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32 나우마키아, 수중드라마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32 나우마키아, 수중드라마
  • 조복행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0.11.03 23: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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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마키아(출처:
나우마키아(출처:en wikipedia.com)

 

나우마키아

로마시대에 물위에서 하던 드라마가 있었다. 이를 나우마키아(Naumachia)라고 부르는데 강이나 호수에서 해전을 재현하는 퍼포먼스였다. 나우마키아를 처음 시작한 것은 율리우스 시저였다. 그가 거둔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여 BC 46년 티베르 강 어귀에 인공무대를 만들어 해상 전투장면을 재현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2,000여 명의 전투원, 4,000여 명의 뱃사공과 죄수들이 동원되었다. BC 2년에는 아우구스투스가 광장건립을 기념하여 시저의 모델을 따라 개최한 적이 있었고, 서기 52년에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배수로와 터널의 개통을 기념하여 자연호수인 푸치네 호수에서 개최한 적이 있다. 티투스 황제는 두 차례의 나우마키아를 공연하였는데, 한 번은 AD 80년에 콜로세움 준공을 기념하여 또 한 번은 인공호수에서 각각 개최하였다.

나우마키아는 검투사들의 싸움보다 더 잔인했다. 반드시 누군가가 죽어야 끝이 났다. 개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부대단위나 집단단위로 싸우는 잔인한 스펙터클이었는데, 이들은 검투사처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도 아니었다. 주제는 역사적이거나 준역사적인 사건들로서 고대 그리스나 이집트의 해군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우마키아는 특별한 계기에 강이나 호수를 인공적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엔터테인먼트보다 큰 자원을 필요로 하였다. 나우마키아는 되도록 많은 로마인들이 보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하였다. 따라서 자연적인 호수나 강보다는 인공적인 호수가 관람에 유리했다. 자연적인 물을 이용하면 경비를 절약하고 시설설치도 간단하였지만, 이는 관객들의 관람에 지장을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호수를 크게 파고 무대를 만들고 관객용 스탠드를 설치하였다. 이 자체가 큰 스펙터클이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만든 인공호수는 그 크기가 533X355 미터 정도였는데, 이는 축구경기장 네 개 정도를 합쳐놓은 크기다. 여기에 물을 채워서 배를 띄우고 전투를 벌였으니 가히 그 거대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나우마키아가 끝나면 바로 물을 뺐는데, 이는 전염병의 위험을 염려한 조치였다. 나우마키아가 건물로 들어온 것은 네로 시대부터다.

나우마키아가 열리는 곳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의자와 객석이 설치되고, 거리에는 상인, 도둑, 매춘부들이 들끓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리자 어떤 사람들은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전날 밤부터 밤을 새우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자리다툼을 하다가 사망하는 일도 벌어졌는데, 시저의 나우마키아 때에는 두 사람의 원로원 의원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오늘날 자주 발생하는 공연장 압사사고였던 것이다.

콜로세움
콜로세움(출처:getyourguide.com)

인공적인 건물내에 물을 채우고 배를 띄우는 일은 기술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로마는 토목기술이 매우 발전하여 전염병을 방지하고 깨끗한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먼 수원지에서 물을 끌어와 사용했다. 이렇게 끌어온 물은 목욕탕이나 화장실, 분수등에 사용되었고 콜로세움이나 엔터테인먼트 공간에까지 제공되었다. 나우마키아는 로마의 발전된 토목기술을 자랑하고 황제들의 권력을 과시하려는 과시적 이벤트였다. 하버마스는 이런 권력의 이벤트를 과시적 공공성이라고 불렀다. 민중들에게 스펙터클한 볼거리를 제공하여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로마의 신민이라는 자긍심을 심어주어 그들을 통치하려는 통치전략이었다. 또한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해가던 로마에게 나우마키아는 국가적 정체성의 표현이었고, 효율적인 프로파간다이자 민중들을 순치할 수 있는 통치수단이었다. 빵과 서커스로 상징되는 로마의 국가운영전략이었다.

나우마키아는 기술적으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큰 비용이 소요되는 이벤트였기 때문에 누구나 실행할 수 있는 퍼포먼스가 아니었다. 나우마키아는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다시 부활하는데, 부를 축적한 귀족들이나 정치적 권력을 차지한 왕들이 자신들의 부와 권위를 과시하고 국가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나우마키아

