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13, 스펙터클 3, 서커스 – 극한의 스펙터클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13, 스펙터클 3, 서커스 – 극한의 스펙터클
  • 조복행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3.06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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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 – 극한의 스펙터클

서커스의 기원

폴 부이작(Paul Bouissac)은 서커스 기호학이라는 독특한 학문을 개척한 학자다. 그는 서커스의 기원을 인류학적으로 설명한다. 서커스는 전통과 역사적인 사회형식에 기반을 두고 있고 수백만 년동안 진화해 온 인간의 생리학이나 심리학이 발전한 것이다 . 서커스의 모든 동작은 인간의 생존방식과 관계가 있다. 부이작은 서커스의 동작을 다섯 가지로 나눈다. (1) 좁은 공간에서 균형잡기 (2) 낙하를 방지하기 위해 무언가를 붙잡기 (3) 뛰거나 올라가서 방해물을 없애기 (4) 사물을 던지거나 받기 (5) 동물을 통제하기 등이다. 열매를 따기 위해 나무를 기어 오른다거나, 포식자로부터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무언가를 던진다든가 뛰어내리거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무언가를 잡는 행위 등은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체화된 생존동작들이다 (『Semiotics at the Circus』, 127) . 연극이 제의에서 비롯된 것처럼 서커스 역시 인류의 생존과 관련된 동작에서 비롯된 것이다.

린다 사이먼은 서커스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재주를 보임으로써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동작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스펙터클로서의 신체를 강조하는 것이다(『The Greatest Shows on Earth』, 7). 서커스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모든 지역에 다 존재했을 것이다. 인간은 다양한 재주를 부릴 수 있는 신체적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 중국에서 텀블링이나 춤을 가지고 수확기에 순회공연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각 지역의 시장이나 축제에서 인기있는 공연이었다. 이들은 연주자, 재담꾼, 점쟁이, 댄서등과 같이 무리지어 다녔다.

근대서커스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견해로 나뉘어 있다. 로마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과 1768년 영국의 필립 애슬리(Philip Astley)에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로마시대에 서커스는 마차경주나 기마술, 무대화된 전투장면등을 보여주던 건물을 의미하였다. 지금도 남아있는 시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는 전차경주 등이 열리던 대형 경기장이다. 유베날리스가 말한 ’빵과 서커스‘는 먹거리와 볼거리만 제공하면 대중은 만족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당시의 서커스는 오늘날의 서커스와는 달리 광범위한 오락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근대 서커스는 필립 애슬리(Philip Astley)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 그는 서커스를 제도화하고 상업화하였다. 서커스를 위한 전용 공연장을 마련하고 전문적인 서커스 단원들을 육성하였으며, 이를 대중들에게 유료로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서커스의 전문화와 대형화로 이어졌고 대중들의 절대적인 인기를 모으는 계기가 된다.

애슬리는 17살에 부모를 떠나 기수가 된다. 18세기 영국에서 기수는 영웅이었다. 용기있는 행위는 말을 필요로 했다. 기사들은 말을 탔고 신사들은 말을 소유했으며 군인들은 전쟁터로 끌고 갔다. 애슬리에게 말은 계급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였다. 1759년 애슬리는 군대에 입대한다. 군대에서는 기마술을 익히고 말을 조련하고 관리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말조련사는 강하고 남성다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말은 충성심과 복종심이 강한 동물로 여겨져 왔다. 애슬리는 1766년에 제대하고 군대에서 익힌 기마술을 사업화한다. 1768년에 승마학교를 열고 아침에는 승마술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기마술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야외공연장(Amphitheatre)을 만들었다. 그는 키도 크고 강건한 남성이었다. 말에 앉은 그의 모습 자체가 스펙터클이었다. 1769년에는 아내가, 나중에는 아들도 이 사업에 참여한다. 야외극장은 비가 오면 공연이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극장을 천막으로 가리기도 하고 지붕을 만들어 덮기도 하였다. 입장료는 저렴하게 책정하여 모든 계층의 관객이 관람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저글링, 마술, 텀블링, 줄타기 등의 새로운 서커스를 계속 추가하였다. 그러나 기마술이 서커스의 중심이었다. 아들 존 애슬리는 스타가 되었다. 애슬리는 그 쇼를 서커스라고 부르지 않았다.

