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퇴임하는 맹완호 주한독일문화원 문화협력관
[인터뷰] 퇴임하는 맹완호 주한독일문화원 문화협력관
  • 이종호 기자
  • 승인 2020.12.06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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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속에서 행복했던 33년”
‘지하철 1호선’ ‘피나 바우쉬’ ‘독일 한국문화축제’ 등 큰 보람
퇴임식(c)Goethe-Institut Korea
퇴임식에서 인사말하는 맹완호 협력관. 2020년 11월 25일. (사진제공=주한 독일문화원)

[더프리뷰=서울] 이종호 시댄스 예술감독 = 2000년 3월 홍콩에서 열렸던 아시아-유럽 무용포럼(Asia-Euro Dance Networking Forum). 현대무용이라면 아시아보다 유럽이 훨씬 앞서 있으니 행사명도 ‘유럽-아시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 나는 고백컨대 비아시아적이었다. 그런데 정작 행사에 가보니 아시아인이건 유럽인이건 그런 데 신경 쓰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나 혼자 멋쩍었다. 한편으론 그곳에서 매우 중요한 미래의 파트너들을 다수 만났다, 그들과의 만남은 리틀 아시아 댄스 익스체인지 네트워크(Little Asia Dance Exchange Network, LADEN)로 이어졌고 지금까지도 인간적, 업무적으로 즐겁고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행사를 홍콩측과 함께 조직하고 추진한 것은 독일문화원(괴테 인스티투트)이었다. 내게 거길 가보라고 권하면서 경비까지 지원해준 주한 독일문화원의 맹완호 선생은 귀국 후 어땠냐고 물었고 나는 서울에 온 촌놈처럼 놀라고 깨달았다며 깊은 감사를 표했다. 나름 국제무용계의 사정과 인물들을 어느 정도 안다고 자만했던 내가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했음을 통감하게 한,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적어도 현대예술에 관해서라면 구미(歐美) 위주로 바라보던 내게 문화적, 지리적으로 우리가 피할 수 없이 속해 있는 아시아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게 만든, 나로서는 자못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 맹완호(孟完鎬) 주한 독일문화원 문화협력관이 올 연말로 완전 퇴임한다는 얘길 듣고 사무실로 찾아갔다. 1998년 제1회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시댄스) 때 수잔 링케 무용단을 초청하면서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었던, 그 후로도 독일 무용단들을 초청할 때마다 많은 도움을 준, 나로서는 참 고마운 분이다. 이미 2017년에 정년(60세)을 맞았지만 문화원측의 강권(?)으로 3년간 연장근무하고 있었던 것. 아침부터 점심 때까지 그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한 분야에서 오랜 세월 일해온 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두세 시간 대화로 파악되고 정리될 수 있는 삶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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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리셉션에서 동료직원들이 만들어준 '맹빽' 선물 보따리를 메고 즐거워하는 맹완호 협력관. 2020년 11월 25일. (사진=더프리뷰 이종호)

“기관이 된 개인“
11월 25일 오후 6시 남산 독일문화원에서는 그를 위한 퇴임 리셉션이 열렸다. 강화된 코로나 방역조처에 따라 당초 예정했던 스탠딩 리셉션 대신 2m 간격 의자 배치, 식음료는 도시락으로 대체됐다. 지난 수 개월 코로나 와중에서 온갖 형태의 ‘새로운 모임문화’를 경험했지만 리셉션 음식을 도시락(집에 가서 드세요!)으로 나눠주는 건 처음 대하는 광경이었다. 행사가 모두 끝난 뒤 도시락이 든 비닐 백을 하나씩 들고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엔 약간의 쑥스러움과 어린애 같은 즐거움이 동시에 묻어났다.

