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14 파라고네(paragone)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14 파라고네(paragone)
  • 조복행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8.17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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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ons and Paragone: Van Eyck, Raphael, Michelangelo, Caravaggio, Bernini & Paragone A Comparison of the Arts, da Vinci, Leonardo (Introduction by Irma A. Richter, trans.)
Paragons and Paragone: Van Eyck, Raphael, Michelangelo, Caravaggio, Bernini & Paragone A Comparison of the Arts, da Vinci, Leonardo (Introduction by Irma A. Richter, trans.)

예술에 공통된 체계나 가치가 있을까? 예술은 모두 동일한 지위를 갖는 것일까, 아니면 서로 다른 높낮이가 있고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이 있는 것일까? 공연예술의 위치는 어디쯤에 있을까? 오래 전부터 예술의 차이와 위계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이를 파라고네(paragone)라고 하는데, 이탈리아어로 비교라는 뜻을 지닌다. 예술은 상호작용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고 때로는 경쟁하기도 한다. 예술은 다른 예술과의 사이에 매우 복잡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확대되고 있다. 예술은 전부 다르고, 또한 모든 예술은 매체로서의 약점을 지니고 있어서 다른 예술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연극을 가장 우수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지식인들이 있었다. 칸딘스키는 화가이면서도 가장 뛰어난 예술은 연극이라고 말했다. 그는 ‘연극은 감춰진 자석으로 모든 언어와 예술의 수단을 유인하는 힘을 갖고 있어서 기념비적인 추상미술의 높은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하였다. 체코 출신의 문학비평가 무카로프스키 역시 연극을 가장 우월한 예술로 보았는데, 연극은 힘들이 통일된 것이고 기호와 의미의 종합물이며 모든 구성요소들의 역동적인 혼합물이라고 하였다. 앙토넹 아르토는 ‘진정한 연극은 스스로 움직일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매개물을 이용하기 때문에 삶을 뒤흔드는 그림자들을 열광시키는 작용을 끊임없이 지속한다’( 『잔혼연극론』, 20-21)고 말한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연극이야말로 모든 예술 형식 중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연극은 사람이 다른 사람과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예술이다.’(『Young Audiences, Theatre and the cultural conversation』, 5).

문학을 최고의 예술로 꼽은 철학자들도 많았다. 헤겔은 예술을 시대별로 상징적 예술, 고전적 예술, 낭만적 예술로 나누고 상징적 예술의 대표적인 장르는 건축이고 고전적 예술은 조각, 낭만적 예술은 회화. 음악. 시문학이라고 하였다. 헤겔은 낭만적 예술인 시문학을 가장 높게 평가하였고 고전적 예술인 건축을 열등한 예술로 평가하였다. 시문학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정신을 잘 표현할 수 있지만 건축은 육중한 물질성을 지니고 있어서 정신을 표현하기가 어렵다고 본 것인데, 예술의 정신성을 강조한 헤겔로서는 당연한 주장이다.

칸트 역시 시를 가장 높은 예술로 생각하였고, 그 다음으로는 음악을 꼽았다. ‘모든 예술 가운데에서 시예술(이것은 그 근원이 거의 전적으로 천재에 말미암는 것이며, 준칙이나 범례의 지도를 가장 적게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이 최상의 위치를 주장한다. 시예술은 구상력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 심의를 넓혀준다. ... 심의의 자극과 감동이 문제가 된다면 시예술 다음에 시예술에 가장 가깝고 또한 시예술과는 아주 자연스럽게 결합될 수 있는 예술, 즉 음악을 놓았으면 한다. 왜냐하면 비록 음악은 개념을 떠나서 오로지 감각을 통해서만 말을 하는 것이요, ... 단지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보다 내면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판단력 비판』, 53절).

회화 역시 최고예술 논쟁에서 빠질 수 없었다. 15세기에 예술의 위계논쟁을 불러일으킨 레오나드도 다 빈치와 알베르티는 회화가 최고의 예술이라고 하였다. 에드먼드 버크도 오히려 회화가 시보다 우월한 장르라고 하였다. 회화가 시보다 더 명확하게 관념을 재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7세기 프랑스 화가 로제 드 필( Roger de Piles, 1635- 1709)도 시보다 회화가 우수하다고 하였는데, 그는 사건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에 생생하게 대상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회화의 장점이라고 하였다.