서커스는 그의 라이벌이었던 찰스 휴즈에 의해 보다 상업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다. 휴즈는 기마병이었고 그의 기마학교는 애슬리의 공연장 옆에 있었다. 그는 찰스 디브딘과 함께 공연장을 짓고(1782년) <로열 서커스>라고 명명하였다. 서커스라는 이름이 쇼의 명칭이 된 것은 이 때다. 로열 서커스는 원형의 링과 판토마임이나 음악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도 설치하였다. 애슬리와 휴즈는 시설, 프로그램, 쇼 등에서 강력한 라이벌이 되었다. 애슬리는 그의 극장이름을 <로열 그로브>로 바꾸었다.

서커스의 인기

1791년 드루리 레인은 극장을 허물고 2000 석의 좌석을 3천 석으로 확장하여 1794년에 재개관한다. 그러자 관객들은 객석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보기가 어렵다고 불평하였다. 그러나 서커스장은 원형이어서 이런 문제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서커스에는 볼거리가 많았다. 관객들은 서커스장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드루리 레인같은 정통연극 극장에서도 말을 이용한 연극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1824년에 애슬리 서커스 공연장은 거의 매일 만석이었다. 워털루 전투를 다룬 서커스가 공연되자 불과 몇 달만에 15만 명 이상의 관객이 쇄도한다. 애슬리는 한 극장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국내외에서 서커스 왕국을 건설하려는 나폴레옹같은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매우 엄격하고 냉정한 인물이었다. 기수가 제 때에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면 음식조차도 제대로 주지 않을 정도였다. 더블린에 공연장을 세웠고 1780년대에는 파리에 진출하였다. 루이 16세는 서커스에 매료되었다. 파리의 애슬리 공연장에도 런던과 마찬가지로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정통연극은 서커스에 관객을 빼앗기자 검열 등 엄격한 법집행을 요구하였다. 당국에서 말위에서의 쇼로만 공연을 한정하자 그는 8마리의 말로 다양한 쇼를 개발하였다. 코메디 프랑세즈나 파리 오페라 극장이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애슬리의 서커스 극장은 많은 관객을 모았다. 장터에서 공연하던 곡예사, 텀블러, 저글러 등이 서커스로 들어왔다. 애슬리 극장은 번창했고 노동자와 귀족, 심지어 마리 앙트와네트까지 팬이 되었다. 마리 앙트와네트는 애슬리에게 영국의 장미라는 애칭이 새겨진 메달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애슬리는 영국과 프랑스에 19개의 서커스장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혁명에 의해 성장이 중단되었다. 영국에서는 1843년에 21개의 서커스장이 설치될 정도로 서커스는 인기있는 엔터테인먼트였다.

툴루즈 로트렉 , 페르난도 서커스단에서 여자곡마사 , 출처 : 구글
툴루즈 로트렉 , 페르난도 서커스단에서 여자곡마사 , 출처 : 구글

 

19세기 프랑스에서도 서커스는 일반대중은 물론 예술가와 지식인들의 오락이었다. 헨리 밀러(Henry Miller)는 서커스를 현실의 괴로움을 잊게 하고 경이와 축복으로 이끄는 공간이라고 하였다. 일상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항생제였다. 서커스 입장권은 저렴하여 노동자 계층까지도 관람할 수 있었다. 0.5프랑에서 2프랑까지 저렴한 가격을 책정하였고, 목요일 오후 청소년들을 위한 서커스나 일요일의 저렴한 서커스를 도입하여 관객을 유인하였다. 과거의 서커스는 관객을 찾아 곳곳을 유랑하는 유목형 놀이집단이었다. 이를 두고 서커스가 일상적 생활의 족쇄에서 벗어나려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라는 낭만적 해석이 있었다. 인간신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경이로운 묘기, 젊은 신체들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연기, 힘이 넘치는 역동적인 군무등이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관객들은 숨이 멎을 정도의 긴장과 흥분, 안도와 스릴속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예술가들은 서커스의 예술적 가능성 이외에도 표현의 창조성을 보기도 하였다. 19-20세기 화가들은 서커스를 낭만화하였다. 로트렉, 세잔, 드가, 피카소,르느와르, 피에르 보나르, 조르쥬 쇠라, 페르낭드 레제, 수잔 발라동 등의 많은 화가들이 서커스를 낭만화하고 이상화하였다.

