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이 먼저 사회에 이바지해야”-무용평론가 토마스 한
“춤이 먼저 사회에 이바지해야”-무용평론가 토마스 한
  • 이종호 기자
  • 승인 2020.08.23 2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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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의 위치는 흔들리지만 좋은 글의 가치는 변함없어”
투철한 직업정신, 원고마감 어긴 적 없어

무용평론가 토마스 한, 2017 MIMOS
무용평론가 토마스 한, 2017년 프랑스 MIMOS 축제 (사진제공=토마스 한)

[더프리뷰=서울] 이종호 기자 =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무용평론가 토마스 한(Thomas Hahn, 1963-)은 유럽의 평론가들 가운데서도 유달리 부지런하고 직업의식이 투철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스스로를 평론가보다는 무용기자라고 부르는 그는 개별 공연에 대한 리뷰 외에도 여러 축제와 극장들의 프로그램북에 글쓰기, 축제 자문, 공공지원금 심사 등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국과는 지난 2014년 무용가 이선아와 결혼하면서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됐다. 2008년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시댄스) 세미나에 패널리스트로 초청 받아 처음 한국을 찾은 이래 여의도 비아(Via)축제 참관 등 10여 차례 내한한 바 있는데, 이번에는 아내의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 공연(6월 18-19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 동행한 김에 두 달 가량 한국에서 지내다 파리로 돌아갔다. 그 사이 그를 몇 차례 만났고, 귀국하기 며칠 전에는 이들 부부를 홍대 앞으로 불러내 함께 막걸리를 마셨다. 어찌나 따라주는대로 신속하게 잘 마시던지 계속 그의 술잔을 채워주느라 바빴다.

토마스 한&이선아 부부
토마스 한&이선아 부부 (사진제공=토마스 한)

독일 출신의 토마스 한은 학창시절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문학, 연극을 공부했다. 1990년부터 파리에 거주하며 20년 넘게 독일의 권위있는 무용 월간지 〈탄츠 tanz〉의 프랑스 통신원으로 활동중이다. 프랑스에서는 월간 무용지 <레 세종 드 라 당스 Les Saisons de la Danse>와 <당세 Danser>가 폐간될 때까지 기고했다. 이후 <당세>의 온라인 후속 잡지인 <당세 카날 이스토리크 Danser Canal Historique>에서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동시에 파리시립극장(테아트르 드 라 빌 Théâtre de la Ville) 등 주요 극장의 무용 프로그램 작가로 일하고 있으며, 무대기술과 무대미술에도 관심이 많아 프랑스 <악튀알리테 드 라 세노그라피 Actualité de la scénographie>, 독일 <뷔넨테흐니셰 룬트샤우 Bühnentechnische Rundschau> 등 세노그라피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그 외에도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의 무용축제에서 작가, 모더레이터, 강사로 활동중이다. 현재 여러 가지 무용서적을 집필하고 있으며 공연예술에 관한 프랑스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고 있다.

2017 몽펠리에 당스에서 인터뷰 중인 토마스 한.(좌:앙줄랭 프렐조카주, 우:마틸드 모니에)
2017년 몽펠리에 당스에서 앙줄랭 프렐조카주(좌), 마틸드 모니에(우)를 인터뷰 중인 토마스 한 (사진제공=토마스 한)

인터뷰는 그간 그와 가졌던 몇 차례 만남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들을 대화체로 정리한 것이다.

 

연극에서 무용으로

▲간단히 자신을 소개해 달라.

==북독일 브레멘 근처 델멘호르스트(Delmenhorst)라는 인구 5만의 소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여덟 살 때 가족이 엘베강 동서독 분계선 근처로 이사를 했는데 동네 아이들과 수영하면서 철조망 옆에서 경계근무중인 군인들의 모습을 보기도 했다. 함부르크 대학에 입학해서 7년 동안 언어학, 프랑스문학, 이탈리아문학 및 연극을 공부했다. 어릴 적부터 잘 읽고 특히 어휘력이 풍부했다. 너댓 살 때 이미 아무 책이나 건네받아도 술술 읽었던 걸로 기억한다.

▲거의 내 수준이네! 맞다. 공연예술이든, 또다른 분야에서 일하든 문자는 어릴 적부터 기본으로 갖추고 있어야 하는 거지.

