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무용영화 투르기’를 위한 제언
[칼럼] ‘무용영화 투르기’를 위한 제언
  • 김광익 문화기획자
  • 승인 2020.11.01 12: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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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이라는 예술장르에 있어 영상은 어떤 존재인가?
샌프란시스코 발레단의 댄스필름, 'Dance of Dreams'의 한 장면(사진=youtube.com)
샌프란시스코 발레단의 댄스필름, 'Dance of Dreams'의 한 장면(사진=youtube.com)

[더프리뷰=서울] 김광익 문화기획자 = 영상(영화, 드라마)은 기존의 예술로 인정받은 많은 분야의 사람들에게 논란의 여지가 많은 장르이다. 혹자는 예술이 아니다, 혹자는 독자적인 예술적 표현을 해내고 있으므로 예술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최초의 영화로 인정받는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은 기존 사회의 인식을 뛰어넘는 ‘가상현실’의 첫 발자국을 내디뎠다. 당시 기차 오는 장면이 암전 속에 갑자기 나오자 이를 보던 많은 이들은 깜짝 놀라 도망을 했고, 아직 예술의 경지라기보다 과학과 예술의 경계를 구분 짓기 애매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영상이 예술적 경지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기법이 도입되면서일 것이다. 각기 다른 화면을 연결함으로써 제3의 감흥을 만들어 낸 그의 대표작 <전함 포템킨>은 단순한 현실을 기록한 카메라의 기능을 뛰어넘어 연출자가 전하고자 하는 감흥이 의도적인 편집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기존의 예술에서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감흥을 맛보게 한 것이다. 이후 D. W. 그리피스의 블로킹을 통한 심리적 벡터를 비롯, 여러 기술실험을 통해 영상은 독자적 예술의 경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전함 포템킨' 중 오뎃사 계단 장면(사진=wikipedia)
'전함 포템킨' 중 오뎃사 계단 장면(사진=wikipedia)

영상의 핵심은 ‘사실과 왜곡’이라 할 수 있다
영상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뿐 아니라 샷, 앵글과 조명, 음향, 커트의 조합에 따라 전혀 다른 내용을 전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상의 기능 중 사실적인 부분을 중시하는 이들은 다큐멘타리라는 장르를 발전시켰고, 왜곡의 기능을 십분 활용하고자 하는 이들은 영화와 드라마라는 분야에서 최대한 활용하였다. 여기까지가 과학기술에 의해 태어난 카메라의 분화 1기라 할 수 있다.

리얼리즘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영상은 사실과 왜곡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속성을 지니고 있다. 작가가 마음 먹은 대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도 있고, 더러는 같은 상황을 자신의 의도된 장면과 편집, 기타 효과를 통해 전혀 다른 내용을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것이다.

흔히 영상에서 사실주의 또는 표현주의(독일 칼리가리 박사의 <캐비넷>-향후 공포영화로 발전됨), 기타 장르가 분화하게 된 상황은 아이러니하게 이 모순에서 출발한다. 대표적으로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은 현실의 피폐함을 외면한 채 귀족들과 부유층의 삶에 대한 환상을 대변한 소위 백색전화(거품 욕조에서 당시 부의 상징인 하얀 전화를 받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의 통칭)에 반해 전후 이탈리아 서민들의 삶을 대변한 <자전거 도둑>이나 <길> <신화> 등이 현실을 통찰하려는 젊은 영화감독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와 같은 일들이 벌어질 수 있었던 데는 찰리 채플린의 영향을 지나칠 수 없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중 한 장면(사진=youtube.com)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중 한 장면(사진=youtube.com)

