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발레리나 알리시아 알론소 타계
전설의 발레리나 알리시아 알론소 타계
  • 이종찬 기자
  • 승인 2019.10.20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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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발레리나 알리시아 알론소 타계
무용수/안무가로 모두 뛰어났던 쿠바 발레의 아이콘
중남미 최초의 프리마 발레리나 아솔루타(Prima ballerina assoluta)

알리시아 알론소(Alicia Alonso, 1920-2019)(사진=쿠바 국립발레단 facebook)
알리시아 알론소(Alicia Alonso, 1920-2019)(사진=쿠바 국립발레단 facebook)

[더프리뷰=서울] 이종찬 기자 = 쿠바의 전설적인 발레리나이자 안무가인 알리시아 알론소(Alicia Alonso)가 지난 17일(현지시간) 타계했다고 쿠바의 관영매체가 전했다. 향년 99세.

알론소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발레리나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녀는 19세에 망막각리증으로 수술을 받으며 조금씩 시력을 잃기 시작, 무대조명과 상대 무용수의 어렴풋한 움직임에 의지해 춤을 추었다.

바티스타 군부독재 시절 쿠바를 떠났던 그녀는 1959년 쿠바혁명 후 귀국, 피델 카스트로의 적극적 지원을 받으며 쿠바 국립발레단을 창설, 평생 동안 이끌었다.

국가평의회 의장인 미겔 디아스-카넬은 “그녀가 떠났다. 그 빈 자리는 너무나 크지만 그녀는 누구도 넘어설 수 없는 유산을 남겼다”고 애도를 표하며 “그녀는 쿠바를 세계 무용계 최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고 덧붙였다.

그녀의 생년월일은 정확치 않다. 현재로서는 대체로 1920년 12월 21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알리시아 에르네스티나 데 라 카리다드 델 코브레 마르티네스 이 델 오요(Alicia Ernestina de la Caridad del Cobre Martínez y del Hoyo)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녀는 10살 무렵이던 1931년 처음 무대에 섰으며 곧 발레와 사랑에 빠졌다.

“사람들로 가득찬 극장을 볼 때면 살아 있다는 걸 느껴요, 내가 태어나 있다는 것을. 멋지고 특별한 느낌이에요.” 2015년 BBC 방송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와 몬테카를로 발레 뤼스의 간판 스타였다. 냉전의 골이 깊던 1957년, 그녀는 구 소련에서 객원 예술가로 공연한 첫 서반구 무용가였다. 특히 <지젤>에서 우크라이나 출신 발레리노 이고르 유스케비치(Igor Youskevitch, 1912-1994)와 환상적인 호흡을 펼쳐 관객을 열광시켰다.

16살 때 동료 학생이던 페르난도 알론소(Fernando Alonso)와 결혼했으며 이들은 뉴욕으로 떠나 캐러반 발레단(Ballet Caravan)에 합류한다. 알리시아는 3년 뒤 시력이 악화되기 시작한다. 망막박리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시력 때문에 정말 힘들었고 여러 번 수술을 받아야 했어요. 망막박리. 끔찍한 일이었어요. 머리를 급하게 숙여도 안되고 옆으로 움직여도 안된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2년을 지냈고 다시는 춤추지 못할 거라고 했어요. 그런데 다시 추었죠.”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공연이 안 좋았을 때 ‘시력 때문이야’라는 말을 듣기도 싫고 공연이 잘 됐을 때 ‘시력장애에도 불구하고’란 말을 듣기도 싫다”고 말했다. 그녀는 질병과 나이에 굴복하기를 거부했다.

회복기 동안 교사들이 그녀 곁에 와서 <지젤>의 스텝을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스텝을 흉내내며 머릿속으로 익혔다. 하지만 시력 문제가 다시 찾아왔고 한 때 동료 무용수들의 모습조차 알아보지 못해 무대조명과 동료들의 속삭임에 의지해 공연했다. 정상적인 시력을 거의 상실한 23세 무렵 <지젤>로 데뷔했다. <지젤>은 그녀의 대표작이 되었고 1940년대 말까지 그녀는 뉴욕과 런던에서 <지젤>을 포함, 많은 주요 배역을 맡았다.

"지젤"에서 레이에스 페르난데스와 함께(1960)(c)Annemarie Heinrich(사진=위키공용)
'지젤'에서 레이에스 페르난데스와 함께(1960)(c)Annemarie Heinrich(사진=위키공용)

그녀의 <지젤> 해석은 갈수록 무르익어 갔다. 1945년 공연 당시 뉴욕 타임즈의 평론가였던 존 마틴은 그녀의 <지젤>이 ‘찬란’했고 ‘쾌활하고 씩씩했다’고 쓰고 있다. 1979년 그녀가 메트로폴리탄에서 쿠바 국립발레단과 함께 <지젤>을 공연했을 때 평론가인 제니퍼 더닝은 더 타임즈지에 ‘씩씩한 농부의 딸’은 사라졌지만 그녀의 춤은 '처음부터 지젤의 화신'이었다고 극찬했다.

1948년 자신의 이름을 딴 알리시아 알론소 발레단을 아바나에 설립했던 그녀는 쿠바에 올 때마다 "왜 우리 나라에는 모두를 위한 발레단이 없는가"라고 묻곤 했다. 1956년 발레단은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다. 1981년에 나온 자서전에 의하면 그녀는 피델 카스트로로부터 발레단을 세우려면 비용이 어느 정도 필요할지 질문을 받았고 10만 달러 정도라고 하자 피델은 20만 달러를 주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카스트로의 도움을 받아 그녀의 발레단은 1959년 쿠바 국립발레단(Ballet Nacional de Cuba, BNC)으로 재탄생한다.

아바나의 알리시아 알론소 대극장(c)Knomrm(사진=위키공용)
아바나의 알리시아 알론소 대극장(c)Knomrm(사진=위키공용)

발레단은 공장, 작업장 등에서 공연하며 모두에게 발레를 선사했다. 알론소는 70대까지 발레단을 이끌며 계속해서 춤도 추었다. 쿠바에서는 그녀에 대한 존경이 대단해서 그녀의 이름을 딴 향수도 있으며 그녀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코펠리아>의 이름을 딴 아이스크림 가게도 있다.

넘실거리는 검은 머리와 당당한 무대매너로 늘 객석을 흔들어 놓았지만 무대 밖에서는 친근하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후계자를 키우지 않았다는 점, 카스트로 정부와 오랜 밀월관계였다는 점 때문에 일부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녀는 쿠바와 세계 무용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쿠바 발레를 세계 정상급 수준으로 키워놓은 장본인이자 쿠바 발레의 역사 그 자체였다.

알리시아 알론소, 무용수들과 함께(파리 그랑 팔레, 2007년)(c) (사진=위키공용)
BNC 무용수들과 함께(파리 그랑 팔레, 2007년)(c)Jean-Pierre Dalbéra(사진=위키공용)

“앞으로 얼마나 더 늙을까 따위를 생각하고 있다면 그건 최악이에요....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지속해 나갈지를 생각해야 해요. 그거 알아요? 난 200살까지 살 거에요. 여러분 모두 그랬으면 좋겠어요. 혼자 있긴 싫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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