이날 리셉션에는 김민기(가수, 학전소극장 대표) 김숙희(종로 아이들극장장) 양정웅(연출가) 이경성(변방연극제 예술감독) 정의숙(서울무용영화제 집행위원장) 김형민(안무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김선정(선재미술관 대표) 양지윤(대안공간 루프 대표) 김성은(백남준아트센터 관장) 이현정(LG아트센터 팀장), 오성지(한국영상자료원) 등 문화예술계 주요 인사 35명과 주한 독일문화원 직원 등 모두 60여 명이 참석했다.

마를라 슈투켄베르크 주한 독일문화원장 등 여러 사람이 그의 이임을 아쉬워하며 기억에 남을만한 인사말을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지난 7년간 통영국제음악재단 대표이사로 있으면서 그와 많은 일을 함께했던 플로리안 리임(Florian Riem)의 언급이 각별히 인상적이었다.

”미스터 맹은 그 자체로 ‘주한 독일문화원’입니다. 누구를 만나든 주한 독일문화원 이야기가 나오면 ‘아, 맹완호 선생이요?’ 합니다. 그는 ‘기관이 된 개인’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그렇다. 주한 독일문화원이 가는 모든 곳에 그가 있었다. 침착하고 낮으면서도 울림이 좋은 전형적인 아나운서 목소리, 결코 흥분하거나 서두르는 일 없이 모든 것을 가급적 되는 방향으로 노력하던 그의 일관된 모습, 독일과 한국의 모든 유관 분야 인사들과의 성실하고 오랜 관계, 대외협력만이 아니라 사내 직원들의 근무여건 개선에까지 신경 쓰는 고참의 모습. 이러한 그의 면모가 많은 이들에게 안정감과 신뢰감을 주었으리라.

주한 외국대사관이나 국제기구에서 문화교류 업무를 했던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각별히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것은 33년이라는 짧지 않은 근속기간도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문화예술에 대한 정열과 애착을 바탕으로 초심(初心) 하나로 달려온 그의 세월이 유난히 소중하고 아름답게 비쳤기 때문이다.

퇴임식 단체사진 (c)Goethe-Institut Korea
퇴임식에서 주한 독일문화원 동료들과 함께한 맹완호 협력관. 2020년 11월 25일. (사진제공=주한 독일문화원)

“독일문화원은 대학(성균관대 독어독문학과) 1학년 때부터 수시로 드나들었죠. 당시엔 문화원이 장충동 주택을 빌려서 운영하고 있었는데, 독일어도 배우고 음악감상, 영화감상도 하는 맛에 마치 허물없는 친구 집처럼 수시로 다녔어요. 졸업 후 1983년 1학기에 대전 배재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다가 그해 5월부터 KBS 국제방송에서 5년간 아나운서(정식 명칭은 프로듀서)로 일했죠. 그런데, 그때 기억하시죠? 전두환 정권 시절 분위기요. 매일 밤 9시 땡 치면 어김없이 시작되는 ‘땡전뉴스’도 듣기 싫고... 마침 독일문화원에서 사람을 뽑는다기에 옳다구나 응모했죠.” 그렇게 해서 1988년 3월부터 근무를 했으니 32년 9개월을 일하고 떠나는 셈이다.

하지만 그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그를 독일문화원으로 보낸 것은 땡전뉴스보다는 예술애호가 취향, 혹은 놀고 구경하기 좋아하는 한량기질이라고 말할 것같다. 매우 근엄하고 사무절차를 중시하는 스타일(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독일인 타입)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대학 재학 때부터 연극반 활동을 했고 최근에도 한독 합동무대에 연기자로 선 적이 있다. 어릴 적 신설동에서 살았던 그는 신설극장의 동시상영 프로그램을 빠짐없이 보고 다녔고, 19금 영화를 보고 싶어 아버지를 조른 적도 많았단다. LG아트센터에 왔던 도이체스 테아터 베를린(Deutsches Theater Berlin) 극단이 2015년 독일에서 한국 연출가들과 워크숍 공연을 할 때는 연기자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물론 독일어 대사를 읊조리면서. 이런 피를 물려받았는지 그의 아들 역시 이름난 춤꾼이다.

