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모든 게 ‘그들의 탓‘이라고?”
[북리뷰] “모든 게 ‘그들의 탓‘이라고?”
  • 이종호 기자
  • 승인 2020.09.25 17: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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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분노, 비난에서 벗어나 이성과 화합으로 가야
실천적 지성 마사 누스바움의 ’타인에 대한 연민‘​
“예술과 비판의식, 정의감으로 미래의 희망을”
마사 노스바움, '타인에 대한 연민'(사진=
마사 누스바움, '타인에 대한 연민'(사진=알에이치코리아)

[더프리뷰=서울] 이종호 기자 = 사람들은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성적, 합리적으로 원인을 파악하고 대책을 세우기 보다는 특정 대상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경우가 많다. 우리 사회에도 ‘여혐’ ‘남혐’ ‘호모포비아’ 등 차별과 혐오의 말들이 넘쳐난 지가 이미 오래 됐다. 좌-우, 진보-보수의 대립도 진지한 철학적 기반에 근거한 이념대립이 아니라 노골적인 편들기와 비겁한 눈치보기의 수준으로 추락한 지 오래다. 무조건 ‘우리’ 아니면 ‘적편’이다. 한국사회의 과도한 경직성과 도를 넘은 ‘죽기 아니면 살기’식 대립은 이제 특정집단을 넘어 나라 전체를 망칠 지경에 이르렀지만 누구 하나 올바른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문제가 한국에만 있는 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불확실한 삶 앞에서 쉽사리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잠식당하며, 두려움은 자연스레 타인에 대한 혐오, 분노, 비난으로 연결된다. 이성적 사고와 현실적 행동 대신 감정적으로 손쉬운 타자화를 선택해 나와 타인 사이에 날카로운 경계선을 긋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유대인, 여성, 동성애자, 하층민들이 이런 취급을 받았고, 현대 미국에선 특정 인종, 여성, 동성애자, 무슬림에 대한 혐오로 나타난다. 한국 역시 탈북자, 조선족, 이주민, 장애인에 대해 결코 관대한 사회가 아니다. 교실에서 일어나는 왕따도 마찬가지다. 성별, 종교, 직업, 나이, 장애, 성적 지향 등 다양한 사회적 편 가르기의 근본에는 이렇듯 언제나 인간의 내밀한 감정이 배어 있다.

세계적인 정치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2016년 11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던 날 밤 느껴야 했던 깊은 무력감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나면서 한 권의 책을 써내려갔다. 특정 인종과 계층에 대한 두려움, 분노, 혐오를 부추겨 승리를 이끌어낸 트럼프의 환호 앞에 망연자실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서. 원제는 <The Monarchy of Fear>이지만 최근 알에치코리아에서 나온 번역본 제목은 <타인에 대한 연민>이다. 임현경 역, 296쪽, 1만6천800원.

“정치는 필연적으로 감정적”
우리 시대 대표적 지성 가운데 한 사람인 마사 누스바움(Martha Craven Nussbaum, 1947-)은 꾸준히 ‘정치적 감정’을 통해 인류사회의 내면을 관찰해온 인물이다. 전작들인 <정치적 감정> <혐오와 수치심> <혐오에서 인류애로>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번 책에서는 고대 그리스 로마 철학자들의 사상과 현대 심리학자들의 언어를 빌려 인간의 근본적 감정인 ‘두려움’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미지의 생 앞에서 한없이 불안해진 개인이 어떻게 이를 타인에 대한 배제와 증오로 발산하고, 나아가 사회적 분열을 일으키는지 그 과정을 그림처럼 그려 보인다. 아울러 담론의 전개를 넘어 독자들의 실제 행동을 독려하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두려움이 어떻게 시기와 분노라는 유독한 감정으로 번져 가는지를 통해 대중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포퓰리즘 정치가 현대 민주주의를 좀먹는 과정을 차근차근 진단하면서, 두려움의 영향을 받을 때 위험해지는 세 가지 감정 '분노‘ ’혐오‘ ’시기'에 대해 집중 탐구한다. 그러면서 두려움에 기반한 이 감정들을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로 전환하기를, 나아가 서로를 연민하고 연대하기를 열정적으로 권한다. 타인에 대한 연민, 인류애를 바탕으로 하는 연대를 호소하는 휴머니스트의 모습이다. 책 말미로 갈수록 혼신의 힘을 다해 인류가 나아갈 길을 역설하는 표정이 뚜렷하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한국은 1997년 경제위기 이후 본격적인 저성장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개인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더욱 취약해지기 시작했다. 개인의 사회적 불안과 두려움이 누스바움이 얘기하는 것처럼 증오, 혐오, 분노로 연결되는 사례들이 무수히 목격되고 있다.”고 말한다.

