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30 메가뮤지컬(하) 뮤지컬 '캣츠'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30 메가뮤지컬(하) 뮤지컬 '캣츠'
  • 조복행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0.10.07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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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캣츠'(출처:youtube.com)
뮤지컬 '캣츠'(출처:youtube.com)

 

뮤지컬 <캣츠>가 샤롯데 극장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팬데믹 시대의 <캣츠>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고양이들, 그 위에 분장한 모습은 팬데믹 시대의 진풍경이다.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박수야말로 공연의 또 하나의 스펙터클인데, 거리두기 때문에 허전하다.    관객과의 상호작용도 <캣츠>의 중요한 볼거리인데 이 역시 약해졌다. 그러나 배우들은 진지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이다. 이번 공연은 <캣츠> 40주년을 기념한다는 표제가 붙어 있다. 가까운 과거처럼 느껴지는데 벌써 40주년이라니! ‘유령’처럼 반복적으로 다가오는 공연은 그래서 친구같은 느낌을 주나 보다.       

      
<캣츠>는 뮤지컬의 역사를 바꾼 작품이자 공연산업에 빛을 던져준 뮤지컬이다. 뮤지컬 학자 마크 스테인은 뮤지컬의 역사는 <캣츠>를 중심으로 달라진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표기한다.  BC - Before Cats – and AD – Andrew Dominant. 여기서 AD의 A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Andrew를 말한다. <캣츠>는 본격적인 메가뮤지컬의 개막을 알린 뮤지컬이다. 1970년대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와 에비타가 서막이라면 <캣츠>는 본공연의 첫 작품인 것이다.   <오클라호마>가 북 뮤지컬을 본궤도에 올려놓은 드라마적 차원의 혁신이라면  <캣츠>는 메가뮤지컬의 진정한 기원이다. 

<캣츠>는 1981년에 웨스트엔드의 뉴 런던 극장에서 1981년 5월 11부터 2002년 5월 11일까지 21년 동안 총 8,949회의 공연을 하였고, 브로드웨이에서는 1982년 10월 7일부터 2000년 9월 10일까지 7.485회를 공연하였다. 로렌스 올리비에상과 토니상에서 베스트 뮤지컬로 선정되는 등 많은 상을 받았으며, 커다란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캣츠>는 웨버가 작곡하고 로열 세익스피어 극장의 연출가 트레버 넌이 연출을 , 웨버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추어 온 팀 라이스가 대본을 담당했으며 안무에는 질리안 린, 세트 디자인은 존 내피어, 프로듀싱은 카메론 매킨토쉬가 맡았다. 웨버가 1980년에 매킨토쉬를 만났고 매킨토쉬는 이들 스탭을 추천하였다. 존 내피어는 트레버 넌이 추천하였다. 이들은 이후에도 작곡가, 안무가, 프로듀서로(오페라의 유령), 연출과 작곡가(스타라이트 익스프레스, 송 앤드 댄스)로, 대본작가와 작곡가로 여러 뮤지컬에서 호흡을 맞추었다. 트레버 넌의 역할은 매우 컸다. 국립극장의 연출가가 상업연극의 연출을 맡는다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엘리엇의 미망인 발레리에게 저작권 승인을 받는 일 역시 어려웠다.

T.S. 엘리엇(출처:illstrationx.com)
T.S. 엘리엇(출처:illstrationx.com)

그녀는 대시인의 작품이 아무렇게나 다루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트레버 넌이라는 국립극장의 연출가가 합류하지 않았다면 발레리도 제작에 동의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웨버, 『자서전』,318). <캣츠>는 이들 스탭이 1년 동안 이루어낸 협동작업의 결실이었다. 하나의 아이디어는 그대로 수용되기도 하고 거부되기도 하였으며 치열한 토론을 거치기도 했다. 대본이 수용되지 않아서 라이스처럼 자존심이 상하는 경우도 있었고, 좋은 아이디어에 탄복하는 경우도 있었다. 흩어진 수많은 요소들을 통일성있게 결합하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시간은 늘 부족했다. <메모리>의 가사는 프리뷰 직전에야 완성되었다. 공연제작은 아무리 많은 시간이 주어져도 언제나 바쁜 작업이다. 그리고 제작비의 조달은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트레버 넌(Trevor Nunn)(출처:bbc.com)
트레버 넌(Trevor Nunn)(출처:bbc.com)