공산권 문학에 대한 해금과 <지하철 1호선>

▲입사해서 처음 맡은 프로젝트가 무엇이었나요?

"1988년 서울올림픽 문화축전의 일환으로 만든 쿤스트디스코(Kunstdisco)였습니다. 올림픽 기간에 운영하던 예술 디스코였죠. 서울시와 KBS, 독일문화원의 3각 협업이었는데, 여의도 인도네시아 대사관 옆 앙카라공원에 디스코텍을 지었어요. 독일에서 설계, 기술인력, 공연팀 등 수 백 명이 왔었죠. 날마다 서커스, 비디오 상영, 보디페인팅 퍼포먼스 등 이벤트를 열었고 독일에서 공수해온 식음료를 제공했습니다. 물론 한국인 예술가들도 다수 참여했구요. 제1세대 문화기획자로 불리는 고 강준혁 선생과 함께했던 작업이라 더 기억에 남습니다."

쿤스트디스코 건물은 행사가 끝난 후 통째로 보라매공원으로 옮겨졌다가 결국은 해체됐지만 맹 협력관에게는 여전히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아무래도 가장 큰 작업이라면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라고 해야겠죠?

"그렇습니다. 그렇게 크게, 오래 가는 프로젝트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지하철 1호선' (c)학전
'지하철 1호선' 공연장면(사진제공=학전소극장)

원작인 독일 극작가 폴커 루트비히(Volker Ludwig)의 <1호선 Linie Eins>은 동서 베를린을 오가는 지하철 1호선을 무대로 전개되는 서베를린 남자와 동베를린 여자의 이야기. 이걸 김민기의 번안과 연출로 원작보다 훨씬 강렬하고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 특히 음악이 뛰어났다. 옌볜 처녀가 백두산에서 만났던 한국 남자를 찾아 서울에 왔다가 다양한 군상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특히 소외계층 인물들을 등장시키면서 근현대사의 아픈 상처들을 건드려 대중의 공감을 샀다. 루트비히도 “원작보다 낫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했다.

1994년 학전소극장(현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초연한 뒤 이듬해 5월 학전그린 소극장으로 옮겨서 계속 공연, 2006년 3천회, 2008년 4천회(누적 관객수 70만명) 기록을 세우고 마감했다가 10년 뒤인 2018년에 100회 한정공연을 하기도 했다. 2011년에는 무대의상과 소품 등이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됐는데 맹 협력관도 소장하고 있던 자료를 이때 모두 기증했다고. 또 2019년 루트비히가 설립, 운영하는 독일 그립스극장(Grips-Theater) 창립 50주년 때에도 <지하철 1호선>이 초청 받아 독일에 갔다.

2019년, 베를린 그립스 테아터 설립 50주년으로 한국의 '지하철 1호선' 초청시. 뒷줄 좌로부터 김승근 서울대교수, 우베 슈멜터 독한협회회장(구 주한독일문화원장), 그립스 테아터 설립자이자 'Linie eins' 원작자 폴커 루드비히(사진=맹완호)
2019년 베를린 그립스-테아터 설립 50주년 기념 '지하철 1호선' 초청공연 때. 좌로부터 김승근 서울대 교수, 우베 슈멜터 독한협회회장(전 주한 독일문화원장), 김민기 학전 대표, 그립스-테아터 설립자이자 'Linie Eins' 원작자 폴커 루트비히, 맹완호 협력관. (사진제공=맹완호)

김윤석, 설경구, 황정민, 장현성, 조승우 등 이른바 '학전 5형제'를 비롯해 방은진, 나윤선, 배해선, 방진의, 김무열, 김희원 등이 이 작품을 통해 스타로 성장했다. 해외에서도 원작의 고향인 베를린을 비롯해 프랑크푸르트, 도쿄, 후쿠오카, 오키나와, 상하이, 홍콩 등 여러 곳에서 공연했다. 지하철이 없는 도시에서는 <버스 1호선>으로 제목을 고치기도 했다. 맹 협력관은 <지하철 1호선>의 독일 공연을 성사시키기 위해 독일에 몇 차례나 다녀왔고, 그립스극단의 다른 작품을 학전소극장에 소개하기도 하는 등 협력관계를 발전시켜 나중에는 극단 학전의 명예회원증을 받기도 했다.

