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문화전쟁, 말의 전쟁(하)
[더프리뷰 칼럼] 문화전쟁, 말의 전쟁(하)
  • 조복행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7.30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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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헌 김호성 부채 작품
고헌 김호성 부채 작품

정치언어의 주술성

사람들은 언어를 장악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는데, 특히 정치인들의 언어투쟁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언어를 전파하려는 정치인들은 대표적인 언어전쟁의 수행자들이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벌였던 언어전쟁은 전쟁위기로 이어질뻔한 위험천만한 말싸움이었는데, 이들이 벌인 언어전쟁은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었다. 미디어는 언어로 형성되어 있으며 미디어의 기능은 언어와 이미지의 전달이다. 정치인들은 미디어를 최대한 이용하려 한다. 그래서 미디어에 의존하는 오늘날의 정치 현상을 '미디어화(mediatization)'니 '미디어크러시 (mediacracy)'라고 부른다. 16~17 세기, 영국에서는 팜플렛을 이용해서 정치적 견해를 전파하려 하였는데, 이를 '팜플렛 전쟁'이라고 부른다. 1600년에서 1715년 사이에 무려 2천종의 팜플렛이 제작되었다. 당시에는 주로 카톨릭과 신교의 싸움이 심각한 이슈였기 때문에, 종교문제에 대한 설득이 많았고 정치적 이슈에 대한 것도 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특히 팜플렛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홍보하였다. 미디어는 이처럼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가져왔다.

현대 정치인들의 언어전쟁은 모든 사람들을 언어투쟁으로 내몬다. 부르디외는 정치인은 그에게 희망을 의탁하는 사람들과 주술적인 동일시 관계에 의해 묶여 있다고 말한다(언어와 상징권력, 227). 수많은 지지자들의 집단적 힘은 마치 주술이 되어 정치인들에게 주술적인 권력을 부여한다. 반대로 대립적인 정당의 정치인들에게 퍼붓는 저주의 언어 역시 주술이 된다. 정치는 주술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과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반대파들 사이에 벌어지는 주술적 언어의 싸움이다. 정치인에게 지지자들은 끊임없이 언어를 재생산하는 수단이다. 그들은 물질적 후원을 하기도 하지만 언어를 통해서 그들을 지원한다. 이러한 끈끈한 유대관계를 통해서 주술적 동일시가 생겨나고 재현의 정치가 작동하는 것이다. 이런 끈끈한 관계에 흠집을 내는 정적이나 반대파들은 투쟁의 대상이 된다. 지지자들 사이의 관계가 강력한 만큼 반대파에 대한 주술적 언어 역시 강력해진다. 그래서 정치는 극단적인 대립의 장이 된다.

언어는 이 주술적 유대관계를 지탱하는 결정적 수단이다. 반대로 대립하는 정적들에게는 적대적인 관계가 형성되고 이 역시 언어로 나타난다. 재현의 위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극단적인 대립과 저주만이 판치는 언어전쟁의 시대다. 현대사회에서 말이 심각한 문제가 된 것은 미디어 때문이다. 정치인들의 언어전쟁은 많은 미디어를 통해 전파되고 이는 대립을 격화시킨다. 인터넷 댓글은 저주와 증오로 가득 차 있다. 이성이 자리할 공간은 없다. 오로지 ‘적’에 대한 공격과 비난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기초한 민주주의가 이제는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은 아닐까? 이런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것 같다. 2016년 대선 때 트럼프의 당선으로 미국인들의 3분이 1가량이 가족과 대화를 끊은 적이 있다고 한다. 오로지 적만이 있을 뿐이다. 나의 이념만이 옳고 타자의 이념은 무조건 틀렸다. 타자는 타도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타자는 틀렸으니까.

