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팬데믹 시대의 공연예술 (하)
[더프리뷰 칼럼] 팬데믹 시대의 공연예술 (하)
  • 조복행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0.06.02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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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의 영상화 – 미학적 오염인가, 문화의 민주화인가

1. 연극의 영상화, 연극의 영화화(?)

맥루헌은 모든 미디어의 내용은 또 하나의 미디어라고 하였다. 볼터와 그루신은 하나의 미디어가 다른 미디어를 모방하는 것을 재매개라고 하였고, 게오르그 푹스는 공연예술에서 다른 공연을 모방하거나 장점을 도입하는 시도를 재연극화라고 불렀다. 모든 공연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타장르의 장점을 모방하고 스스로의 단점을 보완하려 한다. 피렌체의 지식인들이 그리스 연극을 되살리겠다고 오페라를 만든 일, 서커스가 이야기를 도입하여 연극화하는 현상, 유럽 연극이 동양의 연극을 재매개하는 현상 등이 그런 예다. 초기의 텔레비전은 연극을 재매개하였고 영화 역시 연극을 재매개하였다. 영화는 연극, 매직 랜턴 쇼, 대중오락 등의 19세기적 문화형식이 결합된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상황이 바뀌어 연극이 영화를 재매개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영화만이 아니라 텔레비전도 재매개하고 있는데, 라이브로 전송하는 것은 텔레비전을 닮았기 때문이다.

연극은 단순한 언어예술이나 신체예술이 아니라 시각적 효과가 중시되는 종합예술이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프로시니움 무대는 시각적 효과를 강조하였고 역시 르네상스 시대에 발견된 원근법은 프로시니움 무대에 활용되어 무대세트를 시각화하고 사실성을 높이는 효과를 창출하였다. 프로시니움 아치는 창이나 영화의 스크린에 해당한다. 무대의 시각화 현상은 그 이전의 야외극장이나 원형극장 등에서는 구현이 불가능한 방식이었다. 이를 영상화(picturization)로 부를 수 있다. 영화의 스크린처럼 프로시니움 무대는 관객의 시선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무대위의 각종 장치와 장비, 배우들의 동선이나 연기, 조명이나 의상 등의 적절한 배치와 그 시각적 효과는 관객의 관람태도와 공연의 의미생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무대위에 이들을 배치하는 것을 미장센이라고 부른다. 미장센을 통해 관객은 연극의 시간과 장소 등을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관객은 이들 이미지에 지속적인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기호학적 입장에서 각 세트나 조명과 의상등의 배치를 분석하고 이를 잘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미장센은 시각적 효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전개에 필요한 장치들이다. 소설이나 희곡에 글로 서술되어 있는 지문들이 연극에서는 미장센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언어를 시각화하는 것이다. (반대로 시각화된 회화나 이미지 등을 언어화하는 것은 에크프라시스(Ekphrasis)라고 말한다).

미장센은 연극계 공연(오페라, 뮤지컬, 연극 등)이나 영화에 사용되는 용어다. 그러나 영상이 도입되면서 이제는 콘서트에도 미장센이 등장한다. 최근의 SM의 <비욘드 라이브>는 가상현실, 홀로그램 등의 첨단 테크놀로지를 삽입하여 콘서트에 미장센을 설치하였다. 트래비스 스코트의 콘서트에서도 VR과 증강현실을 이용한 미장센이 등장하였다. 라이브 콘서트에서는 미장센이라고 부를 만한 장치들이 거의 없다. 연극의 미장센도 간헐적이고 정적인 장면전환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최근의 영상 콘서트에서는 미장센이 등장하고 그 미장센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매우 동적이다. 영화의 방식이 고스란히 콘서트와 연극에 도입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의 차이는 관객의 시선에 대한 통제력의 차이로 이어진다. 연극의 고정된 미장센은 무대 밖의 공간을 철저히 배제한다. 따라서 관객의 시선은 무대만을 향하며, 그 곳을 벗어난 어디에도 관심을 가지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의 미장센은 관객의 시선을 프레임의 저 편으로까지 유도한다. 그 곳은 예상 밖의 시각 정보가 존재하거나 이야기의 또 다른 국면이 제시되기도 하는 스크린 밖의 공간, 즉 외화면(off screen)이다. 이렇게 영화의 미장센은 이야기속 현실의 연속으로서 가상의 공간까지 내포한다( 배상준 『미장센』, ).

영화가 태어난 지 12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많은 서사구조들이 영화를 닮으려고 하고 있다. 시간을 나누고 이를 다시 재구조화하는 방식들, 한없이 광활한 세상을 작은 화면속에 들여놓고 나누고, 확대하고, 갑자기 도약하거나 사라지는 방식들은 새로운 서사의 표현형식들이다. 영화에서 사용되고 있는 가상현실은 모든 예술의 주요한 의지처가 되었다. 보이지 않는 것, 실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영상의 매력이다.

