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15 - 가격인상이 부른 티켓폭동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15 - 가격인상이 부른 티켓폭동
  • 조복행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0.07.3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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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의 가격탄력성

공연예술은 가격탄력성이 작다는 이론이 있다. 가격이 내려가도 수요가 크게 늘지 않고 오른다고 해도 수요가 크게 줄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공연예술의 소비는 가격에 영향을 받기보다는 취향에 더 좌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과연 옳을까? 필자의 생각에는 30%는 맞고 70%는 틀린다. 돈많은 관객들에게는 티켓가격이 크게 문제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관객들에게는 가격에 매우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취향보다도 경제력이 공연소비에 더 영향을 준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실제로 많은 통계들은 공연소비자들이 티켓가격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연관람의 가장 큰 장애요인이 시간부족과 경제적 문제, 높은 티켓가격 때문이라는 결과가 이를 증거한다. 되도록 싼 값에 사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소비자들은 할인티켓 부스(브로드웨이의 경우 TKTS)에 몰리고, 마케팅 정책으로서의 가격할인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초대권을 얻으려고 로비를 한다.

공연흥행의 어려운 점 중의 하나는 티켓가격을 마음대로 올릴 수 없다는 점이다. 공연제작비는 지속적으로 오르기 때문에 티켓가격을 올려야 함에도 이를 마음대로 올릴 수 없는 것은 관객들의 가격 민감성과 공연의 공공재적 성격 때문이다. 티켓가격을 둘러싼 소비자들의 민감성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티켓마스터

티켓마스터 로고

 

미국에서 가장 큰 티켓 판매회사는 티켓마스터로 2019년의 판매총액은 300억 달러, 약 36조에 달했고 이익은 18억 달러 정도로 약 2조원에 달한다는 통계가 있다. (뉴욕타임즈, 2020년 4월 8일). 이는 거대한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점유율 83%에 해당하는 것으로 거의 반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기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티켓마스터와 몇몇 티켓판매회사의 비윤리적 사업태도가 미국민들의 불만의 대상이 되고 있다. 티켓마스터는 미국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기업들 중 하나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미국의 공연티켓 가격은 꽤 비싸다. 미국의 물가와 아티스트의 수준, 공연제작비 등을 고려하여 결정하는 것이지만 생각보다 훨씬 비싸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여기에는 매우 불합리한 다른 요인이 숨어있다. 티켓가격과 관련하여 미국의 독특한 특징은 공연티켓에 표기된 가격이 최종 가격이 아니라는 점이다. 표기가격에 추가비용이 붙는다. 이는 공연주최사가 정한 가격에 티켓판매회사가 붙이는 추가수수료 때문이다. 마치 식당에서 음식값에 10-20%의 팁을 주는 미국문화를 연상케 한다.

티켓에 표기된 가격이 100달러라면 우리의 경우에는 그 가격만 내고 산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여기에 각종 비용이 추가된다. 서비스비(service charge) 또는 편의제공비(convenience charge), 시설사용료(facility charge), 주문처리비(order processing fee), 홍보비(promoting fee), 송달비(delivery charge) 등의 각종 비용이 추가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윌콜(will call) 차지라는 비용이 추가되기도 하는데, 이는 전화로 예약하고 현장에서 찾을 때 내는 비용이다. 이 비용이 너무 불합리하여 못내겠다고 하니까 면제받은 경험도 있다. 티켓마스터 다음으로 큰 회사는 이베이 산하의 스텁허브인데, 작년도 판매액은 약 50억 달라, 약 6조원이었다. 이 회사의 추가수수료중에는 업로딩비(Fulfilment Fee)라는 항목이 있는데 이는 티켓을 온라인에 업로딩하는 비용이다. 티켓마스터의 서비스 차지에 해당한다. 이들 중에서 2-3 가지 항목의 비용을 추가하는 것인데, 전체 추가비용은 20- 30% 정도다. 2018년에 나온 통계로는 평균 27%의 비용이 추가된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최종 가격이 나오기 전까지는 정확한 가격을 알 수가 없다. 미국관객들은 이를 사기 상술이라고 비판한다. 어떻게 가격이 사전에 확정되지 않고, 이런 저런 수수료를 붙인 다음에야 확정되는가? 왜 그렇게 수수료는 높은가?