음악이 최고라는 주장도 많다. 루소는 『인간언어 기원론』에서 음악을 그림보다 우월한 예술이라고 하였다. ‘그림은 자연에 더 가깝고 음악은 인간예술에 더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음악이 그림보다 더 흥미롭다는 것은 또한 확실하다. 왜냐하면 음악은 인간관계를 더 잘 보여주고 항상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어떤 관념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림은 종종 메마르고 생명이 없는 듯하다. ... 들을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는 것은 음악가들의 위대한 장점 중의 하나인 반면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음악은 해일을 일으키고 불길을 더욱 타오르게 하며 시내를 넘쳐나게 할 뿐만 아니라 무서운 황야의 공포를 묘사하고 지하감옥의 벽을 어둡게 하고 폭풍우를 잠재우고 바람을 정복할 수도 있다( 『인간언어기원론』, 124~125). 니체와 쇼펜하우어도 음악이 최고라고 하였다. 니체는 음악 없는 삶은 하나의 오류이고 독일인은 신까지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한다(『우상의 황혼』)고 하였고, 쇼펜하우어는 음악은 다른 예술처럼 이념 혹은 의지의 객체화의 단계가 아니라 직접 의지 자체를 표현하고 있으며, 음악은 시의 단순한 보조수단이 아니라 분명히 독립된 예술일뿐더러 모든 예술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예술이기 때문에 목적하는 바를 자기수단에 의해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바그너는 미래의 예술작품 또는 종합예술 개념을 정립하면서 시(머리)와 춤(몸)을 연결하는 음악이야말로 가장 우월한 예술이라고 보았다. 바그너는 음악과 시와 춤이 인간으로부터 기원한 장르가 아니고 자연으로부터 나온 것이라서 우수한 것이고 그림이나 조각이나 건축은 보조적인 기능만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한편 프랑스의 소설가 에밀 졸라와 발작은 조각을 높게 평가하였다.

 

지배적 예술

미학자들은 각 시대별로 시대를 주도하는 지배적 예술이 있다고 하였다. 17-18세기, 즉 계몽주의 시대의 지배적 예술은 연극이었고 18세기 후반에는 음악이 주도하였다‘ (볼프강 울리히, 『예술이란 무엇인가』, 154). 19세기는 소설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고 20세기는 영화의 시대가 되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에 의하면 ‘17세기까지는 문학이 주도권을 잡았고, 반면 회화는 17세기 중엽 거의 모든 곳에서 궁중의 수중에 떨어져 있었다. 하나의 예술에 지배적인 역할이 부여되면 그 예술은 모든 예술들의 원형이 된다.’ (『예술과 문화』 326)고 하였다. 레지스 드브뢰 역시 지배적 예술은 타 예술을 흡수하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그 시대의 공통분모로서 지배적인 예술을 선택하는 형상적 약호가 있고 다른 것들을 자기 이미지로 통합하거나 자기 이미지로 삼아버리는 능력을 갖는 ’예술의 예술‘이 있다는 것이다. (『이미지의 삶과 죽음』 431). 지배적 예술의 가장 큰 근거는 사회적 상황과 해당 장르의 매체성이다. 소설이 19세기에 지배적 예술이 되었던 것은 제지기술과 인쇄술의 급격한 발전, 중산층의 등장과 그들의 문자 해독력의 증진, 교통의 발달로 인한 도서의 원활한 유통 등 때문이었다. 당시에 철도의 발달은 철도소설이라는 특이한 장르를 낳았고 이는 소설의 상업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바흐친이 19세기의 이러한 문화현상을 ’소설화‘(novelization)라고 말한 것은 그런 이유들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20세기에 영화는 영상이라는 매체의 힘에 의해 지배적 매체가 되었다. 회화가 16세기의 정신분석이라면 20세기의 정신분석은 영화다.