프로시니움 무대(출처: pinterest.com)
프로시니움 무대(출처: pinterest.com)

 

2. 공연영상화가 공연생산과 수용방식에 미치는 영향

미장센은 연극의 서사와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 연극을 이끌어나가는 플롯과 이를 시각화하는 미장센은 서로를 보충하면서 연극의 의미를 창출한다. 이런 관계성은 영화에서 더욱 강력해진다. 영화는 끊임없는 미장센의 변화와 역동성이 의미를 생산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오페라가 영상화되면서 오페라 연출가들은 이런 영상문법 때문에 곤혹스러울지도 모른다. 아직은 연극이 선행하고 영상화는 후행하는 형식이지만 매번 HD 라이브를 제공해야 하는 상황에서 영상의 특성에 맞는 연출의 변화가 등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얀과 카츠는 『미디어 이벤트』의 저자다. 미디어 이벤트는 이벤트의 생방송을 말하는 용어로서, 아폴로 우주선의 달착륙 장면, 정치지도자들의 정상회담, 월드컵 등의 글로벌 이벤트의 생방송을 말한다. 이들은 방송을 통한 생방송과 실제의 퍼포먼스 사이에는 큰 감각적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시청자들이 현장에 없어도 현장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고 주장한다. 이를 ‘ 부재하면서도 현전하는 것처럼 느끼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매개 (mediatized) 퍼포먼스는 퍼포먼스를 스펙터클로 만든다고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스펙터클은 텔레비전을 통하면 스펙터클이 더욱 화려하고 장엄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이브 이벤트와 매개된 공연 사이에는 생산과 소비의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 오페라나 연극을 영상화하면 가수나 배우들의 연기에도 변화가 올 지도 모른다. 무대위에서의 작은 동작이나 연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던 성악가들이 점점 카메라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특히 카메라의 클로즈업은 퍼포머의 디테일한 연기를 포착하기 때문에 연기에도 신경을 쓰게 될 것이다. 사실 오페라 가수들은 연기보다는 노래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연기에 덜 신경을 써 왔다. 그러나 앞으로 이런 현상에 변화가 올 지도 모른다. 카메라는 디테일한 장면까지 클로즈업하는 특성을 지닌다. 가수의 크게 벌린 입, 땀에 젖은 얼굴까지를 보여주려는 ‘무자비한’ 클로즈업은 가수들의 연기와 노래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카메라는 가수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구성하기 때문에 외적인 이미지, 즉 분장이나 미용 그리고 외모 등에도 더욱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공연은 매스 미디어의 영향을 받아서 마이크를 사용하는 등 기술발전의 효과를 도입하고 있다. 오히려 공연에서 TV기술을 도입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되었다. 기술발전은 공연의 질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해 왔다. 조명의 발전은 배우들의 연기력 향상에 큰 자극제가 되었는에, 이는 조명이 배우들의 얼굴을 비추기 때문에 어설픈 연기로는 관객들을 사로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트나 미술의 사실성도 높아졌고 무대의 색채도 화려해졌다. 존 길버트는 11년 동안 미국의 은막과 여성들을 매혹시켰지만 자기 목소리는 절대 공개하지 못했다. 그런데 1929년 길버트의 첫 번째 유성영화가 제작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길버트의 목소리는 빨리 돌리거나 느리게 녹음하지 않아도 마치 미키마우스나 내시처럼 들렸다. 유성영화는 얼굴의 표현과 제스처에서 완벽한 일상성을 요구한다 (프리드리히 키틀러, 『광학적 미디어』, 308). 프로시니움 무대는 전반적으로 무대장치와 배우들의 연기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여기에 기술이 주마가편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현대 오페라는 점점 무대미학과 가수들의 외모를 중시하고 있는데 영상화 작업은 이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한편 카메라의 클로즈업은 앙상블을 훼손할 수 있다. 공연에서 잘 조화를 이루던 앙상블이 특정 가수나 특정 장면만을 부각시킨다고 생각해 보라. 영상 오페라는 더욱 스타만들기도 강화할 것이다. 영화의 스타탄생은 클로즈업 때문이라라는 주장도 있는데, 카메라는 오페라 스타를 더욱 부각시킬 것이다. 영상적 편집 역시 공연의 원본에 영향을 미친다. 대조적 장면의 교차(크로스커팅)는 공간을 없애버리고 장면 사이의 페이드 아웃은 시간을 죽여버리고 만다( 『The Oxford handbook of Adaptaion Studies』, 319). 장면교차는 공간을 복수화하여 불연속적으로 만든다. 영상은 공간을 분할할 수 있다.

극장에서의 스펙터클한 무대가 안방극장의 작은 화면, 가까운 거리속에 들어오려면 극장의 미장센이나 조명이 바뀌어야 한다. 대개 무대 조명은 어둡다. 지나치게 밝으면 연기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고 관객의 몰입을 방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두운 무대조명을 그대로 촬영하면 텔레비전이나 영화와 맞지 않는다. 그래서 무대조도로 인해 공연연출과 텔레비전 연출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약동하는 공연, 사람의 땀과 에너지가 넘치는 극장에서의 퍼포먼스를 영상으로 옮기면 생기를 잃어버리고 공연의 아우라를 상실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은 원본성을 말하는 것이다. 원본이 복제되면 원본의 아우라를 상실한다고 하였는데 공연이 영상으로 전환되면 약동하는 힘이 사라지고 기계와 카메라의 어두운 심연속으로 들어가버리고 마는 것일까?

