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리(quarantine)'의 원조는 크로아티아
'격리(quarantine)'의 원조는 크로아티아
  • 이종찬 기자
  • 승인 2020.05.01 22: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세기 동안 흑사병 완벽히 막아내
크로아티아는 만년필, 샤프펜, 넥타이와 함께 격리의 발명국
위기상황에서 통제는 불가피, 그러나 고통감소를 위한 것이어야

쿼런틴(qaurantine, 격리)은 본래 숫자 '40'을 의미했다. Photo by Kelly Sikkema on Unsplash
쿼런틴(qaurantine, 격리)은 본래 숫자 '40'을 의미했다. Photo by Kelly Sikkema on Unsplash

[더프리뷰=서울] 이종찬 기자 = 코로나19 사태에 따라 '자가격리(self quarantine)'란 말을 매우 흔히 접하게 됐다. 현재 각국의 봉쇄, 휴업 등 조치도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태다.

격리조치에는 'quarantine'과 ‘isolation'이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정의에 따르면 ’quarantine'은 “감염자와 접촉했거나 감염 가능성이 있을 경우, 예방 차원에서 사람과 물건을 외부와 차단하는 것”이고 ‘isolation’은 “감염된 사람이나 물건을 외부와 강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다. 우리 말로는 둘 다 ‘격리’ 이지만 구분하자면 quarantine은 ‘자가격리’, isolation은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강제)격리’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우리 나라의 자가격리는 2주간 시행된다. 하지만 quarantine이란 말은 본래 ‘40’을 뜻하는 말인데, 동시에 ‘격리’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크로아티아와 쿼런틴(quarantine)
사상 최악의 팬데믹은 14세기 유럽을 휩쓴 흑사병(Black Death)이었다. 흔히 '페스트'로 불리는 이 흑사병으로 당시 약 7천5백만-2억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된다. 1377년, 세계 최초의 쿼런틴이 당시 라구사 공화국(The Rebpublic of Ragusa)에서 이루어졌다. 라구사는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시(市)이다. 쿼런틴의 발명지는 두브로브니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크로아티아는 만년필, 샤프펜, 넥타이의 발명지로 알려져 있지만 여기에 더해 감염확산 방지를 위한 쿼런틴의 발명지이기도 한 것이다. 크로아티아에서 발행되는 타임아웃지는 최근 쿼런틴의 역사와 함께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지에 대한 이야기를 실었다.

세계 최초의 쿼런틴-14세기
14세기 라구사 공화국은 인구 3만의 작은 무역국가였다. 국가는 번창했고 사람들은 이탈리아어, 라틴어, 크로아티아어를 사용했다. 1348년 흑사병이 두브로브니크를 강타하자 4년간 2천-1만명 정도가 희생됐다. 흑사병이 발생하면 들판과 가축을 돌보지 못해 주민들은 영양실조 상태가 됐다. 이는 면역력 약화로 이어지고 또다시 흑사병이 찾아오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 Photo by Spencer Davis on Unsplash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시(市) Photo by Spencer Davis on Unsplash

30년간 흑사병이 계속되자 라구사 의회는 1377년 최초로 격리체계를 수립했다. 그 해 7월 22일 발효된 법에 따라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감염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은 특정 섬에서 30일간 갇혀 있어야 했다. 여행자들은 사람이 살기 어려운 보바라, 무르칸, 수페타르 등 작은 섬으로 보내졌다. 때로 캠프를 세워 지내기도 했지만 이들은 비바람, 추위, 더위를 피할 곳이 없었다.

1397년 의회는 법을 수정해 격리기간을 40일로 늘렸다. 처음에는 격리기간이 30일이었기 때문에 trentine(30)이라고 했지만 40일로 바뀌면서 이름도 quarantine이 됐다. 법을 어길 경우 벌금, 감금, 공개망신(public shame) 등 다양한 징벌이 가해졌다.

15세기 흑사병에 대한 대처-쿼런틴과 카카모르티(kacamorti)
흑사병이 15세기까지 계속 재발하자 쿼런틴도 계속됐다. 두브로브니크 정부는 1426년 보건위원회(The Health Magistrate)를 구성했다. 보건위원회의 명령을 따르는 카카모르티(kacamorti, 이탈리어로 ‘죽음을 잡아들이다’의 의미)들은 쿼런틴을 감독하고 환자의 상태 뿐 아니라 그들의 주소와 가족의 이름 등을 기록, 관리했다. 신속, 정확하게 흑사병 확산을 방지하고 자신들의 견습기간도 줄이기 위해 이들의 임기는 전임자 임기만료 6개월 전에 시작됐다. 이는 전염병 방지에 핵심이었다.

1431년에는 환자 및 감염 의심자를 위한 격리시설인 라자레토(Lazzaretto)가 석조건물로 지어졌다. 라자레토라는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라자로에서 따온 것이다. 이후 라자레토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점차 시설과 성직자, 이발사, 청소부 등 근무인원들도 갖춰져 나갔다.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은 얼굴에 검은 반점이 생긴다. Photo by Mathew MacQuarrie on Unsplash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은 얼굴에 검은 반점이 생긴다. Photo by Mathew MacQuarrie on Unsplash

16세기의 대처-쿼런틴의 양성화
1526년 흑사병이 또다시 강타하지 무역은 완전히 멈춰섰다. 정부는 엘리트 계층의 시골 여행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면 귀족의 지위를 박탈했다. 1590년에는 시 성벽 근처에 대규모 라자레토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플로체(Ploče) 부근으로 짐작되는 이 지역은 당시 도시의 주 항구 부근으로 두브로브니크와 연결되어 동쪽 도시들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따라서 여행객, 선원들, 상인들은 더 먼 섬이나 내륙으로 가지 않고 바로 쿼런틴 지역으로 갈 수 있었다. 이 시기에 표준화된 쿼런틴 시스템이 확립됐고 흑사병은 지중해 전역에 퍼졌지만 시의 성곽 안으로는 이후 한 세기 동안 들어오지 못했다.