기념식 (사진=LG 아트센터)
2008년 '지하철 1호선' 4천회 공연 때 학전 명예회원증을 받고 있는 맹완호 협력관(사진제공=맹완호)

<지하철 1호선>의 제작에는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공산권 문학작품에 대한 해금이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레 같은 분단국가인 독일에 대한 문화적 관심이 고조된 측면도 작용했다고 봐야 할 것같다. 해금조처 이후 동독 출신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서푼짜리 오페라 Die Dreigroschenoper>가 정진수 연출로 무대에 오르고(1988년 호암아트홀) 하이너 뮐러(Heiner Müller)의 <청부 Auftrag>도 김광림 프로듀서, 이윤택 연출로 공연되는(1989-90년 동숭아트센터) 분위기에서 동서 베를린을 오가는 남녀간의 이야기를 다룬 <1호선>도 자연스레 관심의 대상이 됐다.

맹 협력관은 연출가 김광림의 소개로 김민기를 만나 이 프로젝트를 본격 추진하게 된다. 설경구, 나윤선 등 출연진은 독일문화원에서 연습을 했는데 독일문화원 구내식당을 운영하던 아주머니가 “배우들 먹성이 좋은지 식비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고 호소하는 바람에 뒷돈(?)을 얹어주기도 했다. 연출을 맡은 김민기는 연습 기간 배우들에게 매우 엄격했던 것으로 그는 기억하고 있다. 김민기는 <지하철 1호선> 공연으로 백남준, 윤이상이 받았던 독일정부 문화훈장(괴테 메달)을 2007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가서 받기도 했다.

▲2000년 하노버 엑스포 때 대규모 안동차전놀이 팀을 데리고 가셨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맞아요. 당시는 하노버주지사 출신인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총리였는데, 두 팀이 편싸움을 하는 각국 민속놀이를 초청한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당시 참가 팀 중 가장 많은 300여 명의 대형 팀이었어요. 대한항공 전세기를 타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내려 버스를 대절, 하노버까지 타고 갔습니다. 중간에 현지 한인식당에 주문해 놨던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는데, 젓가락이 부족해서 근처 공원에서 잔 나뭇가지를 꺾어서 대용품으로 쓰기도 했구요.

그때는 김대중 정부 시절이었는데, 나중에 모 인사가 그러더군요. 아니 호남지역에도 비슷한 놀이가 있는데 하필 영남지역 민속을 추천했느냐구요. '호남팀을 보냈으면 정부지원도 훨씬 더 많이 받았을텐데'라면서... 문화에도 정치논리가 작용한다는 걸 새삼 실감했죠."

“불안이 나를 춤추게 합니다” 피나 바우쉬의 추억

▲피나 바우쉬의 한국 초청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셨죠. 아마도 맹 선생님으로서는 잊지 못할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였을 것같네요.

"그럼요. 정말 보람있는 일이었습니다. 2000년 3월 LG아트센터 개관기념 공연으로 피나가 이끄는 부퍼탈 탄츠테아터(Tanztheater Wuppertal Pina Bausch)가 왔잖아요. 그 전부터 한국에 데려오려고 1998년 홍콩 아트 페스티벌에 가서 그들의 공연을 보고 피나도 만나고 하면서 공을 많이 들였어요. 지금은 고인이 된 김주호 당시 예술의전당 담당자(나중에 LG아트센터로 옮겨서 근무), 이현정 현 LG아트센터 팀장과 함께 준비를 많이 했지요.

