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21 극장폐쇄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21 극장폐쇄
  • 조복행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4.13 11: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라 페니체 오페라 하우스(출처 : 구글)
라 페니체 오페라 하우스(출처 : 구글)

 

극장폐쇄

오늘날의 공연산업의 발달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에 의한 세계화 덕분이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세계화로 인한 코로나 19의 확산은 공연산업을 위기속으로 내몰고 있다. 19세기까지 유럽문화를 주도했던 이탈리아와 21세기 세계문화의 중심지 미국이 코로나 19로 몸살을 앓고 있다.

캐나다의 태양의 서커스가 직원의 95 프로를 감원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5%도 무급으로 근무한다고 하니 사실상 전직원 해고라고 할 수 있다. 캐나다에서는 영화관 직원의 해고도 있었다. 시네플렉스는 영화관을 폐쇄한 후 수 천명의 단기고용 직원들을 해고하였다.

영국에서도 런던극장협회(SOLT)와 영국 공연경영인협회(UK Theatre)산하 극장과 예술단체들이 영국정부의 권고에 따라 극장을 폐쇄하고 있다.

뉴욕의 공연장이 대혼란에 빠졌다. 브로드웨이, 링컨센터, 카네기 홀 등의 공연장이 폐쇄되었다. 뉴욕 필은 5월 종료예정이었던 2019-2020 시즌 공연을 전부 취소했고 10회의 유럽 순회공연도 취소했다. 이로 인한 손해는 약 천만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106명에 달하는 단원들의 급여도 삭감될 것이다. 다만 건강보험료는 9월까지 그대로 지급된다고 한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도 5월 9일까지 예정되어 있던 2019-2020 시즌의 남은 공연을 3월부터 취소하였다. 따라서 전세계 70여 개국 2,200여개의 극장에 라이브로 전송하던 HD 라이브(Met : Live in HD )도 함께 취소되었다. 아메리칸 발레 씨어터(ABT)는 올해로 창립 80주년을 맞아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5월에 관련 공연을 가질 예정이었지만 취소하였다. 우리나라 역시 대부분의 극장들이 잠정적으로 폐쇄하고 있다.

극장은 다양한 원인으로 폐쇄된다. 과거에는 자연재해, 사건, 사고, 전염병 등이 발생하면 부득이하게 폐쇄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정치적 이유나 종교적 이유로 폐쇄되는 일도 많았다. 영국에서 극장폐쇄가 가장 길었던 기간은 청교도 혁명이후 1642년부터 1660년까지였다.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된 강제적인 폐쇄였다. 사순절과 같은 종교행사 때도 폐쇄되었다. 영국에서 1590년대에는 매주 목요일에 폐쇄되기도 하였는데, 연극이 인기가 있어서 황소골리기(Bull Baiting)와 곰골리기(Bear Baiting)와 같은 엔터테인먼트가 활성화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영국 르네상스 시대의 극장들은 지붕이 없는 무개식이어서 겨울에는 폐쇄되곤 하였다. 일본의 가부키 극장도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지붕이 없다가 1730년경에야 지붕을 덮기 시작하였다.

화재

과거 극장폐쇄의 가장 큰 원인은 화재였다. 목재로 지었고 집이 밀집해 있어서 불이 옮겨붙기 쉬웠기 때문이다. 반면 소방기술은 매우 빈약하였다. 세익스피어가 활약했던 글로브 극장의 화재는 1613년에 발생하였는데 극적 효과를 내기 위해 대포를 쏘다가 화약이 지붕에 옮겨붙으면서 발생하였다. 1614년에 재개관하였지만 1642년 청교도 혁명에 의해 극장이 폐쇄되었다가 1997년에야 다시 재개관하게 된다. 현재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소유하고 있고 주로 뮤지컬 극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드루리 레인(Drury Lane) 극장은 1663년 찰스 2세가 허가한 두 개의 왕립극장(Theatre Royal)중 하나로 1663년 개관하였다. 이 극장도 지은 지 불과 9년만인 1672년에 화재를 당하여 1674년이 돼서야 재개관했고 1809년에도 화재가 발생하여 1812년이 돼서야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다.

