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온라인 시대? 아직은 일러”
“공연 온라인 시대? 아직은 일러”
  • 이종찬 기자
  • 승인 2020.07.10 22: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럽 저명 춤비평가 토마스 한 내한강연
“비평가의 제1덕목은 열린 마음”
발제발언중인 토마스 한(Thomas Hahn)(tkwls
춤 비평가 토마스 한(Thomas Hahn)

[더프리뷰=서울] 이종찬 기자 =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중인 춤비평가 토마스 한(Thomas Hahn) 초청 <유럽의 춤비평문화> 강연이 지난 6월 30일 오후 마로니에공원 좋은공연안내센터 다목적홀에서 열렸다.

한국춤비평가협회(회장 채희완) 주최, 국제공연예술프로젝트(대표 장광열) 협력으로 열린 이날 행사에서 토마스 한은 간략한 유럽 무용비평사와 최근 비평 매체의 변화양상, 비평가의 사회적 지위 변화, 주목 받는 유럽 신예 안무가들의 창작경향 등을 소개한 뒤 방청객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이종호 한국춤비평가협회 상임운영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모임에서 토마스 한은 좋은 비평의 요소로 ‘열린 마음으로 쓸 것’을 가장 먼저 꼽았다. 춤과 미디어의 관계에 대해서는 “미래는 낙관적이다. 영상으로 감상하는 게 한계는 있지만 뭔가 새로운 장(場)이 출현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최근의 코로나 사태에 따른 공연의 온라인화에 대해서는 ‘아직 온라인화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한국 안무가들의 작품에 대해서는 “많이 보지 못해 뭐라고 말하기 어렵다”면서도 “지난 2008년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시댄스)의 초청으로 여러 나라 평론가들과 함께 한국의 현대무용 작품들을 보았는데 ’한국적 정체성‘이 불분명하다는 점에 대다수가 동의했었다”고 전했다.

이날 강연에는 무용평론가와 연구가, 블로거, 기획자 등 30여 명이 참석, 끝까지 진지하게 발표 내용을 들은 뒤 질의응답과 토론을 벌였다. 다음은 토마스 한의 발제문 전문.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유럽의 춤비평, 특히 미래의 춤비평에 대해 발제를 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발제 내용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유럽의 현재 상황은 이전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변하지 않는 상태는 춤비평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합니다. 몇 가지 사례를 상기해 보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오래 전, 저는 콜롬비아의 메데인(Medellín)에서 열린 축제에 초청 받아 콘퍼런스를 하기로 돼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콘퍼런스 주제를 몇 가지 제안했지만, 축제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셔서 ‘춤비평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이곳에는 춤비평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간단한 얘기를 해도 될까 놀랐습니다. 하지만 사실, 전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제가 그 질문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축제 감독의 질문은 현실의 간극을 강조하는 듯했습니다. 볼 수 있는 무용이 거의 없는 곳에서 어떻게 춤비평가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언제 당신은 스스로를 춤비평가라고 할 수 있는가?

역사상 최초의 춤비평가는 <지젤>의 줄거리를 쓴 테오필 고티에(Théophile Gautier)였습니다. 그는 1837년 무용에 대해 글을 쓰기 전에도 이미 시인이자 소설가였고 동시에 발레 대본을 쓰기 시작했는데, 물론 그 중 <지젤>이 가장 유명합니다. 고티에는 당시 춤을 존중하고 춤에 관심이 많았던 유일한 비평가였습니다. 당시 발레는 음악과 삽화의 스토리텔링 기법으로만 여겨졌었습니다.

이는 20세기에 들어서야 바뀌게 됩니다. 19세기에는 아직 무용이 독립적인 예술형태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한 장르의 춤비평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비평은 음악비평 또는 연극비평에서 파생된 문학의 한 종류였습니다.

춤비평은 20세기에 들어서야 등장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때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가 세운 발레 뤼스(Les Ballets Russes)는 낭만발레에 대한 비평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바슬라프 니진스키(Vaslav Nijinsky), 롤프 드 마레(Rolf de Maré)의 스웨덴발레단(Les Ballets Suédois),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마리 비그만(Mary Wigman), 피나 바우쉬(Pina Bausch) 등이 등장하면서 가능해졌습니다.