미디어는 권력을 창출하는데, 오늘날과 같은 매스 미디어만이 미디어가 아니다. 로마 시대에 시민들을 모아놓고 시선을 장악하던 콜로세움도 미디어일 수 있고 왕이 앉던 오페라 극장의 정중앙 좌석도 미디어다. 대규모의 인원을 모아 히틀러가 연설을 하던 뉘른베르크의 연설회도 미디어다. 미디어는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수단이고 그건 권력이었다. 그러던 미디어가 문자시대를 거쳐 지금은 영상과 디지털이 결합된 시대가 되었다. 현대 미디어의 양적 발전은 놀라울 정도다. 무엇보다 그 강력한 전파력이다. 게다가 이제는 누구나 자신의 개인미디어를 통해 생각을 발산할 수 있게 되었다. 유투브의 강력한 힘을 보라. 그동안 억압되어 있던 언어가 미디어를 통해 분출하고 있다. 정치인이 힘을 갖는 것은 그들이 언어를 독점하기 때문이다. 국회나 정부에서 벌어지는 많은 언어들은 미디어에 의해 재현된다. 명망 높은 정치가들의 언어는 늘 화제의 중심이 된다. 따라서 정치가와 미디어는 공생관계에 있다.

민주주의를 재현의 정치라고 말한다. 시민들의 언어를 정치에 반영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그러나 요사이의 시민언어는 극도로 포악해져 있다. 욕설과 비방으로 가득 찬 시민언어는 정치인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재현의 수단이 아니라 타인을 저주하는 주술적 수단으로 변해가고 있다. 언어는 늘 문화전쟁의 도구가 된다. 그것도 돈이 안 드는 가장 값싼 전쟁무기다. 한 편이 언어전쟁에서 패하면 다른 한 편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어 미디어에 전달한다. 특히 자극적일수록 언어의 전파속도는 빠르다. 그것은 미디어가 자극과 사건을 선호하고 정치인들은 이를 이용하는 공생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의제설정의 싸움이지만 정당한 의제설정 싸움이 아니라 자극적 언어, 극단적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인터넷에 등장하는 수없이 많은 댓글들. 여기에는 정말 인간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극단적인 욕설들이 난무한다. 거기엔 자정능력도 없고 자기검열도 없으며 더군다나 제도적인 검열은 불가능하다. 극단적인 혐오와 증오,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무차별적인 공격이 난무한다. 남녀노소 가릴 것이 없다. 청소년들의 욕설은 아마도 이런 댓글에서 파생된 것일 것이다. 과거의 사회적 상호작용은 대부분 대면 커뮤니케이션이었고 여기에서는 사회적인 검열이 작동한다. 따라서 욕설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인터넷이 주도하는 오늘날의 커뮤니케이션은 자기검열이 불가능하다. 인터넷은 누구의 통제나 검열없이 자신의 주장을 올릴 수 있다. 물론 지나칠 경우에 여러 가지 처벌을 받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댓글들은 무방비상태로 노출된다. 특히 정치에 대한 댓글들, 나와 이념을 달리하는 타자에 대한 무차별적인 욕설을 보고 있으면 과연 우리가 같은 땅을 밞고 사는 언어공동체의 일원인지 걱정될 정도다. 기성세대들의 막무가내 식 언어전쟁이 아마도 청소년들의 언어질서를 파괴했을 것이다.

 

청소년 문제를 다룬 연극들
청소년 문제를 다룬 연극들

청소년의 욕설

어느 날 버스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과 여학생의 대화를 들은 적이 있다. 여학생은 매우 예쁜 용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대화 내내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나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은 자신이 하는 욕설을 욕설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여학생에게 욕설은 자연스런 일상어였다. 욕설은 무의식적으로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다. 유투브에는 ‘욕배틀’이라는 제목의 콘텐츠들이 수십 건 올라와 있다. 정말 듣기에 거북한 욕설들이 난무한다. 욕배틀은 청소년들의 카톡방에서도 이루어지고, 그 욕배틀에 참여하지 못하면 왕따를 당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욕앱’까지 등장했다. 욕은 놀이가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언어놀이, 언어게임이 된 것이다.

