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는 수줍고도 마음 아픈 것"
"창조는 수줍고도 마음 아픈 것"
  • 이종찬 기자
  • 승인 2020.07.18 23: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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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성에 대한 다섯 가지 명제
Photo by Ameen Fahmy on Unsplash
창조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c)Ameen Fahmy on Unsplash

[더프리뷰=서울] 이종찬 기자 = '예술'이란 말에는 때로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어렵고 두꺼운 책을 (교양을 위해) 읽어 줘야 한다든가, 뉴욕의 최첨단 미술전시회를 보러 간다든가, 대사의 섬세한 행간을 집중해 따라가야 하는 유럽 영화를 본다든가 하는 부담스러움과 함께 어쩐지 허세같은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5분 동기부여>의 저자이자 미국 TV 방송작가인 에릭 카플란(Eric Kaplan, 1971-)에 의하면 예술이란 창조성이 스며 있는 인생의 한 모습일 뿐이며 예술이 없으면 우리는 그저 움직여 다니기만 하는 동물일 뿐이라고 말한다. 또한 창조성이란 사랑과 같아서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서 창조성에 대해 나름의 명제를 제시했다.

1. 창조성은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든다.

뭔가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세계는 새롭게 보인다. 중세에 길은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곳이었고 바다는 파란색으로 끝없이 펼쳐진 무서운 곳이었다. 하지만 한 시인이 바다를 ‘고래의 길(whale road)'이라 부르자 독자들은 바다를 새롭게 보게 됐다. 땅에 발 붙이고 사는 인간에게 바다는 분명 장애물이지만 고래에게는 그저 길인 것이다.

2. 창조성은 수줍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창조성이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란 사실을 잊기 쉽다. 그것이 성공하면 이 새로운 것은 명확해 보이고 마치 원래 있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고래의 길’을 말했을 때 ‘고래’와 ‘길’은 원래 있던 것이다. 사람들은 “물론이지! 바다는 우리에겐 장벽이지만 고래에겐 아니지. 거기서 헤엄도 치는데.”라고 한다. ‘고래의 길’을 말한 사람은 원래 있는 것, 말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단지 그가 말하기 전까지는 말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창조성이란 문제해결 도구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만 해결하는 게 아니라 풀어야 할 새 문제를 만들거나 발견하기도 한다. 수 백 년 전, 누군가 바다를 고래의 길이라고 말하기 전까진 바다라는 단어가 새로운 의미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창조성은 늘 스스로를 감춘다. 스스로 사라진다.

과학에서도 창조성이란 근본적인 것이다. 흔히 우리는 과학이란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가’에 대한 일종의 유일한 진술, 즉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라면 과학자들은 어떻게 창조적이 될 수 있을까? 과학자들은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수동적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서술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은 전혀 아니다. 사실 우리는 그것을 창조한다. 뉴턴이 그의 운동 제 2법칙(힘은 질량 곱하기 가속도, f=ma)을 제시했을 때 그는 단지 ‘고래의 길’을 말한 사람처럼 창조적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고래의 길’과 마찬가지로 뉴턴의 창조성은 그의 창조적 행위에 의해 가려진다. 즉 그의 공식은 뭔가 이미 있던 것을 가리킨 것이지만, 또한 아니기도 했다. 우리의 창조가 성공적일수록 우리가 창조한 것은 창조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창조성은 늘 자신을 감춘다.

3. 창조성은 삶에 스며든다.

창조성은 우리 삶에 대양(ocean)의 물처럼 모래성의 알갱이들 사이를 채운다. 이 순간과 다음 순간, 이 행위와 다음 행위, 이 세계와 다음 세계 사이의 간극을 채운다. 결과적으로 당신은 무엇이든 아주 많이 할 때 창조적이 된다. 즉 직장으로 걸어가는 방식, 슬픔에 반응하는 방식에 따라, 또한 친구를 사귀고, 아침에 일어나 몸을 움직일 때, 맑은 날 콧노래를 부를 때 당신은 창조적이 된다.

TV 방송작가 에릭 카플란(c)Gage Skidmore(사진=wiki commons)
TV 방송작가 에릭 카플란(c)Gage Skidmore(사진=wiki commons)

우리는 늘 창조적 행위를 통해 우리의 삶을 재창조한다. 창조성이란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치 물이 있어야 모래성을 세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이 없으면 모래성은 무너진다. 완전히 일상화된, 비창조적인 삶은 전혀 인생이 아니다.

4. 창조성은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창조성이란 본래가 모험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창조는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다. 왜 모두가 늘 창조적이지 않지? 왜 사람들은 베끼고 표절하는가? 왜 그들은 창조하려 할 때 룰을 따르는 걸까? 왜 늘 영웅은 잘 생기거나 노래 가사는 운을 맞춰 만들지? 왜 전에 만든 작품을 따라할까?”

창조성이란 실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든 것이 성공적일지 미리 알 수 있다면 당신은 창조적이 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성공하지 못한다면 마음이 상할 것이다. 당신은 바보처럼 보일 것이며 나아가 스스로를 바보처럼 생각할 것이다. 대략 난감한 일이다. 그러나 고통과 실패를 감수하지 않는다면 창조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 이는 진실한 사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5. 창조성은 일종의 사랑이다.

그래서 마음이 아픈 것이며 동시에 창조가 세계를 살아있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창조적일 때 당신은 사물을 새롭고 신선하게 한다. 당신이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다.

창조는 사랑과 같다.(c)Nick Fewings on Unsplash
창조는 사랑과 같다.(c)Nick Fewings on Unsplash

이는 또한 왜 창조성이 수줍은 것인지, 왜 스스로 숨는지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냉담하게 도식화되기를 원치 않는다. 누군가 “너는 긴 생머리 여자만 좋아하네”라거나 혹은 “넌 엄마 닮은 사람만 찾는 것 같아”라고 말하면 듣기 싫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누구를 혹은 무엇을 사랑하는지 알아내어 우리를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영 기분이 별로이다. 이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사랑 자체에 대한 모욕인 것이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이들이 우리가 사랑하는 방식을 이용해 우릴 이용하길 원치 않는 것이다.

최선의 것이 붕괴되는 것이 최악이다. 사랑은 우리 인생의 최상의 것이며 우리의 전 존재에 스며든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 사용되거나 오해될 때 그 결과는 끔찍하다. 창조성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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