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나키즘이다: 회화의 해방, 몸의 자유’
‘나는 아나키즘이다: 회화의 해방, 몸의 자유’
  • 서봉섭 기자
  • 승인 2020.10.08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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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표 화가의 모모미술관 7회 개인전
작업실에서 김상표 작가 / 사진=더프리뷰 서봉섭 기자
작업실에서 김상표 작가 / 사진=더프리뷰 서봉섭 기자

[더프리뷰=인천] 서봉섭 기자 = 김상표 작가는 삼례문화예술촌(대표 심가영.심가희) 모모미술관의 초대를 받아 11월 1일(일)-14일(토)까지 7회 개인전을 개최한다. 김상표 화가는 이번 전시회의 제목으로 ‘나는 아나키즘이다: 회화의 해방, 몸의 자유’라는 상당히 무거운 주제를 들고 나왔다. 중력의 악령에 사로잡힐 듯한 그 엄숙한 주제를 작가는 뜻밖에도 ‘춤’이라는 경쾌한 이미지들을 가지고 풀어간다. 춤은 사회적 코드에 옭아매여져 왔던 우리의 몸을 완전히 해방시킬 수 있기에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다(바디우, 비미학, 110쪽). 그래서 니체 역시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라는 아름다운 정의를 춤에 헌사하지 않았던가? 

김상표_EROS_캔버스에 유채_193.9×390.9cm_2020
김상표_EROS_캔버스에 유채_193.9×390.9cm_2020

모모미술관 7회 개인전에서 김상표 화가는 몸 이전의 몸인 춤의 사유이미지를 빌어 회화에 가해졌던 기존의 규정들과 권력에 예속화된 몸을 철저히 해방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김상표 화가의 태도는 결국 그것이 내용(주제)이든 형식(스타일)이든 예술에 대한 모든 정체성과 동일성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예술의 아나키즘 전통과 맞닿아 있다. 김상표 화가는 ‘창조적 무’, ‘회화의 해방’, ‘몸의 자유’ 등 3개의 핵심키워드를 가지고 삼례문화예술촌 모모미술관에서 열리는 이번 7회 개인전의 의미를 아래와 같이 친절하게 설명한다. 

김상표_아나키즘3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0
김상표_아나키즘3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0

나는 창조적 무(creative nothing)이다   

“리비도의 억압은 항상 리비도적으로 투자된 억압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리비도는 억압과정에서 절대적으로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예속화하는 도구가 된다. …. 더욱이 도덕적 금지, 특히 그의 육체에 등을 돌리는 금지는, 그 금지가 구속하려는 육체적 활동에 의해 유지된다(버틀러, 권력의 정신적 삶, 119쪽).” 예속이 주체를 생산하지만 예속의 의도하지 않은 효과로 유지되는 리비도적 욕망과 몸(신체)에 기대어 주체의 해방이 시작된다.

경영과 철학의 모험을 거쳐 예술의 모험에 이르는 나의 궤적은 리비도적 욕망과 몸에 등을 돌렸던 ‘주체’인 나를 다시 ‘개인’으로 돌려세우는 과정이었다. 이 개인을 니체의 말로 표현하자면, 몸 그 자체인 자기(das Selbst)이다. 이러한 원초적 신체에 권력이 파고들어 타자(들)의 욕망을 기입한다. 그리하여 몸은 억압적,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에 의해 포획되어 수많은 자아들을 생산하며 자본주의적 편집증의 억압 속에서 여러 갈래로 분열된다. 자기라는 하나의 몸 속에 다양한 이율배반적 자아들이 또아리를 튼 것이다. 이것들은 타율적으로 기입된 것이라 할지라도 이제 자기의 일부를 구성하게 되었기에 한편으로는 나인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원초적 자기에 의해 생산된 것이 아니기에 내가 아니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권력의 개입뿐만 아니라 자아의 일정한 능동적 개입도 함께 작용하는, 이중적으로 엇물린 복잡한 과정을 경유해서 주체가 형성된다는 주장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나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니기도 한 수많은 자아의 흔적들, 이것들을 화가-되기의 과정에서 그리면서 지워가는 회화적 고투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자기인 원초적 몸을 향한 아우성이었다. 억압적,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에 의해 강제되고 훈육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수많은 나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길들여지지 않고 야생적으로 남아 있는 몸인 자기(잠재적으로 또다른 수많은 나들)가, 서로 싸우고 화해하고 또 싸우기를 반복하는 장으로 내 회화는 불려 나와져 있다. 무엇보다 나는 ‘불합리와 무의미의 놀이 공’ 같은 창조적 무의 공백상태에 이르기를 욕망한다. 