웨버는 2018년 70세를 맞아 자서전(Unmasked : A Memoir)을 썼다. 여기서 <캣츠>의 제작에 얽힌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는 처음부터 <캣츠>를 뮤지컬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틈틈이 시에 맞춰 곡들을 써 나갔고, 이렇게 여러 곡들이 모여서 <캣츠>의 넘버를 이루었다. T.S.엘리엇의 시를 뮤지컬로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은 우연한 기회에 떠올랐다. 1978년 웨버는 <에비타>의 리허설에 열중하고 있던 중에 제니 린덴이라는 여배우를 만났는데, 그녀가 시드몬턴 축제에서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시낭송을 하기로 되어 있으니 그에 맞는 곡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다음날 여배우 엘렌 페이지가 무도회 복장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걸 보고 T.S. 엘리엇의 시를 떠올렸다. 이 시는 웨버가 어릴 때 어머니가 자장가처럼 들려주던 시였다(『자서전』,267). 웨버는 1980년 1월에 카메론 매킨토쉬를 처음 만났다. 매킨토쉬는 손드하임의 팬이었고 락 음악에는 관심이 없었다. 반면 프로듀서로서 펀딩에 많은 경험이 있었다. 웨버는 엘리엇의 미망인인 발레리를 찾아가서 엘리엣의 시와 그의 음악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조언과 저작권 문제 등을 상의하였다. <캣츠>는 이렇게 많은 스탭들의 도움으로 시작되었다.

혼종
뮤지컬 <캣츠>의 창작방식은 파스티슈, 즉 혼종(pastische)이다. 이는 웨버의 모든 작품에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뮤지컬이라는 장르 자체가 강한 혼종적 경향을 지니고 있지만, 웨버는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하다. 19세기 중반 이후, 예술을 천재의 작품으로 보던 서양에서 예술은 개인의 창의성과 독창성에서 나와야 하고, 기술보다는 아이디어가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다른 사람의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모방하는 것은 독창성의 부족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창의성과 모방, 현재와 과거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문화에는 시간적. 공간적 단절이 거의 없고 늘 혼종하고 겹치며 타자와의 교류를 통해서 생산되기 때문이다.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 타문화의 장점을 빌려오는 일)나 표절 등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고립된 개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문화를 생산하기란 불가능하다. 모든 문화는 부지불식간에 다른 문화를 차용하고 있고 다른 문화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인류는 다른 문화의 전유와 차용, 모방과 혼종을 통해 발전해 왔다. 프레데릭 제임슨은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기에 혼종이 특히 강해졌다고 말하면서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지금까지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것은 이제껏 대학과 박물관, 화랑조직 그리고 재단들을 지배해 왔던 본격적인 모더니즘에 대한 특정한 반발로서 등장하였다. 우리는 조부모들에게는 추잡하고 놀라운 것으로 여겨졌던 이전의 파괴적이고 전투적인 스타일들 , 예를 들면 추상표현주의, 에즈라 파운드, T.S. 엘리어트 등의 위대한 모더니즘 시, 스트라빈스키,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등은 1960년대의 세대들에게는 기존의 전통이자 적으로서, 다시 말해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생명력이 없고 억압적이며 규범적이고 물화된 기념비로 간주되었다....’