관객의 예술, 감독의 예술

연극을 영상화하는 것은 연극의 영화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거기서 나타나는 차이는 공연의 의미창출의 주체에 대한 문제다. 공연은 관객의 시점에서 보는 예술이고 영상공연은 연출이나 카메라 감독의 시각이 개입되는 예술이다. 영상공연은 무대위의 모든 장면을 풀 샷으로만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연출자나 카메라 감독의 시선이 개입하여 장면을 선택적으로 노출한다. 녹화방식의 경우에는 무관객 촬영을 추가하여 부족한 영상을 보충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 예술의 전당의 <싹 온 스크린>은 그렇게 제작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굉장한 시간적 노력과 추가적 비용지출, 출연자들의 노력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는 화면을 매우 디테일하게 분할하고 작은 부분까지 촬영함으로써 공연의 정세도(Definition)를 높인다.

벤야민은 그림과 영화를 이렇게 비교한다. ‘ 화가의 영상은 하나의 전체적 영상이고 카메라맨의 영상은 여러 개로 쪼개어져 있는 단편적 영상들로서 이 단편적 영상들은 새로운 법칙에 의해 다시 조립된다 ’. 이를 국소적 차원 (Local Level)과 전체적 차원( Global Level)으로 부른다. 영상화된 공연은 전체가 감독에 의해 재구조화된 영상들의 집합이다. 관객은 감독이 나누어 놓은 전체와 부분 영상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반면 공연은 관객의 예술이다. 관객은 무대위에 펼쳐지는 연기와 노래, 미장센을 자신의 시점에서 수용하게 된다. 맥루헌은 미디어를 핫 미디어와 쿨 미디어로 나눈다. 핫 미디어는 감각정보가 풍부하고 정세도가 높은 미디어로서 인쇄물, 라디오, 사진, 영화 등이 이에 속한다. 쿨 미디어는 감각정보가 빈약하고 정세도가 낮은 미디어로서 만화, 전화, 텔레비전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관객의 수용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핫 미디어를 대할 때는 높은 집중과 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세도가 높기 때문에 눈에 들어오는 대로 받아들이면 되기 때문이다. 반면 핫 미디어의 경우에는 정세도가 낮기 때문에 대상에 집중해야 한다. 연극은 쿨 미디어에 속한다. 연극무대는 재현에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아무리 사실적으로 미장센을 구성하려 해도 리얼리티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관객은 공연에 높은 주의력을 가지고 매우 집중해서 보아야 한다. 시각적 포화도(visual saturiz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연극은 시각적 포화도가 낮다.

정세도의 차이는 관객의 관여도(Involvement)를 바꾸어 놓는다. 관여도는 관심도의 다른 이름이다. 공연관객은 공연에 대한 집중과 몰입이 매우 강해진다. 공연관객들은 높은 입장료를 지불하기 때문에 대부분 고관여자에 속한다. 게다가 공연의 낮은 정세도는 더욱 관여도를 높인다. 고관여는 공연의 수용태도를 매우 적극적으로 바꾸어놓는다. 그러나 영상공연은 핫 미디어로서 굳이 공연에 집중하지 않아도 카메라가 고화질의 화면을 제공한다. 벤야민의 말처럼 작품이 내게 들어오는 것이다. 영화와 같은 높은 정세도의 영상은 실재감을 높여준다. 오히려 육안으로 보는 공연보다 더 실재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될 때가 있다. 그것은 영상이 고화질의 기술로 공연의 세부와 전체를 조화롭게 포착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쿨 미디어에서는 관객이 작품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벤야민은 회화와 영화의 관계를 이렇게 비교한다. ‘ 화가는 주어진 대상에 자연스러운 거리를 유지하는 데 반해 카메라맨은 작업할 때 주어진 대상의 조직에까지 깊숙이 침투한다. 마치 외과의사가 수술을 통하여 환자의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처럼 영화는 관객의 내부로 깊숙이 침투한다. 이를 통해 두 사람이 얻게 되는 영상은 엄청나게 다르다. 나는 이미 내가 생각하고자 하는 바를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다. 움직이는 영상들이 내 사고의 자리에 대신 들어앉게 된 것이다(『기술 복제시대의 예술작품』, 142). 실제로 이런 영상들을 바라보는 사람은 영상들의 끊임없는 변화로 인하여 연상의 흐름이 중단된다. 정신집중을 하는 사람은 작품속으로 들어간다. 이에 반해 정신이 산만한 대중은 예술작품이 자신들 속으로 들어오게 한다. (144)

발터 벤야민 출처 : newstatesman.com
발터 벤야민 출처 : newstatesman.com

 