진정한 춤비평은 다양한 스타일이 있고, 대조가 있으며, 논쟁이 있을 때 가능해집니다. 이는 무용이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고 때로는 사회에 참여하기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0세기의 춤비평은 고티에보다 더 유명한 장 콕토(Jean Cocteau),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스테판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같은 비평가들이 등장하며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그러나 춤비평이 그들의 중심 작업은 아니었으므로 춤비평가라는 직업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유럽과 미국에서는 아마도 20세기가 춤비평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표현주의, 모던 댄스, 컨템포러리 댄스, 힙합 등 그렇게나 많은 새로운 무용의 형태가 이전에는 없었습니다. 또 20세기에는 아침에 신문을 사고, 주말에는 큰 신문을 사는 것이 일상인 시대였습니다. 그렇게 춤비평은 직업이 되었습니다.

21세기에 들어 춤은 계속해서 재창조되었지만 춤비평은 더욱 재창조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술에는 거의 전투가 없습니다. 최근 가장 큰 전투라 한다면 힙합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비보이들은 빠르고 쉽게 그 전투를 이겨냈습니다. 90년대부터 전 세계가 무용공연으로 넘쳐나면서 비평은 거의 관객을 위한 서비스의 한 형태가 되기까지 했습니다. 당신은 입장권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 파리, 런던, 뉴욕은 물론 유럽의 작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선택권이 주어지게 되었고, 어떤 공연을 볼 것인지에 대한 정보는 매우 유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물론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무용잡지에서는 ‘담론’이 필요했습니다. 무용잡지는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그 가능성은 줄어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비평은 인터넷으로 빠르게 옮겨갔고 이러한 변화로 인해 경제적 요소 또한 이동했으며 변화의 방식이 호의적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누구든지 블로그에 춤에 대해 쓸 수 있는데 누가 비평을 읽기 위해 돈을 지불하려 할까요? 한편 블로그에 쓰여진 글은 좋은 글이 아니며 심지어 꽤 잘 알려진 사람이 쓸 때에도 엉망일 때가 있습니다. 주변에 패스트푸드가 많은 것이죠. 비평의 수위가 더 높아지더라도 일간신문에 게재되지 않는 한 사람들이 인터넷 비평에 돈을 지불하게 만들기는 어려워졌습니다.

강연회 경청중인 참가자들(사진=국제무용협회)
강연회 청중들

1) 지위/춤비평가 되기

이런 상황에서 춤비평가가 무엇인지를 말하기는 점점 더 어렵습니다. 제 아내는 제게 몇 번이고 묻습니다. 당신은 춤비평가인가요, 아니면 무용기자인가요? 아마도 한국에서는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는 높은 지위인가 봅니다. 하지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연구와 보도가 더 많은 실용적인 일을 이뤄낼 수만 있다면 비평만큼 높게 평가합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일의 질에 따라 결정됩니다.

저는 이따금 프랑스나 몬테카를로의 무용공연 리뷰를 기고했던 독일 일간지 <디 벨트 Die Welt>와의 대화를 기억합니다. 아마 6, 7년 전이었던 것 같은데 저는 그들에게 리뷰를 쓰겠다고 먼저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제게 말하길 “뭐든지 쓰십시오. 하지만 창작에 관한 이야기여야 합니다. 감정을 담은 개인적인 이야기여야 합니다. 인터뷰 같은 걸 하든지 해주세요. 리뷰는 하지 말아주세요! 그 누구도 리뷰를 읽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비평가의 영향력은 분명히 감소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른 채널들로 쏠렸습니다.

당시 언론은 완전히 뉴스를 인터넷으로 옮기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사들은 읽기 쉬워야 했습니다. 언론은 무용비평에 대한 일반 대중의 관심이 진짜인지 아니면 언론에 의해 추측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 관심이 사라짐에 따라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인쇄된 신문을 읽을 때와 스크린에서 신문을 읽을 때의 습관이 똑같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디 벨트>는 아직도 독일의 대형 연극이나 오페라에 대한 비평을 게재하지만 춤비평은 거의 없습니다. 그 신문은 오페라, 클래식 음악, 무용에 대해 비평을 쓰는 단 한 명의 비평가에게만 월급을 줍니다. 즉, 다시 19세기로 돌아온 셈입니다. 다행히도 이 비평가는 무용을 존중하고 글도 잘 쓰고 계십니다.