청소년들의 언어생활은 언어시장, 언어의 장 내에서 벌어지는 끊임없는 문화전쟁의 한 양상이다. 그들은 일상적 언어, 올바른 언어를 진부한 언어로 여기고 새롭고 특별하고 자극적인 언어를 찾는다. 기성권력이 강요하는 언어질서에 반기를 드는 것은 차이를 추구하려는 문화현상이다. 기성권력은 올바른 언어사용을 청소년들에게 요구하지만 청소년들은 이 권력의 강요를 이겨내고 사회 속에서 또 다른 언어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 부르디외의 표현을 빌자면 언어도 하나의 시장인데 , 이렇게 언어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화전쟁, 언어전쟁은 청소년들에게 남기는 이윤이라도 있는 것일까? 기성권력이 요구하는 언어질서를 벗어나서 그들의 독특한 언어시장을 형성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정당한 권력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정당한 이데올로기가 갈수록 퇴조하고 교육의 힘은 약해지면서, 청소년들의 하위문화가 또 다른 언어공동체를 형성한 것이다. 욕설은 청소년들의 자기정체성의 확인이다. 욕설은 점점 다양해지고 많아지고 있다. 중고생들은 물론이고 초등생까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욕설을 한다. 초등생들도 단톡방에서 욕배틀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작문에까지도 등장한다고 한다. 그들에게 욕설은 의미도 모르고 사용하는 일상어가 된 것이다. 청소년들의 욕설은 기성세대의 욕설과 판이하게 다르거나 강한 것은 아니다. 기성세대가 사용해 온 욕설을 답습하는 것인데, 이는 결국 기성세대의 문화가 그들에게 전승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답습한 문화는 반대로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닌다. 기성세대가 부과한 삶의 방식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바흐친은 라블레 론에서 욕설은 예찬과의 경계에 있기 때문에 민중의 욕설은 정체된 것을 되살리는 '역동적 힘'이라고 하였다. 김열규도 욕설을 민중의 카타르시스로 보았다. 확실히 욕설은 부정적인 성격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억압된 감정을 분출하여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때로는 웃음을 유발하며, 친근감을 높이기도 한다. 학업에 지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욕설에는 애교가 들어있고 풍자도 있어서 건조한 삶에 활력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욕설이 긍정적 효과를 나타내려면 맥락적 사용이 전제되어야 한다. 아무 때나 상시적으로 발설하는 언어가 아니라 때와 장소, 그리고 상황을 고려한 사용이 이루어질 때 긍정적 효과를 갖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사용’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언어를 적절한 맥락속에서 사용할 때 의미가 생성된다는 뜻이다. 욕설은 내용의 문제와 함께 양적 문제가 대두된다. 지나치게 넘쳐나는 욕설, 대화를 욕설로 가득 채우는 대화형식은 욕설이 대화전체를 지배하고, 이는 심각한 갈등을 유발한다. 욕설을 너무 많이 듣다보면 이에 무감각해지고 욕설은 자연스런 언어가 된다. 언어의 반복효과다. 자극적인 언어에 많이 노출되면 뇌의 변연계가 영향을 받아 분노와 공포의 감정을 일으킨다고 한다. 자극적인 언어는 쉽게 기억된다는 실험들이 있는데, 욕설은 좋은 말보다 더 우리의 뇌를 강하게 지배하기 때문에 욕설을 많이 하는 사람은 폭력적인 성격으로 변할 수 있다. 청소년 시절의 욕설은 습관화되고, 성인이 되어서도 무의식중에 나온다. 어릴 적 배운 언어가 체화되듯이 욕설 역시 체화되는 것이다. 욕은 또한 다양한 언어표현을 제한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인데, 우리말의 표현능력 자체를 떨어뜨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욕설이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배타성이다. 우리의 욕설 중에는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욕설들이 많다. 타민족에 대한 배타적 욕설, 다문화가정에 대한 욕설 등이 많다. 또한 성차별적 욕설, 능력차별에 대한 욕설, 직업차별에 대한 욕설등도 많다. (이점식, 욕, 인간, 그리고 한국인, 2013). 사회적 약자나 신체적 약자에 대한 인권침해 적인 욕설도 많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지역과 이념 등에 의한 배타적 욕설이 많다는 점이다. 타자는 절대악이고 나는 절대선이라는 절대적 사고들이 우리의 언어에 그대로 잠입해 있다. 이는 타자와의 갈등조장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갈등이 언어에 의해 더욱 상승하는 건 아닐까? 아무리 사소한 언어활동도 사회적인 성격을 지닌다. 언어가 그 사회의 성격과 권력관계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의 언어생활(굳이 정치인들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적 성격이 청소년들에게 전이된 것이다. 미디어가 만들어놓은 극단적 언어전쟁과 반지성주의적 태도들, 연예인이 인생의 목적이 된 사회, 교육의 붕괴가 가져온 기성권력의 퇴조, 무엇보다도 타자에 대한 배척적인 태도들이 그런 것이다. 이런 모든 문화전쟁이 문화의 위기를 낳는 원인들이다. 소쉬르는 언어를 ‘공동의 보물’이라고 하였는데, 언어는 오히려 공동체의 파괴자가 되고 있다.

