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 ‘나의 1968년(Mój 1968)'
움베르토 에코 ‘나의 1968년(Mój 1968)'
  • 이종찬 기자
  • 승인 2020.04.11 15: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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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의 1968년 바르샤바 기행
‘언어상의 오해’와 ‘정말로 원하는 것’
움베르토 에코, 1984년 모습(C)Rob Bogaerts(사진=wiki commons)
움베르토 에코, 1984년 모습(C)Rob Bogaerts(사진=wiki commons)

[더프리뷰=서울] 이종찬 기자 = 1968년 여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장미의 이름>의 작가이자 학자였던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2016)는 바르샤바에서 열리는 한 기호학 학술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먼저 프라하에 들렀던 에코는 때마침 민주화를 외치는 시위대와 군인들이 충돌하는 ‘프라하의 봄’ 현장을 보게되고 이동이 어려워지자 우여곡절 끝에 빈에 들러 거기서 비행기를 타고 바르샤바로 들어간다.

에코는 프라하 사태를 기록, 자신이 일하는 <l'espresso> 잡지사로 보냈고 잡지사로부터 바르샤바의 3월 시위(March Event)와 그 이후의 탄압사태에 대해서도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이 두 기사가 지난 2008년 폴란드어로 번역, <나의 1968년(Mój 1968)>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그런데 폴란드 부분에 대한 여러 리뷰를 보면, 폴란드인들은 외국인인 에코가 당시 바르샤바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이 자신들과는 좀 다르다고 느끼는 것 같다. 오래전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주변국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 우리에게도 생각하게 하는 바가 있어 여러 리뷰들을 통해 책내용을 살펴보았다.

1968년 프라하 시위 모습(c)Reijo Nikkilä(사진=wiki commons)
1968년 프라하 시위 모습(c)Reijo Nikkilä(사진=wiki commons)

1968년 유럽과 바르샤바
1968년은 서구에서 시작된 학생운동이 번지면서 이른바 ‘68혁명’을 낳았던 해이다. 당시 에코는 36세의 젊은 학자이자 저널리스트였고 소설 <장미의 이름>은 1980년에 출간된다. 아직 그는 우리가 아는 그 유명한 에코가 아니었고 모두가 감시당하던 바르샤바에서 그는 완전히 이방인이었다.

1968년 3월, 바르샤바에서는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들, 노동자들의 시위가 있었고 이후 학생들이 투옥되고 교수들은 해고되면서 분위기는 암울해졌다. 아무도 외국인인 에코에게 실명으로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에코는 바르샤바의 친구들을 조심스럽게 공원 벤치나 카페 등에서 만났다. 에코에 따르면 바르샤바에는 ‘뭔가 숨기는,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일반적이었고 외국인은 위험요소 취급을 받았다. 그들이 에코에게 하는 첫 질문은 대놓고 놀라며 "기자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속에서도 에코는 그들과 어울리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바르사뱌에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이 <Elle> 잡지를 읽고 있었고 <Kultura> 잡지에는 사드(Sade) 후작을 다룬 기사가 실렸다. 물론 서구권 정치에 대한 보도는 없었지만 학생들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토론하며 팝아트 전시회에도 가고 이탈리아 영화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정사>나 <욕망>도 보러 다녔다. 그들과 비밀스럽게 어울리면서도 서로 이름만 묻지 않으면 됐고 모이는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

도서 '나의 1968년
도서 '나의 1968년'(사진=amazon.com)

3월 시위의 시작, 아담 미키에비치
에코는 바르샤바 3월 시위 이후의 진압사태에 대해 썼지만 이런 비밀스럽고 조심스런 분위기는 어떻게 비롯된 것인지가 궁금했다. 시작은 폴란드 시인 아담 미키에비치(Adam Mickiewicz, 1798-1855)의 연극 <짜디(Dziady)>였다. 짜디는 우리의 추석과 비슷한 슬라브 명절이다. 1800년대 러시아 차르의 폴란드 탄압을 그린 이 작품에는 대사를 다소 과장해 “모스크바의 은총으로 자유를 얻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안다”와 같은 구절이 있었고 68년 3월, 당국은 반소(反蘇) 정서를 우려, 상연을 금지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반발을 자극했고 학생들과 교수들은 아담 미키에비치의 동상 앞에 모여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아담 미키에비치 동상(폴란드 프라쿠프(c)Haypo(사진=wiki commons)
폴란드 '민족시인' 아담 미키에비치(폴란드 크라쿠프). 하지만 그는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태어났다.(c)Haypo(사진=wiki commons)