제임슨은 두 번째의 특징으로 경계의 소멸을 든다. 대중문화와 고급문화 사이에 존재하던 구분이 사라지고, 고급예술과 상업적 형태들 사이에 경계선을 긋기가 곤란한 정도로까지 텍스트들은 통합되었다(할 포스터 편, 『반미학』, 177-178)』.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순히 특정 양식이 아니라 시대를 구분짓는 개념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만큼 혼종은 현대의 문화적 특징이 되었고, 순수주의는 과거의 미학이 되어버렸다. 난해한 모더니즘 예술, 박물관. 미술관. 극장에 갇혀 있던 고급예술은 대중적 예술로 바뀌었고, 혼종은 그 변화의 핵심적 동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은 서로 소통하게 된다. 대중으로부터 유리된 고급예술은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하고, 대중예술은 고급예술의 높은 예술성을 전유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문화의 혼종은 이루어진 것이다. 혼종은 반드시 포스트모더니즘만의 생산방식은 아니다. 21세기에 더욱 강화된 것일 뿐인데, 그것은 문화의 생산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차용할 수 있는 문화가 많아졌고 다양해졌고, 문화의 교류와 소통은 강해졌으며 소통의 기술이 급격하게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제임슨은 모더니즘 이후 더 이상 새로운 세계와 스타일을 만들어낼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자리에 혼종이 들어온 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제임슨의 분석은 웨버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혼종, 패러디, 전유, 암시 등이 있는데, 웨버는 이들 방식을 모두 사용한다. 웨버의 음악은 표절논란이 많았고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칸트리 음악이나 엘비스 프레슬리의 락 음악, 프랑스의 샹송 등을 사용하기도 하였고 ,오페라의 유령에서는 마이어베어와 모차르트의 곡들을 모방하기도 하였다. 또한 스트라빈스키와 프로코피에프도 차용했다는 비난이 일기도 했으며 <캣츠>의 메모리는 푸치니를 표절했다는 논란에 휩싸인다. 그래서 웨버를 혼종의 예술가(pastische artist)라고 부른다. 그에게는 독창적인 음악이 없고 오로지 다른 문화를 차용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웨버는 하루 저녁에 처음 듣는 음악을 계속 듣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하였다. 어떤 멜로디가 다른 맥락에서 연주되면 새롭고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것이  웨버의 음악전략이었다. 뮤지컬에서 이렇게 같은 곡을 반복하는 것을 리프라이즈(reprise)라고 말한다. <캣츠>에서 메모리는 몇 차례 반복되어 관객들의 기억에 깊이 새겨진다. 이로써 <캣츠>는 메모리와 동의어가 된다. 매킨토쉬와 탐 라이스 모두 웨버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관객은 또 단순하고 아름다운 멜로디를 선호한다.(『Megamusical』, 88) 웨버는 대중의 취향을 간파하고 이에 맞는 음악전략을 늘 구사하였던 것이다. 

'캣츠' 엠블럼
뮤지컬 '캣츠' 엠블럼

음악 중심성
웨버는 줄거리를 먼저 구상한 것이 아니라 음악을 먼저 작곡하고 나서 여기에 가사와 안무를 붙였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특이점이 있을 것 같다. 첫째로는 그가 처음부터 음악이 중심에 놓여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음악과 음악 사이에 대사가 삽입되면 곡의 흐름을 방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특이점은 그가 음악가이기 때문에 음악을 작곡하고 이에 맞추어 가사와 안무가 따라간 것이라는 점이다. 웨버는 자서전에서 작곡을 먼저 하는 일은 가사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로움을 준다고 하였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점일 수 있는데, 만약 작가가 먼저 줄거리와 가사를 써서 작곡을 의뢰했다면 서사중심적 뮤지컬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 순서가 절대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웨버는 늘 음악을 먼저 써 놓고 여기에 서사를 결합하는 방식을 택했다. 음악이 선행하느냐 이야기가 선행하느냐에 따라 제작의 방향이나 그에 따른 수고와 노력이 달라지게 된다.

반면에 작가는 음악의 구속을 받게 된다. 특히 <캣츠>는 엘리엇의 시에서 출발한 작품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창작하는 일은 작가의 중요하고도 어려운 몫이었다. 팀 라이스는 불과 36시간 만에 대본을 썼지만 넌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는 웨버와 매킨토쉬도 마찬가지였다. 넌은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고 했고, 스스로 이를 다시 썼다. 넌은 <캣츠>는 모든 등장인물은 고양이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고양이가 고양이에게 말하고. 고양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움직여야 하며, 고양이들끼리 싸우고 고자질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넌은 결국 T.S. 엘리엇의 황무지에서 따 온 이야기를 제안한다. 엘리엇의 시에서 출발하여 엘리엇의 다른 시로 이동한 것이다. 도덕이 무너져 황폐해진 현대사회를 풍자하는 내용이다. 드라마로서의 뮤지컬에서 서사가 누락되면 뮤지컬이 될 수 없을 거라고 본 것이다.    