그들은 서커스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였지만 공연자들에 대해서도 강한 관심을 가졌다. 여자곡마사, 어릿광대, 아크로바트 등. 대담성과 용기, 위험, 웃음과 즐거움 등이 이들의 자산이었다. 이들의 그림, 조각, 드로잉 등은 서커스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평론가들은 서커스가 세상일을 잊게 하는 가능성을 지니기도 했지만 시장의 물질주의에 저항하는 창조성을 지니기도 했다고 칭송하였다. 반부르주아적 제도 때문에 사회로부터 낙오된 사람으로 인식되거나 보헤미아적 태도를 가진 낭만주의자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체를 통해 예술을 표현하는 서커스 아티스트들은 늘 관객들의 변덕스런 취향에 직면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툴루즈 로트렉은 서커스의 스펙터클을 사랑하였다. 15살 때 다리가 부러져 후천적 장애인이 된 로트렉은 왜소증에 가까운 허약한 몸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서커스에 애착을 느끼게 된 건 공연자들의 강한 신체에 매료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50여 점 이상의 서커스 작품을 남겼다.

피카소는 특히 서커스에 특별한 매력을 느꼈다. 그의 첫 번째 연인이었던 로자 오르티즈(Rosa Ortiz)는 기수였고, 첫 번째 화상이었던 클로비스 사고(Clauvis Sagot)는 어릿광대였다. 피카소는 특히 어릿광대를 좋아했다. 그들은 당시 유명한 서커스단이었던 메드라노 서커스장에서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고전적 복장을 벗어버리고 벌레스크 타입의 복장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진정한 혁명이었다고 피카소는 회고했다(The Greatest Shows on Earth, 57). 그들은 자신들의 복장과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알렉산더 칼더 ‘서커스’  출처 구글
알렉산더 칼더 ‘서커스’ 출처 구글

 

알렉산더 칼더는 서커스를 제재로 50여 점 이상의 작품을 창작했다. 움직이는 조각, 즉 모빌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칼더는 서커스도 모빌로 제작하였다. 미니어처로 동물과 사람, 서커스장을 만들어 이를 움직이게 하는 모빌 서커스였다. 이를 <칼더 서커스(Cirque Calder)>라고 한다. 칼더는 메드라노 서커스단에 모인 많은 지식인과 화가들을 만났고 그들을 대상으로 혼자서 모빌 서커스를 선보였다. 칼더가 예술가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파리에서였고 특히 <칼더 서커스>는 칼더가 국제적인 예술가로 발돋움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뉴욕과 파리를 오가는 여행길에 늘 가방에는 서커스 작품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는 파리의 언론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서커스단이라는 이름을 붙인 서커스단을 창단한 임프레사리오이기도 하였다.

피카소 '서커스 가족' , 출처 : 구글
피카소 '서커스 가족' , 출처 : 구글

 

극한의 스펙터클

서커스는 늘 특별한 재주를 개발하는 데 힘을 써 왔다. 서커스는 대단한 노력과 훈련이 필요한 엔터테인먼트다. 저글링이나 죽마, 외발 자전거타기처럼 위험하지 않은 묘기도 있지만 공중그네(트래피즈)나 공중곡예(아크로바틱), 줄타기, 동물쇼와 같이 스릴넘치고 위험한 쇼도 있다. 관객은 더욱 자극적이고 스릴넘치는 쇼를 요구했고 서커스 공연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쇼를 개발해야 했다.

- 찰스 블론딘

1829년 장 프랑소와 그라벨라는 다섯 살이었다. 그는 유랑 서커스단의 줄타기 공연을 보고 서커스 곡예사가 되고 싶어했다. 체조선수였던 아버지는 그의 꿈을 이해하고 리용에 있는 서커스 학교에 입학시켰다. 불과 6개월 만에 대중앞에서 공연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추게 된다. ‘ 작은 경이였다. 4년 후 아버지가 사망하자 서커스단에 입단하여 27살 때까지 유럽순회공연을 따라다녔다. 그는 이름을 찰스 블론딘(Charles Blondin)으로 개명한다.

