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한복판에서 좀비처럼 살아가는 그들 혹은 우리의 이야기
뉴욕 한복판에서 좀비처럼 살아가는 그들 혹은 우리의 이야기
  • 박상윤 기자
  • 승인 2019.07.30 16: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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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차이니즈/아메리칸‘ 슌하오 리우의 디아스포라 문학 <뉴욕 좀비>
생의 본능과 에로티시즘 앞에 선 우리의 자화상
뉴욕좀비 표지
뉴욕좀비 표지

[더프리뷰=서울] 박상윤 기자 = 재미교포 망명작가 슌하오 리우(Shunhao Liu, 유순호) 의 장편소설 <뉴욕 좀비(NEW YORK ZOMBIES)>는 세계 문화의 중심지이자 본능이 만개한 도시 뉴욕에서의 작가 자신의 삶을 담은 자전적 소설이다. 타임스퀘어와 맨해튼, 센트럴파크에 가려진 뒷골목 이민자 사회와 영주권을 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난민들의 삶을 배경으로 성과 욕망, 좀비 등의 키워드를 통해 인간의 내밀한 감정과 인간성에 질문을 던진다. 소설은 허구와 사실이 교묘하게 교차하면서 생생한 질감의 현장을 그려나가며 인물들을 더욱 입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느끼게 한다. (서울셀렉션, 380쪽, 13,500원)

나(리우)와 세 여자(루시, 채희, 샹샹)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이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욕망을 구체화하거나 성취하거나 전복시키기 위해 온힘을 다한다. 욕망은 좀비처럼 스스로를 물어뜯고 타인을 물어뜯으며 끝없이 순환한다. 모두에게 마치 운명처럼 좀비가 찾아오는 것이다. 누군가를 공격하면서 억눌렸던 욕구를 터뜨릴 수 있기에, 또 순간의 쾌락과 찰나의 정점을 성취할 수 있기에 감염은 계속된다. 이처럼 모두의 현실은 불안하고 고단하며 외롭다. 하지만 욕망과 불완전함 너머의 세계를 꿈꾸며 나아간다.

이 작품은 ‘에로티시즘을 통한 좀비의 사랑과 죽음의 변주곡’이기도 하고, ‘인간의 구원과 진짜 사랑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며, ‘내 안의 천사와 야수가 벌이는 싸움의 기록’이기도 하다. ‘좀비’라는 키워드는 우리의 감정과 욕망을 솔직하고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한다. 뉴욕의 뒷골목에서 또 뒷골목으로 들어간 비주류 이민자 사회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뉴욕 전체,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도 벌어지는 생의 본능과 에로티시즘에 관한 우리들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 세계 문화 중심부인 그 세계에서 그는 한국인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니고 미국인은 더더욱 아닌, 철저히 외부자인 동시에 모든 경험의 주체(내부자)가 되어 이야기를 서술한다. 그를 통해 우리는 가장 솔직하고 내밀한 감정과 욕망의 이면을 한층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축소시켜 보면 미국 플러싱 이민 사회에서 벌어지는 ‘좀비들’의 사랑 이야기지만, 확대시켜 본다면 그곳이 뉴욕이든 서울이든 크게 다를 게 없다. 공간을 넘나드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현대성의 문제를 안고 있는 넓은 의미에서의 디아스포라이고 좀비이기 때문이다. (이미옥의 평론 중에서)

#이 이야기들이 이 사회의 도덕적 통념과 부합하지 않으며 나아가 크게 어긋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누구를 좀비라고 경계할 것도 없이 나를 좀비로 만들었던 주술자가 남자의 본능에서 생성하고 있었으며, 나도 그와 같은 본능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어떠하신가? (작가 노트 중에서)

리우, “내 삶은 본능에 잠재한 천사와 야수 사이의 싸움이었다.”

망명작가로 뉴욕에 정착한 리우는 기자인 동시에 액자가게에서 파트파임으로 일한다. 궁핍하고 외로운 처지이지만 이상형인 루시, 비슷한 처지의 동생 친구 채희, 가족애를 느끼게 하는 딸 같은 샹샹, 세 여자를 통해 자신의 본능과 욕망, 존재와 현실에서의 삶의 경계를 통찰한다.

금발 미녀 루시를 사랑하고 관계에 탐닉하지만, 좁고 깊게 흐르는 계곡물 같은 루시는 흘러넘치길 꿈꾸며 리우를 탐하다 남편에게 돌아간다. 엄청난 빚 때문에 몸 파는 직업을 선택한 채희는 졸졸 흐르는 시냇물 같지만 새소리와 바람 소리를 불러일으키는 힘을 지녔다. 열여섯 어린 나이로 리우에게 뛰어든 샹샹은 딸이자 시어머니와 아내처럼 굴면서 진짜 사랑을 질문한다. 이들은 어제의 추억과 오늘의 현실을 오가며 방황하는 고단하고 외롭고 궁핍한 리우를 때론 감싸고 때론 뒤흔든다.

#육체의 쾌락은 사랑의 완성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쾌락은 완성의 반대말이기도 하다. 쾌락은 찰나에 그치기 때문이다. 완성이라는 안정적인 상태와는 도무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에서 찰나에라도 정점에 오르는 경우가 어디 흔히 있는 일인가? (127쪽)

#금기의 위반으로서 에로티시즘은 우리의 일상을 가로질러 강렬한 흔적을 남기지만, 삶과 죽음, 이상과 현실, 정신과 육체 사이를 끝없이 왕복 운동해야 하는 개체에게 있어 환희와 초월의 순간만으로는 일상의 견고함을 극복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내가 그녀들로부터 구원을 얻지 못했던 것처럼 그녀들도 누군가에 의해서 구원될 수 없는, 인간은 서로에 의해 구원될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미옥의 평론 중에서)

루시, “정신적 사랑도 결국 육체적 사랑으로 구체화하는 거잖아요.”