오스만 제국은 1299년 아나톨리아 지역(터키)에 건설되어 1922년 해체될 때까지 600여년 이상을 지속해 온 제국이었다. 1453년 동로마 제국을 함락시킨 뒤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의 맹주로 떠올랐다. 수시로 발칸지역과 유럽을 침공함으로써, 유럽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는 슐레이만 1세가 통치하던 16세기 중반이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나서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유럽연합군에 패한다. 1571년 봄 베니스. 로마. 스페인은 연합하여 ‘신성동맹’을 결성하고 지휘관으로는 오스트리아의 돈 주앙을 임명하였다. 10월 7일 예상을 뒤엎고 유럽연합군은 승리하였다. 유럽인들에게 레판토 해전의 승리는 믿을 없는 쾌거였다. 오스만 제국의 지중해와 대륙으로의 팽창전략을 좌절시켰고 그들의 예봉을 꺾어놓았기 때문이다. 베니스는 축제의 도가니가 되었다. 모든 상점은 문을 닫았고 3일 동안 교회는 계속 종을 울렸으며 교회의 탑들은 밤늦게까지 불을 밝혔다. 불꽃놀이가 이어졌고 도시의 광장에는 기쁨과 행복감이 넘쳐흘렀다. 12월 4일 교황청의 지휘관 마르코 안토니오 콜로나(Marco Antonio Colona)가 500여 명의 터키 노예들을 거느리고 로마로 승리의 행진을 했다. 레판토 해전의 승리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일시적 억제에 불과했지만 그 인기는 50여년간 여러 축제의 주요한 레파토리가 되어 나우마키아가 재현되기에 이른다. 레판토 해전은 이슬람 제국의 확장전략을 저지하여 대규모의 충돌을 피할 수 있게 하였지만 이슬람의 잦은 해적질은 늘 유럽인들을 괴롭혔다. 유럽인들은 거대한 해상전투보다 작은 규모의 해적들의 출몰을 더 무서워했다. 유럽인들은 레판토 해전의 재현을 통해 유럽인들의 우월감과 이슬람 해적에 대한 경고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나우마키아는 그렇게 다시 등장한 것이다.

승전후 15년 뒤인 1586년 스페인의 발렌시아에서는 펠리페 2세의 입성식을 축하하기 위해 해상전투를 재현한다. 물에서가 아니라 육지에 무대를 세우고 5명의 요정이 왕을 맞는 장면을 재현한다. 펠리페 2세가 현장에 도착하자 잘 짜여진 무대에서 갤리선이 움직이는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장관을 연출하였다. 무대는 무너지고 갤리선이 침몰하여 마치 바다에서 실제로 전투가 벌어지는듯한 장면을 연출하였다. 민중들과 왕은 매우 즐거워했다. 그러나 사고를 염려하여 실제 총은 사용되지 않았다.

1589년 5월 11일 피렌체에서는 페르디난드 메디치와 크리스틴 데 로레인의 결혼식을 맞아 레판토 해전을 모델로 한 나우마키아가 열렸다. 피렌체의 나우마키아도 강과 호수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 무대를 세우고 극을 진행했다. 출연한 선원들은 모두 전문적인 선원들이어서 전투장면을 매우 실감나게 재현했다.

1613년 2월 13일 런던에서는 제임스 1세의 딸 결혼식에 즈음하여 템즈강에 레판토 해전을 재현하였다. 이는 1589년 피렌체 나우마키아를 모델로 한 것으로 38대의 배와 17척의 터키 갤리선이 충돌하는 장면을 재현한 것이었다. 제임스 1세의 의도는 나우마키아를 통해 영국해군의 우수성을 과시하려는 것이었다.

같은 해 6월 7일에는 브리스톨에서도 똑같은 행사가 열렸다. 이는 앤 여왕의 브리스톨 방문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1632년 11월 22일 프랑스의 라 로쉘에서는 처음으로 프랑스에서 나우마키아가 열렸다. 이 역시 프랑스의 국가적 위신을 높이기 위한 일종의 프로파간다였다. (『Waterborne Pagents and Festivities in the Renaissance』) .

르네상스의 나우마키아는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라는 종교적 우월감, 아랍에 대한 유럽의 우월성을 홍보하려는 프로파간다였다. 오스만 제국에 당해온 오랜 굴욕을 설욕했다는 자긍심이 작동한 퍼포먼스였고, 유럽인들의 의식속에 자리잡은 자랑스러운 ‘역사적 기억’을 간직하려는 이벤트였다.

수중 드라마

나우마키아는 19세기에 프랑스, 영국, 미국 등에서 부활하였다. 특히 서커스 공연장에 해상전투 신을 재현하는 공연이 유행이었다. 무대에 물탱크를 설치하고 여기에 배의 미니어쳐를 만들어 해전을 재현하는 연극이었는데, 이를 수중 드라마(Aqua Drama)라고 부른다. 거대한 강이나 호수에서 극장으로 이동하였고 , 보다 연극적인 세트와 전문적인 배우들이 이를 재현하였다. 주제도 나중에는 해상전투 위주에서 일상적 주제로 변화한다.