예술의 우열논쟁, 즉 파라고네는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기원은 6세기경 그리스의 시모니데스의 말에서 비롯된다. 시모니데스는 ‘ 그림은 소리 없는 시고, 시는 말하는 그림’ 이라고 하였고 호라티우스는 ‘시는 그림처럼’(ut pictura poesis)이라는 경구를 통해 예술 간의 비교를 시도하였다. 파라고네는 15세기 르네상스에 와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그 시작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의 <회화론>이었다. <회화론>의 주요 내용은 이렇다. 회화는 거의 모든 예술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을 맺는다.(『회화론』, 28). 회화는 실제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해 주고 몇 백 년 전에 죽은 사람도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생생하게 보여주는 신성한 힘을 가지고 있다. 자유시민의 품격에도 잘 어울리며 학식이 있고 없고를 떠나 누구에게나 즐거움을 준다. 화가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historia)이고, 역사는 기독교나 고대의 이야기와 같은 늘 존경스러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역사화는 화가에게 있어 최고의 성취이며 모든 도덕적 가치의 체현이며 이 가치는 아름다움, 표현 그리고 의미를 통달했을 때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역사화는 다른 모든 회화장르들을 마스터해야 가능하다. 왜냐하면 역사를 시각화하는 것이고 관람하는 이에게 감동을 주고 큰 힘을 갖기 때문이다. 역사화가 위대한 것은 소재의 다양성 때문이다. 음식과 음악이 그렇듯이 새롭고 특별한 것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를 즐겁게 한다.(『회화론』 147). 역사화는 20세기까지 회화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화가와 회화의 지위를 높여주었다. 역사화는 이야기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지적이고 철학적 주제를 다룰 수 있다고 하는 당시의 예술관 때문이었다. 그래서 형편없는 역사화가가 뛰어난 풍경화가보다 더 많은 존경을 받았다. 당시에는 언어가 포함된 예술이 높은 평가를 받았고 비언어적 예술은 그렇지 못했다.

알베르티는 또 사회의 냉대를 받고 있던 화가들의 지위를 개선하려면 그들의 지적능력을 높여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교양학문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알베르티는 사회적 신분이 낮았던 화가들을 명망가로 만들었다. 그는 이 논문으로 존경을 받기도 했지만 동시에 악명을 동시에 떨치기도 하였다. 알베르티는 회화를 시에 종속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는 시가 가지는 서사성 때문이었다.

알베르티의 뒤를 이어 나타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파라고네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다 빈치는 화가이자 조각가, 건축가이기도 했는데 회화에 관한 논문을 써서 회화와 조각, 시의 우열을 논하였다. 다 빈치는 회화가 조각보다 우월하다고 하였다. 조각은 지나치게 수공업적이고 땀을 흘려야만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회화는 시보다도 우수한 예술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각적으로 인지되는 회화가 청각적으로 인지되는 시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러 감각 중에서 시각을 중시하는 주장은 알베르티의 회화론에도 등장하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서양의 오랜 전통이었다. 다 빈치는 또한 시는 순차적으로 표현해야 하지만 그림은 동시에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우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점에서는 레싱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레싱은 그림은 일정한 시점에서의 장면만 포착할 수 있지만 시는 시간을 가지고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회화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하였다. 다 빈치는 또 그림은 대상을 직접 모방하는 것이지 ‘인위적인 기호’의 영역으로 옮겨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다른 예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볼프강 울리히, 『예술이란 무엇인가』 119)

 

파라고네의 배경

오늘날 학문의 수는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다. 같은 학문 내에서도 수십 갈래로 분리되어 전공자가 아니면 도저히 구분조차 불가능하다. 생물학을 예로 들어보면 해부학, 생화학, 분자생물학, 식물학, 동물학, 유전학, 세포학, 진화생물학, ... 그러나 과거 서양 중세대학에는 일곱 개의 학문만이 있었다. 이를 교양학문(Liberal Arts)이라고 부른다. 교양학문에는 삼학사과가 있었는데 삼학(Trivium)은 수사학, 문법, 변증법이고 사과(quadrivium)는 산술, 기하학, 점성술, 음악 등 4개 학문이다. 오늘날처럼 인문학과 과학분야로 나누어져 있지도 않았고 각 학문의 세부적인 분화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늘날 예술로 분류되고 있는 분야 중에서는 음악이 포함되어 있고 수사학이나 변증술에서는 문학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나 회화나 조각 등의 미술분야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세네카는 회화나 조각에 교양학문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반대했고 대신 요리나 레슬링과 같은 지위를 부여했다. (볼프강 울리히, 『예술이란 무엇인가』 114). 파라고네는 회화를 시나 건축과 같은 교양학문의 한 영역으로 인정받으려는 투쟁에서 나온 것이다.

