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힘드냐고 일상이 물었다"
"'삶'이 힘드냐고 일상이 물었다"
  • 박상윤 기자
  • 승인 2019.08.01 19: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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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쓰는 집, 밥, 몸 이야기 '밥하는 시간'
일상과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통한 삶의 치유
'밥하는 시간' 표지 /사진=서울셀렉션
'밥하는 시간' 표지 /사진=서울셀렉션

[더프리뷰=서울] 박상윤 기자 = “압력밥솥 뚜껑을 열고 김이 막 오르는 밥을 나무주걱으로 살살 젓는다. 먹빛이 도는 자그마한 자기 그릇에 소복이 담는다. 현미잡곡밥에 들깨미역국, 두부구이, 김치, 식탁에 단정히 앉아 손을 모아 감사드린다.

한 입씩 먹는다. 현미밥은 오래 씹을수록 단맛이 난다. 밥이 다 넘어가면 국을 뜬다. 미역의 미끌한 느낌과 들깨의 고소한 향이 입 안을 가득 채운다. 현미유에 구은 따뜻한 두부의 말랑하면서도 쫄깃한 맛, 약간 신 김치의 톡 쏘는 알싸한 맛을 느끼면서 천천히 먹는다.

저무는 햇살이 갓 튀겨낸 튀김처럼 투명하게 바삭거린다. 반찬으로 가을 저녁의 햇살을 한 줌 뿌린다. 딱새 한 마리 먹이를 물고 소나무 가지에 앉았다. 함께 식사를 한다.(......) 한 끼 밥을 대하는 태도가 나를 대하는 태도, 내 삶을 대하는 태도이다. 밥을 정성스럽게 먹는 행위는 나를 정성스럽게 대하는 것이고, 내 삶을 정성스럽게 창조하는 일이다.”

최근 발간된 김혜련의 <밥하는 시간>은 ‘지금 여기의 삶’을 우리에게 돌려줄 수 있는 일상의 작고 소중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밥이고, 집이고, 몸이고, 일이고, 공부이고, 다른 생명과의 관계이다. 우리를 둘러싼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을 들여다보고 그 진정한 의미를 회복하고 새로운 관계 맺기를 통해 삶을 치유하고 회복한다. 이것이 자신의 삶을 위한 진짜 자기계발 아닌가. (서울셀렉션, 316면, 14,500원)

일상의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을 ‘견뎌야 하는 그 무엇’으로 생각하는 한, 삶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그런 일상이므로. 밥하기 싫고 청소하기 싫고 일하기 싫고. 하지만 지루한 반복이 아닌 그 무엇이 세상에 있던가? 해는 매일 같이 뜨고 지고, 하루에도 몇 차례 밥을 하고 밥을 먹고, 아침저녁으로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우리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반복되는 노동에 삶은 고되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 아닌 저 너머 다른 곳, 다른 시간을 꿈꾼다. 그 꿈만으로 우리의 빡빡한 삶을 지탱하기는 공허하다. 저 너머는 언제나 저 너머일 뿐 지금 여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철학자는 행복의 반댓말은 일상이라고 했다. 저자는 반대로 절망의 반댓말은 일상이라고 한다. 수많은 삶의 절망과 고통 속에서 저자가 찾은 해답은 일상이었다.

일상의 소소하고 작은 것들과 맺어가는 단단한 관계와 정성스런 태도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구할 수 있다. 삶은 언제나 우리가 벗어나고 싶은 과거도 아니고, 오지 않을 미래도 아니다. 지금, 여기 있다. 그리고 지금을 사는 삶은 절망하지 않는다.

이 책은⟪학교종이 땡땡땡⟫과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의 작가 김혜련이 20여 년간의 교사생활을 접고 경주 남산마을에서 백년 된 집을 가꾸고, 텃밭을 일구고, 살림을 하고, 자연과 만나는 일상을 담았다. 저자는 진리를 탐구하는 태도로 삶을 탐구하고, 일상을 탐구한다. 혼자 먹는 밥상에서 늦가을의 햇살과 따뜻한 땅속의 기억을, 청소를 하며 집과 가구의 직접적인 감촉을, 아궁이에서 불을 때며 존재의 위엄을 본다. 저자는 일상의 사물에 대한 몸의 감수성과 감각을 되찾는 것이 삶을 되찾는 것이라 한다. 감각한다는 것은 사물을 직접적으로 만나는 것이고 직접적 만남은 삶을 견고하고 풍성하게 한다. 그래야 세상의 기쁨이, 작고 소중한 것들이 보이고 삶을 즐길 수 있다.

저자는 또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게 쉬운 ‘몸’에 대해서도 정곡을 찌른다.

“몸을 무시하면 명민한 몸을 갖기 힘들다. 그렇게 되면 평범한 일상에서 오는 기쁨을 누릴 수 없다. 그저 밋밋해 보이는 것들, 이를테면 날씨의 변화라든가, 몸의 변화 등 삶의 기초적인 것들에 둔감하다. 밋밋한 행위에서 빛을 느끼지 못한다면 삶에 빛이 들어오기는 어렵다. 삶의 90퍼센트는 그런 밋밋한, 보이지 않은 것들이 지층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하고 당연한 세계가 근원적인 세계다. 이것을 무시하고 특별한 무엇을 아무리 해도 실은 허망하다. 늘 특별한 것을 추구하면 일상에 무뎌진다. 내가 그토록 공허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지만 공허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이유다. 우리 삶의 근원적인 토대를 단련시키지 않으면 허무해지기 마련이다.“

새로운 개념을 얻는 건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것이다. 저자는 일상을 이해할 새로운 개념을 이야기하고 이를 다시 일상을 살면서 확장시킨다. 공부하고 배운 것을 일상으로 살아보고, 살면서 다시 배우고. 이 반복적인 과정들이 우리의 삶을 단단하고 새롭고 창조적으로 만들어준다. 세상의 모든 삶은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저자는 “삶이 고통스러워 삶을 탐구했다”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마주보기 어려워 환상을 찾아 헤맸다. ‘여기’ 아닌 ‘저기’를 갈망했다. 그 절망의 끝에서 ‘여기’로 내려왔다.

20여 년간 국어 교사로 일했고 30대에 여성학을 만났다. ‘또 하나의 문화’와 ‘한국여성민우회’에서 활동하고, <여성신문> 등에 글을 썼다. 마흔 후반에 교사생활을 접고 수행하러 입산했다. 50에 경주 남산마을에서 백 년 된 집을 가꾸고, 텃밭을 일구며 사는 일상을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 연재했다. 현재는 경주보다 자연이 더 깊은 곳으로 옮겨와 잘 늙어 가는 일을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학교종이 땡땡땡⟫⟪결혼이라는 이데올로기⟫⟪학교붕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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