리우가 사랑한 루시는 금발의 미녀 화가로 사회적으로 결핍된 리우의 신분을 보상해주는 이상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 역시 사생아로 태어났으며, 아버지 EJ는 사라졌고, 남편은 전쟁으로 하반신을 잃은, 결핍된 존재이다. 남편 그레고리는 설치미술 작가이나 루시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며 ‘좀비’ 같은 작품을 제작하여 자신을 투사한다. 루시는 리우를 만나 환각과 섹스 중독증에 이를 만큼 서로의 육체를 탐하고 격정적으로 관계한다. “이 여자는 몸과 마음이 얼마나 서로 갈등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리우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떠난다.

#서로 얼싸안고 어깨를 어루만져 주고 허리와 엉덩이를 토닥거리고 서로에게 얼굴을 파묻고 타는 목마름으로 서로를 탐할 때, 나는 이젤 앞에서 검고도 부드러운 선을 선명하면서도 흐릿한 명암을 넣어 그려가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내 손등을 쓰다듬고 목덜미를 어루만져주는 것과 같은 미묘한 느낌을 차근차근 배워나갔다. 이것이 모두 그녀만의 언어였다. (176쪽)

#루시의 욕망은 죽음의 충동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자신을 좀비와 동일한 존재로 규정하고 필생의 과제로 좀비를 만드는 그레고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그녀 또한 그레고리와 같은 좀비의 정신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미옥의 평론 중에서)

채희, “이 일을 하는 여자들도 진짜 남자가 그립단 말이야.”

채희는 난민-이민자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존재로 나의 그림자 같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불법으로 국경을 넘었지만, 그에게 주어진 것은 불안한 신분과 어머어마한 빚뿐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매춘’밖에 없었지만, 채희는 강한 생존력으로 경계를 넘어서고자 한다. 몸을 팔면서 만나는 남자를 돼지나 고깃덩어리로 여기던 호쾌한 채희는 빚을 갚고 영주권을 얻고 자신의 빵집을 열며 정착한다. 리우 역시 루시와 헤어지면서 얻은 상처를 채희와 지내면서 치유받는다.

#…나는 창녀와 섹스를 시작할 때, 하늘을 나는 솔개 같은 숭고한 기상과 정신이 창녀에게서 드러남을 보게 된다. 창녀는 몸만 팔고 절대로 영혼은 팔지 않는다. 시간당 몸을 내어놓음으로써 오로지 제한된 돈만 받는다. 창녀는 평생 영혼까지 팔아가면서 무제한으로 백성들을 사취(詐取)하는 무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다.

생계를 꾸리기 위해 몸을 팔지언정, 영혼과 육신(肉身) 모두를 바쳐서 스스로를 노예화하지 않는 자존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202쪽)

#그녀는 자신의 유일한 자산인 몸뚱어리로 세상과 끊임없이 만나고 거래한다. 그녀를 끌고 가는 가장 강력한 본능은 에로스이다. …육신이 좀비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에서 그녀의 왕성한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옥의 평론 중에서)

샹샹, “그냥 여자랑 섹스만 하는 건 사랑이 아니잖아?”

샹샹은 열여섯 살에 미국 국경을 넘었지만 부모는 체포되어 강제 추방되었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홀로 뉴욕에 남게 남았다. 생존조차 어려워 누군가 자신을 사주길 원한다. 리우의 도움으로 그와 같은 건물에서 살면서 자신을 가족처럼 아빠처럼 돌보는 리우를 사랑한다. 미국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 가짜 결혼을 하게 되지만, 영주권을 얻자마자 이혼한다. 어린 샹샹이지만, 미국에 왜 왔는지, 진짜 사랑은 무엇인지 질문하면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다.

# ‘나는 정말 이 아이만큼은 진심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칼릴 지브란의 말대로, 언젠가는 추억으로 되돌아가 어김없이 만나게 될 이 모든 이야기가 결코 내 앞길을 가로막는 돌멩이가 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생트뵈브의 말을 빈다면, 추억도 식물 같은 데가 있어서, 추억도 식물도 싱싱할 때 심어두지 않으면 뿌리를 박지 못하니, 우리 싱싱한 젊음 속에 싱싱한 일들을 남겨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268쪽)

#샹샹은 진짜 사랑이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서 “왜 사랑을 안 해”라고 물었지만, 좀비 세상 같은 현대 사회에서는 “진짜 사랑은 가능한 것인가”로 질문을 바꿔 던질 수밖에 없다. 사랑은 너무 많은 순간에 있지만 더 많은 순간에 흘러가 버리거나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미옥의 평론 중에서)

재중한인 출신 작가 슌하오 리우는 열여섯 살에 이미 소설가로 촉망받았으나 중국에서 문학단체 구성 문제로 활동이 금지되자 2002년 미국 뉴욕으로 옮겨간 망명 작가이다. 중국에서 지내던 1981년부터 1999년까지 18년 동안 동북 3성을 도보 답사하며 항일투쟁과 관련한 역사소설을 주로 집필했다. 뉴욕으로 이주한 후에도 정치, 역사, 문화 칼럼과 수필, 소설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리얼리티에 기반을 둔 스토리텔링으로, 삶의 모든 순간을 소설화하는 서사구성 능력이 뛰어난 작가로 평가받는다. 독립운동가 허형식의 일대기를 담은 《만주 항일 파르티잔》과 《유순호 정치 역사 문화 칼럼집》 등을 출간했고, 《김일성 평전》(전 3권)을 곧 출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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