김상표_푸른난장3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0
김상표_푸른난장3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0

회화의 해방   

예술이라는 통일체에서 하나의 부분으로만 머물러 있던 회화를 유기체적 억압에서 해방시키고자 한다. 또한 회화에 대해 이전에 선취되었던 모든 주의와 주장에 대한 판단중지를 요청한다. 새로움의 옷을 걸치고 있지만 자칫 이전의 주의와 주장들을 반복하고 마는 것에 대한 수행적 절박함 속에서 이 판단중지는 이루어진다. 결국 나름의 방식으로 미술사를 다시 쓰면서 자기 회화를 찾아갈 수밖에 없다는 한계 앞에서, 이러한 판단중지는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얼마나 역설적인 상황인가? 나의 아나코 회화는 다음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봄은 봄이 봄이다’라는 ‘봄의 나르시시즘’ 상태에서 지각대상에 전염된 채 감응에 겨워 온 몸으로 춤을 추며 그 표현대상의 강도를 선과 색의 리듬으로 질료적 감각덩어리에 담아내는 복합적 사건이 나의 그림이다. 이때 나는 스스로 자기조직화하는 욕망기계인 몸으로서 그림, 음악, 춤이 모호하게 혼재된 사건을 만들어내는 리좀적 다양체이다. 나는 그림-사건을 겪는 과정에서 시각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포함하여 우주의 몸이 담고 있는 모든 감각에 관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로써 나의 그림은 우주적 몸들의 힘과 쾌락을 통과시키는 이미지가 된다. 요컨대 이제 화폭 안팎의 연기의 망 속에서 발생한 그림-사건은 수많은 해석과 촉발을 기다리는 감각덩어리로서 몸(살)인 셈이다.

그렇다면 수행성으로서의 화가-되기를 욕망했던 나는 회화를, 나의 삶을 진정 해방시키기에 이른 것인가? 들뢰즈의 입을 빌려 니체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예술은 회복시키지도, 진정시키지도, 승화시키지도, 사심을 없애지도 않으며, 욕망도, 충동도, 의지도 <중지시키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예술은 <권력의지의 자극제>, <의욕의 흥분제>이다(들뢰즈, 니체와 철학, 185쪽).” 이러한 관점에서 조망해 볼 때, 나의 화가-되기는 삶의 활동성이자 힘에의 의지로서 타자의 긍정적 삶을 촉발시키는 창조의 미학이자 실존의 미학인 셈이다. 그런데 예술가에게 자신의 삶의 활동성은 가상(회화에서는 이미지)으로 결과된다.

들뢰즈에 따르면 예술가에게 가상은 현실적인 것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선택, 수정, 증가, 긍정을 의미한다. 이런 방식으로 예술은 거짓을 우월한 이상으로 고양시킨다(들뢰즈, 니체와 철학, 187쪽). 눈을 돌려보면 형이상학, 종교, 도덕, 과학, 이것들 또한 우리의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거짓말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결국 인간 자신은 실재, 진리, 본성의 일부이다(슈스터만, 삶의 미학, 322쪽). 니체와 들뢰즈의 목소리가 내게 위안을 준다. 이리하여 나의 화가-되기는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의 추구라는 오랜 중압감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숨막혀 들어오는 허무주의 깊은 질병에서 살짝 비켜서서, 이제야 비로소 삶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창안하는 수행의 기쁨을 향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상표_푸른난장7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0
김상표_푸른난장7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0

몸의 자유   

나는 그리기 대상의 형태와 구조를 미리 확정하는 스케치를 하지 않는다. 최초의 선을 긋고 색을 칠하면서 이것과 접속하는 다른 선과 색을 찾아간다. 연이어서 특정한 선과 색은 다른 수많은 선과 색들에 열린 채로 리좀적 접속을 계속한다. 서예필법과 검법이 녹아든 붓질과 열 손가락의 본능적인 할큄이 캔버스를 흩고 지나가는 가운데 선과 색이 얼기설기 얽혀서 불규칙한 흐름이 형성된다. 그러다가 이질적인 선과 색의 리듬들에 의해 형성된 패턴이 나의 공감각과 공명하는 어느 순간, 내 몸이 스스로 그리기를 멈춘다.

이처럼 리좀적 접속을 통해 도달하려는 목적지는 사전에 설정되어 있지 않고 과정을 통해서 늘 잠정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동일성(재현)에 사로 잡힌 그림-기계인 화가는 사전에 의도되고 계획되고 프로그램화된, 하나의 코드화된 기계로서 관념에 예속된 노예이다. 이러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지식인인 나를, 그렇게 절규하는 나를 통해 회화 또한 동일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동일성의 관념으로부터 해방된 창조적 무의 상태에서 (어쩌면 사유와 하나된, 아니면 사유 이전의) 몸(살)의 감각에 모든 것을 맡긴 채 시시각각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선과 색으로 물들이며 그림-사건을 창안하는 과정이 수행성으로서 나의 화가-되기이다. 그렇기에 이것의 결과는 ‘회화 아닌 회화’, ‘비회화의 회화’이다. 결과물 없는 결과이자, 몸에 기입된 권력을 지워가는 자기 극복의 과정이자, 차이와 다양성의 생성의 놀이이자, 원초적 생명으로 복귀하는 운동으로서, 다의적 의미들이 교차하는 지점이 나의 회화이다.