이렇게 되니 100달러 짜리 티켓이라면 130달러 정도에 사게 된다. 필자가 실제로 8년 전에 경험한 사례인데, <런던 심포니>의 연주회 티켓가격은 표기가격이 35불이었는데 시설사용료 3달러, 서비스 차지 7달러를 추가하여 총 45 달러를 지불하였다. 약 30% 정도의 비용이 추가된 것이다.

티켓마스터는 1976년에 아리조나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이 설립한 티켓판매회사다. 수작업으로 티켓을 발행하고 판매하던 시절의 티켓판매는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우선 인쇄된 실물티켓의 앞뒤에 공연장과 주최사가 교차검인을 한다. 여기에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한 두달의 장기공연일 경우 수만 장의 티켓에 검인을 하는 일을 상상해보라. 검인후 주최측의 티켓담당자가 티켓을 예매처에 배포하면 관객은 예매처를 찾아 자신이 원하는 좌석번호를 확인하고 티켓을 구입한다. 만약 자신이 원하는 티켓이 해당 예매처에 없으면 어느 예매처에 있는지 주최사에 확인한 후에 다시 그 예매처로 가서 구입해야 했다. 공연이 끝난 후에는 주최사와 티켓예매처가 판매대금을 정산해야 한다. 이런 작업들은 관객이나 주최측에 매우 비효율적이고 번거로운 일이었다. 이런 비효율을 해결한 것이 온라인 티켓이고 이를 처음 개발한 회사가 티켓마스터다. 온라인 티켓은 1990년대부터 활성화되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어 나갔고 티켓마스터는 이 시장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티켓마스터는 공연장이나 운동장 등 티켓을 판매하는 공간과 약정하여 티켓마스터를 통하여 티켓을 팔도록 하는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이 약정이 장기간의 독점계약이었다. 다른 회사에서는 그 공간에 진입하여 티켓을 팔 수 없었던 것이다. <펄 잼, Pearl Jam>이라는 락 밴드는 이런 장기독점계약이 독점금지를 규정한 셔먼법에 저촉되고 부당한 수수료를 추가하였다고 하여 티켓마스터를 고발하였다. 펄 잼은 1990년 시애틀에서 결성되어 지금도 활동중에 있다. 1994년도에 그들의 공연티켓에 서비스 차지가 추가된 것을 알고 티켓마스터에 항의하였다. 펄 잼은 티켓마스터를 고소하였고, 이 문제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펄 잼은 스스로 ETM 엔터테인먼트라는 티켓판매회사를 설립하여 독자적인 영업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공연장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티켓판매가 쉬울 리가 없었다.

그리고 1995년 법원은 티켓마스터의 손을 들어주었다. 펄 잼은 그 뒤에도 동료 아티스트들에게 티켓마스터와 계약을 맺은 극장을 사용하지 말 것을 호소하면서 같이 저항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동료들의 반응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관객들로부터는 티켓마스터를 거부함으로써 티켓구입이 어렵다는 불만이 쏟아져나왔다. 펄 잼은 다시 티켓마스터를 사용하였고, 다시 정상적으로 공연할 수 있게 되었다.

관객들로부터의 항의는 계속되고 있다. 2003년에는 실제로 비용이 들지도 않은 주문처리비(Order processing fee)와 배달비(UPS delivery charge)를 추가하였다고 해서 집단소송(class action)을 당했다. 그 결과 법원은 1999년부터 2013년까지 티켓마스터로부터 티켓을 구입한 5천만 명에게 4억 달러를 변상할 것을 명령하였다. 현금배상이 아니라 바우처나 무료입장권등으로 보상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티켓마스터가 겉으로는 암표상(scalper)을 비난하면서도 은밀히 암표상들과 거래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아마존에서도 수수료 인하를 내걸고 티켓판매를 시작했지만 아직은 티켓마스터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티켓마스터는 2010년에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기업인 라이브네이션과 합병하여 <라이브네이션 엔터테인먼트>라는 이름으로 몸집을 더 키워나가고 있다. 작은 티켓판매회사들을 사들였고, 사업도 글로벌하게 확장하고 있다.