피나가 처음 한국에 왔던 건 1979년이었습니다. 마침 한독수교 100주년 행사들도 있었고 세종문화회관 재개관 기념공연 시리즈도 있었고... 그때 피나가 무대에서 춤을 추다가 의상이 흘러내리면서 앞가슴이 드러난 것을 두고 평론가들이 월간 <신동아>에서 예술이냐 외설이냐 논쟁을 벌이기도 했었죠. 피나는 한국 공연을 마치고 귀국한 지 얼마 안돼 남편이 타계하는 바람에 한동안 심리적으로 한국에 대해 서먹한 느낌을 갖고 있었던 것같았어요. 한국에 몇 차례 다시 초청하려 했는데 응하지 않더라구요.

'카네이션' (c)Goethe-Institut Korea
2000년 3월 LG아트센터 개관공연으로 올려진 피나 바우쉬 부퍼탈무용단의 '카네이션'(사진제공=LG아트센터)

나중에 LG아트센터가 독일문화원과 함께 피나에게 한국을 소재로 한 신작 <러프 컷 Rough Cut>을 의뢰했을 때 한국의 곳곳을 함께 여행하기도 하면서 가까이 지냈지요. 자신에겐 엄격하고 남들에겐 한없이 너그러운 성격이었는데, 혹시 스트레스를 너무 참아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나중에 서울에서 피나 추모공연이 열렸을 때는 관객들 앞에서 춤 공연과 함께 피나에 관한 저의 개인적 추억담도 들려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언젠가 피나에게 “무엇이 당신을 춤추게 만드는가”라고 물었는데, ‘불안(die Angst)’이라고 답하더군요.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늘 잔잔한 미소로 받아들이던 그녀의 마음속에 실은 ‘불안’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거죠."

피나 바우쉬 '러프컷'(사진=LG 아트센터)
2005년 6월 공연된 피나 바우쉬 부퍼탈무용단의 '러프컷'(사진제공=LG 아트센터)

▲충분히 이해합니다. 기본적으로 피나는, 유럽의 다른 동세대 예술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양차대전의 고통을 겪지 않았습니까? 특히 피나는 개인 성장사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민감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나는 피나를 ‘전쟁의 상처를 먹고 피어난 꽃'이라고 부릅니다. 불안이라는 단어가 그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것같습니다.

"그걸 바탕으로, 그걸 넘어서서, 불후의 명작들을 만들어 냈다는 게 그의 그릇이겠지요. 한국에서의 몇 차례 공연이 한국 무용계는 물론 문화예술계 전반에도 상당한 심리적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큰 인물‘과의 접촉과 교류가 얼마나 중요한가 종종 생각하게 되더군요."

통영 별신굿 행사에 참가한 피나 파우쉬와 맹관호 협력관(우측)(사진=LG 아트세터)
2004년 10월 통영별신굿을 참관한 피나 파우쉬와 맹완호 협력관(사진제공=LG아트센터)

평양의 독일문화원 정보센터

주한 독일문화원 52년 역사에서 그는 33년을 일했다. 아무리 좋아서 시작한 일이라지만 자국이 아닌 외국기관에서 일한다는 것은 즐겁기만 한 건 아니다. 자신의 신념과 달리 그 나라의 이익을 위해 일하다보면 딜레마에 빠지는 경우도 있을 터. 하지만 그의 대답은 의외로 명쾌했다.

”그런 경우는 없었어요. 제가 워낙 문화예술과 관련된 일을 좋아했고, 다행히도 일하는 동안 문화외적인 요소 때문에 시달린 적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다행이었지만 사실 주한 독일문화원은 정치적인 일로 작은 소요를 겪은 적이 있다. 언젠가 한 동교동계 인사에게서 들었던 바로는 1970년대 초반 주한 독일문화원장이 공개적으로 DJ(김대중)를 옹호하고 박정희의 독재를 비판하는 글을 <슈피겔> 같은 영향력 있는 신문에 기고한 탓에 한독관계가 껄끄러워질 것을 우려한 당시 주한 독일대사가 본국에 문화원장의 소환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하지만 귀국 후 원장은 오히려 승진했고, 독일 통일 이후에는 한국으로부터 가장 많이 초청받는 독일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2004년 6월초 평양 천리마문화회관 2층(150㎡)에 독일문화원 정보센터가 문을 열 때는 맹 협력관도 많이 긴장했다. 물론 독일 본국정부 차원의 사업이었지만 준비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주한 독일문화원의 한국인 직원 입장에서는 신경 쓰이는 일이 하나 둘이 아니었을 터.