==절대 동감이다. 공연예술에 대한 나의 관심은 1980년대 대학 시절 프랑스어 연극 동아리에 가입, 작품을 제작하고 출연하면서 본격화한 것같다. 간간이 탱고를 추기도 했다. 우리 작품에 탱고 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난생 처음 현대무용을 본 것도 그 무렵이다. 주로 함부르크 캄프나겔(Kampnagel) 공연예술센터와 캄프나겔 축제를 통해서였는데, 이때 안 테레사 드 케에르스매커의 작품을 처음 접했다. 뭔지 몰랐지만 엄청난 에너지와 도발성이 느껴졌다. 프랑스의 조제프 나주 역시 에너지가 대단했다. 그의 처녀작인 <북경오리 Canard pékinois>를 봤는데, 이해하진 못했지만 좌우간 매료됐다. 1980-90년대 대스타였던 부비에-오바디아의 에스키스무용단(Compagnie L’Esquisse)의 공연을 본 것도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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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한이 작업하고 있는 각종 매체와 기관들 (사진제공=토마스 한)

▲한국에서는 연극에서 춤으로 넘어간 경우가 많지 않다. 서양에는 꽤 많은 것같던데.

==내 경우는 프랑스 연극이 별로 피지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피지컬한 것에 관심이 있었는데 프랑스 연극은 말의 역할이 더 컸다. 그래서 처음엔 연극을 좋아했지만 마임이나 피지컬 시어터로, 그리고 결국은 무용으로 오게 됐다. 그렇게 해서 1995년에 조제프 나주의 공연을 보고 <탄츠>에 기고한 것이 나의 첫 무용평론이 되었다. 내게 조제프 나주는 오늘날까지도 가장 밀접한 관심의 대상이다.

앞서 1990년에 나는 파리로 이사했고 2년 후, 연극 프로그램을 하고 싶어서 작은 지역 라디오 방송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많은 연극 공연을 보고 인터뷰할 기회를 얻었다. 나중에는 그 프로그램을 직접 운영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업방송이 아니라 매우 자유로운 스타일의 라디오였고, 그렇게 많은 예술가들을 만나는 것은 매우 흥미로웠다. 이어서 독일 신문에 연극 관련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주로 주요 전국지인 <디 벨트 Die Welt>에 기고했다. 아울러 역시 전국지인 <쥐트도이체 차이퉁 Süddeutsche Zeitung>과 유명한 뉴스 매거진인 <데어 슈피겔 Der Spiegel>에도 쓰기 시작했다.

토마스 한이 2020년 7월 국립광주과학관을 방문, 관계자들과 공연장 설계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사진제공=토마스 한)
토마스 한이 2020년 7월 국립광주과학관을 방문, 관계자들과 공연장 설계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사진제공=토마스 한)

▲처음부터 그런 권위지들에 기고를 했다니 대단한 실력이네. 그러다 자연스레 무용평론으로? 어문학 배경과 연극의 경험이 결국 무용평론으로?

==그런 셈이다. 연극도 좋지만 사실 무대 위에선 말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점점 일반 연극보다는 무브먼트 연극과 춤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글을 쓰고, 춤 공연에 대해 논리적인 말을 할 수 있다고 느끼기까지 여러 해 동안 오로지 구경만 하면서 보냈다. 그러다가 다시 무브먼트 연극을 통해 춤에 접근했다. 나는 마임과 현대 무브먼트 연극의 대표적 축제인 미모스(Mimos)의 심사위원이 되었다. 프랑스에서 매년 열리는 축제인데, 1990년대에는 전 세계 유수의 공연단들이 이 축제에 참가했다. 그래서 나는 오노 카즈오와 마르셀 마르소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협업무대를 목도할 수 있었다!