이미지의 크기와 화질

영상화된 공연은 거의 영화에 가까워진다. 영화의 몰입장치는 스크린이다. 영화관에 들어서면 모든 관객은 스크린을 바라보게 되는데 스크린에서는 빛과 소리와 이미지가 방출되기 때문에 관객은 여기에 몰입하게 된다. 그러나 관객의 관람태도는 제의적인 태도보다는 오락적인 태도로 변하게 된다. 영상은 공연보다는 정세도가 높아서 관여도가 낮아지고 영상의 빠른 장면전환과 동적 움직임이 감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영상의 수용은 이미지의 화질과 크기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 Ditton Lombard, 「At the Heart of it all: the Concept of Presence」, 『Journal of computer –mediated communication』). 이미지의 질이 좋을수록, 화면이 클수록 무매개의 환영 또는 몰입도는 높아진다. 미디어 이론에서 무매개의 환영(Illusion of Nonmediation)은 영화나 PC 등의 스크린을 통해 영상을 감상할 때 마치 스크린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 몰입으로 이어진다는 이론이다. 이는 일종의 지각적 습관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화면의 크기와 화질은 몰입도에 큰 영향을 준다. 그리고 영화관에서는 암전이나 주변의 관객 등이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영상 콘서트를 영화관이 아닌 PC나 모바일로 관람할 경우에는 몰입에 방해를 받게 될 것이다. 작은 화면에 몰입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최근 경희대학교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영상 콘서트의 몰입시간이 불과 20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조사결과가 발표되었다(국민일보, 5월 25일). 그러나 이 조사는 영화관 공연관객이 아니라 PC나 모바일 관객을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낮게 나타났을 것이다. 앞으로 영화관 공연과 PC공연의 차이를 조사하여 그 차이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NESTA등의 조사결과를 보면 대부분의 관객이 몰입하게 된다는 결과가 보고되고 있다. 영화관은 화질이 좋고 크기 때문이다. 전화에서도 상대방의 목소리가 클수록 실제로 더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낀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런 차이는 영화관과 PC 또는 모바일 사이의 화질과 화면의 크기, 목소리의 크기 등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 북( e- book)을 읽는 것과 실제 책을 읽을 때 몰입도에 큰 차이를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많은 실증적 연구결과를 통해서도 증명되고 있다.

관람공간의 의례도의 차이 역시 수용방식에 차이를 초래한다. 영상 콘서트에서는 끊어보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가정이나 사무실에서 유튜브나 인터넷 등으로 관람할 때는 극장이나 영화관과 달리 끊어보기가 가능하다. 이는 전통적 연극의 관람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수용태도의 변화다. 그렇게 되면 불연속적인 관람으로 인해 지각적 연속성(Perceptual Continuity)이 사라진다. 지각과 인지, 그리고 감정의 생성은 즉각적이다. 즉 어떤 대상을 지각하고 인지하고 이에 의해 감정이 생성되는 것은 순차적인 것이 아니고 즉각적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지각적 연속성이 사라지면 감정적 연속성(Emotional Continuity)도 사라질 것이고 이는 미적 경험을 분절적으로 만들게 된다. 반대로 몰아보기도 가능하다. 2-3시간 분량의 공연을 지루해지면 작게 끊어보거나 몇 편의 작품을 몰아서 보는(binge watching) 방법이다. 넷플릭스가 등장하면서 몰아보기가 성행하고 있다. 몰아보기는 과몰입이나 중독으로 연결될 수 있다. 공연은 영상화를 통해 더욱 오락성이 강화될 것이다.

인간은 공연무대에서 벌어지는 전체상을 전부 지각하기보다는 특정한 인상적인 장면을 잘 기억한다. 그리고 이를 개별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화하여 기억하고 그 기억은 오랫동안 유지된다. 의미 역시 개별적인 장면이나 언어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시간적 관계속에서 형성된 집단적 이미지나 언어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나 언어가 나타나는지는 우리의 지각과 인지, 감정의 형성에 매우 중요하다. 영화는 감독과 카메라 감독의 예술이다. 그들이 지정하는 이미지와 장면이 스크린에 투사된다. 관객은 그들에 의해 선정된 장면을 보게 되고 이는 영화이해의 단서가 된다. 반면 공연은 개방된 무대에서 관객이 지각적 대상을 선정하고 이해하고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감각의 확장

에릭 벤틀리는 영화의 카메라는 건초더미 속의 바늘도 찾아낼 수 있다고 하였다. 영상공연의 촬영에는 인간의 눈보다 훨씬 시각능력이 탁월한 카메라가 설치된다. 이들은 무대의 공연장면을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한다. 그리고 촬영된 영상들은 편집되어 다양한 장면들로 나뉜다. 벤야민은 기술적 복제는 사진에서는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는 렌즈로는 포착되지만 인간의 육안에는 미치지 못하는 원작의 모습들을 강조해서 보여줄 수도 있고 또 확대나 고속촬영술과 같은 기계적 조작의 도움을 받아 자연적 시각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이미지들을 포착할 수 있다고 하였다. 기계는 인간의 감각보다 훨씬 뛰어나다. 인간의 감각으로 포착할 수 없는 대상을 기계는 포착할 수 있다. 카메라는 순간적인 그러나 핵심적인 장면을 포착하고 관객은 여기에 시각을 집중하기 때문에 신성한 장면을 포착하여 그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인간은 근접성에 대한 욕망, 즉 대상을 가까이서 접촉하려는 욕망과 보다 상세하게 보려는 욕망(Philip Auslander, 36)이 있다. 영화의 카메라는 멀리 있는 대상을 가깝게 보이게 하고 마이크는 소리를 더욱 명확하게 들리게 한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온갖 도구를 사용하여 자신의 신체기관을 완전하게 하거나 신체기관의 기능에 대한 제한을 제거한다고 하였다. 모터 덕분에 인간은 거대한 힘을 손에 넣어 근육처럼 그것을 어느 방향으로든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였고(『문명속의 불만』, 275), 맥루헌은 미디어는 인간의 감각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신체의 매체적 약점을 기술로 보완하면서 문명을 개척해 왔다. 영상공연은 라이브 공연에서는 거리나 낮은 조도등으로 인해 확인할 수 없는 배우의 섬세한 연기를 감상할 수 있게 한다. 축구 중계에서 관객이 육안으로 운동장 전체를 조망할 수 없을 때 중계카메라가 중요한 장면에서 선수의 작은 발동작을 비춰주면 큰 도움이 되는 것과 같다. 카메라는 순간적인 그러나 핵심적인 장면을 포착하고 관객은 여기에 시각을 집중하기 때문에 신성한 장면을 포착하여 그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또한 텔레비전은 해당 퍼포먼스와 관련된 자료들을 미리 준비한다. 그래서 실제 퍼포먼스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때로는 그 장면의 극적 효과를 더욱 높이기도 한다. 여기에 나레이터는 해당 장면에 극적 효과를 높인다.