다른 공중곡예사처럼 블론딘도 대중의 갈채를 받기 위해 워험한 곡예를 감행한다. 185935살 때 <나이아가라 폭포 건너기>를 감행한다. 48미터 높이의 줄에 18kg의 장대로 몸의 균형을 잡고 건너는 모험이었다. 5시에 블론딘이 나타나자 관중들은 숨을 죽였다. 약간만 발을 헛디뎌도, 약간의 현기증이 나도, 약간의 불안정성만 있어도 그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의 퍼포먼스는 단순히 줄을 건너는 것만이 아니었다. 로프 위에 멈추어 물구나무 서기도 하고 공중돌기도 하였다. 그가 캐나다 쪽에 도착하였을 때 온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물론 관중들은 이를 알아채리지 못했다. 1861년에 런던의 수정궁에서 똑같은 쇼를 했을 때 또 한 번 관객들은 전율했다. 그의 쇼를 8번 째 불가사의라고 불렀다. 수정궁에서 12번의 퍼포먼스를 하였고 다른 공연자보다 4배 이상의 개런티를 받았다. 매공연 때마다 다른 의상과 악세서리를 하였다. 딱 한 번 관객들의 항의를 받은 것은 그의 딸을 외발 수레바퀴에 태우고 줄을 건널 때였다. 이후 법은 블론딘의 모험을 금지했다.

나이아가라의 영웅이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키자 이를 모방하는 쇼들이 등장한다. 반 하레는 비올란테를 여성 블론딘으로 변신시켰다. 그녀도 템즈강에 로프를 걸고 걸어나갔다. 10만 명의 관중이 운집하였는데 비올란테는 로프에서 떨어져 엉덩이를 다쳤고 곡예사의 일을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블론딘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널 때 공중그네 곡예사 줄레스 레오타르는 초인적인 쇼를 감행하였다. 나폴레옹 서커스단에서 공중에서 그네타는 묘기였다. 그네를 타고 공중에서 난 다음, 다음 동작에 다시 그 그네로 돌아오는 묘기였다.

공중그네(trapeze) 공연자 중에는 한론 리스(Hanlon Lees)형제가 있었다. 그들은 1860년 런던에서 공연하였는데 레오타르에게 자극을 받아 매우 스릴 넘치는 공중그네 곡예를 고안하였다. 그야말로 생명을 건 모험이었다. 한 사람이 첫 번째 그네로 뛰고 거기서 두 번째로 또 세 번째로 날아간다. 형제 중 토마스는 더욱 위험한 트래피즈 동작을 창안하였다. 한 사람이 사다리를 붙잡고 있으면 다른 한 사람은 그 꼭대기에서 곡예를 하는 것이었다. 이를 보는 관객들은 극도의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도저히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1865넌 토마스는 트래피즈 도중 떨어져 두개골이 조명기구에 부딪혔고 3년후에 자살하였다.

 

조르주 쇠라 ‘서커스’, 출처:구글
조르주 쇠라 ‘서커스’, 출처:구글

 

- 릴리안 라이첼

릴리안 라이첼(Lilian Leizel)은 서커스 황금시대의 최고 스타였다. 1892년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출생하였고 할머니, 어머니가 모두 공중곡예사였다. 처음에는 체조를 하였고 언어와 음악을 전공하였다. 장래의 희망이 콘서트 피아니스트였을만큼 음악에 재능을 보였지만 결국 공중곡예사가 되기로 한다. 150 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체구에 날렵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개발한 동작들은 강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위험한 곡예였다. 그녀는 한 번도 네트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녀가 로프를 잡고 올라갈 때 그녀의 매력과 경쟁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링글링 서커스단 단장 존 링글링 노스는 그녀의 연기를 극찬하였다. 알렉산더 칼더는 반짝이는 그녀만이 빚나고 다른 모든 것은 어둠속에 있다고 하였다. 라이첼은 본인이 스타라는 걸 알고 있었고 특별한 대우를 원했다. 분장실도 혼자서만 사용하였고 여자하인을 몇 번이나 갈아치웠다. 그러나 대스타 라이첼에게도 공중곡예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끊임없는 부상과 상처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이겨내야 했다.

