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34 공연예술, 계급, 문명화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34 공연예술, 계급, 문명화
  • 조복행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0.12.07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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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메쉬 (출처 : ancient-origins.net)
길가메쉬 (출처 : ancient-origins.net)

문화에 대한 우리의 편견중의 하나는 문화나 예술은 매우 민주적이고 평등한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갈등을 낳는 다른 영역들과 달리, 문화는 이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초연하고 순수한 분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화에는 강한 계급성이 작용한다. 문화도 사회의 한 영역이며 그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적 상황이나 시장을 이끌어가는 힘, 생산과 소비의 전 과정에는 어김없이 계급성과 권력이 작동한다. 또한 문화는 강한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고 때로는 정치보다 더 정치적일 수 있다. 문화는 의미를 창출하려는 거대한 싸움터다. 물론 이런 의미투쟁이 문화발전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계급은 불평등을 초래한다. 문화는 경제 못지 않게 차별적이다. 자원은 불평등하게 배분되기도 하고 아예 접근이 불가능한 사람들도 있다. 문화와 예술의 불평등은 많은 경우 구조적 원인에 의해 발생하기도 하지만 예술 자체가 지닌 내재적이고 본원적 성격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부르디외는 문화의 폭력적 성격을 고발하면서 문화는 구별한다고 하였다. 미적 불관용, 젠더와 인종의 차별, 승자독식, 기회의 불균형 등이 문화의 폭력성과 불평등의 모습들이다. 
 
계급의 발생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계급이 생긴 건 1만년 전에 시작된 농업혁명 때다. 농업이 시작되면서 생산력이 증대되자 노동력을 필요로 하게 되고 이들을 통제하는 지배계급이 출현한 것이다. 국가와 왕이라는 제도가 생긴 것도 농업혁명 시기다. 이 때는 오늘날과 같이 기술이 발달되지 않아서 농민들은 엄청난 노역에 시달렸을 것이다. 고대 수메르의 서사시인 <길가메쉬>에는 노동에 지친 신들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당시에는 농사도구들이 매우 원시적어서 대부분의 농사를 모두 사람의 힘으로 지어야 했을 터이니 그 어려움을 상상할 수 있다. 이렇게 힘든 노동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조직과 힘이 필요했을 것이다. 농업혁명 시대에 소유제도가 생겨나고 인류는 계급사회로 변한다. 마르크스는 역사발전 5단계에서 계급이 등장한 시기를 원시공산사회에 이어 나타난 고대노예제 사회라고 말하는데, 이는 농업혁명의 시기에 해당한다. 국가가 생기면서 지배와 피재배 관계,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생긴다. 소유와 축적이 발생하고 이로써 인류의 불행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토마스 모어는 소유의 폐지가 유토피아를 낳을 것이라고 하였고, 루소도 역시 농업과 야금의 발달이 지배와 복종, 폭력을 낳았고 이로 인한 불평등한 소유는 계급사회의 출현을 촉발했다고 하였다. 계급의 최초의 의미는 소유의 불평등을 말하는 것이었다.

계급(class)은 18세기에 들어와 등급(rank)이나 순위(order)등을 대체하는 용어로 등장한다. 이미 홉스나 루소 등이 불평등의 문제를 제기하였고, 19세기에는 산업혁명의 진전과 함께 뜨거운 사회적 의제가 되었다. 마르크스는 계급문제를 다룬 대표적인 학자다. 마르크스의 계급론은 잘 알려진 것처럼 생산수단의 소유를 기준으로 자본가 계급과 프롤레타리아로 나눈다.

이를 좀 더 포괄적인 사회학적 개념으로 발전시킨 건 막스 베버다. 베버는 경제적 차이만이 아니라 지위, 교육정도, 명예 등의 사회적 차이도 계급에 포함한다. 그는 이를 신분이라고 부른다. 계급은 경제적으로 규정된 계급상태이고, 신분은 ‘인간의 생활운영을 구성하는 온갖 전형적인 요소들로서 다수에 공통적인 그 어느 특성에 결부되어 있는 명예에 대한 특유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사회의 평가(막스 베버, 『경제와 사회』, 409)’다. 계급은 경제력의 차이만을 구분의 근거로 삼지만 신분은 사회적 지위, 명예, 생활방식의 차이들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개념이다. 계급은 생산중심적 개념이고 신분은 소비중심적 개념으로 볼 수 있다( Tak Wing Chan, 『Social Status and Cultural Consumption』, 87).
 