그러나 티켓마스터도 최근에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이다. 공연의 취소나 연기로 예매관객들이 돈이 묶이자 반환을 요구하며 또 다시 집단소송한다는 움직임도 있고, 수수료 수입이 전혀 발생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공연산업 전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티켓가격 폭동

- 드루리 레인의 티켓가격폭동

지금처럼 공연산업의 직무가 세분화되지 않았던 과거에는 배우중에서 우두머리가 막강한 권한과 의무를 동시에 지고 있었다. 가부키에서 배우대표를 자가시라(座頭)라고 부르는데, 자가시라는 연출과 극장경영 등 극단운영에 관한 전반적 일을 담당했다. 영국에서도 16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액터 매니저(Actor Manager)라는 제도가 있었다. 자가시라처럼 배우가 극장경영자를 겸하는 제도였다. 세익스피어도 액터 매니저로 볼 수 있는데 그는 배우와 연출가, 경영자, 작가, 투자자 등의 많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액터 매니저 제도는 미국으로도 건너가서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유명한 배우들은 유능한 경영자로서도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는데, 데이비드 개릭도 그런 액터 매니저였다.

개릭에 대해서는 이미 「세익스피어 숭배」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익스피어를 세계적인 문호로 만든 세익스피어 전문배우이자 드루리 레인의 경영자로서 극장의 재정을 안정시킨 유능한 경영자이기도 했다. 그는 극장의 개혁과 나아가서는 연극의 개혁도 시도하였다. 백스테이지 출입을 금하였고, 무대위 객석도 폐지하였다. 무대위 객석은 프랑스와 영국에서, 귀족들에게 제공된 좌석이었는데 이는 배우들의 연기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고 관객들의 시야를 방해하여 원성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개릭은 또한 조명의 혁신을 시도하였고 필립 라우터버그(Loutherbourg)와 손잡고 무대세트의 개혁을 도모하였다. 당시 영국에서는 1660년 왕정복고 후에 찰스 2세가 허가한 두 개의 칙허극장( patent theatre)만이 정통연극을 공연할 수 있었다. 이들은 드루리 레인과 코벤트 가든으로 왕이 허가한 극장이라는 뜻으로 왕립 드루리 레인극장 (Theatre Royal,Drury lane), 왕립 코벤트 가든극장(Theatre Roayl, Covent Garden)으로 불리웠다. 이 두 극장은 영국을 대표하는 왕립극장으로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지만 협력을 하기도 하고 필요할 때에는 담합을 하기도 했다. 두 극장은 티켓가격의 인상을 시도하였다.

당시 영국 극장에서는 3막 이후에 반값입장이 가능했다. 가난한 관객들이 주로 이용하였다. 1763년에 개릭은 반값입장제도를 폐지하고 언제 입장하든 모든 관객에게 제 값을 받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관객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코벤트 가든에서도 관객들이 술렁거렸지만 극장장 존 비어드가 재빨리 관객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개릭은 티켓가격의 조정을 관철하려고 하였고, 관객들은 데모를 하기 시작했다. 폭동의 중심에는 평론가 타데우스 피츠패트릭(Thaddeus Fitzpatrick)이 있었다. 그는 인쇄물로, 때로는 희곡 작품으로 이를 비판했다. 전단이 커피하우스와 술집 그리고 공공장소에 배포되었고 이는 폭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관객들은 극장장의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갑자기 흥분한 일부 군중들이 벤치와 세트를 부수기 시작했고, 경비원들이 출동해 시위대를 해산했다. 한 달후 , 이번에는 코벤트 가든의 비어드가 가격의 조정을 시도하였다. 그러자 다시 반발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비어드도 완강했다. 시민들은 분노하여 무대를 부수고 오페라는 중단되었다. 끝내 비어드가 들어주지 않자 이번에는 상들리에와 갤러리를 지탱하고 있던 기둥을 부수었다. 이 폭동으로 인해 2천 파운드의 손실을 입었다. 여종업원의 임금이 4파운드이던 시절이었다. 비어드의 주장은 오페라 제작비의 급등으로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3월에 개릭이 비어드를 찾아갔다. 비어드에게 제값 받기를 계속할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비어드는 포기하겠다고 답했고 개릭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티켓가격인상 시도는 간헐적으로 있어 왔다. 1744년에도 있었지만 실패했고 1763년, 그리고 1792년에도 실패했다.