또한 카메라의 클로즈업은 배우의 미세한 동작까지를 보여줄 수 있다. 이는 관객의 공연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

수용태도의 변화

대중들은 매우 변덕스럽고 그들의 취향은 다양하고 자주 바뀐다. 이는 공연의 역사, 엔터테인먼트의 역사가 증명한다. 과거의 오락은 새로운 오락에 늘 짓눌려왔다. 19세기 중반에 유럽의 공연계를 주름잡았던 그랜드 오페라는 불과 50여년만에 쇠락의 길을 걸었고, 미국과 유럽의 인기있는 엔터테인먼트였던 기형쇼 역시 텔레비전과 영화의 등장으로 소멸할 수밖에 없었다. 소위 예술이라고 일컬어지는 공연들 역시 소수의 애호가들을 위한 예술이 되어가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버팔로 빌 와일드 웨스트 쇼(BBWW)도 불과 50년만에 막을 내려야 했다.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 세계의 연출을 보여주었고 심지어 근엄한 글래드스턴마저 사로잡는 데 성공한 BBWW였다. 에펠탑 아래에 회전식 양탄자를 깔고 수백마리의 말을 달리게 했으며 그의 초상화를 지구 곳곳 모든 광고판에 내걸리게 했던 BBWW였다. 심지어 창시자인 코디의 이름을 딴 도시를 건설하였고 인디언의 상품을 러시아에서까지 팔게 만들었으며 유럽 곳곳의 수백만의 관객들에게 미국 애호열을 일으킨 스펙터클, 로마의 콜로세움이 작다고 여겼던 BBWW도 어느 새 쇠락하고 말았다(『대지의 슬픔』, 128-129). 전통서커스나 철도서커스 역시 오락의 왕자자리에서 물러난 지 오래고 연극화를 통해 새로운 길을 걷고 있는 현대서커스 역시 언제 또다시 쇠망의 길을 걸을지 모른다. 대중의 취향은 매우 변덕스럽다. 시대를 지배하던 오락들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새로운 오락이 등장한다. 대중들의 기호는 냉혹하고 그 기호는 엔터테인먼트의 변화에 따라 변한다. 새롭게 등장하는 영상공연이 대중들의 기호를 바꿀지도 모른다. 이미 콘서트에서 그런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라이브 공연만을 순수공연으로 생각하는 기존의 공연관념이 바뀔지도 모른다. 가상현실이나 영상에 익숙한 세대에게는 오히려 영상공연이 더 수용하기에 편리할지도 모른다. 공연의 본질적 조건이라고 여겼던 현전의 형이상학이 무너지고 있다. 세상에 본질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대중들은 늘 새롭고 스펙터클한 오락을 원한다. 공연을 우리는 예술이라는 측면에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공연은 예술보다 오락과 놀이의 성격이 더욱 강하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공연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3. 문화의 민주화

미디어 민주주의

전통미디어는 일부의 자본가 계층만이 접근할 수 있는 장치산업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방송과 신문 등의 매스 미디어다. 그러나 이제 누구나 모바일 폰을 소유하게 되었고 소셜 미디어에 접근할 수 있다. 미디어는 점점 개인화되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사회적 의제설정과 변화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이를 미디어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유튜브는 누구나 쉽게 업로드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돈까지 벌 수 있다. 뉴 미디어는 전통미디어의 단점을 보완한다.

공론장으로서의 미디어는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되고 공정한 정보의 분배에 기여해야 한다. 영상공연은 이런 점에서 미디어 민주주의가 낳은 새로운 현상이다.

감각의 민주화

벤야민은 기술적 복제는 원작이 도달할 수 없는 상황에 원작의 모사를 가져다 놓을 수 있다고 말한다. 기술적 복제는 원작으로 하여금 사진이나 음반의 형태로 수용자의 요구에 부응하도록 한다. 사원은 제 자리를 떠나 예술 애호가의 작업실에서 수용되고 음악당이나 노천에서 연주되는 합창곡은 안방에서 들을 수 있게 된다(벤야민. 104-105). 영상공연을 통해 우리는 직접 갈 수 없는 지역을 방문할 수 있고 들을 수 없는 공연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현전에 의해 제약을 받아왔던 공연소비자들은 글로벌한 소비, 언제 어디서나 소비가 가능한 무제약적 소비가 가능하게 되었다. 물론 공연은 완전한 공공재가 아니라 사유재와 혼합된 혼합재로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무료로 분배될 수는 없다. 그러나 영상공연은 라이브 공연에서의 관람의 제약을 해소하고 있다. 이는 곧 문화의 민주화로 이어진다. 영상공연은 그동안 공연을 볼 수 없었던 도서벽지나 산간지방 같은 문화소외지역에도 공급될 것이다. 이는 곧 문화복지가 될 것이다.