문화와 사회계급
베버 이후 계급의 개념은 경제적 차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조건을 포괄하는 차이로 확장된다. 그래서 최근에는 사회계급 또는 사회경제계급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였다. 사회계급은 계급사회에서 발생하는 사회계층화와 관련된 개념으로 지층이 몇 개의 수직적인 층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사회도 그렇게 계층화한다는 개념이다.

문화소비를 계급적으로 파악한 것은 손스타인 베블렌이었다. 그는 소비를 사회적 지위의 과시수단으로 보았다. 값비싸고 아름다운 물건, 명품의 소비는 부와 지위를 과시하는 행위이고, 사치재의 경우 비쌀수록 잘 팔리는 것은 부유층의 과시적 행위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과시소비’다. 부르디외는 이를 대중들이 필요에 의해 소비하는 필요취향과 대비하여 사치취향 또는 자유취향으로 부른다.  필요와 그 필요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로부터의 객관적 거리두기는 자유를 과시함으로써 자유로움을 배가시키는 의식적 거리두기를 동반한다(『구별짓기』, 113)고 말한다.

이와 유사한 주장은 게오르그 짐멜에게서도 나타난다. 짐멜은 유행은 타인과의 차별화 기제라고 말한다. 소비에 있어서 남에게 뒤지지 않거나 남보다 우월하게 보이기 위해서 명품을 구입하거나 최신 유행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짐멜에게 유행은 타인의 모방이기도 하고 타인과의 차별화이기도 하다.

문화를 대중문화와 고급문화로 구분하고 각 계급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대중문화나 고급문화를 소비한다고 본 것은 허버트 갠즈다. 그는 취향문화를 고급, 중상, 중하, 하류, 유사민속하류(quasi folk low)계층 등 5가지로 나누었다. 갠즈는 취향공중이라는 용어를 제안하였는데 이는 동일한 계급에 속한 대중들은 동일한 취향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는 부르디외가 정식화한 ‘상동성’의 개념과 맞닿는다.

부르디외와 문화소비

피에르 부르디외(출처 : en.wikipedia.org)
피에르 부르디외(출처 : en.wikipedia.org)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문화의 계급적 성격을 면밀하게 분석한 것은 부르디외다. 그의 『중간예술』이나 『구별짓기』는 문화소비와 계급의 관계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로 그를 세계적인 사회학자로 발돋움하게 한 저술이다. 그의 아비투스, 상동성 개념등을 활용한 문화소비연구는 세계적인 붐을 이루었다, 그는 문화소비를 계급적 소비로 보았다. 상징자본, 경제자본, 문화자본 등의 차이에 의해 문화소비에 차이가 발생하며 사회적 상동성(homology)에 의해 집단적인 모습을 띤다고 말한다. 상동성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하나의 집단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성격을 말한다. 예를 들면 엘리트층은 고급예술을 좋아한다거나 하류층은 대중가요를 좋아한다는 것들이 그런 것이다. 상류층과 하류층 사이에는 음식이나 의복, 외모와 상징을 위한 지출, 예술 등에서의 소비차이가 발생하며 이는 각 계급의 정체성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상동성은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개념이다. 부르디외는 문화의 각 영역을 장(場)이라고 부르는데, 예를 들면 문학장, 미술장, 연극장 등이다. 그는 이들  문화를 횡단하는 각각의 장들 사이에는 상동성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들 문화의 영역에서는 유사한 성격들이 있어서 이들이 종합되고 통일되어 문화를 구성한다고 보는 것이다.  

부르디외의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아비투스다. 그는 이를 ‘구분 감각으로서의 미적 감각’이라고 부른다. 그는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소비습관, 문화적 행태 등을 아비투스라고 부른다. 성향체계, 사회적 정향 또는 신체도식으로도 부를 수 있다. 아비투스는 취향을 포함한다. 취향은 ‘자연스럽게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형성되는 것 (『구별짓기』, 193)이다. 그런 점에서 취향의 선천성을 주장한 칸트를 비판한다. 부르디외는 음악이 예술소비에 있어서 가장 계급의 차이를 잘 드러내는 영역이라고 말하면서 정통적 취향을 가진 사람은 <피아노 평균율>이나 <푸가>와 같은 작품을 중간층 취향에서는 <랩소디 인 블루>같은 작품을, 대중적 취향의 소비자들에게서는 경음악이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같은 작품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이런 경향은 19세기 뉴욕의 공연관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페라를 주로 관람하던 상류층과 멜로드라마와 민스트럴을 관람하던 중류층, 버라이어티 쇼를 주로 관람하던 노동자 계급으로 나뉘었던 것이다. 부르디외는 계급적 취향이 갖는 배타성을 비판한다. ‘미적 불관용은 가공할만한 폭력성을 갖고 있다. 다른 생활양식에 대한 혐오감은 각 계급을 갈라놓고 있는 가장 강력한 장벽’(『구별짓기』, 115)이라고 말한다. 그는 아비투스를 구조화한 구조이자 구조화하는 구조라고 말한다. 우리는 아비투스에 의해 자신을 형성했고, 아비투스는 우리의 미래를 구성할 것이라는 말이다.     