두브로브니크의 흑사병 대처 성공은 보다 넓은 관점에서 봐야 한다. 주민들은 부유하고 정치는 안정됐으며 인구와 영토가 작았다. 면적이 넓고 덜 조직된 지역에 비해 흑사병과의 싸움에 유리했다.

17세기, 원치않은 재유행-하녀흑사병
두브로브니크에 침투한 마지막 흑사병은 소위 하녀흑사병(Plague of the Maids, Peste delle serve, 1691)이다. 이 병의 이름은 하녀들이 이 병을 일으켰다는 생각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당시 하녀들의 생활환경이 어렵고 면역체계가 약해 가장 고생했을 뿐 그들이 병을 일으켰다는 증거는 물론 없다.

이 하녀흑사병이 마침내 성벽을 통과하게 된다. 잘 정비된 쿼런틴 체계하에서 어떻게 가능했을까? 17세기 두브로브니크 주변의 베네치아 공화국, 합스부르크 군주국 등은 이도시의 전략적 가치를 알아보았다. 대규모 전쟁은 아니지만 게릴라식 강도로 이 곳을 약탈했고, 약탈자들은 종종 흑사병 발병지역에서 왔는데 이들이 병을 전파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처음에는 흑사병을 이미 과거의 것처럼 생각했으며 귀족이든 하인이든 모든 환자를 똑같이 처리했다. 이동 및 사회연결망을 재편, 쿼런틴을 실시했으며 누구든 잠재적 환자로 생각했다. 첫 사망자가 나오고 일주일 후 병의 심각성을 알게 되자, 당국은 도시 전체에 쿼런틴 조치를 취했다. 관리요원인 카카모르티를 포함한 고위 관료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예외가 없었다. 처벌에 따른 벌금은 보건위원회 인건비와 환자 관리비용 등으로 사용했다. 격리시설인 라자레토는 곧 환자들로 넘쳐났고 결국 수도원, 궁전건물, 일반가정들이 격리시설로 전환돼 갔다.

이 시절 카카모르티들에게는 특권이 주어져 하루 몇 번이고 거리를 걸으며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이 없으면 그 집은 격리되어 조사가 이루어졌다. 규칙을 어긴 시민들을 화승총으로 쏠 수도 있었고 건물을 소각할 권리도 있었다. 이들은 개인적 보복을 위해 직권남용을 저지르기도 했다.

한편 지정된 지역에 캠프가 세워지고 식품에 대해서도 방책들이 마련됐다. 고기, 과일, 야채는 물로 씻었으며 나무와 금속은 불에 쬐어서 보관했다. 병을 전파한다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든(모직이나 면도 포함해서) 라자레토에 보관해서 바람과 연기에 쐬고 식초로 세척했다.

흑사병과 관련한 외교 및 국제교류도 장려됐다. 입국자는 출발지의 흑사병 상태에 대해 보고하도록 했고 정부는 주변 지역들과 보건정보를 교환했다. 정부는 1691년 6월 중순 하녀흑사병의 종식을 발표했고 이후 3일간 축제가 열렸다.

현재, 2020년의 쿼런틴-무엇을 배울 것인가?
이를 끝으로 이후 두브로브니크 성곽 내의 쿼런틴은 사라졌었다. 2020년 3월 최초의 코로나19 환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잘 정비된 쿼런틴 시스템은 흑사병이 성벽 내로 침투하는 것을 1세기 동안 막아냈다. 두브로니크의 성공은 확실했다. 오늘날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은 위기상황을 빨리 깨닫고 빨리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제)격리를 포함, 쿼런틴은 현재 가장 효과적인 질병확산 방지책으로 믿어진다. 사회적 접촉의 최소화는 보건의료 시스템을 만들어 줄 수도, 약화시킬 수도 있으며 이는 삶과 죽음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당시 두브로브니크의 빈약한 보건의료 체계는 그 시대의 산물로 제쳐두더라도 우리는 권력남용의 위험을 살펴볼 수는 있다. 카카모르티가 이뤄낸 그 모든 훌륭한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권한을 이용한 개인적 복수를 포함, 지나치게 잔인한 경우도 있었다. 어떤 위기상황에서 상하체계는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어려운 시기에 고통받는 자들을 돕기 위한 것이지 고통을 가중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며 특히 상층부의 사람들은 그 일을 위해 선택된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업무상의 실수, 오보, 가짜뉴스 등도 상황을 악화시킨다. 하녀흑사병은 그 이름 자체로 전체 질병을 무고한 사람들 탓으로 돌린다. 또한 질병에서 회복된 사람들도 중요하다. 그들은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며 환자들에 대한 신뢰도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회복자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조언을 줄 수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상호신뢰의 힘이다.

Photo by JoelValve on Unsplash
상호신뢰는 위기극복의 자신감을 준다. Photo by JoelValve on Unsplash

플로체 지역에 있던 한 라자레토 건물은 현재는 예술 워크숍 장소, 자선단체 사무실, 멀티미디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지난 3월 자그레브의 아레나 센터와 스플릿 팔라디움은 병원 및 방역센터로 사용중이다. 현대판 라자레토인 셈이다.

과거와 현재를 통해 서로 뒤바뀐 모습은 사실 우리에게 환경이 요구하는대로 전환하고 적응할 능력이 있음을 일깨워 준다. 이는 결국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것이다. 미래를 대비할 때는 과거를 반영해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