파로고네 논쟁은 18세기에 들어와 레싱에 의해 재점화된다.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1781)은 문학이 회화보다 우수하다고 보았다. 시와 그림의 동질성을 주장한 호라티우스나 회화가 시보다 우월하다고 말한 다 빈치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문학은 행위를 그리는 예술로써 시간적. 공간적으로 제약이 없다. 시인은 사건을 발단에서 시작하여 모든 가능한 변화를 거쳐 종결로 이끌어간다. 그 어떤 것도 시인에게 묘사를 한 순간에 집중시키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리고 문학은 언어를 사용하여 상황을 다양하게 묘사할 수 있다. 따라서 문학은 시간예술이다. 그러나 미술은 시간적 제약이 많고 여러 가지 역동적 장면 중에서 한 순간의 장면만을 포착해야 하는 부담을 지닌다. 마치 카메라가 여러 포즈 중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을 포착하는 것처럼. 미술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이고 최고로 아름다운 순간을 목표로 작업한다. 미술은 작품의 표상을 동시에 한 공간에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미술은 공간예술에 속한다. 레싱은 희곡을 문학의 중심으로 설정한다. 희곡은 가장 포괄적이며 조형예술에 가까운 문학형식이다. 그리고 예술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대의 환상은 희곡에서 생긴다. 기호의 사용에 있어 가장 종합적인 문학장르로써 희곡은 문학이 넓은 예술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라오콘』 266). 이로써 레싱은 상호예술(interarts)이나 비교예술학의 개척자로 여겨진다.

예술의 우열은 무엇을 기준으로 정하는 것일까? 그 동안의 예술의 우열논쟁의 기준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는 손재주에 의존하는 ‘수공예’ 인가, 아니면 정신성을 담아낸 ‘사유’의 산물인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단순한 재현인가, 아니면 진리의 표현인가의 차이다. 두 번째는 이야기다. 예술은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예술형식인가,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좋은 표현방식이 있는가. 세 번째로는 제도를 들 수 있다. 18세기 이후 예술은 점점 제도화되어 가는데 이 제도들은 예술의 위계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 첫째로 아카데미의 영향이 컸다. 유럽 최초의 미술아카데미는 1563년 조르지오 바사리가 세운 <드로잉 아카데미>이고 이어 17세기 중엽에 프랑스와 덴마크에 설립되었고, 18세기에는 영국에 설립된다. 아카데미는 미술의 위계를 정하고 가치를 결정하는 역할을 하는 등 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프랑스의 <회화. 조각 아카데미>는 당대의 스타일과 예술표준을 정하는 데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16세기에 들어와서는 회화내에서의 장르별 위계논쟁이 발생하여 19세기까지 지속되었는데 그 위계는 역사화, 초상화, 장르화(일상을 대상으로 하는 그림), 풍경화, 동물화, 정물화의 순서였고 그 기준은 사물의 보편적 본질을 가시화하는 예술과 단순히 대상을 모방하는 예술이라는 차이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wikipedia, Hierachy of Genres). 초기와 절정기의 르네상스 이론가들은 자연을 정밀하게 재현하는 것에 큰 점수를 주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풍경화나 장르화(일상적 대상을 그리는 그림), 정물화 등은 정착되지 않아서 장르의 위계나 중요성은 주로 역사화나 초상화의 관계에서만 논의되었다. 당시의 초상화는 화가의 입장에서 보면 대상에 대한 아부의 성격이 짙어서 대상을 지나치게 이상화하여 묘사한다든가 대상의 허영을 자극하는 그림들이 많았다. 반면 대상 쪽에서 보면 화가들의 그림이 자신들의 모습을 충실히 재현하지 못한다는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는 당시 신플라톤주의에 기반을 둔 관념론이 사실주의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철학적 흐름을 반영한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풍경화나 정물화, 장르화 등 그동안 홀대를 받아왔던 장르들이 화가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이는 낭만주의라는 예술사조의 등장과 관련이 있다. 풍경화는 윌리엄 터너나 존 콘스터블 같은 화가들이 중심이 된 영국, 허드슨 강 파(Hudson River School)의 미국 , 바르비종파 등의 프랑스, 러시아 등 서양의 곳곳에서 크게 성장하였고 그림의 크기도 매우 커졌다. 정물화나 동물화, 장르화 등도 일상적인 것에 대한 관심의 증대와 함께 점점 발전해 나갔다. 두 번째로는 비평가들의 영향력이다. 비평가는 저널리즘의 발달과 함께 예술계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확보해 나갔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이 시인이나 소설가 등, 문인 출신이어서 화가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화가를 문인보다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보들레르는 시인이자 예술비평가, 이론가였다. 그는 <근대적 삶의 화가>라는 저서에서 화가들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그려야 할지를 충고하였다. 보들레르만이 아니라 많은 비평가들은 에크프라시스(ekphrasis-그림을 글로 전환하는 것), 즉 그림비평을 하였는데 대부분 비판적인 비평이 많았다. 들라크루와 같은 화가는 이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였다. 세 번째로는 전시회가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에서는 1737년부터 48년까지 매년 살롱전이 개최되었는데 1751년부터 1791년까지는 격년제로 바뀌었다. 그 원인은 비평가나 신문 등의 비호의적 비평과 기사 때문이었다. (Sarah J. Lippert, 『Paragone in Nineteenth Century』).