과거의 극장화재는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건축기술자였던 독일의 펠슈(Herr August Foelsch)는 1877년에 과거 100년간 유럽과 미국의 460개의 극장에서 일어난 화재를 조사하였다. 도시별 화재건수는 런던이 31건, 파리가 29건, 뉴욕이 29건이었는데 극장수와 화재건수를 비교해보면 뉴욕이 가장 많았다. 펠슈는 화재시간을 비교하여 극장수명과 하루중 가장 위험한 시간을 조사하였다. 그가 조사한 252개의 극장 중에서 25%는 건축후 5년 이내에 화재가 발생하였고, 45%는 15년 이내에 발생하였다. 전체의 70% 정도가 건축 후 20년 이내에 발화하였고 극장의 평균수명은 불과 22.5년에 불과했다. 발생시간별로 보면 395개 극장중 5.6%는 공연시작 1시간 이내에, 11.6%는 공연도중(보통 세 시간 정도 경과했을 때)에, 22.6%는 공연후 두 시간 이내에 발생하였다. 이는 40% 정도의 화재가 공연과 관계가 있음을 말한다. 극장이 매일 오픈하는 것이 아니고 일요일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휴관하였으며, 공연시간은 하루중 4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공연과 연관된 화재발생위험은 매우 큰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www. stagebeauty.net)

화재의 요인은 주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 공연시작 전에는 소도구, 세트 등이 설치되고 가스램프가 켜지기 때문이었다.

. 공연도중에는 세트와 배튼에 달린 리깅 시스템(달기)등이 움직이거나 조종되며 불꽃등의 특수효과가 사용되기 때문이었다

. 공연직후에는 소도구와 세트 등이 철거되고 램프가 꺼지기 때문이었다.

과거 극장화재는 주로 가스등이나 촛불 등의 조명도구로 인한 것이 많았다. 또한 불꽃을 사용하는 특수효과, 부주의한 성냥이나 담뱃불 사용 등도 원인이었다. 특히 1800년대에는 가스등에 의한 사고가 많았다. 가스조명은 1810년대에 시작되어 1850년경부터 유럽전역과 미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가스등은 촛불 등의 전통조명보다 밝고 다루기가 편리했지만 , 오히려 그 편리함으로 인해 늘 화재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1836년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의 레함극장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 레함극장은 목조로 된 가건물이었다. 불은 4시경에 발생하였는데 무대 위에 높이 걸려있던 램프불이 지붕에 옮겨 붙으면서 시작되었다. 관객들은 패닉상태가 되었고 출구는 아수라장이 되어 탈출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사망자가 무려 600-800여명에 이르렀다.

1847년 독일 칼스루헤의 그랜드 두칼 극장에서 발생한 화재도 무대보조원이 가스등에 불을 붙이다 천에 옮겨 붙어 발생했다. 63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1857년 이탈리아 레그혼의 데글리 아퀴도티 극장에서는 폭죽이 세트에 닿으면서 화재가 발생하여 43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 밖에 프랑스 영국 등에서도 무대에서의 조명이나 특수효과 등에 의해 화재가 빈발했다. (geriwalton.com/prominent – fires –in – the –1800s –in- Europe)

화재가 발생하면 2층이나 3층 등 갤러리에 앉아있던 관객들이 많이 희생되었는데 주로 연기로 인한 질식, 윗층을 타고 올라가는 강한 불길, 공포감으로 인한 무질서, 갤러리의 붕괴 등이 그 원인이었다.

1903년 미국 시카고의 이로쿼이(Iroquois)극장 화재는 미국 극장 화재중 최악의 참사였다. 이 극장은 당시 미국 공연계를 장악하고 있던 ‘극장 신디케이트’의 재정지원을 받아 건립된 것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매우 아름다운 건물로 칭찬을 받았다. 이 화재는 처음에 조명등에서 발생하여 순식간에 극장전체로 번지면서 무려 602명이 죽은 대형 참사였다. 죽은 사람은 관객뿐만이 아니라 배우, 스탭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숫자도 정확한 것이 아니어서 실제로 사망한 사람이 다 포함된 것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이 밖에도 미국에서는 1811년 12월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 극장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72명이 사망한 사고도 있었고 캐나다에서는 1927년 1월 퀘벡에 있는 로리 팰리스 (Laurie Palace) 극장에서 화재로 78명이 사망한 적도 있었다.

