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발레의 귀환과 여성 안무가들
스토리 발레의 귀환과 여성 안무가들
  • 이종찬 기자
  • 승인 2020.05.12 10: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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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만든 여자 이야기들

[더프리뷰=서울] 이종찬 기자 = <지젤>이나 <백조의 호수>같은 전통발레는 모두 줄거리가 있는 스토리 발레(story ballet, narrative ballet)였다. 대부분 주인공은 백조나 요정 같은 초현실적 존재였고 대개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끝난다.

1960년대 조지 발란신이 추상발레(abstract ballet, 줄거리 없이 음악에 맞춘 추상적 움직임으로 구성된 발레)를 만들면서 이후 모던 발레, 컨템포러리 발레 등이 탄생했다. 물론 <지젤>, <라 실피드>같은 유명 고전들은 여전히 ‘절찬리 상연중’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초현실적 존재가 아닌 현실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새로운 스토리 발레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조지 발란신의 추상발레 '보석(jewels)'(사진=medici.tv 동영상 캡처)
조지 발란신의 추상발레 '보석(jewels)'(사진=medici.tv 동영상 캡처)

발란신은 “발레는 여자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지만 미국의 안무가 팸 태노위츠(Pam Tanowitz)는 “그것은 남자가 만든 여자”라고 응수했다. 스토리 발레는 오래된 장르지만 대부분 남성 안무가들의 작품이며 여성의 시각으로 만든 스토리 발레는 매우 드물다. 오늘날에는 멋진 21세기형 스토리 발레들이 있는데 이는 모두 여성 안무가들의 작품이다. 미국의 무용가 제나 피터스는 댄스 매거진 최근호에 이 새로운 스토리 발레 작품들이 전통발레에 대해 갖는 의미와 그 관점에 대해 썼다.

최근 경향의 배경
이야기 전달수단으로서의 발레는 17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안무가이자 무용학자인 수잔 리 포스터는 저서 <안무와 내러티브>에서 “마리 살레는 이야기 전달수단으로 판토마임을 개발, 자신의 작품 <피그말리온>에서 처음 사용했다”고 말했다. 1800년대에는 낭만발레가 등장하면서 환상적인 모습의 여성 주인공을 숭배하는 남성팬들이 생겨났다.

몇몇 여성은 20세기에도 내러티브 발레를 계속했다. 브로니슬라바 니진스카, 니네뜨 드 발루아, 미국 안무가 아그네스 드 밀 등이다. 주요 발레단들은 지난 60년간 유명 무용가들의 모던 및 컨템포러리 작품을 통해 안무영역에서의 젠더 차이를 메꿔 나갔다. 즉 피나 바우쉬, 트리샤 브라운, 마사 그레엄, 트와일라 타프 등이 그들이며 최근에는 애주어 바튼, 안 테레사 드 케에이르스마커, 제시카 랭, 크리스털 파이트, 팸 태노위츠 등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업적은 대개 스토리 발레가 아니었으며 새로운 내러티브 작품들이 대중 속에 부활한 것은 불과 몇 년 사이의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스토리 발레 때문에 입장권이 많이 팔린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스토리 발레의 부활과 함께 작품 위촉에 있어서도 젠더 평등이 나타났다. 최근 발레단들은 공공연하게 여성 안무가들에게 초기단계부터 프로그래밍까지 모두 맡아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전에 없이 많은 여성들이 발레단 감독을 맡고 있다. 여전히 여자보다 남자가 많기는 하지만 어쨌든 통계수치는 변하고 있다.

이 두 가지 트렌드(즉 내러티브 작품이 새로이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과 무용단들이 여성 안무가들에게 이전보다 작품을 더 많이 위촉하고 있다는 사실)와 여성 안무가들의 스토리 발레는 나름대로의 방식(formula)이 있다는 것을 동시에 바라봐야 한다.

스토리 발레에서 안식을 찾다.
영국 안무가 캐시 마스턴은 “스토리 발레는 약 25년간 나의 열정이었다. 사실 내게는 별 새로운 것이 아니다”라며 “내러티브가 다시 유행하고 있으며 무용단들은 대규모 작품을 공연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유명한 책벌레인 마스턴은 영어교사였던 부모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딸의 문학과 연극에 대한 열정에 불을 지폈다. 그녀는 “신선한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는다”고 하면서도 그렇지만 “여성들의 이야기나 페미니스트 관점을 노골적으로 찾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하지만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라는 여성으로서의 삶의 경험이 스토리 발레에 접근하도록 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 유명한 <제인 에어>를 포함, <폭풍의 언덕>, <롤리타>, <채털리 부인의 사랑> 등 30여 편의 내러티브 작품을 안무했다.

헬렌 피켓의 스토리텔링에 대한 동기도 마스턴과 마찬가지로 부모님이 만들어 준 것이다. 부모들은 모두 배우였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첫 전막 발레작품으로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카미노 레알(Camino Real)>을 권했다. 2015년 애틀란타 발레단에서 이를 작품으로 만들었을 때 그녀는 “마치 집에 온 것 같았다”고 말했으며 작년에는 스코티시 발레단과 <크루서블>을 초연했다. 아더 밀러의 우화적 희곡에 기초한 이 발레는 몇 개의 상을 받았고 곧 미국 데뷔 예정이다.