영상공연은 교육적 효과도 창출할 수 있다. 텔레비전 생방송처럼 부가영상을 삽입할 수 있는 것인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HD 라이브처럼 공연을 해설하고 주요 출연자와의 인터뷰를 삽입하여 공연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다. 녹화일 경우에는 자막을 처리하여 관객의 이해를 도울 수도 있다. 매체가 서로 결합되면 즉 영상에 자막이 삽입되면 공연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다. 이는 예술교육으로도 좋은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

벤야민은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가능성은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를 변화시켰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피카소와 같은 회화에 대해서 가졌던 가장 낙후한 태도가 채플린과 같은 영화에 대해 갖는 가장 진보적 태도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피카소와 같은 어려운 회화에 대해서는 관심을 덜 갖지만 영화처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술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관람방식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영상공연이 공연에 대한 대중들의 낙후한 태도를 바꾸어 좀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다. 공연의 평이성과 소비의 편의성이 증가할수록 공연에 대한 관심이 늘어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영상공연은 공연예술의 단점인 일회성을 극복할 수 있다. 공연은 일회적 성격으로 기록과 저장이 불가능했지만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인해 공연을 기록하여 아카이브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디지털 공유공간

콘서트혁명은 극장을 벗어나고 있다. 지난 4월에 있었던 ‘하나의 세계 : 집에서 함께(One world : Together at home )“라는 콘서트는 영상을 통해 전세계를 연결함으로써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극장의 한계는 디지털 콘서트를 통해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관객의 현전은 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에서의 한정적 현전이 아니라 사이버 공간에서 하나가 되는 글로벌한 ‘디지털 공유공간’(shared digital space)’으로의 현전으로 바뀌고 있다.

이미 BTS 등의 디지털 공유공간은 전세계의 팬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노르웨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공유공간에 원격현전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국적이나 지리적 차이가 사라지고 하나의 공간만이 남는다. 그래서 현전의 또 다른 의미를 이동(Transportation)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이는 이동이자 몰입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디지털 공간에 위치한 관객들은 자유로운 공간이동(Transportation)을 통해 소통하고 몰입한다.

극장의 엄숙주의는 관객의 자유로운 이동을 제한한다. 과거 프랑스의 극장에서는 의자가 없던 시절이 있었는데 관객들은 오히려 자유롭게 이동했다. 이는 극장을 소란스럽게 하였고 사고를 유발하기도 하였으며 미풍양속을 해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해 의자설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부 엘리트층과 관객들은 이에 반대하였다. 배우와 관객간의 자유로운 상호작용을 방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디지털 공유공간에서는 이동을 제한하는 벽이 없다. 자유롭게 이동할 수도 있고 거대한 공동체를 이루기도 한다. 글로벌 공동체. 사이버 공동체. 이는 공연의 중요한 목표인 문화공동체의 형성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전세계를 연결했던 ‘하나의 세계: 집에서 함께’에서는 사회적 약자를 돕는 모금활동이 벌어졌었다.

One world : Together at Home( 출처 : Globalcitizen.com)
One world : Together at Home( 출처 : Globalcitizen.com)

 

4. 공연 - 생성의 예술

라이브의 죽음

195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미국의 텔레비전에서는 브로드웨이 연극의 생방송이 유행하였고, 이는 텔레비전 황금시대의 최고의 인기프로그램이었다. 라이브 방송은 곧 영화와의 가장 차별적인 특징이었다. 그러나 TV는 점점 녹화에 의존하게 되는데, 녹화방송이 경제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정규 라이브 방송은 뉴스나 대통령 선거토론 방송, 스포츠 등으로 축소되었다. 1966년에 포드재단은 텔레비전의 강점은 라이브와 직접성에 있는데, 점점 늘어나는 테이프의 사용으로 그 역동성이 사라지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로써 대중들의 감각은 라이브가 아닌 녹화영상들에 익숙해져 갔다. 현대인은 공연기술의 효과에 익숙해져 있다. 아우스랜더는 이를 미디어적 재현의 ‘자연화(naturalization)라고 부른다. 배우들이 찬 마이크를 통해 나오는 소리에 익숙해진 관객들은 그 소리를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느낀다. 억지로 목소리를 크게 내는 것보다 기계음을 통해 나오는 목소리가 더 자연스럽다고 느낄 것이다. 기술은 연극과 연기의 일상성을 촉진하고 기술에 익숙해진 관객은 기술적 재현을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한다. 인지나 감각의 방식이 습관화된 것이다. 이를 인지습관과 지각습관으로 부른다. 같은 신체동작이 반복되면 습관적인 동작이 되듯이 인지나 감각, 심지어 감정까지도 습관화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연관객들은 라이브를 선호한다. 영상으로 보는 경우에도 녹화보다는 라이브를 선호한다. 트래비스 스코트의 사이버 공연에 1,230만명의 유저가 몰린 것은 ‘ 라이브’를 표방하였기 때문이다. 영국의 NT 라이브 관객을 연구한 조사보고서에서도 대부분의 관객이 공연에 몰입할 수 있었다고 답하였다. 관객들은 NT 라이브에서도 연극의 생동감(buzz)을 기대했고 84.3%가 실제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응답하였다. 그 이유는 라이브를 보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국내극장 상영은 녹화방식이다. 시차가 있고 자막을 입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리얼타임으로 보는 영상공연은 녹화와는 달리 마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참여한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영국국립극장 (출처 nationaltheatre.org.uk)
영국국립극장 (출처 nationaltheatre.org.uk)