그는 단지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통해 웃음을 주는 것만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와 페이소스를 그 특유의 분장을 통해 배가시킨 천재였기 때문이다. 영상이 예술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을 기록함에 있기보다는 사실적 기록을 바탕으로 편집과 기타 예술적 요소를 융합하여 다른 장르에서 느낄 수 없는 감흥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영상을 통한 무용의 상업적 성공은 가능한가?
영상은 기술뿐만 아니라 사회의 변화에 따라 더욱 세분화되고 발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영상언어’라는,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영역이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뮤지컬이나 음악을 소재로 한 많은 영화들이 투자한 만큼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를 관객의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팬데믹 상황에서 주목할만한 결과들이 있다. 뮤지컬의 경우 값싼 유료 비용을 책정했을 때 더 많은 관객들이 참여했다는 점이다. 관계자들도 예상치 못한 이런 결과는 앞으로 질 높은 동영상을 통한 콘텐츠가 기존의 전통적인 극장 관객을 통한 수익 구조를 바꿀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쩌면 공연예술계로서는 기존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비즈니스 모델을 넘어 새로운 블루오션을 만날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예술영화, 관객이 문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화는 ‘사실과 왜곡’이라는 상반된 기능을 통해 만들어 낸 제3의 언어이다. 흔히들 무용을 가장 원초적 언어인 ‘몸짓’을 통해 표현하는 예술이라 말한다. 대부분의 예술이 그러하듯이 최초의 예술은 신과 연관되어 있다. ‘북(鼓)’으로부터 시작된 신과 교통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벽화로 표현된 미술처럼 무용 또한 신에 대한 인간의 생각과 무관치 않다. 헬레니즘을 거치고 인간 중심의 세상으로 들어오면서 신보다는 인간을 중시하면서 모든 예술은 신보다 인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현대무용이 인간의 내면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을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조리’, ‘고정관념’, ‘병적 정신증세’ 등,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많은 예술가들의 다양한 소재이다. 많은 작가들이 밤을 지새우며 만들어 낸 많은 작품들이 관객들에게 바르게 전달됐나는 차치하고, 그 메시지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전파되었는지도 생각해 볼 문제다. 전파라는 부분에서 대중적 파급력과 예술로서의 영상이 재평가되어야 한다. 왜 가장 원초적인 공연이 가장 최근에 예술로 인정받고 있는 영상을 통해서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가? 이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기술적 매체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의문점으로만 남을 것이다.

1. 카메라의 눈은 사람의 눈과 비슷하다

카메라는 인간과 비슷하지만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제 자리에 앉아 볼 수 있는 각도는 최대 120도이다. 삼성, LG가 자랑하는 OLED HD 고화질이라 해봐야 72도를 넘지 못한다. 그리고 아무리 고 해상도라고 해도 사람의 눈이 식별할 수 있는 조도의 차이를 제대로 만들어 낼 수 없다. 따라서 현장에서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과 영상을 통해 보는 화질과 조도의 차이는 클 수 밖에 없다. 이를 보정해 주지 않고 현장의 상황을 그대로 고집한다면 당연히 어둡거나 명암의 빠르기가 급해져서 본래 작가가 생각했던 무대는 만날 수 없다. 조명이 충분하지 않으면 줌렌즈를 사용했을 시 포커스가 흔들릴 위험이 커진다. 동시에 줌으로 피사체를 당겼을 때는 뒷 배경이 흐릿하게 변하게 된다. 더러는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여 새로운 미적 영상을 만들어 낼 수도 있지만 공연장에서 관객이 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2. 영상에 담는 순간 내 아이가 아니다

영상은 선천적으로 노안에서 출발했다. 눈이 나쁘면 안경을 쓰고 라식 수술을 통해 시력을 회복하려 하듯이 현재 기술의 발달 과정은 이 아이의 눈을 제 나이대로 돌려주기 위한 노력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 아이를 불쌍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인간의 눈과 달리 보다 더 많은 것을 표현해 낼 뿐 아니라, 심지어 보이지 않는 것까지 느낄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있다. 줌 기능을 통해 자신이 보고자 하는 세밀한 것도 볼 수 있으며, 달리(Dolly)를 통해 무용수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면의 세계로 접근할 수도 있다. 심지어 다양한 앵글을 통해 신에 대한 경외감, 인간의 나약함과 지미집, 드론 샷, 스태디 캠을 통해 인간이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복합적이고 다양한 감정을 표현해 내기도 한다.