 

매체로서의 예술

그러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예술의 내용 이전에 형식의 문제이고, 이는 곧 매체성(mediality)의 문제가 된다. 예술은 어떤 매체와 형식을 채택하는가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술은 매체를 다루는 기술이다. 시와 소설은 문자를 다루는 기술이고, 회화는 물감을 다루는 기술이다. 음악은 소리와 악기라는 매체를 다루는 기술이고, 공연예술은 신체를 통해 표현하는 예술이다. 매체는 형식을 낳고 형식은 내용을 제약한다. 헤겔은 어느 강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예술은 형식 때문에 내용이 제한되어 있으며 스스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진리만 표현할 수 있다. 그에 반해서 진리를 좀 더 심오하게 파악하는 일은 이제 조각이나 회화를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볼프강 울리히 『예술이란 무엇인가』 325-326). 이는 헤겔이 예술의 종언을 언급하기 위해서 한 말이지만 예술에서 매체가 차지하는 위치를 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헤겔의 예술관은 예술을 매체 중심적으로 사고하는 것으로서 조각이나 회화라는 장르가 사용하는 매체로서는 더 이상 진리를 드러내기가 어렵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형식이 내용을 제한한다.’는 말은 매체가 형식을 만들고 그 형식이 고정되면 내용은 그 형식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헤겔은 그의 방대한 『미학』에서 끊임없이 이상, 정신, 내용과 형식의 통일 그리고 ‘이념의 감각적 현현’을 말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매체의 문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실제로 헤겔은 ‘감각과 그에 합당한 질료성을 규정하는 일을 개별예술들을 분류하는 근거로 삼아야 한다.’ (헤겔 『미학』 3권 42)고 말하고 있다. 그의 예술론은 개별적인 표현매체(소리나 돌이나 문자와 같은)에 대해 논하고 있지는 않지만, 예술의 질료(매체)의 성격에 따른 장르분석의 성격이 강하다. 그가 구분한 예술의 위계들은 곧 어떤 매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예술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예술의 성격이나 위계를 논하기 위해서는 매체의 성격에 따른 구분 이외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어 보인다. 예술의 구분을 매체에 의존하는 건 헤겔 만이 아니다. 수잔 랑어도 예술의 구분은 매체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술을 주로 형이상학적 입장에서 그 예술의 정신성이나 관념, 내용 등에만 집중해 왔다. 그러나 예술을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것은 매체다. 어느 미학자가 쓴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헤겔은 건축을 하등예술로 보았는데 건축에 사용되는 매체인 돌이 정신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헤겔의 모순을 찾을 수 있다. 어떤 매체를 사용하든 예술은 예술가가 지닌 이념을 매체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설령 돌을 사용하더라도 그 돌에 작가의 정신성과 이념을 잘 담아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 감각적으로 표현하면 좋은 예술작품이 되는 것이다. 이념은 돌이라는 매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게 있기 때문이다.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모든 예술작품은 매체에 의해 이미 결정된다는 논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모순으로는 같이 돌을 사용하는 조각의 경우에는 높은 정신성을 부여한다.’ 이런 주장이야말로 헤겔의 예술론을 오독한 것일 뿐만 아니라 매우 관념론적인 사고가 아닐까. 예술은 작가의 창작정신이나 표현능력도 중요하지만 그 정신성을 구현하기 위한 기반이 더 중요할 수 있다. 헤겔은 돌이라는 매체가 표현의 한계를 갖는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세익스피어의 <햄릿>이라는 동일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를 연극이나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만들 수 있고, 무용으로 만들 수도 있고, 음악으로 작곡할 수도 있고 그림으로 그릴 수도 있으며 소설이나 시로도 쓸 수 있고 영화로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동일한 햄릿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자가 느끼는 반응은 장르에 따라 다르다. 물론 창작자의 예술능력에 따라 작품내용이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누구나가 영화가 가장 재미있다고 느낄 것이다. 이런 차이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이는 매체성의 차이 때문이다.