 

불평등 (출처 : industryweek.com)
불평등 (출처 : industryweek.com)

부르디외의 상동성이나 아비투스와 같은 취향 개념은 1990년대까지 문화소비이론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미국학자들은 부르디외의 주장이 프랑스적 현상, 그 중에서도 특히 파리적 현상이라고 비판한다. 취향은 매우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어서 집단과 취향이 반드시 상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R. 피터슨과 심커스는 취향은 계급에 따라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장르만을 좋아하는 편식성 소비를 할 수도 있고(univore), 여러가지 장르를 좋아하는 잡식성 소비를 할 수도 있다(omnivore)고 말한다. 그런데 상류층은 옴니보어 소비를 하는 반면 하류층은 유니보어 소비를 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부르디외의 계급에 따른 취향의 상동성을 비판하였지만 큰 틀에서 보면 역시 계급에 따라 취향이 다르다고 말한 것이다. 옴니보어 소비를 ‘취향 절충주의’(taste eccleticism)라고도 말하는데, 이는 곧 상류층의 문화소비의 특징이 된다. 이는 곧 상류층과 하류층의 문화소비에 차이가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에 의하면 옴니보어적 소비가 문화엘리트주의의 원칙이다. 유일한 안식처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문화적 환경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곧 옴니보어적 소비패턴이다.

최근의 문화소비패턴은 대부분 옴니보어 유니보어 개념이 대세를 이루고 잇다. 그러나 이 개념이 모든 소비계층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높은 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라고 해도 순수예술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들은 텔레비전이나 영상, 게임과 같은 대중문화를 선호할 뿐, 연극이나 오페라, 순수문학 등을 좋아하지 않는다. 젊은 세대들은 대중문화를 선호한다. 반대로 가난한 계층에서도 고급예술을 선호하는 층도 있다. 이처럼 교육의 정도에 따라 선호장르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의 문제인가? 문화소비의 패턴이 변화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부르디외의 상동성 개념이 애초부터 잘못된 개념이었는가? 아니면 프랑스만의 현상인가?
 
개인화
부르디외의 상동성 논변을 피터슨은 옴니보어 유니보어 개념으로 반박하였는데, 탁 윙 찬(Tak Wing Chan)은 여기에 ‘개인화’ 개념을 추가한다. 그는 문화소비의 형태를 (1)상동성 (2) 옴니보어 유니보어 (3)개인화 등 세 가지로 구분한다. 문화소비에는 집단적인 성격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성격도 작용한다는 것이다. ‘개인화’(individualization) 개념은 소비자의 취향은 사회계층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연령, 젠더, 수입 등 개인적인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고, 개인은 스스로 결정하고 판별할 수 있는 자기해방의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울리히 벡이나 안토니 기든스 등의 사회학자들이 주장하는 개인화 담론을 차용한 것으로 현대사회는 점점 개인화되어 가고 있고 소비에서도 개인적 소비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불평등 구조는 상당한 정도로 안정성을 띠고 있고, 계급과 신분(status)이 사회적 행동이나 라이프 스타일의 형성, 소비패턴에 미치는 영향은 점점 감소하고 있다(Tak Wing Chan, 『Social Status and Cultural Consumption』, 5)는 것이다.