창작순서와는 무관하게 <메모리>라는 대표곡(signature song)은 <캣츠>의 상징이 되었다. 넌은 뮤지컬에 극을 대표하는 곡, 관객들의 감정을 모으는 중심적인 곳이 필요하다고 하였고, 이 곡이 ‘감정의 중심(Emotional Center)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메모리는 뮤지컬 역사상 가장 많이 불리운 곡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푸치니의 표절이라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캣츠>의 성공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형식
웨버의 뮤지컬 음악은 대부분 성 스루 형식이다. 노래로 서사를 이끌어가고  대화체는 거의 없다. 이는 이미 <슈퍼스타>에서부터 시작되는데, 대사가 극의 진행을 방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거나 음악을 먼저 작곡하고 이에 가사와 안무를 붙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오페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다.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어 가사를 이해할 수 없다거나 레파토리가 다양하지 못해 늘 푸치니와 베르디 중심이라거나, 레치타티보가 전체의 흐름을 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반면에 성 스루도 비판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말로 해야 할 것까지 음악으로 하거나, 사소한 생각까지도 노래로 하는 것은 드라마의 전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그리자벨라와 듀테로노미(출처 : standard.co.uk)
그리자벨라와 듀테로노미(Grizabella & Deuteronomy(출처:standard.co.uk)

 

스펙터클
트레버 넌은 애초부터 대중의 흥미유발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판타지를 도입했고, 질리안과는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춤사위에 대해 논의하였다. 무엇보다도 스펙터클에 집중하였다. 처음으로 뮤지컬에서 와이어리스 마이크를 사용하였다. 와이어리스는 1964년부터 간헐적으로 사용되어 오긴 했지만 모든 배우가 장착한 것은 <캣츠>가 처음이었다. 이 때부터 영화와 유사한 음향이 가능하게 되었다. 음향설계는 극장의 장치와 구조에 의존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자연적 음향의 한계를 뛰어넘는 획기적 개선이 이루어졌다. 연극은 기술적 측면에서도 점점 영화를 재매개하게 된다. 극장을 가득 채우는 소리는 관객들에게는 처음 경험하는 스펙터클이었다. 특수효과와 장면의 자동전환 등 기술의 진보도 혁신적이었다.

cameron mackintosh
카메론 맥킨토쉬(Cameron Mackintosh(사진=thestage.co.kr)

무대는 전통적인 프로시니움이 아니라 반원형의 돌출무대를 만들었다. 넌과 내피어는 ‘세트보다는 환경’을 창조하려 했다. 뉴 런던 극장을 리모델링하는 데 90만 달러, 약 10억 원의 비용이 추가로 지출되었다. 브로드웨이 윈터 가든 극장도 2백만 달러, 약 22억원의 비용을 들여 리모델링하였다. 프로시니움 무대를 돌출무대로 바꾸었고, 그리자벨라의 승천장면을 위해 천정을 뚫었다. 넌은 오케스트라도 백스테이지에 배치했다.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바그너가 처음으로 오케스트라를 오케스트라 피트에 위치시켜 관객의 시선을 차단한 후, 아마도 처음으로 오케스트라를 무대뒤에 위치하게 한 공연이 아닐까.

고양이를 의인화하였기 때문에 세트는 이에 맞추어 세배는 크게 해야 했다.거대한 쓰레기장이 만들어졌다.


<캣츠>는 춤이 많고 춤은 <캣츠>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영국의 첫 댄스 뮤지컬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고 아예 신체극(physical dance)으로 부르기도 한다. 감정(emotion)보다 동작(motion)에 치중한 뮤지컬이다. 매우 역동적이고 에너지가 넘친다. 웨버와 매킨토쉬는 처음부터 춤이 <캣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많은 무용공연을 보면서 동작에 대해 연구하였다. 매킨토쉬가 질리안 린을 추천한 것은 그녀가 로열 발레의 발레리나 출신이기도 했지만 이미 여러 작품에서 탁월한 안무실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웨버는 로열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출신의 댄서를 영입하기도 하였고, 춤과 연기가 가능한 배우를 선발하기 위해 대대적인 오디션을 실시하였다.