 

공연의 아우라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매개공연에 익숙해져 간다고 해도 영상공연이 라이브 공연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은 관객과 배우간의 상호작용성이다. 영상을 통한 라이브보다는 극장에 현전하는 것, 그것이 공연의 진정한 아우라다. 공연은 실재의 세계를 재현한 것이지만 무대는 재현에 많은 제약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무대에는 인간의 삶의 모습들이 담겨있다. 세트나 소도구들은 실재를 재현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배우들은 살아가는 인간의 숨결들을 표현하고 있다. 관객은 그 배경과 배우와 하나가 되려고 하고 그 공연의 내부로 들어가서 그 사건에, 배우에 동일시를 느끼고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상 공연에는 인간의 숨결이 차단되어 있다. 오로지 기계음으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라이브는 말 그대로 살아있음을 의미한다. 거기엔 역동적인 에너지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공연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식이 작동한다. 라이브는 처음 또는 원본이라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부여한다. 또한 라이브 공연은 관객으로 하여금 역사적 현장에 같이 있고 역사의 생성에 동참하고 있다는 역사의 구성주체로서의 자긍심을 갖게 한다.

라이브의 아우라는 바로 관객과의 상호작용에서 발생한다. 여기서 메텍시스가 생성된다. 공연은 생성의 예술이다. 라이브 공연에서는 관객의 힘은 연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를 관객의 수행성(performativity)으로 부를 수 있다. 관객의 일거수일투족은 연기에 영향을 미치고 이는 즉각적인 연기의 변화로 나타난다. 관객의 웃음과 울음, 몰입 심지어 작은 숨소리까지도 배우에게 영향을 준다. 배우는 관객의 반응에 울고 웃는 역동적 존재다. 관객 역시 배우의 연기에 반응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반면 영상공연에서는 카메라가 영향을 미친다. 이를 매개된 자극(mediated stimulus)이라고 부른다. 이렇듯 관객과 카메라가 부여하는 수행성의 차이 또는 자극의 차이는 상당하다. 매개공연은 많은 과정을 거쳐 생성된 공연의 아우라를 단지 영상으로 보여줄 뿐이다. 공연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생동감있고 관객과 배우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예술이고 즉석에서 공연에 변화가 생성되는 예술이고, 배우의 연기로 인해 극장 전체가 환호성으로 가득차는 공연이다.

극장 – 의례적 공간

극장도 지각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연극에 있어서의 관객의 관람태도는 무대미학과도 관계가 깊다. 프로시니움 무대에서 객석은 암전되고 무대를 향하여 집중된 조명과 기술적 장치들에 의해 관객들의 시선은 무대로 집중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공연장에서의 엄숙한 관람예절(이를 엄숙주의라고 부르고자 한다) 또한 관객의 집중을 요구한다. 이를 공연의 의례적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관객은 매우 엄숙한 관람태도를 보이게 되고 이는 곧 공연몰입으로 이어진다.

극장 – 촉각적 공간

관객들의 감동은 극장전체에 퍼져서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침울한 연극은 침울한 분위기를 만들어 극장에 침울함이 넘치고 명랑한 연극은 명랑함을 극장에 넘쳐흐르게 한다. 이는 다시 관객에게 전달되고 배우에게 다시 전달된다. 극장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극장은 매우 촉각적인 공간이다.

공연장에 들어서는 순간 느끼게 되는 설레임은 극장만이 주는 아우라다. 그 설렘은 관객이 극장이라는 특별한 공간과 출연배우에 대한 팬덤 등이 결합하여 생성하는 감정이다. 이런 감정들을 매개공연은 생성해내지 못한다.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는 루브르 최고의 관광상품이다. 아무리 사진을 잘 찍어도 그 사진은 모나리자의 복제본일 뿐 원본의 아우라를 담아내지 못한다. 아우라는 원본에서 나온다.

극장을 채우는 것은 물리적인 오브제와 배우만이 아니다. 오히려 무대는 말과 소리와 색깔, 그리고 관객들의 숨소리와 에너지로 채워진다. 관객들의 침묵이 때로는 극장을 지배하기도 한다. 오히려 침묵이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효과를 창출하기도 한다. 극장은 배우와 관객의 투쟁의 장소이며 화합의 공간이다. 따라서 극장은 심리적 공간이자 탈물질적 공간이기도 하다.

5. 시뮬라크르와 문화변용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문자가 기억력을 저하시킬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인쇄술이 발명되자 루터는 이를 활용하여 종교개혁에 성공했지만 교황청에서는 배척하였다. 영국에서 있었던 19세기 후반의 적기조례는 마차를 보호하기 위해 자동차의 주행속도를 제한한 법이었다. 영화가 등장하자 가부키 배우들은 대중들의 저속한 오락이 탄생하였다고 비판하면서 가부키 출연 자체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초기영화들은 많은 가부키 배우들을 캐스팅했다. 텔레비전은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오락매체이지만, 이를 바보상자라고 폄훼하는 분위기는 아직 남아 있다. 팝 가수 마돈나는 자식들에게 절대로 텔레비전을 보여주지 않으며 텔레비전은 ‘쓰레기’라고 말한다. 닐 포스트먼은 텔레비전 시대에서 다시 문자시대로 회귀해야 한다고도 하였다.