 

과거가격 폭동

과거가격 (OP)폭동 (출처 : 위키피디아)
과거가격 (OP)폭동 (출처 : 위키피디아)

 

1808년 9월 30일 새벽, 코벤트 가든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소방관이 도착해서 진화를 시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날 30명이 사망한다. 모든 의상과 세트, 대본이 소실되었고 헨델의 악보도 불에 타고 말았다. 코벤트 가든의 화재는 영국 공연계로서는 커다란 재앙이었다. 손실액은 25만 파운드에 달했다. 오늘날의 파운드화는 그 때의 약 130배 정도라고 여겨지는데, 현재 가격으로는 약 550억원에 달하는 큰 손실이었다. 귀족들의 후원과 개인박스석 판매 등으로 76,000파운드를 조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건축비는 급격하게 늘어났다. 땅을 소유하고 있던 베드포드 공작은 높은 가격을 제시하였고 기타 예상치 못한 건축비용이 증가하였다. 옛 극장의 부채를 포함하여 약 164,000파운드의 손실이 예상되었다. 켐블은 티켓가격 인상을 단행하였다. 새로운 박스석의 증설과 티켓가격 인상으로 시즌당 40,000파운드의 수입증가가 예상되었다. 박스석은 6실링에서 7실링으로 , 피트석(1층석)은 3실링 6펜스에서 4실링으로 인상하였다. 켐블이 주장한 것처럼 코벤트 가든의 역사에서 18세기 초 이후 처음 있는 가격인상이었다.

새로운 코벤트 가든극장은 1809년 9월 18일, 화재가 발생한 지 1년만에 재개관하였다. 그러나 가격인상에 분노한 관객들이 반발하였다. 이후 67일 동안 공연중에 야유하고 소리지르고 싸우고 아크로바틱을 동반한 데모가 있었다. 이를 과거가격 폭동(Old Price Riot)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무대위에서 벌어지는 공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티켓가격에만 관심이 있었다. 관객은 코벤트 가든이 더 이상 대중들을 위한 극장, 모든 계급이 같은 문화적 경험을 하는 공간이 아니라고 느끼고 있었다. 티켓가격이 원래 가격으로 환원될 때까지 항의를 이어나갈 것임을 천명하였다. 2개월의 대혼란 끝에 액터 매니저 필립 켐블은 결국 고개를 숙이고 과거가격으로 되돌렸다.

1809년 런던에는 혁명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1802년의 짧은 휴지기를 제외하고 16년동안 프랑스와 전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적으로 보면 산업

화와 도시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빈곤과 오염, 착취를 불러왔고, 일부의 소수에게는 부의 축적의 기회가 되었다. 18세기까지는 거의 인플레이션이 없었지만 19세기 초에 갑자기 생활비가 앙등하였다. 석탄값도 급등하였다. 티켓가격인상은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급격한 사회변화로 인해 대중들은 안정을 희구했고 과거를 향수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특히 런던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욕망이 강렬하게 솟아올랐다. 그러나 67일 동안의 OP폭동이 정치지형을 위협하지는 않았다. 폭력이 일부 있기는 했지만 폭력적 반란이 아니라 축제적 성격의 저항이었다. 특정 공연에 대한 폭동이 아니라 추상적 권리에 대한 주장이자 정치적 항의의 표시이기도 했다.

1808년 12월 30일 화려한 의식속에서 재건축이 시작되었다. 런던에서 연극은 국가적인 중요한 문화양식이었다. 칙허극장은 정치적 성향에 따라 양분되어 있었다. 코벤트 가든은 토리 극장으로서 왕권파 정치인들은 극장이 빨리 재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드루리 레인은 휘그당 극장이었다. 두 극장 모두 좌파의 반정부 활동의 본거지였던 웨스트민스터에 위치했었고 지금도 그렇다.