탁 윙 찬은 미국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칠레 헝가리 등 6개국의 문화소비자를 대상으로 실증연구를 실시하였다. 특징적인 결과로는 상동성이 문화소비에서 큰 적합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문화엘리트층의 존재 자체에 대해 의구심을 표시한다. 대중문화를 외면하면서 고급문화만 소비하는 층은 많지 않고 옴니보어와 유니보어가 훨씬 많다.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의 소수 엘리트 층에서도 아예 고급문화를 소비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교육이나 수입면에서 상류층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고급문화를 소비하는 경우도 많았다. 개인화 개념 역시 별로 지지를 받지 못했다. 세 가지 개념 중에서 가장 적합성이 낮았다. 이는 소비패턴은 개인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소수의 패턴만이 있다는 것이다. 젠더, 교육, 수입, 인구통계적 변수, 지위 등의 영향을 받는 것은 확실하다. 문화소비는 사회적으로 구조화되고 계층화되는 것이지 개인적인 성향이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탁 윙찬이 가장 강력하게 지지한 문화소비유형은 옴니보어와 유니보어 개념이다. 많은 소비자들이 고급문화 대중문화를 가리지 않고 소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류층에서는 문화 비활동자(inactive)도 있다. 이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발견되며 미술분야에서 그런 경향이 강하다. 포시보어(paucivore, 가난한 소비자층)계층도 있는데 이들은 극히 제한된 분야의 문화활동에만 참여하는 층으로 문화 비활동자보다는 사회적 지위가 높다.  탁 윙 찬은 문화소비는 계급보다는 신분, 즉 사회계급에 의해 결정된다고 결론을 맺는다. 경제적 조건과 함께 교육이나 취향 등의 조건이 결합하여 소비패턴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상동성의 퇴조와 옴니보어 소비의 확대는 문화소비는 점점 개방성과 포용성의 방향으로 바뀌고 있음을 말한다.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구별이 점점 줄어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비의 기회도 확장되고 있다. 문화소비도 점점 민주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소비에는 늘 불평등과 계급성이 존재한다. 소비자의 욕망이나 기호, 취향과 관계없이 소비가 불가능한 상황, 소비의 불평등이 문제가 된다. 일반적으로 불평등은 자원의 불균등한 분배, 기회의 불평등 등에 의해 발생한다. 또한 문화의 다양성 부족, 공급의 부족 등 정책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서도 기인하지만 소비자의 경제력에 의해서도 발생한다. 고급예술을 선호하지만 경제력 부족으로 소비할 수 없다거나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없어서 불가능한 상황 등 여러 경우가 있다. 또한 문화불평등은 생산과 소비의 과정에서 상호적으로 발생한다.  

취향과 계급
‘취미에 대해서는 논쟁하지 마라’ (De gustibus non est disputandum). 인간은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있고, 모든 취미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따라서 체화된다. 그래서 취미를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취향을 타인과의 차별화 수단으로 활용한다.

문화소비의 계급성은 경제력에 의해 좌우된다. 과거에는 대중들은 미술이나 음악 등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경제력이 발전하고 중산층이 형성되면서 대중들에게도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경제력만으로 소비되는 것은 아니고, 추가로 취향이 필요하다. 또한 예술소비는 장르에 따라 소비패턴이 다르다. 개인적 취향에 따라 장르별 선호도가 달라지고, 경제력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문학이나 미술과 같은 예술은 개인적 소비경향이 강하지만, 공연소비는 집단성을 띤다. 여기서 소집단내에서의 상동성이 발생한다. 공연을 선택하고 극장을 방문하는 일은 개인적인 행위지만 극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람행위에는 강한 집단성이 작동한다. 우리는 이를 감성공동체, 취향공동체, 소비공동체 등으로 부를 수 있다. 어떤 공연에 참여한 관객들은 유사한 취향을 가지고 있고, 동일한 공간에 있는 동안에는 유사한 감성을 공유한다. 공연예술의 소비에는 경제력과 라이프스타일이 모두 작용하고 취향이 소비에 큰 영향을 미친다.

부르디외는 취향을 ‘운명애의 형식’이라는 멋진 말로 표현하였다. 취향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이끌어가는 형식이다. 따라서 어떤 취향을 형성하는가는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취향의 형성에는 어릴 때부터의 교육이 중요하다. 이는 한 인간의 아비투스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라이프스타일(출처 : pngtree.com)
라이프스타일(출처 : pngtree.com)

공연예술의 계급성 
과거에 배우들은 왕이나 귀족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는 하인이었다. 하위징거는 과거의 음악가들은 귀족들의 집에서 말처럼 일을 했다고 적고 있다. 여배우는 연극에 출연할 수 없었고 출연이 허용된 이후에는 매춘부와 동의어로 인식되어 왔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미투운동은 헐리우드 영화시장에서 출발했고 우리나라 연극계에서도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는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성들은 오랜 기간 성적 불평등에 시달려 왔고 최근까지도 캐스팅 등에서 은밀한 권력의 영향을 받아왔다. <캐스팅 카우치>라는 말은 헐리우드에서 여배우를 캐스팅할 때 사용되어 온 용어다.

곰 골리기 (출처 : history.com)
곰 골리기 (출처 : history.com)

동물은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심각한 학대를 당해 왔다. 고대로마의 동물사냥(Venatio)에서는 엄청난 수의 동물들이 사냥이나 검투사와의 싸움에서 죽어갔다. 중세시대에는 곰 골리기나 황소 골리기 같은 유혈스포츠가 있었고, 서커스에서는 동물들을 돈벌이의 대상으로 삼아 학대해 왔고,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다. 