극장화재는 시멘트와 같은 건축자재의 혁신, 방재시스템의 발달과 함께 줄어들고 있다. 근대적 시멘트는 1822년에 영국에서 발명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극장건축에서 시멘트는 중요한 내화재가 되었다. 여기에 스프링클러나 소화전 등 즉각 대응이 가능한 각종 소화장비들이 개발되고 있고 제도화된 소방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세계 곳곳에서 아직도 극장화재는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7년에 예술의 전당에서 국립오페라단이 공연하던 중 화재가 발생하여 장기간 극장이 폐쇄된 적이 있었고 세종문화회관과 과거의 서울시민회관에서도 공연도중 화재가 발생한 일도 있었다.

베니스의 라 페니체극장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극장 중의 하나이다. 라 페니체에서 여러 편의 오페라가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다. 라 페니체는 ‘불사조’(phoenix)라는 의미로 잿더미 속에서도 다시 살아났다는 뜻을 가진다. 여러번의 화재에도 불구하고 다시 건축되어 더욱 발전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라 페니체는 유럽의 유수한 오페라극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롯시니가 그의 작품을 라 페니체에서 공연토록 했으며 벨리니도 그의 2개의 오페라를 라 페니체 무대에 올리도록 했다. 밀라노와 나폴리에서 명성을 떨치던 도니제티도 1836년에는 라 페니체로 돌아왔다. 베르디와 라 페니체의 인연은 1844년부터 시작되었다. 1844년의 베니스 카니발 시즌에 에르나니(Ernani)가 초연되었다. 그후 13년 동안 베르디의 <아틸라>,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시몬 보카네그라>의 역사적인 초연이 라 페니체에서 있었다. 라 페니체는 1789년, 1836년에 화재를 당했다. 1996년 1월 라 페니체는 또 다시 화염에 휩싸이게 되었는데 이 때의 화재의 원인은 방화였다. 범인을 잡고 보니 극장의 보수용역을 맡은 어떤 회사의 책임자들이었다. 보수공사를 기간내에 마치지 못하여 벌금을 내지 못하게 되자 불을 질렀던 것이다. 1996년의 화재로 인한 복구공사는 2001년에야 착수되었다. 수백명의 작업자들이 합심한 결과 2년도 안 되어서 완전히 복구했다. 오히려 종전의 건물보다 더 섬세하고 화려하게 복구했다. 그리하여 2003년 12월 다시 오픈되었다. 베토벤, 바그너,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이 연주되었다.

동양에서도 극장화재는 매우 자주 발생하였다. 일본의 가부키 극장에서는 서양의 극장보다 훨씬 더 빈발했고 이론 인한 극장폐쇄와 경제적 손실은 막대한 것이었다.

일본의 속담중에 ‘싸움과 불은 에도의 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에도에서는 화재가 잦았고 극장화재도 예외가 아니었다. 에도시대 극장의 화재를 조사해보면 평균 3년에 1번은 전소 또는 반소하였다. 개축 시에 설비를 잘하지만 그래도 그런 상황에서 극장주로서는 큰 돈을 들여 극장을 잘 지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당시 외국인의 공연 관람기를 보면 의상에 비해 극장이 보잘 것 없었다고 적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화재의 원인은 대부분 유소(類燒), 즉 옮겨붙는 것이다. 근처의 가게에서 불이 나면 바람에 실려 극장에 옮겨붙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극장이 나무, 종이, 대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불이 붙으면 금방 큰 화재로 번지곤 하였다.(小山觀翁, 『 歌舞伎, 「花」のある話』, p259).