새 극장은 아테네의 팡테옹을 연상시키는 고전적 분위기를 풍겼고 내부는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로비에는 대리석을 깔았다. 3천 석의 대형극장으로 지어졌고 이는 관객과 배우간의 상호작용이 약화된다는 비판을 초래했다.(18세기 후반부터 극장의 대형화가 이루어진다. 1794년에 재건축한 드루리 레인은 3600석으로 건축하였지만 1809년 화재 이후 3060석으로 축소한다. 극장의 대형화는 오히려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낳았다). 조지아 시대의 전형적인 극장은 말발굽형으로 피트석에는 등받이가 없는 벤치가 설치되었고 윗층 좌석보다 저렴했다. 가장 저렴한 좌석은 가장 윗층의 갤러리석이었다. 새 극장은 과거극장의 3층의 박스석을 없애고 26개의 개인박스석으로 교체하였으며 여기에 출입구를 설치하였다. 각 박스는 황금색과 핑크빛 칠을 하였고 전시즌 내내 임대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금까지 공적으로 사용하던 박스석을 사유화한 것이었다. 박스석 소유자가 원하지 않으면 다른 관객이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게 하였다. 이 두 가지 사실은 극장은 대중을 위한 공간이라고 여겨왔던 공연애호가들에게 매우 모욕적인 조치였다. 매춘부들이 런던의 극장에 자주 출몰했는데 개인박스석은 사악한 부유층에게 매춘부를 끌어들이는 장소로 여겨지기도 했다.

존 필립 켐블(1757-1823)
존 필립 켐블(1757-1823)

 

1809년 9월 18일 월요일, 재개관 기념작품으로 <맥베스>가 공연되었다. 극장측은 홍보자료를 통해 새 극장은 아담 스미스가 주창한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구현할 것임을 알렸다. 그러나 관객은 이를 전혀 다르게 보았다. 코벤트 가든은 왕의 후원으로 설립된 공간으로 국가문화가 구현되어야 할 공간이다. 티켓가격의 인상은 1세기 이상 유지되어 왔고 높은 문화적 가치를 지닌 전통을 퇴색시키는 부당한 조치였다고 보았던 것이다. 극장은 다양한 취향을 가진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는 공동체다. 찰스 처칠의 ‘내가 선택한 무대, 공평하고 자유로워야 한다. 이것은 당신들의 것, 그리고 나의 것, 대중들의 자산’이라는 시가 자주 인용되었다. 1809년 10월 한 잡지에는 ‘극장은 사유재산이 될 수 없고 국가적 관심사로서 강력한 정치적 엔진이며 , 이것이 없으면 국가의 다른 부분이 작동할 수 없는 바퀴다. 극장은 우리 정치시스템의 절대적 구성요소’라는 글이 실리기도 했다. 대중을 위한 좌석이 부유한 귀족과 극장간에 단 한번의 계약으로 단 한번의 회비를 내고 개인박스석으로 사라지는 것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공통공간이 소멸되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19세기 초의 극장은 무대라는 허구세계로부터 격리된 다른 세계가 아니었다. 객석은 훤히 밝혀져 있어서 배우와 관객은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다. 관객은 무대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 소리내어 반응할 수 있었고 불쾌함을 드러낼 수도 있었으며 감동적인 장면에서는 환호할 수도 있었다.

9시가 되거나 3막이 시작되면 관객이 교체되었다. 이 때 반값 입장이 가능했는데, 가난한 관객이 들어오면 배우와 관객간의 상호작용에 변화가 발생하였다. 객석은 무대와 마찬가지로 미적 경험의 공간이다. 따라서 특정한 조건에서 연극의 포커스가 변하면 객석내에서도 변화가 발생한다. 시위대의 특별한 행동이 발생하는 것은 이 지점이었다. 극장의 변화는 당시의 신문들이 다루었던 주요한 의제였다. 9월 18일 오후, <맥베스>가 시작되기 전에 극장 외부에 많은 군중이 모였고, 그들 사이에 흥분이 높아졌다. 그러자 켐블이 등장했다.

