 특정 학교에 모이면 다같이 ‘농민춤’을 추었다. 1만 명이 넘는 초면의 학생들이 어떤 사전지시도, 연출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같은 춤을 추어 당시 기성세대를 놀라게 했던 것이다. 2000년대에는 클럽에 가면 당시 유행가에 맞춰 사람들이 똑같이 그 가수의 춤을 추어 ‘노땅’들을 놀라게 했다.

흔히 춤은 가장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예술이라고 한다. 이성이나 생각을 거치지 않고(immediate) 몸과 가슴에서 바로 나온다는 뜻일 것이다. 최근 한반도 주변정세와 관련한 여러 상황을 보며 우리 나라가 처한 역사적, 지정학적 상황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평화와 통일은 최소한 축구보다는 중요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다면 어떤 의사표현을 할 수 있을까. 우리 시대의 싱크로는 뭘까 뜬금없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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