웨버와 질리안 린(Webber & Gillian Lynne)(출처:telegraph.co.uk)
웨버와 질리안 린(Webber & Gillian Lynne)(출처:telegraph.co.uk)

음악과 춤의 역동성은 극장 전체의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한다. 질리안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전체적으로 춤이 많은 뮤지컬로 음악과 가사, 음악과 춤은 각자의 성격에 맞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음악과 춤은 분리된 음악이나 춤을 이어주거나 때로는 개별적인 노래와 춤을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각 장면의 표현은 명확해지고 강해진다. 둘의 관계는 보완적인 것이다. 매체의 상보성이다. 웨버의 각 넘버는 질리안의 안무로 강화되었다. 웨버가 탭 스타일의 보드빌 음악을 사용하면 질리안 역시 전통적인 탭 동작을 안무하였다(『Megamusical』, 149). 때로는 질리안의 안무가 전통적이고 모방적이며 반복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질리안은 발레, 모던 댄스, 재즈, 탭 댄스 등 다양한 춤을 도입하였고 고양이의 동작을 표현하기 위해 실제의 고양이의 동작과 행동을 면밀히 연구하였다. 이들은 모두 춤에 녹아들었고 ‘의인화된 환영’을 창조해냈다. 특히 질리안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춤장면은 13분간 계속되는 ‘젤리클 무도회’로, 이 장면이 성공하면 <캣츠>가 성공할 거라고 볼 정도로 춤의 역할은 컸다.  

레만은 연극은 정신적이고 지적인 구조로부터 격렬한 신체성의 노출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신체가 절대적인 요소가 되었다고 하였다. 신체는 물리적 육체와 역동적인 동작을 통해 공연을 지배한다. 강렬한 표현은 움직임과 아름다운 동작에 의해서 달성된다. 움직이는 예술인 연극에서 정적인 기호만으로 기의를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이것이 공연기호의 한계다. 그래서 최근 공연기호학은 공연을 분석하는 학문으로서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공연기호학은 움직이고 변화하는 기호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대위에 등장하는 모든 물질들, 기호들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창출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이보다는 연기와 춤, 노래 등의 동태적 움직임이 연극을 지배한다.  

질리안 린(1926-2018)은 오랫동안 발레리나, 안무가, 연출가, 배우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였는데, 무엇보다도 그녀의 뛰어난 업적은 <캣츠>와 오페라의 유령의 안무다. 2014년에는 대영제국의 2등급 훈장에 해당하는 DBE를 받았다. 그녀는 2018년에 서거하였다. 그러자 웨버는 1981년에 <캣츠>를 시작했고 1991년부터 그가 소유하고 있던 뉴 런던 극장, <캣츠>를 시작했던 유서깊은 극장의 이름을 질리안 린 극장으로 바꾸었다. 왕족 출신이 아닌 여성의 이름을 딴 첫 극장이다.

<캣츠> 비판
1960년대에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 등이 미국에서 일으킨 영국 대중음악붐을 영국침공(British Invasion)이라고 한다. 특히 비틀즈의 인기는 실로 엄청났고,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강타했다. 비틀매니아(Beatlemania)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센세이셔널한 인기를 얻었으며, 연일 언론에서는 비틀즈를 대서특필했다. 1950년대에 미국의 락 음악이 영국에 건너가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는데, 역으로 10여년 만에 영국의 대중문화가 미국을 점령한 것이다. 영국침공은 1980년대에 다시 뮤지컬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평론가들의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슈퍼스타>나 <에비타>가 그 동안의 뮤지컬과는 판이하게 다른 형식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비타에 대해서는 ‘ 악취’, ‘쓰레기’와 같은 비판이 쏟아졌다. 미국의 평론가들은 영국의 메가뮤지컬을 비판할 때 독창성의 결여를 지적해 왔다. 반즈(Barnes)라는 평론가는 영국의 뮤지컬은 뮤지컬이 아니라는 독설을 날렸는데, 그것은 이미 과거에 있었던 노래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이야기도 과거의 이야기를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즈는 또한 환상적인 세트와 시각적 스펙터클은 초라한 플롯과 서사를 은폐하기 위한 장치라고 비판한다.  