언어의 수행성

언어는 곧 우리의 의식을 결정한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우리의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라고 하였고, 벤자민 리 워프는 언어가 우리의 사유를 결정한다는 언어 상대성이론을 주장하였다. 우리는 언어에 의해 세상을 인식한다. 만약에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세상을 인식할 수가 없게 되고, 사유를 이어나갈 수가 없게 된다. 외부세계는 언어를 통해 인간에게 다가오고, 인간은 언어적 규정성을 통해 외부에 다가간다. 언어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소여로서, 인간은 대상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서 인식할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는 추상화의 능력이 있는데, 희망이나 용기와 같은 추상적 개념은 언어가 없이는 표현이 불가능하다.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것은 지각할 수 없고 언어 이전에 사유는 불가능하다. 언어가 사물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언어안에 사물이 들어오는 것이다 (푸코, 말과 사물, 216). 우리의 언어는 곧 인간의 전부다. 로마 황제 프레데릭 2세(1194-1250)는 언어박탈 실험을 한 황제로 유명하다. 그는 아기 여섯 명을 영아실에 넣어놓고, 유모들에게 아기들을 먹이고 재우고 씻기되 절대로 아기들에게 말을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그 실험을 통해 아기들이 외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선택하는 언어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내고 싶어 했다. 그리스어나 로마어가 세상의 근원어라고 생각하여 언어를 가르쳐주지 않아도 나중에는 그리스어나 로마어를 말할 것이라고 믿고 한 실험이었지만, 그 아이들은 나중에 전부 죽어버렸다. 아이들의 죽음은 단순히 언어박탈만이 아니라 사랑이나 사람과의 신체적 접촉 등의 결여도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언어가 없이는 생존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언어는 또한 힘을 지닌다. 우리가 수없이 들어온 언어의 긍정적 힘은 이미 많은 실험들을 통해서 입증되었다. 일정 기간 동안 좋은 말을 들려준 쌀은 그대로인데 나쁜 말을 들려준 쌀은 썩었다는 방송프로그램이 있었다. 청정지역의 물은 육각면을 이루고 있는데, 나쁜 말을 계속 들려주면 모양이 흐트러지고, 반대로 일반적인 물도 좋은 말을 들려주면 육각수가 된다는 보고도 있다. 언어는 이렇게 무생물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데 하물며 인간에게 있어서랴. 언어로 죽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인기 연예인들이 인터넷 댓글 때문에 자살한 사건이 여럿 있었다. 상대방의 말에 상처받을 때 우리는 심각한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물론 반대로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말은 이렇게 커다란 힘을 가진다. 이를 '언어의 수행성'이라고 부른다. 수행성의 이론은 존 오스틴(John Austin)이라는 영국의 언어학자의 이론에서 출발한 것인데, 언어는 단순한 전달의 기능, 재현의 기능에서 벗어나 행위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고, 무언가를 구성하는 힘이 있다는 이론이다. 그런데 이런 욕설들이 사회를 지배할 때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 사회처럼, 우리말처럼 욕설이 많은 언어가 있을까 ? 개인도 언어의 지배를 받지만 사회도 국가도 언어의 지배를 받을 것이다.