또 다른 경험이 있습니다. 무용지 <탄츠 tanz>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3년 전, 안 테레사 드 케에르스매커(Anne Teresa de Keersmaeker)가 파리 오페라에서 작품을 했습니다. 그녀는 모차르트의 <코지 판 투테 Così fan Tutte>를 자기 무용단의 무용수들과 오페라단 성악가들과 함께 창작했습니다. 굉장히 흥미로웠지만 제가 프랑스 파리에서 통신원으로 근무했던 독일의 <탄츠> 매거진은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기로 했습니다. 오페라 비평가들에게 비평을 쓰게 한 것입니다.

편집장은 다른 유명한 잡지도 운영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결국 오페라 평론가가 <탄츠>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는 ‘원숭이춤 monkey dance’이라는 단어를 안 테레사의 작품 비평에 사용했고, 가장 유명한 무용비평지가 그것을 그대로 인쇄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글쎄요… 다시는 이렇게 일하지 않겠어요”라고 했지만 이 사건은 19세기에 무용비평이 어떻게 이루어졌었는지를 분명히 상기시켜 줍니다.

한 가지는 절대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무용평론가가 되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교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당신은 젊은 작가들을 위한 워크숍에 참가할 수 있고, 또 개인적으로 작문 스타일을 다듬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방법은 공연을 많이 보는 것입니다. 오페라가 아닌 무용공연말입니다. 예술에 대한 관심과 춤에 대한 열정, 글쓰기 재능이 있다면 춤비평가가 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연극평론을 먼저 썼고, 말이 되는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많은 무용공연을 보면서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2) 춤비평가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뉴스와 보도가 거의 온라인 출판물로 옮겨가면서, 춤비평가와 블로거, 유투버 같은 이들을 차별화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 <당세 Danser>라는 큰 무용잡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 그 잡지는 더 이상 제작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는 함께 일하던 기자들과 함께 온라인 매거진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저는 이 온라인 잡지에 한 달에 10-15편의 글을 씁니다. 가끔 무용계의 누군가는 제게 말합니다. “당신의 블로그에서 기사를 읽었어요!” 그러면 저는 그 사람에게 “제 블로그가 아니고, 매거진이라고요!”하면서 설명하려 노력합니다. 일반인들에게 그 차이를 이해시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단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글의 품질을 지키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적어도 인터넷에서는 글의 깊이가 아니라 클릭수를 최대로 하는 논리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제가 “나는 춤비평가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무용계에서 인식된 지위 정도만을 언급할 수 있을 뿐 입니다. 물론 저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춤비평가협회의 회원입니다만 무용계 현장 밖의 사람들은 그런 것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전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한 신문사에서 월급을 받는 춤비평가입니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지났습니다. 프랑스 언론의 상황은 매우 분명합니다. 신문사는 더 이상 월급을 줄 수 없습니다. 적어도 문화기자들에게는 그렇습니다. 오늘날 가장 유명한 춤비평가들도 프리랜서들입니다.

춤비평가의 지위는 오직 완성된 작업과 역량에 대한 비공식적 인정에 기초하여 존재합니다.

- 비평가들에게 리뷰를 의뢰하거나 그들을 심사위원으로 초청하는 축제 감독들로부터의 인정
- 시즌 브로셔나 이브닝 프로그램 북에 글을 쓰도록 의뢰하는 극장들로부터의 인정
- 책에 대한 기고를 요청하는 편집장들로부터의 인정
- 홍보용 프리젠테이션 작성에 리뷰가 필요한 무용단으로부터의 인정
- 프리젠테이션, 또는 토론중재를 요청하는 기관으로부터의 인정
- 보조금의 일부로 글을 쓰도록 요청하는 정부기관으로부터의 인정
- 창작물에 대한 리뷰를 작성해달라고 요청하는 예술단체로부터의 인정

즉, 춤비평가가 된다는 것은

- 아직도 무용단들에게는 리뷰를 받기 위해 매우 유용하다
- 하나의 조건이지, 더 이상 공식 직업이 될 수 없다.
- 춤에 열정을 쏟아야 한다.