작품과 배우에 대한 비판도 많았지만, 최종적인 비판은 언제나 웨버와 라이스에게로 향했다. 웨버는 자서전에서 ‘그 어떤 독설도 이보다 심할 수는 없었다’고 불편함을 토로하였다. 존 사이먼이라는 평론가는 뉴욕이라는 잡지에  ‘<슈퍼스타>와 <에비타>에 열광하는 이 친구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이들(예수와 페론)의 공통점은 33살에 죽었다는 사실뿐이다. 아마도 웨버와 라이스도 같이 사당에 모셔야 할지도 모르겠다’ 라고 썼다. 그러나 에비타는 토니상 11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고 7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객석은 늘 만석이었다.  

<캣츠>에 대한 비판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평론가들의 힘은 작품의 성패를 좌우할 정도로 컸는데, 특히 ‘브로드웨이의 백정’(Butcher of Broadway)이라고 불리운 뉴욕 타임즈의 프랭크 리치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리치는 브로드웨이에서의 흥행성공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지만. 지방의 공연을 오프 브로드웨이로, 오프 브로드웨이의 공연을 브로드웨이로 끌어올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있었다. 리치는 런던에서 <캣츠>를 이미 보았고 관객들의 반응을 알고 있어서인지 신랄하게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이야기가 부족하고 플롯이 없다고 비판하였다. 스펙터클을 비판하는 평론가가 많았는데 조명과 스펙터클한 세트가 흥미롭기는 하지만 너무 크고 장면전환이 빠르고 거대한 소리가 관객을 피곤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스펙터클과 이야기를 연결하기가 쉽지 않고, 어떤 동작은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지루함을 주며, 작품의 깊이가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었다. 급기야는 이런 평론까지 나왔다. ‘<캣츠>는 개다’. 그러나 관객들은 <캣츠>에 열광했다. 사전판매만 620만 달러에 달했다.

질리안 린 극장(출처 : alamy.com)
질리안 린 극장(출처:alamy.com)

 

- 영혼없는 장사꾼
<캣츠>의 제작비는 당시로서는 매우 컸다. 영국에서는 제작비가 290만 파운드9(약 45억원)가 소요되었는데, 초기제작비 45만 파운드(7억원 정도)를 조달하기가 어려웠다. 당시의 투자자들은 <캣츠>에 부정적이었다. 웨버는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렸다. 웨버는 회상하기를 만약 <캣츠>가 실패했다면 파산했을 거라고 하였다. 나중에는 신문에 광고를 게재하여 개인투자자 220여 명으로부터 투자를 받았다. 투자수익률은 35배였다. 런던에서의 성공은 뉴욕에서의 성공을 확신케 하였다. 뉴욕제작비도 그 때까지의 뮤지컬 제작비 중 가장 많은 550만 달러(약 60억원)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41주(10개월)만에 제작비를 회수하였다.
웨버는 20세기에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곡가로 꼽힌다. 그의 작품은 세계 148개국에서 공연되었거나 공연되고 있으며 3억 명 이상이 관람하였다. 웨버가 설립한 RUG는 세계 각국의 라이센싱과 순회공연, 영화 제작등을 관리하고 있고, 6개의 극장도 소유하고 있다. 웨버의 현재 자산은 12억 달러, 한화로 약 1조 3천억원으로 추산되고 있다(자료:celebritynetworth.com). 그런 웨버에게 ‘영혼이 없는 돈벌이 기계’라는 좋지 않은 별명이 붙어 있기도 하다.

웨버는 <캣츠>에서 돈을 벌기 위해 그동안의 마케팅과는 다른 방식을 택했다. TV 광고를 적극적으로 실시하였고, 뉴욕 시내에 대량의 포스터를 부착하였고,  엠블럼을 만들어 작품의 상징으로 삼았다. 고양이의 두 눈을 상징하는 두 개의 노랑색 구멍인데 이는 매우 미니멀한 디자인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후 엠블럼의 제작은 뮤지컬 홍보의 트렌드가 되었다. 또한 그간의 뮤지컬은 주로 성인들 대상이었지만 <캣츠>는 모든 계층이 관람할 수 있는 뮤지컬이라는 홍보를 통해 관객층의 확장을 꾀했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마케팅도 강화하였다. 현재 브로드웨이의 관객구성을 보면 관광객이 약 35% 내외를 점하고 있는데, 이는 80년대 이후에 발생한 현상이다. 지금까지의 총수입은 조금씩 통계마다 다른데 티켓 판매수입만으로 28억 달러, 원화로 3조원 이상을 올리고 있다(자료:Wikipedia). 아마도 여기에 영화나 머천다이징이나 다른 라이센싱 수입까지 합하면 이는 더욱 커질 것이다.
      