켐블은 1809년 당시 52살이었다. 그는 키가 크고 우람한 체격을 가진 배우였지만 무대위에서의 표현은 정확하고 우아했다. <맥베스>는 1783년 드루리 레인에서의 데뷔작이었고, 1803년에는 코벤트 가든에서 다시 맡았다. 드루리 레인에서 활약하던 켐블은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누이 사라 시돈스(Sarah Siddons)와 함께 드루리 레인을 떠나 코벤트 가든으로 왔다. 월터 스코트에 의하면 켐블의 선배인 데이비드 개릭이 <리어왕>과 <햄릿>에서 더 뛰어났지만 <맥베스>에서는 켐블의 섬세하고 정교한 감정표현과 내적갈등의 표출이 뛰어났다고 말한다. 그는 당시 가장 뛰어난 여배우였던 누이 사라 시돈스와 같이 공연할 수 있는 행운도 누리고 있었다. 켐블은 관객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지만 약간은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신부가 되려고 교육까지 받았지만 개신교도들의 눈에는 아웃사이더였다. 켐블에게 가장 장 어울리는 역은 세익스피어였고 그 중에서도 <코리올라누스>였다. 1817년 은퇴공연도 코리올라누스였는데, 한 장면에 무려 164명의 엑스트라를 출연시키는 스펙터클을 연출하기도 했다.

켐블은 새 극장이 개관할 때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1792년 에 드루리 레인에서 3층석을 2실링으로 두 배의 가격인상을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큰 소동을 일으킨 적이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티켓가격 인상으로 극장증축비를 충당하려던 경영자들은 이를 취소해야 했다. 켐블은 무대 뒤에서 국가연주 전에 ‘ 과거 가격이여 영원하라’ 라는 관객들의 외침을 들으면서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18세기 중반부터 두 왕립극장에서는 영국 국가 ‘신이여 왕을 보호하소서, God Save the King (Queen)’와 Rule Brittania)가 연주되었다. 이는 1970년대까지 영화에서도 실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영화관에서 영화시작 전에 국가가 연주되던 시절이 있었다). 공연중에 야유와 함성, 저주가 난무했다.

코벤트가든 로열 오페라하우스 (출처:네이버 단체사전: 전시관, 굿모닝미디어)
코벤트가든 로열 오페라하우스 (출처:네이버 단체사전: 전시관, 굿모닝미디어)

 

당시 법원이 코벤트 가든 앞에 있었기 때문에 판사들이 무대에 등장해서 폭동법(Riot Act)을 환기시켜 주었다. ‘ 모든 관객들은 해산하여 일상으로 돌아가라. 폭동과 소요는 중단되어야 한다’. 1714년에 시행된 폭동법에 의하면 12명 이상의 단체가 1시간 이내에 해산하지 않을 경우 체포하거나 사형에까지도 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재판관은 오리려 조롱을 받았다. ‘ 극장경찰 철수’라는 함성이 점점 커졌다. 몇몇 상징적인 체포가 이루어졌다. 데모는 새벽까지 이어졌고 군중들은 영국 국가를 부르고 해산했다.