어린 나이에 두 번 결혼한 라이첼이 일반에게 공개한 남편은 알프레도 코도나(Alfredo Codona)였다. 그들은 황금콤비가 되었다. 공중곡예의 여신과 공중그네의 왕자의 황금결합이었다. 코도나는 3회 공중돌기를 하였는데 당시로서는 가장 위험한 묘기였다. 라이첼과 달리 그는 네트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네트도 안전하지는 않았다. 잘못 떨어지면 팔이나 다리, 목이 부러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31년 코도나는 베를린의 윈터가든에서 공연중이었고 라이첼은 코펜하겐의 뮤직홀에서 공연중이었다. 라이첼의 전반 공연이 끝날 무렵 철제로 된 회전 링이 갑자기 부러졌고 그녀는 12 미터 아래로 떨어졌다. 물론 네트는 없었다. 의식을 잃었다. 코도나는 한 걸음에 코펜하겐으로 달려갔다. 라이첼은 코도나에게 괜찮으니 윈터가든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곧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음날 뉴욕 타임즈와 LA 타임즈는 헤드라인으로 그녀의 죽음을 알렸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 하키 경기장에서는 경기전에 그녀를 위한 추모 이벤트가 열렸다. 라이첼과 코도바는 2년 후에 은퇴해서 캘리포니아의 아름다운 휴양도시 롱비치에 정착할 생각이었다.

코도바는 1932년 베라 부르스와 재혼하였지만 과거만큼 공연에 집중하지 못했다. 1935년 공연도중 추락하여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아내 부르스는 이혼을 요구하였다. 코도바는 끝까지 이혼철회를 설득하였지만 그녀는 거절하였고 코도바는 그녀를 총으로 쏘고 본인도 총으로 자결하고 말았다.

 

- 마담 블론딘

1863년 셀리나 파웰(Sellina Powell)은 마담 블론딘으로 불리웠다. 여성 블론딘이라는 뜻이다. 셀리나 파웰은 버밍험의 애스톤 공원에서 수천 명의 관객앞에서 줄타기를 시도하였다. 족쇄를 차고 눈을 가리고 머리에는 가방을 얹은 채로 손에 장대를 들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갔다. 관객들은 숨을 죽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겨우 세 발자욱을 떼었을 때 로프가 끊어졌고 줄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녀의 죽음이 더욱 문제가 된 것은 임신 8개월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전국민을 경악케 하였고 이 위험한 퍼포먼스를 금지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이는 급기야 의회의 논쟁으로 이어져서 30여년간 지속되었다. 논의결과 나온 안이 1879년에 제정된 어린이 보호법이었다. 14세 미만의 청소년에게는 생명에 위험이 발생할 수 있는 퍼포먼스를 금하였다. 이어서 1897년 수정안에서는 이를 남성 16세로 여성은 18세로 상향 조정하였다. 1833년에 공장법이 발효되어 9살 미만의 어린이들은 하루에 9시간 이상의 노동이나 야간작업을 금지하는 등, 어린이들의 과도한 노동을 금하였는데 서커스에도 유사한 법률이 적용된 것이다. 마담 블론딘의 사고는 정제되지 않고 채워지지 않는 스펙터클에 대한 대중의 욕망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사건의 참혹함 이외에도 근본적으로 그런 퍼포먼스가 왜 인기가 있는가를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다. 상업화된 오락은 대중의 시각적 욕망에 대한 댓가로 위험을 판 것이었다.

 

드가 ‘미스 라라(Miss LaLa)’, 출차 : 구글
드가 ‘미스 라라(Miss LaLa)’, 출차 : 구글

 

인간 대포알

1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의 군인 휴고 자키니는 어떻게 하면 적진에 침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다가 인간을 대포를 통해 쏘아 보내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러나 날아가는 도중 적에게 발각될 것이라는 반대에 부딪혀 실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전쟁 후 자키니와 그의 가족들은 35년간 인간 대포알이 되어 서커스를 성공시켰다. 자키니는 그 아이디어를 알려주지 않다가 죽기 직전에야 그 비결을 털어놓았다. 압축공기를 이용하여 실린더를 밀어올리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발사장면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연기를 피우기도 하였다. 그의 딸은 처음에는 공포에 떨었지만 나중에는 이를 즐겼다고 술회하였다.

인간대포알은 1875년 윌리엄 레너드 헌트에 의한 고안되었다. 미국과 접경한 캐나다의 온타리오에서 태어나, 블론딘의 나이아가라 폭포 횡단을 직접 목격한 헌트는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커스 단원이 되었다. 그는 자젤(Zazel)이라는 무대명을 썼다. 그가 사용한 방식은 스프링으로 인간을 쏘아올리는 방식이었다. 런던과 파리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했고 이는 마침내 P.T.바넘의 귀에 들어가 1880년 바넘 베일리 서커스 단의 단원이 되었다. 자젤은 20살 때부터 국제적인 스타가 되었다. 그건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일을 그가 해냈기 때문이었다. 관객들은 점점 여기에 익숙해져 갔지만 지식인들은 이 쇼가 극한의 공포심을 유발하기 때문에 이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넘은 재빨리 이들을 설득했다. 네트를 설치하여 위험을 줄였고 매 퍼포먼스마다 시설물 검사를 강화했고 네트를 자주 교체하였다. 그러나 자젤을 모방한 많은 사람들이 네트의 바깥에 떨어져 죽었다. 정확하게 예상되는 지점에 떨어지지 않거나 급하게 떨어지면 사고가 생긴다. 30여 명이 사망했다.