이후 독일의 무용잡지인 <발레 인터나찌오날 탄츠 악투엘 Ballet International Tanz Aktuell>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잡지는 그후 <발레탄츠 Ballettanz>라고 불렸다가 지금은 <탄츠 tanz>로 바뀌었다. 나의 첫번째 기사는 조제프 나주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나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였고 그는 미모스 축제에 여러 번 초대 받았다. 그 기간, 나는 또 힙합에 예술의 지위를 부여하는 긴 기사를 쓴 최초의 평론가였다. 당시 다른 평론가들은 힙합을 예술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프랑스의 종이잡지인 <레 세종 드 라 당스 Les Saisons de la Danse>와 <당세 Danser>와 협력했다. 첫 번째는 완전히 폐간되었고, 두 번째는 프랑스에서 가장 다작의 무용지가 된 온라인 매체 <당세 카날 이스토리크 Danser Canal Historique>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나서 나는 프랑스와 독일의 축제 프로그램 및 극장 시즌 프로그램들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특히 파리시립극장, 파비용 누아르(앙줄랭 프렐조카주가 이끄는 엑상프로방스 국립무용센터) 등을 위해 글을 쓴다. 샤틀레극장(Théâtre du Châtelet) 또는 필라르모니 드 파리(Philharmonie de Paris)의 무용공연 프로그램북에 글을 쓸 때도 있다. 그런가 하면 파리 한국문화원 잡지인 <한국문화 Culture Coréenne>에도 한국 공연물, 한국의 아파트문화에 대해 글을 썼다. 조만간 코로나(COVID19) 사태에 대한 한국의 대응, 한국 국립극장의 세노그라피에 대해서도 집필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이번에 국립극장과 국립광주과학관을 답사하고 왔다.

국립아시아문화센터 방문
2020년 7월 국립극장을 방문, 해오름극장 개축에 관해 듣고 있는 토마스 한. (사진제공=토마스 한)

단 한 번도 원고마감 어겨본 적 없어

▲일정한 근무시간에 일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여기저기 기고해서 원고료를 받는다는 게 피곤하지 않은가? 안정된 직장에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해본 적은 없는지?

==사실은 파리에서 15년 동안 두 가지 일을 했었다. 무용 기사를 쓰기 위한 공간을 천천히 확보하는 동안, 돈을 벌기 위해 아주 다른 분야에서 일했다. 파리에 있는 미국계 컨설팅 회사였는데 나는 중부유럽 정유산업의 수석 분석가였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씩 나의 진정한 열정이 그들의 사업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2009년 재정위기가 왔을 때, 나를 해고하고야 말았다! 그 이후로 나는 오로지 무용 저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다. 물론 그런 식의 불규칙한 수입이라는 게 불안정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욱 나는 정력적으로 열심히 쓴다. 나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원고 마감일을 넘겨본 적이 없다.

▲정말인가? 믿기 어렵다! 직업적 내지 준직업적으로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그 말을 선뜻 믿기 어려울 것이다. 원고 마감을 넘긴 적이 한 번 도 없다니 정말 존경스럽다. 당신의 말을 듣고 있자니 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꼬박꼬박 타자기 앞에 앉아 시를 썼다는 폴 발레리, 여러 편의 연재소설을 동시에 쓰기 위해 길다란 책상을 벽에 붙여놓고 의자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고군분투했다는 발자크가 떠오른다.

==그런가. 나는 ‘직업’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MIMOS 2014
2014년 한 축제에서 안무자들과 함께 토론하는 모습. (사진제공=토마스 한)

▲그런데 당신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부지런히 쓰고 있지만 유럽에서 무용평론의 자리는 점차 좁아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게 말이다. 프랑스 일간지들의 무용공연 리뷰 게재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고, 영국과 독일은 현대무용에 대한 관심이 프랑스보다 적고... 한국은 30년 전의 프랑스처럼 활발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현재 프랑스에서는 전국지 3-4개에 매주 4-5편의 리뷰 실린다. 여름철에는 축제들 덕분에 리뷰가 더 많아지지만.

▲유럽에서도 일간지나 월간지보다는 블로그 등 다른 매체로 옮겨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뉴스와 보도가 거의 온라인 출판물로 옮겨가면서, 무용평론가와 블로거, 유투버를 구분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당세>가 사라진 가장 큰 원인도 그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오늘날 독자들에게 블로그와 평론을 구분시키기도 어렵다. 단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본격 평론으로서 글의 품질을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쉽진 않다. 인터넷에서는 글의 깊이가 아니라 클릭수를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한국도 무용공연 리뷰가 그다지 활발한 건 아니다. 종합일간지를 기준으로 한다면 1980년대보다도 못하다. 그 사이 무용 월간지들이 많이 생겨나서 양적으로 늘어난 건 맞지만 글의 수준은 전반적으로 신통치 않다. 좀 다른 얘긴데, 프랑스에서도 무용평론가와 무용기자(댄스 저널리스트)를 구분하나?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높다’고 생각하나?