수중 드라마는 찰스 디브딘(Charles Dibdin)이 그 효시다. 디브딘은 근대 서커스의 창시자인 필립 애슬리의 제자로 애슬리로부터 독립하여 그의 경쟁자가 된 서커스 임프레사리오였다. 디브딘은 데이비드 개릭과 함께 활동한 작곡가이자 작가이자 배우이기도 하였다. 데이비드 개릭을 위해 작곡을 하기도 하였고 일인 쇼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새들러즈 웰즈 극장에서 수중드라마를 개척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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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러즈 웰즈 극장의 수중드라마(출처:en.wikipedia.com)df

그는 1804년 새들러즈 웰즈 극장에 무대전체를 덮는 27M X 7.2M x 90CM 의 물탱크를 설치하였다. 물은 극장에서 가까운 뉴 리버강에서 끌어왔다. 이를 위해 12명의 인부가 12시간 동안 작업을 해야 했는데 이들은 물탱크에 물이 가득찰 때까지 네 명이 네 시간씩 교대로 작업을 했다. 사람의 힘으로 물을 강에서 끌어오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 물은 금방 더러워졌다. 공연 자체에 의해서도 그랬고 배우들이 물탱크에서 목욕을 하기도 했으며 일부 별난 관객들은 실제 물인지 확인해 보기 위해 물탱크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관객들은 매우 무질서하고 시끄럽고 술에 취해 있기도 했다. 이들은 무대위의 물탱크에만 들어간 것이 아니라 폭포수를 재현하기 위해 무대 위쪽에 설치한 물탱크에도 들어가 보았다.

첫 수중 드라마는 ‘지브롤터 포위(Siege of Gibraltar)’였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영국으로부터 지브롤터 해협을 빼앗기 위해 스페인과 프랑스가 벌인 해전을 재현한 드라마였다. 무대 위에는 177척의 미니어쳐 배와 총이 배치되었다. 세트를 설치하는 데는 부두노동자들이 많이 고용되었다. 실제로 18-19세기에 무대 기술자들은 배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물체를 내리고 올리고 감는 일등에 능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서는 격렬한 전투장면이 매우 리얼하고 스펙터클하게 전개되어 관객들은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수중 드라마 장면은 가장 마지막이나 막후극(afterpiece)으로 배치되었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커튼을 내리고 물탱크에 물을 채워야 했다. 그러면 관객들은 물이 흘러가는 소리를 듣기 위해 온 신경을 무대에 집중하였다.

수중 드라마는 1802년부터 1820년경까지 영국 공연계의 유행이 되었다. 런던만이 아니라 지방에서까지 이를 모방하는 연극이 등장했다. 드루리 레인 극장에서는 인도의 미개함을 묘사한 <갠지스 강의 폭포>라는 수중 드라마가 공연되었고 다른 극장에서도 많은 수중 드라마가 공연되었다. 19세기 초반에는 나폴레옹 전쟁을 소재로 한 수중 드라마가 많았다. 이는 대중들의 민족주의를 자극했고 애국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815년의 워털루 전투는 단골소재였다. 그러나 관객들은 수중 드라마에 대해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수중 드라마는 점점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디브딘은 177척의 배를 계속 사용하고자 했지만 이는 더 이상 관객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없었다. 새들러즈 웰즈 극장의 수중 드라마는 1821년에 코벤트 가든 출신의 배우 에거톤(Egerton)으로 경영자가 바뀌면서 폐지된다. 그러자 관객은 다시 급감하였고 1824년에 경영자가 바뀌어 수중 드라마를 부활시켜 1835년까지 계속된다.

파리에서도 1834년 경에 수중드라마가 등장한다. 이 때부터 약 두 시즌 동안 수중드라마가 공연된 적이 있었지만 영국만큼 성공하지는 못했다.

수중 드라마는 매우 의례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성격이 강했다. 특별한 계기에 국가적 이벤트를 재현하여 국가적 위신을 높이거나 국민들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퍼포먼스였다. 또한 점점 상업성을 띠게 된다. 관객들은 물이라는 예외적인 소재를 좋아하였고, 임프레사리오들은 이를 이용한 것이다. 19세기부터 강해지는 연극의 리얼리즘도 수중 드라마의 등장에 한 몫을 담당하였다. 무대를 사실적으로 꾸미려는 리얼리즘은 물을 단순히 파란 천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실제의 물을 극장에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브레겐츠 페스티벌(출처 : tripadvisor.com)
브레겐츠 페스티벌(출처 : tripadvisor.com)

수중 드라마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베르겐츠 페스티벌, 장예모(張藝謀)의 인상 시리즈, 프랑크 드라고네의 수중 드라마는 과거의 수중 드라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된 형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어쩌면 새로운 이름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독특한 공연장르가 될지도 모른다.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건 테크놀로지의 발전이다. 이들이 주목받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많은 관광객을 창출함으로써 경제적 부의 창출에도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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