사실상 2개월의 소요기간중 관계당국은 시위의 해산을 명하지 않았고 심지어 시위는 주변으로 확산되었다. 35 명의 집주인들이 관계당국에 해산을 청원했다. 정부 역시 이를 진압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다. 경찰배치는 영국답지 못한 일이라는 것이 토리의 이념이었다. 근처에 군인도 주둔했지만 군인투입은 과도한 행위라고 보았다. 극장과 폭도간의 분쟁에 정부가 관여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 결국 정부는 폭도들에게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두 번째 날에 <거지 오페라>가 공연되었는데 관객들은 무대로부터 등을 돌리고 앉았다. 3일째에는 <리차드 3세>가 공연되었다. 공연시작 전에 켐블은 폭도들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돌아온 건 나무의자에 지팡이를 두드리는 소리, 종소리, 나팔소리, 트럼펫 등 폭동의 상징적 무기들뿐이었다. 금.토요일에는 프라이팬, 석쇠, 부젓가락 등이 ‘요란한 음악’에 추가되었다. 토요일에 기진맥진한 켐블은 극장을 잠정 폐쇄하기로 결정한다. 시위대들에게 입장료를 돌려주고 세트에 불을 지르려는 폭도들을 제지하고 있던 배우들의 출연을 중단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켐블의 자문단은 여러 제안들을 경제적 관점에서 검토했다. 그러나 이는 폭도들의 도덕적.정치적 동기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다. 극장이 10월 4일 <거지 오페라> 공연을 위해 재개관했을 때도 소동은 계속되었다. 시위대의 플래카드에는 박스석에서의 비도덕성을 비난하는 새로운 주장이 담겨 있었다. 켐블도 이번에는 힘에 의지했다. 피트석의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복싱선수들로 구성된 경호부대를 투입한 것이었다. 40대 중반의 다니엘 멘도사가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복싱챔피언을 지냈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함으로써 존경받던 인물이었는데, 돈많은 귀족들을 위해 봉사하는 배신자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이것이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게다가 복서들 중 많은 사람이 유대인이었다. 그들은 사태를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무대위에서 연극이 공연되는 동안 객석에서는 실제 드라마가 진행되고 있었다. 복서들로 인해 폭동이 약간은 진정기미를 보였다. 10월 9일부터 27일까지 공연에서는 2막까지는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반값 입장이 허용되던 3막부터는 관객구성이 달라지면서 소동이 시작되었다. 극장의 수입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폭동에 참여한 대부분의 관객이 반값 입장료를 냈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거리로 뛰어나갔다. 웨스트민스터 사법당국은 폭도들을 기소하겠다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거리데모의 중단을 촉구했다. 실제로 12명의 시위대가 기소되기도 했다. 그런데 두 건의 사건이 사태를 악화시켰다. 첫 번째 사건은 10월 3일 인기배우 클라크 부인이 아더 머피의 < 그리스의 딸들>이라는 작품에 캐스팅되었다. 프롤로그에 폭동을 멈추어야 한다는 내용을 추가하였는데, 이것이 시위대를 자극하였다. 두 번째 사건은 헨리 클리포드라는 변호사의 체포였다. 극장의 경비책임자였던 제임스 브랜든이 진보적 변호사로서 OP폭동에 관여하고 있던 클리포드를 체포한 사건이다. 트럼펫을 불고 OP라는 글자를 새긴 모자를 쓰고 다니면서 폭동을 부추긴 4명의 공모자들도 같이 붙잡혔다. 클리포드의 체포는 새로운 폭동을 촉발했고 급기야 켐블의 집이 공격을 당하게 된다. 300여 명의 시위대가 켐블의 집주변에서 OP송을 부르면서 클리포드를 연호하였다. 그래도 켐블의 반응이 없자 그들은 야유를 퍼붓고 진흙과 오물, 동전 등을 던졌다.

켐블의 집주변에서의 시위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러자 사법당국은 주모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집주변에 30여 명의 군인을 주둔시켰고 60여 명의 경찰을 파견하였다. 시위는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10월 28일 시위대는 OP 위원회를 설립했다. 설립목적은 체포된 폭도의 석방을 위한 법적 비용과 변호사 비용의 조달, 투쟁기금 조달 등이었다. 이런 활동들은 시위대에게 믿음을 주었다.

OP폭동은 축제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요인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진행과정은 매우 축제적이었다. 피트석에서는 매일 저녁 축제가 벌어졌다. 무대위 배우의 연기 따라하기, 춤 등이 벌어졌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아예 벤치를 치우고 검투사 경기, 칼싸움, 레슬링등을 벌이기도 했다.

11월말 경이 되면 박스석이 텅텅 빈다. 그러나 피트석의 축제와 무대위의 연극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이를 카운터스펙터클이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다. 연극이 어떤 이념적 힘을 재현하는 것이라면 객석에서의 OP항의는 이에 대항하는 스펙터클로 기획되었다는 것이다. 이들 행위들에 나타나는 공통점은 사적 오락에 맞서는 공통의 축제였다는 점이다.