공연산업에 미친 영향

   - 브로드웨이
미국 뮤지컬은 1940년대부터 60년대 중반까지 호황을 맞는데, 이 시기를 뮤지컬의 황금시대라고 부른다. 이를 주도한 제작자는 작곡가 리차드 로저스(1902-1979)와 작사가겸 극작가 오스카 해머스타인 콤비로 오클라호마(1943), 캐러셀(Carousel 회전목마, 1945), 남태평양(1949), 왕과 나(1951), 사운드 오브 뮤직(1959) 등 현대인들에게도 익숙한 히트작품들을 연이어 내놓았다. 이들은 노래, 춤, 연기를 잘 결합한 북 뮤지컬의 원형을 만들어냈고 후대의 창작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들 작품들은 토니 상을 비롯한 많은 상을 받았고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오클라호마는 1943년부터 1948년까지 2,212회, 캐러셀은 1945년부터 1947년까지 890회를 공연하는 롱런을 하였다. 

그러나 1964년에 제작된 지붕위의 바이올린 이후 뮤지컬 산업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심각한 침체기에 접어든다. 1968년도의 관객수는 1천만 명 정도였고 1972년에는 500만 명으로까지 떨어진다. 이는 뮤지컬 역사상 최악의 관객이었다. 1975년도부터 다시 부활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15년 동안 롱런한 코러스라인 덕분이었다.(자료:variety.com).  

1970년대 후반부터 뮤지컬은 ‘ 신황금시대’를 맞이한다. 이를 주도한 건 웨버였다. 1980년대부터 연이어 히트한 <캣츠>, 오페라의 유령, 레미제라블, 미스 사이공 등의 뮤지컬은 브로드웨이를 거대한 공연시장으로 만들었다.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난 미녀와 야수, 라이온 킹 등의 디즈니 뮤지컬과 렌트, 2000년대 이후의 맘마미아 위키드, 북 오브 몰론, 해밀톤 등으로 이어지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시장은 더욱 커지고 있고 세계인이 찾는 엔터테인먼트의 메카가 되었다.  

   - 독일
독일에서 <캣츠>는 함부르크 오페레텐하우스에서 1986년 4월부터 2001년 1월까지 6,100회의 공연을 하였고, 600여만 명의 관객이 관람하였다. 첫 5년 동안에 관광객이 연간 100만명이 증가할 정도로 <캣츠>는 대단한 인기를 모았다. <캣츠>는 독일에서 뮤지컬 붐을 일으켰고, 함부르크는 유명한 뮤지컬의 도시가 되었다. <캣츠>는 또 독일어권에서 뮤지컬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레파토리 연극에 머물러 있던 당시의 공연산업을 민간투자에 의한 상업적 연극으로 바꾸어놓음으로써 산업의 변화까지 일어났다. 함부르크와 비엔나에서의 성공은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독일어권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뮤지컬 극장 건설붐이 일어서 많은 극장이 건설되었다. 이후에도 슈투트가르트, 뒤셀도르프, 베를린 등 각 지역에서도 공연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독일은 미국 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의 뮤지컬 시장이 되었다.

   - 일본
<캣츠>의 영향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대단히 컸다. 극단 사계는 일본의 대표적인 뮤지컬 기업이 되었다. 아사리 게이타는 이미 1970년대부터 뮤지컬을 제작하기 시작하였고 코러스라인(1979년),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콘택트 등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공연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들 작품들은 극단의 경제적 사정을 약간은 개선하였지만 결정적인 기여를 하지는 못했다. 아사리가 도약한 것은 <캣츠> 덕분이었다. 이미 아사리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슈퍼스타(1973년, 1976년, 1987년)>와 <에비타(1982년 3-4월, 닛세이 극장)>를 공연한 바 있어서 웨버와는 친숙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캣츠>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세계적인 화제가 되자 그는 런던으로 날아가 웨버와 공연권에 대해 합의하고 1년간의 롱런을 목표로 공연준비에 들어갔다.