 

‘무대의 공연을 있는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한다는 욕심으로 영상을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카메라 렌즈를 통하는 순간, 이미 작가의 생각과 다른 영역에 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본질적으로 싫다 해서 관객의 입장에서 카메라 한 대가 꼼짝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 해도 무대에서의 감흥과 보이지 않는 것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TV를 통해서 본다면 더더욱 답이 없다. 기껏 커봐야 60인치 정도인 화면에 밝은 실내에서 치킨을 뜯는 자유를 만끽하며 당신의 공연을 본다면 얼마나 큰 동감과 감흥을 느낄 것인가? 카메라 렌즈를 통하는 순간 모든 영상은 동등하다. 내 아이만 특별하지 않은 것처럼.

왜 많은 이들이 영상을 보고 특정 콘텐츠에 열광하는가?
모든 나라의 초창기 배우들은 연극배우나 성우 출신이었다. 당시 동시녹음 영상 제작과정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원시적이었다. 야외촬영은 엄두도 못 내었고 50분 짜리 드라마를 단 한 번의 끊김도 없이 찍어내야만 하는 험난한 과정이었다(당연히 당시 연출자들은 절대자였고, NG를 내는 연기자나 원인 제공자들은 호되게 야단을 맞아야 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어야 하니까). 기술은 부단히 발전하여 이제 해상도에 있어서는 1억 화소를 넘어설 정도로 인간의 눈을 뛰어 넘는 수준에 이르렀고, 혼자서도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젊은 세대 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영상은 너무도 익숙한 매체이다. 영상언어에 익숙한 정도를 넘어 더 색다른 앵글과 무빙을 갈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무용은 ‘몸짓’이라는,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비주얼적이고, 그를 통해 내면을 드러낸다는 면에서, 독창적인 장르이다. 어찌보면 영상의 ‘사실과 왜곡’이라는 모순된 장르에 가장 가까운 분야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무용의 ‘위험과 기회’가 있다.

이미지의 왜곡 Photo by xandtor on Unsplash
영상속 이미지는 조금씩 왜곡된다. Photo by xandtor on Unsplash

1.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영상예술이라는 아이는 다른 예술장르와 비교하자면 태어난 지 3개월도 안된 신생아이다. 그나마 예술의 영역으로 인정받은 시점을 생각하면 아직 걸음마도 못 뛴 단계일 것이다. 그 일천함에도 불구하고 영상에 대한 기대가 높은 것은 아직도 알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 때문이다.

백설공주의 계모의 질문에 거짓을 대답할 수 없는 ‘진실의 거울’처럼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계모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선과 악을 동시에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있는 그대로란 외형뿐만 아니라 계모가 누구냐(배우, 액팅, 동선)에 따라 연출자의 의도에 따라 느낌은 달라진다. 영상이 예술일 수 있는 이유이다. 최초의 뤼미에르 형제를 떠나, 영상은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는 것이라는 환상을 깨야만 하는 것이다. 렌즈를 통과하는 순간 다른 세상이 기록되는 것이다.

2.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
아이에게 비유하자면, 부모의 바램과 달리 태어날 때부터 눈이 나쁜 아이다. 부모가 볼 수 있는 세상을 유사하게 보기 위해서는 램브란트의 <야경꾼>처럼 태양 만으로 존재할 수 없는 더 많은 빛이 필요하다. 이를 부정하고서는 아이가 바라본 세상이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세상과 같기를 기대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내가 이 아이를 통해 세상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의 모습은 이게 아니야.”
아무리 분노하고 부정해도 카메라의 현재를 외면하고서는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인간과 가장 가깝게 또는 인간의 눈을 뛰어넘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3. 무엇을 할 것인가? - What has to be done?
“영화와 드라마는 왜곡의 총아다.”
천만 명 이상의 관객을 끌어들인 영화를 보면서 그걸 있는 사실 그대로 촬영한 기록물이라 생각할 사람이 있겠는가? 상당수 무용인들은 자신의 예술행위를 영상과는 별개 또는 부수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많다.