미래 희망의 원천 다섯 가지-언젠가 연대할 ‘우리’를 위하여
마사 누스바움은 암울한 혐오의 시대를 넘어 한 걸음 나아가려는 길목에서 인문학과 예술에서 희망의 실마리를 찾으려 애쓴다. 미래 희망의 원천을 찾기 위해 그는 우리에게 다양한 예술 작품, 합리적 토론, 사랑을 실천하는 종교단체, 비폭력주의로 행동하는 연대, 숱한 학자들이 집대성한 ‘정의’에 대한 이론을 실생활에서 접해 보라고 적극 권한다.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보다는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전 세계를 위협하는 정치적 위기 앞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더 나은 함의를 만들어가기 위해 그 무엇보다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과 존중을 외친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인간 내면의 아주 조그마한 감정의 변화로부터 시작됨을 거듭 강조하면서 그것만이 ‘우리’의 연대를 가능케 하리라 말한다.

기억해 둘만한 구절들

-감정은 품위 있는 정치사회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절대왕정에서 민주주의적 관계로 이동하는 데는 사랑이 작용한다.

-모든 정치적 분노는 두려움을 먹고 자란다.

-불행한 사건을 특정인의 탓으로 돌리면 자아가 충족되면서 깊은 위안을 받는다. ‘나쁜 사람’을 설정해 비난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무력감 대신 통쾌감을 느낀다.

-시기심은 타인이 가진 것에 주목하고 자신의 상황은 그보다 못하다고 비교하면서 느끼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시기는 적대감과 함께 파괴적인 소망을 담고 있어 ‘소유한 자’들의 기쁨을 망치고 싶어한다.

-희망과 두려움은 스위치의 작용과 비슷하다. 희망은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책 속에서
“이 진보적 운동에서 중요한 점은 킹이 그랬던 것처럼 행위와 행위자를 구분하는 것이다. 타인의 인간성을 포용하면서 그들이 저질렀을지 모르는 잘못된 행동만을 반대해야 한다. 그래야 동료 시민들의 말과 행동에 찬성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친구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두려움과 비난, 보복을 통해서는 타인에게서 어떤 선함도 찾을 수 없다.” (129쪽)

“우리는 시기심 넘치는 경쟁과 파괴적인 외부의 공격에 시달린다. 하지만 진정한 선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바로 조국에 대한 사랑, 민주주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삶도 포기한 많은 이들의 헌신적인 봉사, 형제애와 건강한 노동, 소수자와 이민자들의 포용이 증오보다 더 빛난다는 결심 안에 존재한다. 오늘날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할 수 있는 너무나도 소박한 조언이다.” (198쪽)

“타인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스토아학파의 냉소적인 절망이 희망적인 삶보다 더 그럴듯해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희망을 품기 전부터 기본적인 수준의 사랑은 필요하다. 희망은 사랑에 의해 유지되고, 타인에게서 최악보다 최선을 기대하는 영혼의 관대함이 사랑을 지탱한다... 악한 행동을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행동 이상으로 성장과 변화가 가능한 존재다.” (266쪽)

저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oosbaum)(사진=알에이치코리아)
저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사진=알에이치코리아)

저자인 마사 누스바움은 세계적으로 저명한 법철학자, 정치철학자, 윤리학자, 고전학자, 여성학자이다. 하버드대학교 철학과와 고전학과에서 교수직을 시작해 석좌교수가 되었으며, 1980년대 초에 브라운대학교 철학과로 옮겨 역시 석좌교수로 일했다. 현재 시카고대학교 철학과, 로스쿨, 신학교에서 법학, 윤리학 석좌교수로 활발히 강의하고 있다. 학문적 탁월성을 인정받아 미국철학회장을 역임했고,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가 선정하는 ‘세계 100대 지성’에 두 차례(2005, 2008년)나 이름이 올랐다. 저서로 <혐오와 수치심> <정치적 감정>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 <인간성 수업> <혐오에서 인류애로> <분노와 용서> <역량의 창조> 등이 있다.

역자 임현경은 이화여자대학교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연극 무대에 서기도 했다. 아이와 함께 여행을 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쌓다가 전문 번역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역서로는 <지나치게 불안한 사람들> <불안에 서툰, 당신에게> <제3의 식탁> <No Baggage, 여행 가방은 필요 없어> <설득의 재발견> <마즐토브> <무엇이 우리의 선택을 좌우하는가> <속도에서 깊이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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