평양의 도서관 (c)Goethe-Institut Korea
2004-2009년 운영됐던 평양 독일문화원 정보센터 내부 모습(사진제공=주한 독일문화원)

북한 내 최초의 외국 문화기관인 ’도이칠란트문화원 정보센터-독일 기술 및 학술서적 중계소‘는 독일의 과학/학술 자료 4천여 점, 문화.역사 서적과 신문, 영상자료 4천여 점 등 총 8천여 점의 자료가 비치돼 평양 사람들에게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결국은 이런저런 정치적 이유로 2009년 폐쇄된다. 이를 모델로 자국 문화원을 북한에 진출시키려던 다른 서방국가들은 크게 실망했고, 독일문화원 정보센터를 모종의 연결고리로 삼아보려던 한국측도 미련을 버려야 했다.

당시 주한 독일문화원은 평양 정보센터의 운영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고, 이를 위해 개원에 맞춰 내한한 실무자들이 북한의 외국어대학, 인민대학습당 등에서 독일어 강좌 개설 문제를 논의하는 등 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우베 슈멜터 당시 주한 독일문화원장도 "북한측은 이번 정보센터 개원이 자신들의 개방의지의 신호로 비치기를 희망한다"며 "평양에 유럽의 다른 문화기관들도 설립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전했었다. 이 특별한 문화실험이 5년 만에 폐쇄로 끝난 데 대해 맹 협력관은 아직도 아쉬운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독일문화원의 중개와 노력으로 성사된 남북한 문화교류 행사도 적지 않다. 2006년 금강산에서 통영국제음악재단 산하 TIMF앙상블과 북한 윤이상교향악단의 합동연주회가 열렸고, 2016년에는 독일 어린이연극축제에 김숙희 국제아동청소년연극연맹 한국본부 회장 등 남한측 10인과 북한 연극인 3명을 독일문화원이 초청한 적도 있다. 독일 유스오케스트라의 북한-남한 순차공연을 주선하기도 했다.

”윤이상교향악단의 베이징 공연 때 한 단원이 <아침이슬>을 부르고 있길래 그 노래를 어떻게 아느냐고 말을 걸었더니 "남조선 민요 아니냐"고 하더군요. 그런데 몇 년 후 다른 행사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사실은 저항 민중가요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실토하더라구요.”

한독 문화교류의 보람과 에피소드

▲한국과 독일은 워낙 문화교류가 많은 편이라 문화원의 역할도 컸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즘도 독일 예술단체들을 한국의 극장이나 축제들에 소개, 추천하시나요?

"그런 경우도 있지만 요즘은 워낙 정보교환이 많다보니 공연장이나 축제들끼리 먼저 접촉해 놓고 저희에게는 경비지원을 요청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초창기에는 독일 공연단이 방한하는 경우 한국측 파트너를 찾아주고, 초청조건을 조율하고, 공연진행도 도와주고, 공연 후 뒤풀이까지 함께했지요. 최대한 한국 예술가와 연결해 상호 공동협력이 가능한 부분을 찾습니다. 반대로 한국의 공연장이나 축제가 독일의 공연단이나 예술가를 초청하고 싶다고 하면 그들이 원하는 예술가를 찾아내고 그들의 방한을 지원하는 일을 하지요."

▲좋은 취지로 일하는 건데, 중간에서 난처한 일을 당할 때도 많을 것같아요.