 

- 인간화살

대형 석궁으로 사람을 발사하는 인간화살이라는 쇼도 있었다. 나중에는 인간화살에 불을 붙여 발사하고 매트위에 떨어지면 소화기로 불을 끄는 방식도 도입되었다.

 

- 무쇠턱

제도라(Zedora)는 인간대포알 역할을 하던 여성이었는데 부상을 당해서 서커스를 포기하고 다른 서커스를 고안한다. 무쇠턱(Iron Jaw)이었다. 이는 공중그네에서 내려온 로프를 마우스피스를 낀 입으로 물고 공중에서 곡예를 벌이는 쇼였다. 드가의 <미스 라라>는 무쇠 턱을 표현한 그림이다.

 

- 동물서커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직업은 경찰관이나 소방관이 아니라 코끼리 조련사라고 한다. 말로 소통할 수가 없고 오로지 제스처나 동작에 의해서만 조련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맹수들의 조련은 더욱 위험하다. 서커스는 유순한 동물뿐만이 아니라 맹수들을 많이 활용하는데, 이는 서커스가 평범한 스펙터클이 아니라는 걸 말한다.

동물 서커스는 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애슬리가 서커스를 시작한 것도 기마술을 통한 것이었고 서커스의 운반에도 반드시 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말재주는 애슬리 이전에도 이미 유럽과 아시아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었고 , 몽고의 세계정복은 기마술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마상재라고 불렀는데 이는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다. 일본에서 처음에 서커스단을 곡마단이라고 부른 것은 아마도 당시의 서커스가 말을 중심으로 하는 쇼였기 때문일 것이다.

동물을 길들이는 방식은 조작적 조건화(operant conditioning)에 의한다. 이는 행동주의 심리학에 나오는 이론으로 행동에 상응하는 보상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동물이 어떤 동작을 취했을 때 이에 걸맞는 칭찬을 하거나 먹이를 주거나 또는 채찍질을 하는 방법이다. 칼 하겐벡은 처음에는 동물을 전시하는 사업으로 돈을 벌다가 나중에 이들을 조련하는 조련사로 변신한다. 1891년 수정궁에서 완벽한 하모니를 이룬 사자, 호랑이, , 표범의 서커스가 있었다. 하겐벡은 동물들에게서 잔인함은 증오로 돌아오고, 친절함은 신뢰로 되돌아온다고 말하곤 했다.

부이작은 동물서커스에서 재미있는 사례를 언급하고 있다. 어떤 서커스에서 동물쇼가 끝나고 모든 동물들이 제 자리로 돌아갔지만 암사자 한 마리가 돌아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고함을 치고 채찍으로 바닥을 쳐도 꿈쩍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링마스터는 트레이너에게 채찍을 내려놓고 암사자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라고 지시하였고 트레이너는 그대로 실행하였다. 그러자 암사자는 매우 우아한 자세로 자리로 돌아갔다. 부이작은 이를 사자와 트레이너 간에 형성된 깊고 신비한 이해의 결과라고 해석하고 있다(Semiotics at the Circus48). 동물서커스는 조련사와의 약속에 따라 움직이는 패턴화된 행동이기는 하지만 동물과 사람 사이에는 감정의 교감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관객은 이 장면을 암사자가 나를 대접해 주었다. 그러니 나는 기쁜 마음으로 내 자리로 돌아가겠다고 인식한 것으로 해석한다고 하였다.