이러한 수행성으로서 화가-되기 과정을 통해 나의 몸은 무거운 짐을 벗는다. 재현에 포박되어 있는 그림-기계이기를 거부하고 수많은 변신을 거듭하는 삶의 기계임을 선포한다. 여기서 나의 그림그리기의 정치적 효과가 발생한다. 감상-주체에게도 원초적 신체를 떠올리게 하면서 그(그녀)를 감각과 사유의 무정부적 상태로 만든다. 원초적 몸(신체)에 배태된 아나키즘적 리비도의 떨림을 경험함으로 인해 그(그녀)의 견고했던 정체성은 해체되고 말 위험에 처한다. 그렇다면 너와 나, 우리는 몸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 니체, 들뢰즈에 의존해서 나의 수행성으로서 화가-되기를 좀더 해명해보자.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조차 알지 못한다. 에티카 3부의 증명2에서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사람들이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혹은 그것의 본성에 대한 유일한 고찰로부터 무엇을 연역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며, 그들이 정신의 인도 없이 스스로 생산할 수 있으리라 단 한 번도 생각할 수 없었을 무수한 것들이, 그 본성의 유일한 법칙들로부터 생겨남을 경험으로 확인하고 있음을 이미 보여주었다(들뢰즈, 니체와 철학, 85쪽에서 재인용).” 내가 수행성으로서 화가-되기를 실연하는 과정에서 몸의 적극적 힘들은 정말로 신체를 하나의 자기 자신으로 만들고, 그 힘에의 의지는 자신을 우월하고 경이로운 것으로 만들어낸다. 신체가 품은 창조적 무의 변신의 힘, 즉 조형적 힘이 디오니소스적 권력의 활동성으로 드러나게 된다. 니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형제여, 네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너의 작은 이성 또한 너의 신체의 도구, 너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놀잇감일 뿐이다(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52쪽).” 요컨대 관념(혹은 의식)에 대한 신체의 고귀함과 우월성이 고스란히 담긴 자리에 나의 예술활동으로서 그림-사건의 흔적이 배어 있다. 

김상표_디오니소스춤1_캔버스에 유채_162.2×260.6cm_2019
김상표_디오니소스춤1_캔버스에 유채_162.2×260.6cm_2019

주체화, 의미화, 유기화를 거부하는 구조적 장으로서 김상표 작가와 함께 발생한 그림-사건은 지금 우리를 매끄러운 공간으로 초대하여 환대한다. 우리는 코드화된 감각과 사유에서 해방되어 감각할 수 없던 것을 감각할 수 있게 되고 사유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을 사유해야만 하는 곳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창조적 무의 무한한 기쁨은 알려지지 않은, 그래서 알지 못하는 상태, 빛과 어두움 그마저의 구분조차 도래하기 이전의 세계와 함께 주어진다. 원초적 불안정성으로서의 애매함과 모호함이 그것이다. 그곳에서는 우리의 고유성이 와해되고 신체의 무정부성만이 난무한다. 그야말로 무법과 혼돈의 경계이다. 우리는 갈 곳 잃어 울부짖는 한 마리 짐승으로, 의미의 세계를 상실한 태초의 한 인간으로, 어쩌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단독자인 신으로 고독하게 서 있다.

김상표_무용수1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9
김상표_무용수1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9

그렇다면 김상표 화가가 지향하는 미학적, 윤리적 삶이란 대체 어떠한 것인가? 작업노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수행성으로서 화가-되기를 통해 나는 한편으로는 세계에 저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를 긍정함으로써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고 싶다. 이런 점에서 나의 화가-되기는 저항과 자기형성의 특수한 존재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예술로서의 삶을 지향하는 것이 나의 미학적 윤리인 셈이다. 우리의 삶을 규범화하는 권력관계들의 촘촘한 그물망이 교차하는 장소가 우리의 몸이다. 이것을 문제화하고 나와 타자의 예술적 주체성을 생산하는 미적 방안들을 창안하는 과정 그 자체가 나의 예술활동이기를 소망한다. 이러한 예술활동은 ‘기쁨의 저항’ 형식으로서 나의 삶의 존재방식이 될 것이다. 이것이 니체가 자유로운 정신으로 즐거운 학문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자, 이 사람을 보라! 나만의 고유한 아나코 예술의 스타일과 주제들을 채굴해가면서 나의 몰락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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