가부키 극장의 화재가 3년에 한 번씩 발생했다는 것은 흥행이 너무나 어려웠음을 말해준다. 극장을 짓고 나서 3년 정도 흥행을 했는데 다시 불이 난다면 정상적인 흥행이 가능하겠는가? 가부키 극장에서 더욱 화재가 빈발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목조건물들이 매우 촘촘하게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가부키 극장은 건물이 높아서 불이 쉽게 옮겨붙었고 진화하는 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에도에는 바람이 불면 화재가 나는 일이 많았고 조그만 불씨에도 간단히 대화재로 발전했다.

265년간 계속된 에도시대에 대화재가 96회 있었다. 3년에 한 번씩 대화재가 있었고 7일에 한 번씩 소화재가 있었다. 일본인들이 대화재라고 말하는 기준은 불에 탄 길이가 15정, 약 1636m 정도에 달하는 화재를 말하는 것이다. 에도의 많은 화재중에서도 가장 큰 3대 화재는 1657년 일어난 메이레키 대화재(明曆大火), 1772년에 일어난 메이카 대화재(明和大火), 1806년에 일어난 분까 대화재(文化大火)를 든다. 그 중에서도 메이레키 대화재는 1666년에 일어난 런던 대화재, 네로시대의 로마 대화재와 함께 세계 3대 화재라고도 일컬을 정도로 큰 규모의 화재였다. 이 화재로 심지어 에도성의 천수각이 불탔고 다수의 다이묘들의 저택이 불탔으며 시가지 절반이 불에 탔다. 사망자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3만 명에서 많게는 10만 명까지로 추정되고 있고 에도성은 그 후 재건되었다. 이 대화재 이후 에도막부는 대대적인 방화대책을 세웠다. 다이묘의 저택의 이전, 흙의 사용과 기와지붕의 장려, 다리의 건설, 연소를 차단하는 방화선으로서의 광소로(廣小路, 이를 히로고지라고 읽는다)등이 설치되었다. 지금도 우에노에는 우에노 히로고지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메이레키 대화재는 후리소데 화재라고도 불리 우는 데 상사병을 앓다가 죽은 소녀의 후리소데(젊은 부녀자의 기모노)를 혼묘지(本妙寺)에서 불에 태우는 순간 불이 붙어 커다란 화재로 발전했다는 설에서 이런 이름이 붙기도 했다. 이 화재는 1월 18일과 19일 각기 다른 장소에서 세 번에 걸쳐 불이 나 방화설의 유력한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에도인들은 저축을 하지 않았다. 화재가 발생하면 전재산을 다 잃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부유한 대상인들은 시내 중심가에서 벗어나 스미다가와강 건너편에 창고를 만들어 재산을 보호하는 방법을 썼지만 일반 쵸닌들은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가부키 극장의 화재는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히사마쯔극장(久松座)은 1879년에 지어진 극장인데 그 다음해 1880년에 화재로 불타고 말았다. 1885년에 치세극장(治世座)으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개관하였지만 1890년에 다시 화재를 당하였다. 10여 년 만에 세 번의 화재를 당한 것이다. 1893년에 당시 유명한 배우였던 이치카와 사단지( 市川左團次)가 매입하여 메이지극장(明治座)으로 개칭하였는데 이후에도 여러 차레 지진과 전쟁을 만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中川右介, 『歌舞伎座誕生』, p126). 가부키 최초의 극장인 유서깊은 나카무라(中村)극장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1882년 화재가 발생하여 전소된 후, 1884년에 다시 재건축하여 사루와카(猿若)극장으로 개명하고 재개장했지만 불과 2개월 후에 다시 소실되었고(1885년) 그 다음해 (1886년)다시 재건축하여 나카무라극장으로 되돌아왔다. 이 때 나카무라 극장에 등장한 사람이 가와카미 오토지로(川上音二郞)다. 그는 후쿠오까 출신으로 일본 신파극의 창시자로 불리운다. 자신의 극단을 만들어 교또와 요꼬하마에서 흥행을 하였지만 실패하자 도꾜에 들어와 나까무라 극장에서 흥행을 하게 된다. 그의 신파극은 전통연극에서 사용된 허무맹랑한 기담이나 괴담, 외설등을 배제하고 새로운 연극을 지향하였다. 당시 연극계의 화두였던 연극개량운동을 적용한 것이었다. 이후 도리코시극장(鳥越座)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면서 재기에 몸부림쳤지만 1893년 화재로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中川右介, 『歌舞伎座誕生』, p324). 1624년에 개장한 일본 최초의 가부키 극장은 이렇게 사라졌다.