말은 신체적 폭력보다 훨씬 심각한 폭력이다. 요사이 인터넷 댓글들에 등장하는 저주와 증오, 분노와 조롱으로 가득 찬 언어들을 보면 이것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댓글들인지 기차 찰 때가 있다. 문제는 이런 욕설들, 막무가내 댓글들이 매우 집단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언어질서가 아예 무너진 것 같다는 우려를 가지게 될 때가 있다. 우리말은 세계적인 언어학자들도 칭찬할 만큼 우수한 언어다. 그런 아름다운 언어가 이제 오히려 사회를 오염시키고 분열시키고 남에게 상처를 주는 수단으로 바뀌고 있다.

언어의 반복의 힘

'언어의 수행성(Performativity)'이라는 개념은 언어를 행위로 보는 것으로서, ‘퍼포먼스 학’의 핵심적 개념이다. 레이몬드 윌리엄스에 의하면 언어를 행위로 보는 개념은 이미 18세기 유럽에서부터 있었다고 한다. 언어는 우리를 행위 하게 만든다는 것이 언어의 수행성이다. 언어의 수행성에 대해서 데리다는 오스틴을 비판했는데 데리다가 강조한 것은 반복성이다. 오스틴은 언어는 그 자체로 또는 적절한 조건을 갖추었을 때 힘을 갖는다고 했지만, 데리다는 반복에 의해 언어가 수행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주디스 버틀러라는 여성학자는 데리다의 주장을 따라서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여성이라는 말을 듣기 때문에 여성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를 '젠더 수행성'이라고 말한다. 반복되는 언어는 하나의 개념을 형성하고 사실을 구성하고, 거대한 힘이 되어 사회를 집어삼킨다. 언어투쟁은 이제 내용의 투쟁이 아니라 언어총량의 투쟁이 되었다. 말을 많이 하다보면 사람은 자기 말을 믿게 된다(잃어버린 환상,581). 말을 반복하면 없는 것도 있는 것이 되고 있는 것은 없는 것이 된다. 동일한 말을 무한반복하면 누구든지 그 말을 믿게 된다. 문화전쟁은 언어의 질적 투쟁이 아니라 양적 투쟁이 된 것이다. 정치인들이 페이스북을 통해서 언어전쟁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언어는 의미의 생산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어야 하지만 이제는 소유가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언어는 이제 사물이 된다. 우리 사회의 언어는 되도록 많이 소유해야 가치가 올라가는 물질이 되어버렸다. 어느 정치집단의 말을 어떻게 더 효과적으로 많이 확산시키는가가 문제이지 그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언어의 투쟁이 문제가 되는 건 언어의 양이 언어의 힘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전쟁이 시작되면 수많은 말들이 교환된다. 멈추는 사람이 지는 것이다. 마치 전쟁터에서 총알이 수없이 교환되는 것처럼 언어의 총탄도 교환된다. 그리고 되도록 많은 총탄을 쏜 사람, 강력하고 새로운 총알을 쏜 사람이 이기게 된다. 여기엔 현대사회의 미디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또 하나의 언어투쟁의 요체는 언어강도의 싸움이다. 얼마나 자극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대중의 관심을 끌 것인가? 교묘한 왜곡과 비틈, 부적절한 비유가 난무한다. 인간의 감각은 자극에 민감하다. 자극적 언어는 감각을 흥분케 하는 효율적인 무기가 된다. 반복되는 욕설과 막말은 동류집단들을 결속시키고 이들이 패거리를 이루고, 정치집단들은 이들을 분열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아닌가? 청소년들이 부지불식간에 사용하는 폭력적인 언어, 욕설, 남을 비난하는 마타도어들은 스스로를 비하하고 , 나아가서는 사회를 오염시킬 것이다. 언어는 우리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행위하게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기능을 할 수도 있다.