예술은 끊임없이 새로운 장르를 생성하고 있는데, 이 역시 새로운 매체의 발명 때문이다. 과거의 파라고네가 문자나 이미지, 시나 회화와 같은 전통적 매체의 비교라고 한다면 오늘날의 파라고네는 전자 미디어의 발달로 생성된 새로운 장르가 추가되면서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전통적 미디어와 전자 미디어의 차이는 매우 크다. 이를 우리는 예술에서의 매체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늘 다른 매체와의 경쟁, 비교, 합종연횡 등을 통해 발전해 왔다. 예술은 그 매체성에 따라 어느 시대에 두각을 나타냈다가 어느 시대에는 그 영광이 사라진다. 파라고네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예술논쟁이며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파라고네는 예술 간의 지위에 관한 경쟁이라기보다는 예술의 특성, 예술 간의 관계 등을 정확히 파악하는 이론적 작업일 수 있고 이를 통해 예술 간의 연합과 그 효과 등을 파악할 수 있다.

파라고네는 각 예술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이들을 서로 비교를 통해 예술의 나아갈 길을 모색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 파라고네는 예술 간의 경계를 확정하는 일이다. 파라고네를 통해서 매체로서의 예술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가능해졌다. 예를 들면 각 매체의 독자성을 지켜야 한다는 매체 순수성 개념을 주장한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있는가 하면, 예술은 서로 돕고 다른 예술의 장점을 흡수하여 자신의 단점을 보완해야 한다는 상호매체성 이론가들도 있다.

예술은 예술 이전에 매체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술은 예술로서가 아니라 매체로서 바라보아야 보다 예술의 다양한 성격을 자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특히 공연의 경우에는 그 사용매체가 다양하고 그 사용방식이나 결합방식 등이 달라서 매체성의 차이가 장르별로 큰 차이로 이어진다. 이는 미학적 성격 뿐만 아니라 공연이 사회적 성격, 경제적 성격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

 

공연예술의 위치

샤논 잭슨(Shannon Jackson)은 공연은 오랫동안 인식론적 어려움의 대상이었으며 서구 지성사는 공연에 대해 오랜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Professing Performance, p11-12) 고 말한다. 18세기 중엽에 예술개념이 탄생하고 미학이라는 학문이 등장하면서 예술의 범위와 의미를 확정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샤를르 바퇴는 <예술>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안한 프랑스 철학자였는데, 그는 순수예술을 음악, 시, 회화, 조각, 춤으로 한정하였고 달랑베르는 시, 회화, 조각, 음악, 건축을 포함( 순수예술의 발명, 151-160)하였다. 당시 지식인들 누구에게서도 연극을 예술로 인정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연극 등, 공연예술은 예술의 범주에 포함하지 않는다. 그는 예술을 언어예술(웅변술과 시예술), 조형예술(조소와 회화), 감각의 미적 유동(遊動)의 예술(음악과 색채예술)로 (판단력 비판 51절) 나눌 뿐 연극 등의 공연예술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칸트 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철학자들과 미학자들이 그랬다.

헤겔은 시문학을 서사시, 서정시, 극시(희곡)로 나누는데 극시가 공연으로 전환하는 것을 높게 평가한다. ‘본질적으로 어떤 극이 상연을 목적으로 씌어질 때 그것에 극으로서의 내적인 가치가 부여된다.’ (헤겔 『미학』 3권 886). 그러나 헤겔 역시 예술 장르로서의 공연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헤겔도 문학이 우위에 있고 연극은 이를 재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헤겔은 무용을 불완전한 예술이라고 하였고 발레 역시 낮게 평가하였다. ‘사치스럽고 매력적인 장식의 변화, 의상, 조명이 중요하므로 우리는 최소한 일상의 범속한 오성의 궁핍성을 멀리하고 잠시 다른 영역으로 빠져 들어갈 수 있다. ... 춤추는 배우들의 아주 발달되고 능란하게 움직이는 다리를 보기를 즐겨하는데... 이처럼 극단적으로 감각적인 것에 빠짐으로써 정신은 결핍된다.’ 고 말한다. 헤겔 역시 연극을 높게 평가하였지만 다른 공연예술에 대해서는 아직도 편견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헤겔은 오페라에 대해서도 그 화려한 스펙터클을 비판한다.

공연예술은 오히려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해로운 오락으로 인식되어 왔다. 공연예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매우 오랫동안 비판의 표적이 되어 왔고 사치를 조장하고 미풍양속을 해치며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비도덕적 오락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이를 ‘반연극주의’라고 부른다.

ⓒ arda savasciogullari/Shuttersto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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