가부키 극장의 야구라(櫓)(출처 : 구글)
가부키 극장의 야구라(櫓)(출처 : 구글)

 

가부키는 1603년에 탄생하였고, 첫 극장은 1624년 지어진 사루와카 극장(猿若座)이다. 이후 작은 극장들이 많이 지어졌지만 에도막부에서는 이들 작은 극장들을 폐쇄하기에 이른다. 풍기문란과 화재 때문이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화재 때문이었다. 에도막부는 가부키 극장을 4개로 한정하고 여기에 야구라(櫓)라는 일종의 허가징표를 발행하였다. 에도4좌 체제는 1670년대까지 이어지다가 이후 에도삼좌( 江戸三座 ) 체제로 바뀌는데 이 모두가 화재의 위험때문이었다. 당시 에도의 소화기술은 물을 뿌리거나 옆에 있는 집을 부수어 유소를 방지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화재는 에도인들이 가장 무서워한 재난이었다.

지진이 많은 일본에서는 지진으로 인하 극장폐쇄도 많았다. 1854년 안세이 난카이 대지진, 1855년 안세이 에도지진등 ‘안세이 대지진(安政大地震)’이라 불리우는 큰 지진이 있었고 이 때 콜레라가 창궐하여 10만명 이상이 죽고 가부키의 흥행이 큰 타격을 받았다. 1703년에는 겐로꾸 대지진으로 당시 에도3좌가 모두 파괴된 일도 있었다.

런던 대화재(출처 : 구글)
런던 대화재(출처 : 구글)

 

런던 대역병과 런던 대화재

전염병이 발생하면 극장은 폐쇄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번 코로나 19로 인한 폐쇄 이외에도 2009년에 발생한 신종플루와 2015년에 발생한 메르스로 인해 극장폐쇄를 경험한 적이 있다. 화재가 발생하면 해당 극장만 폐쇄하면 되지만 전염병의 경우에는 지역 전체의 공연장을 폐쇄해야 한다. 영국에서는 전염병으로 인해 1582~1583년까지 18개월, 1593년에는 11개월, 1603년에서 1604년 사이에는 13개월, 1636년에서 1637년까지 17개월 동안 극장을 폐쇄하였다.

1665년과 1666년 런던에는 전염병과 화재가 연이어 발생하였다. 이를 런던 대역병, 런던 대화재라고 부른다. 런던 대역병은 1665년에 발생하여 1666년까지 계속되었다. 당시의 의학수준과 위생상태는 매우 열악했다. 전염병의 원인은 물론이고 치료방법도 몰랐다. 거리에는 오물과 쓰레기, 동물의 배설물이 가득했고 말과 마차, 짐꾼, 사람들로 혼잡하였다. 거리를 지나다니려면 수건이나 꽃다발(nosegay)로 코를 막고 다녀야 할 지경이었다. 전염병에 대한 대처방식은 오늘날과 유사했다. 런던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통제했고 환자가 발생하면 출입을 아예 통제했다. 환자에게는 감시원이 할당되어 그들의 출입을 감시하기도 했지만 환자가 많아지면서 이도 유명무실해졌다. 약 8만여 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이어서 1666년에는 화재가 발생했다. 이를 런던 대화재라고 부른다. 9월 2일부터 9월 6일까지 계속된 화재로 8만여 채의 가옥중 7만여 채가 불에 탔고 , 사망자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재는 프랑스 출신의 시계공 로버트 허버트가 일으킨 것으로 소문이 났고 그는 처형된다. 그러나 화재 당시에 그는 선원으로 북해에 있었고 화재가 발생하고 이틀 뒤에 런던에 도착한 사실이 밝혀진다. 카톨릭과 이에 반대하는 측간의 알력이 이런 희생자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당시의 소방은 오늘날과 같은 제도화된 소방서가 있는 것이 아니었고 시민들이 자율적으로 만든 소방대가 담당했다. 그들은 밤마다 순찰을 돌았고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교회의 종을 울려 이를 알렸다. 당시에는 법에 의해 교회는 소방에 필요한 사다리, 양동이, 도끼 등을 구비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의 유일한 소방도구는 물뿐이었다. 사다리를 타고 물을 붓는 것이 전부였다. 또 하나의 방식은 방화선(firebreak)이었다. 길과 길, 산길과 산길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불이 옮겨붙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일본의 히로고지와 같은 방식이었다(인간의 사고방식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매우 비슷한가 보다).