==꼭 그렇진 않다. 그런 구분은 갈수록 흐릿해지고 있다. 타이틀이 아니라 글의 질과 영향력이 문제 아닐까? 프랑스에는 공연예술 사이트가 여럿인데, 여기서는 비평가와 기자가 동등한 지위를 누린다. 나 자신은 댄스 저널리스트라고 생각한다. 연구와 보도가 더 많은 실질적인 일을 이뤄낼 수만 있다면 비평만큼 높게 평가해야 한다. 결국 모든 것은 일의 질에 따라 결정되는 것 아닌가?

춤이 먼저 세상에 이바지해야

▲지원금 심사에도 참여하는가?

==그렇다. 자주 불려가는 편이다. 큰 프로젝트의 경우 심사위원 숫자가 예술가, 평론가 등 20명에 이르기도 한다.

▲한국 안무가들의 작품도 자주 보는가?

==미안하게도 많이 보지는 못했다. 2015-16년 한불 교류의 해 기념공연 때 본 것과 2008년 시댄스에서 본 것이 고작이다. 2008년 시댄스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온 평론가들과 함께 봤는데 다들 ‘한국적 정체성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지적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이 시대는 코로나19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무용가들, 예술가들에게 힘든 시대다. 이 어려운 시대에 예술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인간과 물질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고 본다. 지원금은 향후 계속 감소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때일수록 춤이 먼저 사회에 다가가야 춤의 가치를 살리고 높일 수 있다. 춤이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부분을 생각해봐야 한다.

매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코로나 때문에 영상이 대세가 되고 있지만 아직 온라인 시대라고 하기엔 이르지 않을까? 춤과 미디어의 관계에서도 미래엔 새로운 장(場)이 구축될 것이다. 나는 낙관적이다. 그 속에서 현대무용의 장르에도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정작 무용가들은 싫어하는데도 농당스(non-danse)라는 용어가 평론가들에 의해 정착돼 버린 것처럼.

▲개인적인 질문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하겠다. 아내와는 어떻게 만났는지,

==선아가 요코하마 댄스 컬렉션 수상자 자격으로 프랑스에서 연수를 할 때 만났다. 2007년 6월 위제스(Uzès) 기차역에서 축제 현장으로 가는 차량에 평론가 3명과 선아가 동승한 것이 첫 만남의 계기가 됐다. 이후 한국에 올 때마다 내가 먼저 연락해서 만났고 2014년 결혼했다(이선아는 2007년 2월 요코하마 댄스 컬렉션에서 <Performing Dream>으로 수상, 6개월간의 프랑스 레지던시 기회를 부여 받았다).

이선아, 'COVER'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 무대에서 공연된 이선아의 자작솔로 'UN·COVER' /사진=더프리뷰 박상윤 기자

▲평론가와 무용가가 함께 산다는 것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나?

==(이선아) 한 마디로 배우는 게 너무 많다. 지식과 정보는 물론 작품과 경향을 바라보는 관점 등 모든 면에서 늘 배우며 산다. 함께 공연을 보고난 후에는 언제나 길고 본격적인 부부토론이 이어진다. 아울러 늘 열려 있고 무엇에나 경청하는 삶에 대한 진지하고 근면한 태도는 남편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 존경스럽다. 내가 집에서 즉흥춤이라도 출 때면 언제나 진지하게 관람하고 열정적으로 논평을 한다. 내게는 ‘준비된 관객’인 셈이다.

토마스 한&이선아
토마스 한&이선아 (사진제공=토마스 한)

(토마스 한의 이야기를 좀더 듣고 싶은 독자들은 더프리뷰 7월 10일자 <공연 온라인 시대? 아직은 일러>와 8월 4일자 <평론가는 공연기획하면 안됩니까?>를 읽어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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