발언중인 토마스 한과 통역을 맡은 이현민(시댄스)(사진=국제무용협회)
강연중인 토마스 한

3) 경제

그렇다면 춤비평가는 어디에서 돈을 벌까요? 비평으로만 살기에는 충분치 않습니다. 당신이 월급 받는 자리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기성세대 중 한 명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당신은 이제 은퇴가 임박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다른 종류의 출판업, 다른 주제, 또는 다른 장르에서 찾아야 합니다. 아니면 정부로부터 자금을 받아 돈을 잘 줄 수 있는 극장에서 일할 기회를 얻어야 합니다. 또 운 좋게 그런 기회를 얻는다 해도 그것은 엄청난 수의 짧은 글들을 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아직 안무가들은 리허설조차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안무가의 의도에 대해서나 줄줄이 써야 할 것입니다. 나는 파리시립극장(Théâtre de la Ville de Paris)과 다른 극장들에서 시즌 브로셔를 준비할 때 이따금 글을 씁니다. 원고를 준비하는 데 몇 달이 걸리고 그것이 돈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춤비평가들은 차를 살 수 없다는 뜻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무용이 사회의 현재와 미래 상황과 얼마나 강하게 연결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안무가들이 사회에 적절한 질문을 하고 있는지, 그들이 관심을 끌 수 있는 적절한 언어를 찾는지 여부에 따라 상황은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비평가들도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적절한 언어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무용가의 사고와 연구는 항상 비평가들의 사고보다 앞서야 하기 때문에 쉽지만은 않습니다. 즉, 비평가들이 안무가들의 언어를 묘사하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 무용은 흥미로워진다는 것입니다. 19세기에는 정확히 그랬습니다. 그리고 또 이것은 오늘과 같은 경우입니다.

4) 새로운 안무개발

춤과 가상현실의 만남, 그 새로운 현실에 대해 조금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앞으로 VR를 사용하는 인터랙티브 공연과 관객참여형 공연은 관객과 공간, 예술가의 관계를 완전히 뒤집을 것입니다. 한국 안무가들이 이 분야에서 조금 더 발전해 있다 하더라도 놀랍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 분야에서는 유럽이 그나마 목소리를 내고 있는 편인데, 가령 스위스의 안무가 질 조뱅(Gilles Jobin)의 작품 <VR_I>에서는 다섯 명의 관객이 VR 헤드셋을 쓰고 가상세계의 집, 도시, 풍경을 탐험합니다. 그들은 한정된 공간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본인들을 아바타로 볼 수 있고, 그 가상의 세계에서 무용수들을 만납니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 지 용어조차도 없습니다. 공연도 아니고, 영화도 아니고, 비디오게임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 다섯 명의 관객은 진짜 관객이라고 하기도 어렵고, 참가자, 방문자도 아닙니다. 원할 때 말을 할 수 있고, 춤을 출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무용수라도 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작품은 어떻게 비평을 할 수 있을까요? 먼저 그 비평의 툴(tool)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툴이 마침내 준비되었을 때, 예술가들은 확장된 현실세계인 인공지능(AI) 기술로 넘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평은 무대를 넘어서서 무용과 사회변화를 이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진정한 비평은 무용이 아니라 사회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5) 에코페미니즘

어떤 무용작품들이 현재 유럽에서 가장 늘어나고 있는가 질문을 해보면, 여성들로부터 시작되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여성 안무가들이 현재 에코 페미니스트 접근법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관객과 공연자는 한 장소로 이동하고 원형으로 둘러앉습니다. 관객들은 이따금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합니다. 즉, 그들은 일정한 의식에 참여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작업들은 여성과 그들의 힘, 그들의 자유, 성, 월경까지의 주제를 논하는 작업들입니다. 그들은 자연의학과 신체에 대한 지식을 가진 여성들로서 중세시대의 마녀희생 의식처럼 사람들에게 공공의 적으로 묘사되어 온 마녀의 모습을 상기시키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안무가들은 물론 여성들입니다. 그들은 페미니즘과 평등주의적 접근법과의 연관성을 이론화한 정치적인 작가들로부터 영감을 얻기도 하며 특히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멀티스피시즘’이라 불리기도 하죠.