런던 대역병과 세계 3대 화재라 불리우는 런던 대화재의 연이은 내습은 런던을 대혼란에 빠뜨렸다.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라는 글을 써 붙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안녕을 위해 다른 사람을 돌보아주지 않았고 하인들이 병에 걸리면 갈 곳이 없는 걸 알면서도 내쫓기도 하였다. 시체는 커다란 구덩이에 암매장하였다. 무려 1,114명의 시신이 한 구덩이에 묻히는 일도 있었다. 이런 대혼란의 와중에 화재가 발생했으니 런던시민들이 겪었을 고초를 상상하기 쉽지 않다.

당시의 왕은 찰스 2세였다. 그는 1660년 왕정복고에 의해 왕위에 오른 뒤 청교도들에 의해 폐쇄되었던 극장을 다시 열도록 허용했다. 그는 연극을 매우 좋아했던 왕으로 영국 최초의 여배우 중 한 명이라고 일컬어지는 넬 그윈(Nell Gwyn)은 그의 애첩이었다. 찰스 2세는 화재로 인한 민심이반을 우려하였다. 그래서 노숙자들을 도시외곽으로 추방하고 다른 도시에서 그들을 수용하도록 지시하였다. 화재로 소실된 건물들의 재건축을 실시하였고 소방설비와 위생시설을 갖춘 거리를 조성하여 런던을 파리에 버금가는 바로크적 화려함을 지닌 도시로 거듭나게 하였다. 메이레키 화재로 커다란 재난을 당한 에도가 오히려 경제적 활력을 되찾았듯이 런던도 대화재 이후 새로운 도시로 재탄생한 것이다. 런던 대역병으로 런던 인구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8만여 명이 사망하였다. 그런데 이런 대참사속에서 전염병이 사라졌다. 선페스트를 일으키는 쥐와 벼룩이 화재에 타죽었기 때문이다. 세상일에는 양과 음이 공존하는 것인가?

극장에서는 사고도 자주 발생한다. 장치봉에서 떨어지는 낙하물로 부상을 입기도 하고 조명등이 떨어지면서 다치기도 한다. 때로는 2층이나 3층 등의 발코니에서 떨어지거나 무대에서 오케스트라 피트로 떨어져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우리나라 국립극장에서 그런 사고가 실제로 발생하였다). 극장에는 많은 장비와 세트들이 있어서 이들을 설치하거나 철거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한다. 또한 서커스에서는 위험한 퍼포먼스를 하다가 추락하여 발생하는 사고, 동물로 인한 사고 등이 발생한다.

최근에는 공연장에서 테러가 빈발하고 있다. 2017년 5월 23일 영국 맨체스터 아레나에서 열린 아리아나 그란테의 공연시 테러로 23명이 사망하였고, 같은 2017년 10월 라스베가스 만달레이 베이 야외공연장 테러로 59명이 사망하였다. 2015년 11월 13일 프랑스 바타클랑 극장 테러는 130명의 사망자와 352명의 부상자를 낳았는데 1년만인 2016년에야 다시 열 수 있었다. 극장이라는 문화적인 시설에서 반문명적인 테러가 자행되고 있는 것은 21세기적인 역설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