모두가 갈수 있는 대학
바르샤바 시위 사태의 의미는 시간이 지나면서 드러났고 이를 제대로 알기에는 에코의 체류기간이 짧았다. 서유럽 학생들의 시위는 평등, 생태주의, 여성차별금지와 같이 개인의 자주권에 대한 요구였고 동구권 학생들의 시위는 국가의 자주권에 대한 요구로, 사회주의라는 이념보다는 소련에 대한 반대, 정부에 대한 개혁요구가 주된 초점이었다. 에코는 좌파성향의 젊은 지식인으로서 ‘철의 장막’ 저편의 사회주의에 대해 긍정적이었던 것 같다. 그는 처음 학생들의 시위를 잘 이해하지 못하다가 학생들과 대화를 통해 바르샤바의 현실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된 것 같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곳에서) 대학에서의 계급 문제는 없었으며 프랑스, 이탈리아 학생들이 원하는 것(모두를 위한 대학)에 대해 설명하자 여기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서는 대학은 이미 모두를 위한 것이며 농부의 자녀들은 성적에 가산점도 받는다. 출신 차이에서 오는 문화적 차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이다. 심지어 이런 농담도 있다. ‘농부의 자식들이 저항운동을 하기 시작했다는 걸 아는지? 그들은 대학 의무교육의 혜택을 피해 산기슭으로 이사온다’. 즉 사회주의 국가의 대학은 서구와는 다른 문제를 안고 있다. 만일 학생들이 들고 일어난다면, 이는 표현의 자유를 원하기 때문이다.』

동구와 서구의 68혁명
흔히 20세기 후반부 동·중유럽 국가들을 소련에 지배되거나 예속된 걸로 묘사하기 쉽지만 당시 에코와 대화를 나눈 폴란드 학생들에게 상황은 좀더 미묘했다. 즉 이런 환경에서 사회주의는 그들에게 전진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으며 시위는 반사회주의 정서의 표현이 아니라 사회주의 내에서의 개혁에 대한 바람이었다는 것이다. 책 속에서 한 폴란드 학생은 이를 명확히 말하고 있다.

『보다시피 우리에겐 사회주의가 있지만 자유는 없다. 당신들 유럽에는 자유가 있으며 최소한 시민들을 위한 형식적 체계라도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주의에는 없다......아마 당신네 젊은이들은 (우리가) 자유 문제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사회주의는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우린 이미 사회주의를 가지고 있으며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찾는 것, 그리고 폴란드 공산당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학생 뿐 아니라 우익 성향의 폴란드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사회주의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 만큼이나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즉 다른 선택이 없는, 국가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일일 뿐이었다. 책 속에서 에코의 우익 친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러시아는 우리의 영원한 적이다. 그러나 최소한 지금으로선 폴란드의 생존을 위한 보장이기도 하다. 그런 보장을 얻기 위해 우리는 러시아에게 동구권이 여기서 무너지지 않을 거란 점을 보장해 줘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이 길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따라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선택이 없다. 우리는 선택이 없는 국가이다.』

(역사적으로 폴란드와 러시아는 오랜 적대관계였으며 1945년 얄타회담을 통해 미국과 영국은 소련에게 폴란드 일부 영토를 넘기는 대신 폴란드에게는 동독의 폴란드 접경지역 일부를 폴란드에 찾아주기로 합의한다.)

 

얄타회담의 세 정상들. 처칠, 루즈벨트, 스탈린(좌로부터)(c)Grambaba(사진=wiki commons)
얄타회담의 세 정상들. 처칠, F. 루즈벨트, 스탈린(좌로부터)(c)Grambaba(사진=wiki commons)

 

용어의 혼란
사회주의에 대한 이 뜻밖의 태도에 에코는 실제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는 폴란드 친구들과의 논쟁에서 자신의 (이탈리아) 친구들의 중국 문화혁명에 대한 태도를 설명하며 너희들이 보수적이라고 말하는 사회민주주의가 바로 폴란드 학생들이 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여러분들(서양인들)에게 이는 그저 이론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해결해야 할 실질적인 문제들이 있다”고 즉각 반박했다.