더 나아가 자신의 공연을 영상으로 담아낸다는 것이 진품의 품격을 떨어트리는 일이라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공연을 실황중계와 같은 형식으로 영상을 만들어 낸다면 그런 생각에 동의한다. 하지만 영상은 무대 위의 행위를 더 많이 담아내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현 팬데믹 상황에서 영상을 통해 대중과 만나는 일을 일시적 해프닝이나 어쩔 수 없는 차선책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앞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일상이 될 수도 있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어떤 하나의 발견 또는 발명이 멈추거나 퇴보하는 경우는 없다. 원자탄이 대표적이다. 인류를 큰 재앙에 빠트릴 수 있는 치명적 무기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이를 만들고 소유하기를 거부하는 국가는 없다. 영상은 비록 태어난 시기는 어리지만 인류 전체의 일상 속에 그 어떤 매체보다 넓고 깊게 퍼져 있다. 때문에 더욱 영상의 기술과 언어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모든 문화가 그러하듯이 진보와 보수, 실험과 보존이라는 상극이 갈등을 만들어 낸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전통이라는 것이 어느 시점에는 가장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행위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용 또한 영상이라는 나이 어린 아이를 철부지로 취급하여 하대하지 말고 이들과의 융합을 진지하게 고민해 볼 시점이 온 것이다.

카롤린 칼송 안무의 'Signes'(징조)(사진=youtube.com)
카롤린 칼송 안무의 'Signes'(징조)(사진=youtube.com)

맺으며...
인류는 한 번도 뒤로 돌아선 적이 없다. 그것이 잘못된 길이라 하더라도 앞으로 전진만을 했을 뿐이다. 그로 인해 많은 생태계가 파괴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이끌 것임을 알면서도 걸어왔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전진이라 이야기했고, 어떤 이들은 종말을 향해 가는 여정이라고 경고했다. 그 끝이 어디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이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의 질주를 누군가 멈춰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래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인간적인 예술인 무용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 누구는 춤의 시작점으로 돌아가기 위한 항해를 시작할 수도 있고, 혹자는 미래를 향해 조심스레 발을 내딛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상을 통해 지금과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용가와 영상연출가가 각기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담보되어야 한다. 무용가는 영상을 자신의 무대를 담아내는 부수적이고 부족한 매체라는 인식을 버려야 한다. 카메라를 통해 녹화되는 모습은 닮은 듯 다른 제3의 결과이다. 이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모습이 왜곡되었다거나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인간 관계의 변화는 새로운 설정과 기준이 필요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사랑의 감정을 스킨쉽을 통해 전달하는 것은 위험한 행위가 되어버렸고, 수많은 관중이 한 자리에 모여 공감대를 느끼는 자리는 사라질 지도 모른다. 이제 과거에 연연하기 보다 새롭게 변화된 현실을 인정하고 이에 적응하기 위한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코로나19의 팬데믹 상황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바이러스로 인해 더 큰 인류의 재앙이 닥쳐올 것이라 바라보고 있다. 만약 이와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전통적인 예술의 요소인 관객을 오프라인에서 만나기를 고집하는 예술인들은 자리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매우 크다. 더 이상 옛날로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는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 Photo by Sarah Kilian on Unsplash
코로나는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 Photo by Sarah Kilian on Unsplash

영상은 현 위기 상황에 기회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전에 표현할 수 없었던 새로운 영역까지 도전이 가능한 신세계를 만들어 줄 수도 있다. 이 기회는 시대의 변화를 깨닫고 미래의 변화를 정확히 예측한 예술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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