언어전쟁

문화는 투쟁, 구체적으로는 의미에 대한 투쟁이다. 스튜어트 홀은 문화를 '의미화 실천(signifying practice)'이라고 정의했는데, 이는 문화는 '의미를 만드는 행위'라는 뜻이다. 삶의 방식 또는 공유하는 가치나 신념 등의 인류학적 정의의 문화개념에서 최근에는 의미를 강조하는 정의가 더욱 강해지고 있다. 소설이나 시같은 정태적 작품으로서의 사물(things)이 아니라 의미를 생성하고 이를 실천하는 동태적 개념의 문화개념이다. 문화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만들어가는 실천이다. 언어는 의미생성의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수단이다. 언어는 행위로서, 사회를 바꾸는 수행성을 지니고 있다. 사회질서는 곧 언어질서다. 사회적 규범과 법은 언어로 구성되고, 규범이나 법의 힘은 곧 말에서 시작된다. 문화는 언어들이 엮어놓은 씨줄과 날줄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언어질서, 언어생활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서로를 갈라놓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언어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 서로가 통합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사적 언어는 없다고 하였다. 그가 말하는 사적 언어란 나 혼자만이 이해하는 언어로서 타인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말한다. 우리는 사적 언어의 개념을 다르게 사용할 수 있다. 모든 언어는 공적 언어이고, 따라서 거기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테리 이글턴은 "문화는 차이이고 정치는 통합"이라고 하였다(테리 이글턴, Idea of Culture, 58). 반면 막스 베버는 "정치에는 ‘악마의 힘’이 작용하고 ‘불모의 흥분상태’를 만들어내고 정치가는 선동가(데마고그)"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문화는 패거리가 되고 있고 정치는 반목과 분열의 온상이 되었다. 한 사회는 그 사회의 고유한 성격을 지닌다. 모스코비치는 이를 ‘사회적 표상’이라고 하였고 에리히 프롬은 ‘사회적 성격’이라고 불렀는데, 민족성과도 유사한 개념이다. 우리나라는 가족 중심적이고 집단주의적 사고가 강하다고 말한다. 언어는 집단적 사고의 산물이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성격, 민족성들이 언어에 투영되고, 반대로 언어에 투영된 배타적 사고들, 배타적 욕설과 타자를 비난하는 언어습관들이 부정적인 사회적 성격을 만든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문제들, 우리의 사회적 성격은 언어에서 출발한 것은 아닐까? 막스는 한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지배세력의 이데올로기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혼란이 정치인들의 언어싸움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정치는 '의미에 대한 투쟁'이다. 서로 다른 생각들을 관철하여 자신들의 가치를 구현하는 활동, 자신들을 지지하는 지지자들의 주장을 대변하는 재현의 활동이 정치다. 여기에는 역사에 대한 고귀한 신념에 기반한 지성주의적 사유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정치는 그런 의미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패거리 문화가 되어가고 있고, 언어의 투쟁으로 시종한다. 우리는 그걸 수시로 변하는 그들의 신념, 조변석개하는 말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문화전쟁의 시작과 끝은 언어이고 문화전쟁은 언어를 장악하기 위한 투쟁이다. 언어전쟁은 언어의 위기, 정치의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 나아가서는 문화의 위기를 부르고 있다. 반대로 문화의 위기는 환경의 위기, 생태계의 파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일상언어에서부터 시작된다.