최초의 놀라움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점점 명확해졌다. 에코는 자신과 폴란드 친구들 사이의 차이는 결국 목표가 달라서가 아님을 깨달았다. (정치적으로)민주적인 사회, (모두를 위한)사회주의적 제도 등 꿈은 같지만 결국 이 모든 차이는 '언어적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언어적 오해, 정치용어의 혼란, 서로 다른 용법, ....[중략] ... 그리고 ‘수정주의적인’, ‘반혁명적인’, ‘부르주아’ 혹은 ‘자본가’ 같은 개념들이 자유롭게 사용되었고 때로 가장 웃기는 의미를 품기도 했다.』

폴란드 작가 미하우 비에초렉(Michał Wieczorek)은 2018년의 한 리뷰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언어적 오해’가 아마 에코의 분석이 대단히 통찰력 있으면서도 몇 가지 이슈와 관련된 점을 완전히 놓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때문에 외국인인 에코를 나이브하다고 하는 것은 좀 지나치다. 그는 폴란드의 자세한 상황을 나중에야 알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쓴 내용 일부는 우리에겐 다소 당황스럽다. 예컨대 고무우카(Władysław Gomułka, 폴란드 공산당 초대 서기장)에 대해 아무리 일반적인 느낌만 이야기한 것이라 해도 ‘정직하고 괜찮은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한 것이다.  또한 에코는 폴란드 친구들에게 탱크가 폴란드 거리에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화염병을 던질 것이며 그럴 경우 커다란 사태로 확대되므로 소련도 이를 원치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물로 그 이후 발생한 일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리뷰에서 미하우는 당시 서기장이었던 고무우카는 처음 나름대로 업적을 세우며 지지를 받았으나 나중에는 소련과의 마찰을 우려, 현상유지에 주력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에코는 ‘모두를 위한 대학’을 외치는 서유럽인으로서 폴란드 학생들이 왜 ‘사회주의 낙원’에서 반체제 시위를 하는지 궁금했던 것 같다. 하지만 폴란드 학생들은 ‘소련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진정한 사회주의’(정치적으로 민주화된)를 원했고 지정학적으로 소련과의 유대를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소련의 입김아래 민주주의 실현에 힘쓰지 않는 폴란드 정부에 대해 항의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기록
하지만 리뷰에서 미하우는 당시 폴란드 현실에 대한 에코의 부분적 오해들이 에코의 리포트가 대단히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고 평가한다. 외국인 기자가 폴란드에 들어와 사건을 기록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던 혼란의 시절, 에코는 ‘중립적 학자’로서 폴란드를 방문, 폴란드 역사의 가장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당시 폴란드인들의 의식을 기록해 놓았다고 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당시 체제의 실패와 잔혹성을 들어 폴란드 공산주의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쉬운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에코는 우리에게 이 문제가 당시 단순한 흑백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 사회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폴란드인들의 현실 문제에 대한 대응이었으며, 가장 중요하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 사회의 희망이었다는 것을 보여줬다. 폴란드 사회주의는 의식적으로 공유된 노력이었고 실행작업이었으며 과거에는 상상 불가능했던 목표를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에코의 견해를 받아들일 때만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 즉 문맹률 감소, 고등교육 기회의 증가, 바르샤바 재건을 포함한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들, 여성 전문직 활성화, 농업개혁 등등이 그것들이다.』

(c)goljh710(사진=wiki commons)
지난 2017년 마산의 거리(c)goljh710(사진=wiki commons)

다시 그날이 와도
에코는 자신의 글을 한 폴란드 남성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내고 있다. 그는 1968년 진압의 희생자로 교사직을 잃었으며 인생은 파괴되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에코와의 저녁값을 내겠다고 했으며 이는 그가 가진 마지막 돈인 것 같았다고 에코는 쓰고 있다.) 하지만 학생들이 말하는 사회주의의 의미, 그리고 그 모든 관점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도 그가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 학생들이 존재하며 그들이 우리가 1945년에 원했던 것과 같은 것을 위해 싸운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유일한 것이다. 당신은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내 자신이 25년 전과 같은 상황에 다시 처하게 된다면, 나는 모든 것을 그대로 다시 할 것이다. 저항, 당, 그리고 논쟁과 토론, 내가 한 모든 것들을. 내가 한 일은 해야만 했던 것들이다.』

언어란 무엇일까
2차 대전이 끝나고 동구에서는 소련이, 아시아에선 미국이 ‘해방군’이 됐다. 하지만 동시에 ‘점령군’이기도 했다. 민주주의의 개념조차 익숙치 않은 상태에서 그들이 가져다 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같은 개념은 우리를 더 그들 손에 휘말리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어란 현실속의 다양한 현상들을 편의에 따라 대략적인 ‘경향’으로 요약한 것이 아닐런지. 폴란드인들은 자신들이 구체적으로 원하는 것을 위해 싸웠다. 에코가 폴란드 친구들과의 언어 차이를 알아가듯, 우리도 현실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보고 필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용어는 나중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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