"맞습니다. 가끔은 독일 예술가를 초청한 한국측의 비정상적 행동 때문에 중간에서 곤란을 겪기도 합니다. 1992년 독일 인형극단이 대전 엑스포에 초청 받아 공연했으나 초청자가 약속했던 항공료를 지불하지 않아 독일문화원이 대신 냈던 일, 재즈 연주자를 한국에 초청한 기획자가 잠수를 타는 바람에 그 다음해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에 연결해 준 적도 있어요. 또 독일 공연팀이 왔을 때 호텔비를 아끼기 위해 사전양해도 없이 옹색한 자기 집으로 데려가 재우겠다는 한국측 기획자의 고집 때문에 진땀 흘렸던 기억도 있습니다."

(c)Goethe-Institut Korea
2018년 6월 독일 샤우뷔네 극단 '리차드 3세' 내한공연(사진제공=LG아트센터)

▲다른 나라 문화원의 경우 맹 선생님처럼 한국인들과 함께 그 나라로 가는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양국 합작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다릅니다만, 대부분 자국 문화의 일방적 전파에 더 비중을 두는 것같아요. 독일문화원의 경우는 맹 선생님 개인의 열정인가요? 혹은 독일문화원의 정책이 다른 나라들과는 다른 탓인가요? 가령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주빈국이 한국이라 해도 주한 독일문화원의 역할은 제한적일 거라고 생각하는 게 보통인데 실제로는 매우 적극적이었단 말씀이죠.

"글쎄요, 다른 나라 문화원들의 활동에 대해 제가 잘 몰라서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독일문화원이 가급적 폭넓게 움직이려고 애쓰는 건 사실입니다. 독일에서 동아시아나 한국과 관련된 행사를 하면 독일의 주최측이 주한 독일문화원에 협조를 요청합니다. 제가 관여했던 공연만 해도 20건이 넘는데 그중 몇 가지만 말씀드리면, 우선 1990년 독일 에센 세계연극제 책임자가 방한해 여러 공연을 보고나서 최종적으로 이윤택의 <오구>를 선택했고, 이에 따라 저도 공연이 끝날 때까지 여러 가지 일을 했지요.

(c)Goethe-Institut Korea
2016년 5월 독일 샤우뷔네 극단 '민중의 적' 내한공연(사진제공=LG아트센터)

역시 1990년 하반기, 베를린 세계문화의 집에서 <아시아의 호랑이>라는 제목으로 연극, 김금화 선생의 굿, 윤이상 관련 음악회, 국립현대미술관 지원 전시, 춤, 영화 등 다양한 행사를 할 때도 저희가 많은 일을 했습니다. 2000년 하노버 엑스포 때도 앞서 말씀드린대로 안동차전놀이가 참가했구요.

2005년에는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다양한 한국 주빈국 행사를 했습니다. 함부르크-부산 행사, 만하임 쉴러 페스티벌의 폐막작이었던 국립극단의 <떼도적>,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주빈국으로 펼쳤던 많은 행사, 베를린에서 있었던 한국 주빈국 행사에서의 국립창극단 <제비> 공연, 2016년 한독 합작 프로젝트 <이피게니에>, 도이체스 테아터 베를린의 광주 아시아 문화전당 공연 등등... 지금 생각해보니 많이도 했네요."

주한 독일문화원 50년

한국의 국제 문화교류가 미미하던 시절 주한 외국문화원들의 역할은 매우 컸다. 그중에서도 독일문화원은 프랑스문화원과 함께 가장 적극적이었다. 미국, 영국, 일본같은 주요국들이 모두 비슷한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본국 정부의 정책에 따라, 혹은 한국과의 관계에 따라 활동의 초점과 강도가 달랐다. 그런 면에서 순수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독일과 프랑스 두 나라의 문화원이 가장 선두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주한독일문화원 1978년 신축당시 모습(c) Goethe-Institut Korea
주한 독일문화원의 1978년 신축 당시 모습(사진제공=주한 독일문화원)

독일문화원은 1968년 현재의 터에 소규모로 세워졌었다. 여기에 가수 윤복희의 첫 남편이었던 유주용의 집이 있었는데, 유주용의 모친이 독일인이어서 독일문화원과 자연스레 친교가 생겼고, 문화원은 그의 집과 근처 가옥들까지 사들여 1978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개관했다. 그 중간이 장충동 시절이다. 2018년에는 개원 5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히 열기도 했다.