*(멀티스피시즘 Multi-specism, 다종주의(多種主義): 여성에게 편견을 가진 성차별주의(sexism)가 철폐된 것처럼 동물을 차별하는 '종차별주의'(specism) 역시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 멀티스피시즘은 동물 및 기계, 심지어는 강과 물에까지 확장된 개념으로, 이 세계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이 한데 어울린 'multi-species world'이다.)

미국 작가 스타호크(Starhawk) 또는 도나 해러웨이 (Donna Haraway)같은 운동가들은 젠더 연구의 선구자이자 페미니스트 작가들입니다. 1970년 첫 번째 콘셉트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아나키스트인 프랑수아즈 도본 (Françoise d’Eaubonne)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날 새로운 것은 이러한 아이디어들이 유럽의 안무창작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예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1) 니나 상테스(Nina Santes, 프랑스): <처녀막 찬가 Hymen Hymne> (2018)

-5명의 무용수/가수 (여성 4, 남성 1). 관객은 한 곳으로 몰려 배치되어 있고, 처음에는 이동을 하다가 나중에 자리에 앉도록 함
-움직임, 사운드스케이프, 라이브 창법으로 샤머니즘의 에너지 창출 모색
-왕이나 족장의 영결식 같이 독한 남성성을 증발시켜 버리는 것으로 마무리

2) 우나 도허티(Oona Doherty, 북아일랜드): <레이디 마그마 Lady Magma> (2019)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출신의 젊고 급진적인 여성 안무가
-첫 솔로작품과 군무작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옴
-5명의 여성 퍼포머, 친밀한 공간
-켈트족의 의식, 주술의식, 마녀, 섹슈얼리티
-관객은 극장좌석이나 극장의 바닥 등 퍼포머와 가까운 곳에서 관람
-여성 신체의 해방선언

제가 이 작품들의 비평을 작성할 때,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합니다. 이 작품들은 담론이 안무의 재료와 작품의 구성보다 우선시되고 주제에 대한 접근법이 꽤 교훈적이기 때문에 위험성이 높습니다. 특히 이 안무가들은 관객을 위해 공간을 개방하는 경험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창작물들은 결국 가능한 한 무대 앞쪽에서 공연되는 게 우선일 수 밖에 없습니다.

3) 슈테파니 티어슈 (Stephanie Thiersch, 독일): <군도 Archipel> (2020)

-일본 건축가 후지모토 소우(Sou Fujimoto)와의 협력으로 무용수와 뮤지션들을 위해 만든 작품
-뮤지션, 가수, 무용수 간의 자유롭고 비위계적인 새로운 관계 창출 모색
-인간과 행성의 균형 잡힌 관계를 기대할 수 있다
-독일 루르 트리엔날레(Ruhrtriennale)에서 초연일정이 잡혔으나 코로나 바이러스로 취소됨
-담론이 아닌 예술적 은유에서 우주, 음악, 춤에 집중하기 때문에 매우 유망한 프로젝트

4) 올리비아 그랑빌(Olivia Grandville, 프랑스): <서부에서 A l’Ouest> (2018)

-여성 퍼포머 5명, 이글루 1개
-안무가는 캐나다와 노스다코타를 여행했다
-미국 원주민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춤과 의식을 연구했다
-춤은 그녀가 본 것에서 영감을 받지만 본래의 춤은 따라하지 않으려 한다
-독창적인 춤사위의 추상화와 창작성이 우수하다

이렇게 여성 안무가들의 접근은 사실 다양한 미학과 접근법을 만날 수 있는 안무경향에 있어서 훨씬 더 큰 권한을 부여하는 여성운동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번역 장수혜, 감수 이종호)

참석자들 기념촬영(사진=국제무용협회)
참석자들 기념촬영(사진제공=국제무용협회 한국본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