조련사들은 흔히 동물들을 학생‘, ’ 착한 소년‘, ’ 착한 소녀와 같이 친근한 부모의 언어로 부른다. 그러면 동물들은 이에 잘 따른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고 다루기 어려운 동물들의 경우에는 거친 말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동물들에게는 부드러운 말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역시 동물과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그러나 조련사들은 절대로 맹수를 믿지 말라고 말한다. 사자는 언제든 야성이 폭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물을 채찍으로 조련하는 조련사도 있었다. 아이작 반 앰버그(Issac Van Amburgh, 1808-1865)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동물 조련사가 되었다. 그는 최초의 동물 조련사로 알려져 있다. 그가 나타나면 동물들도 움찔했다고 한다. 그가 관객들을 경악케 한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모험 때문이었다. 그는 머리를 사자의 입속에 넣었고 그러면 관객들은 숨도 쉴 수가 없었다 1838년 런던의 드루리 레인 애슬리 서커스장에서는 채찍과 권총으로 호랑이, 사자, 표범등을 자극하여 날뛰게 하고 자신의 등에 올라타게 하는 등의 스릴을 감행하였다. 관객들은 경악하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그의 쇼를 여섯 번이나 보았다. 최초의 여성 동물 조련사는 메이블 스타크(Mable Stark)였다. 그러나 그녀는 나중에 호랑이에게 팔과 다리를 물려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그녀는 동물에게도 상과 함께 징벌도 필요하다고 하였다.

동물은 인간의 오락, 노동을 위해 봉사한다. 이 경우에 동물은 인간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동물은 또 인간에게 사랑받는 개체이기도 하다. 동물도 사람처럼 놀이를 한다. 동물도 서커스를 하면서 스스로 노는지도 모른다. 고든 차일드는 동물을 가축화하기 시작한 것은 만년 전쯤일 것으로 추측한다. 사람과 동물은 상호간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을 인간의 필요에 의해 학대하고 이용해 왔다. 동물서커스에서도 지속적으로 자극적인 서커스를 요구해 왔다. 동물들의 연기가 끝날 무렵에 갑자기 붉은 불꽃이 타오르고 연기가 자욱해진다. 조련사는 다급하게 도움을 청하면 기다리고 있던 조수가 황소의 피를 뿌려서 불길을 잡는 유혈극이 벌어지곤 했다. 피비린내나는 스펙터클일수록 관중들은 좋아했다(The Greatest Shows o Earth, 151-157).

코끼리 서커스 , 출처:구글
코끼리 서커스 , 출처:구글

 

동물 서커스의 역사는 사고로 점철되어 있다. 1997년 펜실베니아에서 서커스단 공연도중 호랑이 조련사 웨인 프란젠이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20132월 멕시코의 소노라주에서 벵갈 호랑이 두 마리와 함께 공연을 하던 조련사가 그 중 한 호랑이에게 목을 물려 사망했다. 1992년 플로리다의 팜 베이에서 코끼리가 흥분해서 공연장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1994년 호놀룰루에서 코끼리가 그의 조련사를 죽인 사고가 발생하였다. 서커스 종자사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동물에 신체적 위해를 가하는 경우가 있다. 전기충격기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사고가 발생한다.

동물서커스는 늘 동물보호단체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왔다. 지금도 동물 서커스가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스웨덴, 오스트리아, 코스타리카, 핀란드, 싱가포르, 스웨덴, 덴마크에서는 서커스에서 동물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그리스가 처음으로 동물을 서커스에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최고점 규칙

전통서커스는 극단적인 스펙터클만으로는 대중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동물 서커스, 스리 링 서커스 등 과거의 서커스는 1970년대부터 서서히 변모해간다. 거대주의는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의 비용이 들었고 동물의 사용도 어려워졌다. 또한 기형쇼와 같은 자극적인 내용도 더 이상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없었다. 서커스는 영상 시대와 경쟁할 수 있는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도입할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은 강렬한 경험을 더 잘 기억한다는 이론이 있다. ’최고점 규칙( Peak End Rule)‘이다. 정점에 있던 자극만이 기억된다. ‘베버의 법칙 또는 페히너의 법칙도 자극의 변화를 느끼기 위해서는 처음 자극에 대해 일정 비율 이상으로 자극을 받아야 된다는 이론인데 최고점 규칙과 유사하다. 처음에 약한 자극을 받으면 자극의 변화가 적어도 그 변화를 인지할 수 있다. 하지만 처음에 강한 자극을 받으면 자극의 변화가 커야 그 변화를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스펙터클은 늘 새로운 스펙터클을 도입해야 하고 점점 자극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스펙터클이 무한정 거대해지고 자극적일 수는 없다. 도저히 기존의 스펙터클을 유지할 수 없을 때 새로운 방식의 스펙터클을 도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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