소셜미디어
소셜미디어

미디어의 상징독점

미디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미디어의 발달은 정보의 교환을 촉진하기도 하지만 타락을 부추기고 언어전쟁을 촉발한다. 미디어가 많아지면 언어도 많아진다. 프레데릭 제임슨은 현대사회의 문제는 미디어의 문제라고 하였다. 언어의 문제는 곧 미디어의 문제다. 과거에는 대중매체가 언론의 중심을 이루었지만 현대사회는 누구나가 정보를 생산하고 확산할 수 있는 개인 미디어의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미디어들을 통해서 엄청난 양의 언어가 생산되고 재생산된다. 정보들의 진위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어떤 정보나 어떤 언어가 많이 확산되느냐, 언어의 양이 문제가 되는 시대가 되었다. 매일매일 우리는 아침부터 스마트 폰을 통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세상과 교류한다. 사람과의 만남보다 미디어와 함께 하는 시간이 훨씬 많고 이를 통해서 언어와 만난다. 스마트 폰이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마트 폰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스마트 폰에 등장하는 수없이 많은 언어와 이미지는 우리를 지배한다. 언어습득의 공간은 가정과 교육시스템이라고 부르디외는 말하였다. 그러나 그건 부르디외가 생존해 있던 시대의 현상이다. 오늘날에는 거기에 미디어가 추가되어야 한다. 미디어는 초등생이 되기도 전부터 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미디어는 수없이 다양한 종류로 분화하였다. 미디어는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되었다. 미디어에는 모든 언어들이 모이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언어는 정치인과 연예인의 말들일 것이다. 미디어는 늘 사건과 오락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인과 연예인은 시민들이 가장 많이 접하는 유명인사이고, 그들은 시민들의 관심을 받기 위한 언어를 구사한다.

정치인들은 대중들에게 보다 많이 노출되어야 한다. "시선은 권력이다" 그들은 대중들의 시선을 독점하기 위해 미디어를 이용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보다 강력하게 하기 위해 자극적인 언어, 새로운 언어를 사용한다. 미디어는 언어의 정확함, 순수성보다는 특별한 언어를 선호하고, 사건과 스펙터클을 선호한다. 스펙터클에서 출발하는 언어는 그래서 화려하고 자극적이다.

권력은 말과 이미지를 생산하는 미디어에서 나온다. 미디어가 권력을 갖는 것은 이런 말과 이미지 등의 상징을 독점하기 때문이다. 부르디외가 ‘상징권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런 말과 이미지 등의 상징의 독점에서 비롯된다.

언어는 호모 사피엔스를 만들었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언어를 통해서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 언어가 인간의 표현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언어 속으로 들어간다. 언어가 인간을 통제하는 것이다. 인간이 주체가 아니라 언어가 주체가 된다. 청소년들의 언어생활은 하위문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다. 그 진원지는 정치와 미디어다. 끝없이 대립과 분열을 생산은 정치언어, 그리고 그들의 언어를 재생산하는 미디어들이 문제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된다고 하였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언어는 마치 물과 같이 흐르기도 하고 공기처럼 무의식중에 확산되기도 하며, 병균처럼 전염되기도 한다. 욕설도 언어생활의 일종이라거나, 욕설도 긍정적 효과가 있다는 식의 접근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언어는 세상의 허구적 존재들의 질서를 창출한다. 집과 차와 건물이 들어서 있는 도시에 물리적 질서가 있는 것처럼 언어는 문화적 허구와 상상력을 질서화 하는 능력을 지닌다.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사물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사물의 존재증명이며 인식의 기반이며, 사물들에 생명을 부여하는 도구다. 언어가 부여되지 않은 사물, 기호화되지 않은 현상은 존재하지 못한다. 세상은 언어로 된 질서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언어가 만들어내는 허구와 상상력의 세계가 곧 문화다. 푸코는 인간이 만든 기호가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인간은 언어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언어는 사물을 재현하는 단순한 기호에서 세상의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고 세상을 구성하는 힘으로 변화하고 있다. 언어가 세상과 인간을 지배하리라는 우려가 맞아떨어질지도 모른다. 인류의 주체적 위치는 사라지고 언어가 세상을 지배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호모 사피엔스를 진정한 인간이 되게 하였던 언어가, 인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 인류는 다시 어떻게 언어와 화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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