코벤트 가든 재개관 기념공연 포스터
코벤트 가든 재개관 기념공연 포스터

 

11월 27일 8명의 시위대가 기소되면서 시위는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러나 OP폭동을 지지하는 정치인들은 이런 견해에 반대하였다. 12월 6일부터 관객들은 처음으로 무대에 물건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는 과거에는 없던 일이었다.레몬, 사과, 동전, 지팡이, 벤치를 뜯어낸 조각 등을 던져서 배우들을 위협했다. 시위대의 결의는 더욱 강고해졌다. 피트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OP 시위대는 점점 폭력적으로 변했고 관객은 점점 감소했다. 켐블과 경영진은 새가격 지지자(NPs, New Prices)들에게 무료 입장권을 제공했다. 법률비용도 급등했지만 켐블은 OP위원회처럼 돈을 모금할 수도 없었다.

켐블은 매일 저녁 300파운드의 손실을 입고 있었고 전체적으로 12,000 파운드의 손실을 입었다. 12월 4일 켐블은 클리포드와 만났다. 켐블은 가격인상, 피트석에서의 복서고용 등에 대해 사과하고 무대에 올라가 항복을 발표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 브랜든의 해고였다. 소요는 계속되었고 다음날 켐블은 그 건에 대해서도 합의하고 발표했다. 모든 소송을 취하하겠다고 하였고 박수가 터져나왔다. ‘ 우리는 만족한다’ 라는 플래카드가 펄럭였다. OP폭동은 끝났고 갤러리석은 제외하고 피트석은 과거가격으로 환원되었다. 그리고 박스석 숫자는 다음 시즌부터 줄이기로 합의하였다.

코벤트 가든이 1810년 시즌에 오픈할 때 박스석은 약속한 것보다 많았다. 그러자 다시 한번 소요가 발생했고, 재빨리 합의가 이루어졌다. 재정적인 측면으로 보면 시위대는 피트석에서 이겼다. 그러나 대부분의 OP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정치적 원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3천석으로 확대한 것은 관객과 배우간, 관객 상호간의 상호작용을 저해하는 일이었다. 박스석처럼 극장내에서의 좌석분리 역시 공동체적 기능을 담당해야 할 극장의 본원적 임무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공연이 문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는데, 칙허극장만이 9월부터 다음해 봄까지 이어지는 한 시즌의 연극을 공연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 연극에 음악이 들어가서는 안 되었고 말로 된 연극만이 가능했다. 허가받지 못한 극장들은 이를 피하기 위해 편법을 동원했다. 즉 언어극을 기반으로 하되 음악을 삽입하는 형식을 취했던 것인데, 오히려 이런 형식의 공연이 더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18세기의 최고의 히트작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 오페라>는 이런 환경 때문에 탄생한 히트작이었다. 1766년이 되어서야 세 번째 왕립극장이 헤이마켓(Theatre Royal, Haymarket)에 신설되었지만 여름에만 공연하는 조건이었다. 이후 리버풀, 브리스톨 등지에도 왕립극장이 신축되었다. 영국의 극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국가적 오락, 합리적 오락에서 상업적 오락으로 바뀌어 나간다. 예를 들면 멜로드라마의 부상은 이를 대변한다.

영국의 공연역사에서 1808~1809년은 중요한 전환기다. 1808년 8월에 발생한 코벤트 가든 화재와 1809년 2월에 발생한 드루리 레인의 화재로 불과 6개월 사이에 영국을 대표하는 극장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칙허극장의 화재와 티켓폭동, 리차드 쉐리단, 필립 켐블, 사라 시돈스 등의 스타들의 부침은 18세기적 공연이 19세기적 공연으로 넘어가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켐블은 1809년까지 런던 공연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빈틈없는 자세와 낭만적이고 정열적인 연기스타일, 특히 세익스피어에 있어 역사적이고 고증에 충실한 접근은 데이비드 개릭이 그랬던 것처럼 이 음유시인에 대한 숭배의 표현이었다. 세익스피어는 프랑스의 고전주의에 대비되는 영국문학의 중심이었다. OP폭동의 중심에 세익스피어가 있었다. 9월 18일 <맥베스>로 시작하여 12월 15일 <햄릿>으로 종료되기까지 세익스피어는 OP폭동의 핵심의제였다. OP폭동은 세익스피어의 엘리트 중심적 소비를 대중적 소비로 바꾼 운동이었다.

OP 폭동은 단순한 가격저항이나 소비자들의 소비자 운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유층에 대한 정치투쟁이자 계급투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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