아나벨 로페스 오초아 역시 오랫동안 내러티브에 대한 매력을 느꼈다. “젊은 안무가로서 나의 작품은 늘 연극적 요소가 있었다. 작은 플롯과 인간의 상호작용 같은. 하지만 모두들 ‘해체된 동작’을 원했기 때문에 트렌드가 되지는 못했다.”라고 말했다.

내러티브 발레에 대한 수요가 커지면서 그녀는 2012년 테네시 윌리엄스 원작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자신의 첫 장편으로 만들었다. 이후 영화 <대부> 분위기의 마피아 스토리인 <벤데타>, 소설 <위험한 관계>등 스토리 발레 안무를 계속했다. 2016년에는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의 이야기를 그린 단막작 <부러진 날개>를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와 공연했다. 지난 2월에는 이를 전막 작품으로 확장한 <프리다>를 네덜란드 국립발레단과 초연했으며 9회의 공연이 금방 매진됐다.

다양한 면모의 여성상
4년간의 연구 끝에 오초아는 프리다의 본래 모습을 훼손하지 않고 그녀의 힘(agency)에 초점을 맞춘 대본을 완성했다. 그녀는 “나는 프리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여성이 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면서 “여성으로서 우리는 보다 많은 층위를 드러낼 수 있다...그리고 우리는 클리셰를 사용하기 보다 암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작품에서 프리다의 자화상을 남성군무로 표현하면서 오초아는 젠더 규범을 희롱하기도 하고 프리다의 초현실적 표현주의를 따라 창의적 추상작품을 만들어 냈다.

피켓은 <크루서블>을 시작할 때 매사추세츠 댄버스로 가서 역사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밀러의 등장인물에 대한 새로운 이론들을 모았다. <크루서블>은 17세기 세일럼에서 있었던 마녀재판을 소재로 아서 밀러가 쓴 희곡 <The Crucible>을 발레로 만든 것이다. 남자 주인공은 잘못된 혐의를 인정하고 벌을 받을지 아니면 이를 피하기 위해 젊은 여인 아비게일과의 불륜을 털어놓을지를 결정해야 한다. 피켓은 자신의 연구에 기초해 이 이야기를 부인 엘리자베스와 하녀 아비게일을 중심으로 대본을 만들었다.

피켓은 “힘든 결정을 스스로 내리는, 자살하지 않는 여자의 이야기를 찾고 있다”고 말한다. <크루서블>에서 죽음을 택하는 사람은 남성이다. 피켓은 이 이야기를 여성 캐릭터의 힘에 관한 이야기로 만들기로 했다. 즉 이런 마녀사냥은 여성에게서 힘을 빼앗는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마스턴의 가장 최근 프로젝트 또한 전통적으로 남성중심적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찰스 웹의 <졸업>.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 등이다. 이는 ‘주부-엄마’라는 미국의 전형에 도전한 것이다.

마스턴은 미세스 로빈슨이 “단지 외로운 알콜중독자가 아니라는 엔딩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런 선택들은 계속해서 발레를 낡아빠진 스테레오타입에서 끌어내 현대세계로 집어넣는 것이다.

선도해 나가기
수잔 리 포스터는 스토리 발레의 가부장적 역사를 볼 때, 이런 시도들이 온전한 페미니스트 선언으로 될 수 있을지에 의문을 제기한다. 많은 초기 페미니스트 안무가들은 발레를 규탄하고 모던이나 포스트모던 댄스를 개척하고 있었다.

마스턴은 “나는 전통발레 어휘가 정말로 이런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 이야기들은 근거가 있고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피켓도 이 의견에 공감한다. 그녀는 ”나는 더 낮고, 땅에 발을 붙인 동작을 실험했다. 내 모든 커리어 동안 포인트, 맨발로 된 스트레이트 발레 언어에 몰두했다“고 말한다.

안무가 캐시 머스턴(Cathy Marston)(사진=cathymarston.com)
안무가 캐시 마스턴(Cathy Marston)(사진=cathymarston.com)

때로 아주 단순한 동작이 가장 다이내믹한 표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마스턴의 <제인 에어> 마지막 장면은 제인이 로체스터의 품에서 빠져나와 관객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이다. “나는 이게 그녀의 이야기를 사랑에 빠져 결혼한 이야기로 축소시킬까 걱정했다. 나는 샬롯 브론테가 외부의 시선으로 만들어낸 강력한 1인칭 목소리를 포착하려 했다.”

마스턴은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를 그린 <더 첼리스트>에서 남자 무용수에게 첼로 역할을 맡겨 악기와 신체 사이의 강력한 유대를 표현했다. 뒤 프레를 연기한 로렌 커스버슨은 종종 뒤로 가서 첼로인 남자 무용수를 받치기도 한다. 이는 놀라운 역할 도치이다. 마스턴은 “무게를 부여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누는 사람으로서의 여성역할 표현이 너무 중요하다”며 “여성이 꼭 들어올려지고 여기저기 옮겨질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고통 속에 살다간 여성화가(프리다), 마녀사냥에 갇혀버린 여자(크루서블), 다발성경화증으로 오랜 투병 끝에 삶을 마감한 뛰어난 첼리스트(더 첼리스트). 이런 여성상들은 초자연적 요정이라는 고전발레의 표준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몇몇 여성 안무가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메인 발레무대로 가져오면서, 변화된 시대에 변화된 스토리 발레가 돌아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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