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할머니의 발레, 그리고 음악의 힘
치매 할머니의 발레, 그리고 음악의 힘
  • 이종찬 기자
  • 승인 2020.11.20 16: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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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프리뷰=서울] 이종찬 기자 = 눈을 내리뜬 채 의자에 파묻힌 노쇠한 할머니. 차이콥스키 <백조의 호수> 음악이 나오자 돌연 그녀의 손이 날개처럼 파닥인다. 반짝거리는 눈빛의 그녀는 안개 낀 호숫가의 오데트 공주가 된다. 팔이 올라갔다 몸을 앞으로 숙이고 두 손을 교차시키며 전형적인 백조의 포즈를 취한다. 무대에 신호를 보내듯 턱을 쳐들며 얼굴은 몽상에 잠긴다.

유튜브에 빠르게 퍼지고 있는 한 할머니의 영상이다. 전직 발레리나인 그녀의 이름은 마르타 신타 곤살레스 살다냐(Marta Cinta González Saldaña)로, 이 영상을 찍은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영상을 올린 곳은 스페인의 무시카 파라 데스페르타르(Música Para Despertar, 깨우기 위한 음악이라는 뜻)로서 음악을 통해 알츠하이머, 치매 환자들을 돕는 일을 하는 곳이다.

일단 가디언, NPR 등 다수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이 영상과 관련된 세부사항들은 잘 못 알려진 게 많다고 한다. 마르타는 뉴욕 발레(New York Ballet) 단원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런 발레단은 없으며 뉴욕 시티발레(New York City Ballet, NYCB)도 아니었다.

또한 영상 중간에 젊은 발레리나가 춤추는 장면을 할머니의 동작과 비교해서 보여주는데 젊은 발레리나의 이름은 마르타가 아니라 울랴나 로파트키나(Ulyana Lopatkina)이며 그녀가 추는 춤도 <백조의 호수>가 아니라 미하일 포킨이 안무한 <빈사의 백조>이다. 물론 음악도 다르다. 물론 영상을 포스팅한 무시카 파라 데스페르타르에서 두 사람이 같은 인물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의 동작이 비슷한 부분도 있지만 분명 두 작품은 다른 작품이고 그냥 보여주기 위해 편집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디언지는 그런 것들은 이 영상이 주는 감동에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누군지조차 잊어가는 한 노인의 얼굴이 환해지며 음악의 힘으로 기억의 빗장이 열리는 모습. 마르타가 진짜 자기 자신으로 태어나는 모습으로 보인다.

심한 치매환자에게조차 음악의 그 특별한 능력은 잘 알려져 있다. 음악교사이자 콘서트 피아니스트였던 폴 하비(Paul Harvey)는 최근 <네 개의 음>이라는 즉흥곡을 만들었다. 그의 아들은 어린 시절 아버지 폴과 함께 ‘작곡놀이’를 했다고 한다. 몇 개의 음을 주면 그걸로 즉석에서 곡을 만드는 것이다. 이번에는 아들이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에게 ‘파, 라, 레, 시’ 라는 네 개의 음을 주었고 아버지는 즉석에서 화성을 붙여 곡을 연주한다.

‘치매환자를 위한 음악’(Music for Dementia)이라는 단체의 프로그래머인 그레이스 메도우즈는 청각기억이 우리에게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기억인 것 같다고 말한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18주 정도 지났을 때부터 나타나는 생명 최초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청각은 가장 깊게 있는 신경회로인 것 같다”고 말한다. 아기들의 옹알거림과 엄마가 그에 대한 반응으로 내는 비슷한 소리가 최초의 음악적 소통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아주 원초적인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토록 깊고 우리가 잘 반응하는 거에요”라고 말했다.

이는 인지장애가 생겼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아마도 음악이 뇌의 여러 다른 경로를 통해 처리되는 것도 한 이유인 것 같다고 한다. 즉 어떤 신경경로를 막고 있는 것이 있으면 음악은 다른 경로를 찾아낸다는 것이다. 특히 10-20대에는 많은 사회적 유대와 새로운 감정과 경험이 집중적으로 일어나며 이때 음악을 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첫사랑, 새로운 동네로 이사하는 것, 혹은 무대에서 첫 주역으로 춤추는 것 등등.

마르타와 같은 전문 무용수는 훈련을 통해 근육의 기억이 음악적 본능과 강력하게 연결돼 있을 것이다. 그러나 꼭 전직 발레리나에게만 음악이 신체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30년 넘게 커뮤니티 댄스 활동을 해왔으며 최근 10년 간 치매환자를 위한 워크숍을 진행중인 퍼거스 얼리(Fergus Early)에 따르면 음악과 춤이 결합됐을 때 더 강력한 효과를 낸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이 눈 앞에서 변신한다. 그들은 다시 한 번 예전의 그들로 돌아간다. 한 번은 어떤 민속음악을 연주했는데 갑자기 휠체어에 앉아 있던 한 할머니 환자의 발이 빠르게 춤을 추었다. 그리고 나중에 수업 끝 부분에 가서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전에는 누구에게도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주변 스태프들에 의하면 그녀는 결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는 흔치 않은 일이다”라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또한 그는 “마음은 몸이 따라올 때 더욱 잘 작용한다”며 “만일 즉흥(춤)을 그들이 한다면 그들은 다음에 뭘 할지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매우 단순하게 들리지만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주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라고도 말했다.

그레이스 메도우즈는 “(이 영상에서) 발레리나로서 그녀가 어땠는지, 또 앞으로도 그녀가 누구일 것인지 알 수 있다. 치매를 넘어서서 자신이 누군인지를 안다는 것은 그녀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르타의 영상에서 정체성 의식은 아주 뚜렷해 보인다. 자리에서 일어나 펄펄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표정과 눈빛에는 자신에 대한 위엄과 예술적 감흥에 대한 몰입과 헌신, 동경이 느껴진다. 폴 하비의 영상에서도 곡을 치며 천진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이 질병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그들 자신을 찾아주는 걸까. 두 영상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치매를 앓고 있는 폴 하비와 아들 닉 하비(사진=youtube.com)
아들 닉 하비(좌)와 아버지 폴 하비(사진=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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