2018년 주한 독일문화원 개원 50주년 기념음악회 '소리의 흔적' 리셉션(사진제공=주한 독일문화원)
2018년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주한 독일문화원 개원 50주년 기념음악회 '소리의 흔적' 리셉션. 앞줄 좌측부터 소프라노 임선혜, 최창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직무대리, 마를라 슈투켄베르크 주한 독일문화원장, 맹완호 협력관. 뒷줄은 노부스콰르텟과 독일인 예술가들.(사진제공=주한 독일문화원)

그동안 독일문화원의 정책방향도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흔히 주한 외국문화원들의 활동은 자국의 문화를 한국에 전파하고 이식하는 게 주목적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독일문화원은 조금 다르다. 자국문화의 전파도 중요하지만 현지인들과의 교류와 합작, 심지어는 독일과 관계없는 주재국 인접국들과의 공동작업이나 교류에까지 관심을 갖고 지원한다. 최근에는 다른 나라들도 상대국과의 공동작업에 방점을 두기 시작했지만 독일의 경우는 좀더 일찍 그 중요성에 눈을 떴던 것같다.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독일과 주재국 예술가들의 협업을 중시하기 시작했고 나아가서는 가령 독일 예술가의 참여 없이 아시아 몇 나라끼리 진행하는 공동창작에도 지원을 하는 등 시야를 넓혔다. 홍콩 아시아-유럽 무용포럼도 딱히 독일 무용인들이 참석한 행사도 아니었다. 1998년에는 베를린 세계 문화의 집에서 한국문화 행사를 크게 열었고 맹 협력관은 이를 위해 현지에서 2개월간 출장근무를 하기도 했다. 물론 세계문화의 집은 독일문화원과는 또다른 정책적 방향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어쨌거나 이른바 선진국들일수록 자국문화의 일방적 보여주기에서 벗어나 외국문화의 자국내 소개 혹은 쌍방향 교류를 지향한다는 얘기다.

현재 주한독일문화원 전경 (c)Goethe-Institut Korea
주한 독일문화원 전경(사진제공=주한 독일문화원)

현재 주한 독일문화원(괴테 인스티투트 서울)은 독일문화원 동아시아 본부가 되어 있다. 과거에는 도쿄가 동아시아 본부를 맡았었는데 중국이 본격적인 대외활동을 시작하면서 2010년부터 바뀐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중간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그렇게 되었다는 말도 있는데, 어쨌든 독일의 대아시아 문화정책에서 서울의 위치는 더 중요해진 셈이다.

무대 뒤에도 박수를 보내며

사람들은 무대를 보면서 그 뒤에 가려진 존재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다기 보다 그들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연이 끝나면 출연자들과 연출자/안무자, 그리고 잘해야 스태프들이 객석을 향해 인사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나마 기획자, 제작자, 후원자들은 무대가 아닌 다른 방식, 가령 언론을 통해 종종 알려지고 인정 받는 경우도 있지만, 맹 협력관처럼 완전히 뒤에서만 일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경우이다. 얼마 전 작고한 이종덕 전 예술의전당 사장의 책 제목처럼, 대부분의 경우 <나의 인생은 무대 뒤에서 이루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맹완호 협력관 같은 인물들의 존재는 더더욱 소중할 수밖에 없다. 그의 은퇴가 몹시 아쉬워지는 까닭이다. 물론 누군가 물러나면 누군가 이어받겠지만..... 퇴임하면 무얼 할 생각이냐고 물었더니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단다. “그래도 뭔가 하셔야죠?” “글쎄요, 통영국제음악제에 가서 자원봉사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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