가장 큰 문제는 자금문제였다. 1년간의 롱런을 할 수 있는 극장을 빌리기가 불가능하였다. 아사리는 신쥬쿠역 서편출입구 건너편에 텐트극장을 짓기로 한다. 극장건축비를 포함하여 인건비, 운영비 등 초기비용만 8억엔, 원화로 100억원 가량이 소요되었다. 이는 사계로서는 운명을 건 모험이었다. 일본 속담에 ‘떡은 떡집’이라는 속담이 있다. 각 분야에는 전문가들이 있고 그 전문가들을 잘 찾아야 된다는 말이다. 아사리는 광고, 홍보, 자금, 건축 등의 전문가들을 찾아다녔다. 아사리가 쌓아놓은 정치계 인맥도 동원하였다. 그는 나카소네, 이시하라 신타로 등 우익의 거물정치인들과의 친분도 이용하였다.

일본의 '캣츠' 전용극장(출처 : shiki.jp)
일본의 '캣츠' 전용극장(출처:shiki.jp)

1983년 11월 1일부터 시작된 도쿄공연은 1984년 11월 10일까지 474회의 공연을 끝으로 일단 막을 내렸다. 마지막 날의 낮공연에서는 20회가 넘는 커튼콜이 계속되었고 저녁공연에서는 모든 관객이 기립박수를 하였고 15분간이나 커튼 콜이 이어졌다. 이 날 극장을 찾은 웨버는 다음과 같이 인사말을 했다.  "멋진 공연이었습니다. 내 작품이 일본에서 공연되었습니다. 3년 전부터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언젠가는 런던에서 이 캐스팅으로 공연하고 싶습니다. 행정당국이 텐트극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면 이 극장을 통째로 사가지고 가고 싶습니다."

이후 <캣츠>는 오사카, 후쿠오카, 다시 도쿄, 나고야 , 후쿠오카, 삿뽀로 등 주요도시에서 공연을 계속하였다. <캣츠>를 가장 많이 공연한 나라는 영국이 아니라 일본이다. 일본에서는 2019년 3월 12일에 1만회를 넘어섰다. 2년 전에는 도쿄 시나가와 오오이마치에 <캣츠> 전용극장을 건설하였고 코로나 바이러스에도 불구하고 공연을 재개하였다. 
<캣츠>는 일본의 공연산업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작은 극단에 불과하던 사계가, 늘 언제 파산할지 모르는 위험속에 있던 연극 극단이 일본을 대표하는 극단으로 성장한 것은 전적으로 <캣츠>의 힘이었다. 이후 일본에도 뮤지컬 붐이 일어난다.    

<캣츠>는 메가뮤지컬의 본격적인 개막을 알린 작품으로, 그 이후의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등의 길을 닦았고 이를 통해 뮤지컬 산업, 나아가서는 공연산업이 진일보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 웨버는 그 동안의 뮤지컬 문법을 버리고 매체사용법의 혁신, 대중친화적 문화의 도입, 타문화의 전유와 혼종을 통해 새로운 뮤지컬을 창안해 냈다. 문화의 혼종과 전유는 현대문화의 특징이다. 우리는 서커스에서의 문화혼종의 경향을 살펴본 바 있다. 태양의 서커스는 차용할 수 있는 모든 콘텐츠를 빌려왔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타문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문화와 예술은 천재성으로 가득한 개인이 고립된 섬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협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웨버는 21세기의 문화경향을 선취하여 뮤지컬에 도입하였던 것이다.  

웨버는 영국 왕립음악대학에서 클래식을 전공한 클래식 전문가로, 프로코피에프와 락 음악을 동시에 좋아하였다. 영화 <남태평양>과 <토스카>에 등장하는 마리아 칼라스를 좋아했다. 그러나 브로드웨이는 그의 클래식 음악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웨버는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을 결합하는 혼종을 택하였다. 트레버 넌은 로열 세익스피어 극단의 연출가로서, 순수연극에 전념해 왔고, 질리안 린은 로열 발레의 발레리나 출신으로 역시 순수예술 전공자였으며 존 내피어도 순수예술의 세트 디자인에 많은 경험을 지닌 관록있는 디자이너였다. <캣츠>는 순수예술의 높은 예술성과 대중적 감수성이 결합된 작품이고, 이를 통해 공연산업은 글로벌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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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로이드 웨버(출처:varie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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