새로운 미디어가 발명되면 늘 이에 대한 저항이 있어 왔다. 그러나 예술은 늘 새로운 기술, 당대의 주도적인 기술을 도입해 왔다. 예술은 새로운 매체를 미학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 유용한 방향으로 이용한다. 뉴 미디어와 올드 미디어는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면서 공존해 왔다. 어떤 미디어도 완전한 미디어는 없기 때문에 타 미디어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미디어의 상보적인 성격이다. 온 라인 공연에 대한 반대 또는 우려가 있다. 창작자나 배우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비판이다. 배우, 관객의 현전에 의해 제작되어야 하고 현장에서의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한 역동적 장르인 공연이 영상이라는 매체에 의해 제약을 받을 것이라는 우려는 타당하다. 전통적인 공연의 존재론 자체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온라인 공연은 점점 많아지고 있고 라이브 공연을 보완하는 문화형식으로서가 아니라 독자적인 형식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영상공연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점점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문화적 잠재력을 높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극장이라는 닫혀있는 공간을 활짝 열어젖혀서 대중들의 문화적 감수성에 변화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필자는 공연예술의 기술적 진보가 아무리 진전된다고 해도 공연예술의 존재론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무리 조명과 음향기술, 영상의 질이 발전하더라도 현전이라는 공연의 기본적 요건, 관객과 배우와 극장이라는 물리적 존재의 현전은 필수적 조건이라고 믿어왔다. 아우스랜더가 주장하는 매개공연은 공연이 아니라는 주장은 지금도 강하다. 고양이를 찍은 사진은 고양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변화들, 특히 콘서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들은 현전이 절대적인 조건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다. 관객들은 원격현전(telepresence)에 의해 사이버상에 위치할 수도 있고 이들은 사이버상에서 가수들과 상호작용을 하기도 한다. 물리적 극장이 사라지고 사이버 극장이 생겨서 관객들은 동일공간이 아니라 글로벌하게 위치한다. 콘서트는 동시에 세계 각국의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시간적 동일성은 있지만 공간적 동일성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공간적 동일성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전세계 또는 사이버 공간을 하나의 공간으로 본다면 공간적 동일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글로벌 시대인 것이다. 이제 공연은 물리적 현전만이 전부가 아니라 사이버 상에서 이루어지는 현전도 현전으로 인정해야 할지 모른다.

앤디 워홀 : 마릴린 먼로( 출처 : wheremilan.com)
앤디 워홀 : 마릴린 먼로( 출처 : wheremilan.com)

 

플라톤은 『국가』에서 예술과 미메시스를 비판한다. 그는 침대를 예로 드는데, 침대라는 이데아가 있고 이를 모방하여 침대를 만드는 장인이 있고 이 침대를 다시 모방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것이다. 3중적 재현인 셈이고 이데아로부터는 멀리 떨어진 것이다. 그는 이를 시뮬라크르라고 하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의 허상을 비판한 사람은 플라톤만이 아니다.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 사회』의 첫머리에서 포이에르바하를 인용한다. ‘ 현대는 확실히 사실보다 이미지를, 원본보다 복사본을, 현실보다 표상을, 본질보다 가장을 선호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니엘 부어스틴도 『이미지의 환상』에서 이미지의 피상성을 비판하고 있고 보드리야르 역시 시뮬라크르를 비판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플라톤을 전복한다. 시뮬라크르야말로 창조성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렇게 시뮬라크르를 옹호한다. “ 그래서 플라톤주의의 타파는 다음을 의미한다. 시뮬라크르들을 기어오르게 하라. 그리고 도상들이나 복사물들 사이에서의 그들의 권리를 긍정하라. 이제 문제는 더 이상 본질 - 외관 또는 원본 - 복사본의 구분이 아니다. 이러한 구분은 표상의 세계내에서 작동한다. 문제는 이 세계내에서 전복을 시도하는 것. ‘우상들의 황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시뮬라크르는 퇴락한 복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원본과 복사본, 모델과 재생산을 동시에 부정하는 긍정적 잠재력을 숨기고 있다.”(『의미의 논리』, 「플라톤과 시뮬라크르」p417)

시뮬라크르는 이데아라는 절대적 존재에서 파생된 가짜가 아니라 오히려 진짜와 가짜들간의 자유로운 접합과 변용속에서 창조성이 움튼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를 자본주의 사회의 음습한 경제논리가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생각했지만 들뢰즈는 반대로 생각하였다. 원본이나 최초의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이들을 자유롭게 변용하여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시뮬라크르고 생성이라는 것이다. 앤디 워홀의 팝 아트는 시뮬라크르의 대표적인 예이다. 공연에서도 영상을 이용한 다양한 시뮬라크르가 생성되고 있다.

생성의 예술이자 관객과의 상호작용의 예술이다. 미술이나 문학과 달리 늘 살아 움직이고 변한다. 현전을 주요가치로 삼는 라이브의 미학적인 매력이 있고 텔레비전이나 영화나 인터넷으로 중계하는 영상공연은 문화의 민주화와 경제적 가치의 증진에 기여한다. 라이브와 온 라인 배척적인 관계가 아니라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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