임프레사리오와 배우 간의 갈등 역시 공연의 강한 계급성의 영향이다. 과거의 배우들은 열악한 공연조건에서 혹사를 당했고, 출연료를 못 받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1910년대에 있었던 미국의 공연노조의 탄생은 배우착취에 대한 저항의 결과였다. 그런 현상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공연예술의 구조적 문제 때문이다. 연출과 배우 사이에도 권력이 작동하고,  때로 연출가들은 배우들을 비인격적으로 대우하기도 하였다. 
 

공연은 소비에서도 강한 계급성을 드러낸다. 문학이나 미술처럼 언제 어디서나 소비할 수 있는 예술이 아니라 현장에 현전해야 소비가 가능한 예술로서, 시간과 경제력이 있는 계층에게만 열려 있는 장르다.

승자독식도 주요한 불평등의 요소다. 파바로티와 우리나라의 어느 이름없는 성악가의 차이는 매우 크다. 이런 지명도의 차이는 곧장 수입의 차이로 이어진다. 파바로티는 한 회당 몇 억을 받기도 했지만 우리나라의 무명 성악가는 때로는 무보수로 출연하기도 한다.  같은 공연에 출연하는 퍼포머 사이에서도 차이가 발생한다. 특급 배우와 엑스트라의 개런티의 차이는 매우 크다. 연예산업에서도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연예기획사와 특급스타가 수익을 분배할 때 0:10인 경우도 있었다. 즉 연예기획사는 아무런 수입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손실을 어디서 보상받을까?  특급스타보다 열등한 다른 배우들과의 계약에서 보상받는다. 그 경우에는 9:1정도가 될 것이다. 무명배우의 희생으로 특급배우가 살아가는 것이다. 매우 계급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능력주의(meritocracy)라고 말한다. 배우의 능력에 따른 차등화. 20세기 초반 심리학을 지배했던 행동주의 심리학은 행동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바뀔 수 있다는, 즉 노력하는 만큼 성과가 따라온다는 심리학이었다. 왓슨은 12명의 건강한 아기를 준다면 아이들이 원하는대로 변호사든 의사든 거지든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노력만으로 무엇을 성취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불평등은 더욱 심해지고.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하는 능력주의 가치관, 인류가 믿어온 행동주의 심리학은 이제는 무의미한 주장이 되고 말았다. 노력보다 사회계급 또는 사회경제적 계급이 인간의 미래를 결정하는 세상이 도래하였다. 사회계급은 인간의 사고, 생활방식, 소비패턴 등 삶의 모든 방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공연에서 스타시스템은 단순히 능력만이 아니라 이미지의 조작과 왜곡에 의해 발생하는 경우도 많다. 예술가는 만들어진다.

승자독식은 국가 간에도 발생한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많은 나라들의 공연산업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많은 나라의 공연산업을 식민화하고 있고 앞으로 더욱 강화될지도 모른다.
장르별 편차도 심하다. 장르도 위계화(paragone)되어 있다. 오페라나 클래식 음악은 고급예술이고 뮤지컬이나 대중음악은 대중예술 또는 하급예술이라는 시각은 지금도 강하게 남아있다.

장르별 소비량이나 선호도에도 큰 차이가 나타난다. 뮤지컬과 무용의 소비자 선호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공연은 인종과 민족 간에도 갈등을 초래하였다. 미국의 민스트럴이라는 엔터테인먼트는 흑인을 비하하는 오락이었고, 미국과 영국 간에는 배우의 연기를 둘러싼 폭동도 있었다.   

공연예술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은 예술단체나 조직에 소속되어 있지 않는 한 모두 비정규직이다. 그러나 예술인들이 몸담을 수 있는 단체는 수요에 비해 많지 않다. BBC는 맨체스터 대학과 공동으로 16만여 명의 영국인을 대상으로 <영국의 사회계급 조사>를 실시하여 2017년에 발표하였다. 결과보고서에서 그들은 영국의 계급을 엘리트, 기성중류층, 기술중류층, 신흥부유층노동자, 전통적 노동자, 새로운 서비스 집단, 프레카리아트 등 7개로 나누었다. 여기서 주목을 끄는 새로운 계급이 프레카리아트로 전체 응답자 중 15%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가이 스탠딩(가이 스탠딩은 기본소득 개념의 연구에 있어서도 매우 선구적인 학자다)이라는 경제학자가 만든 신조어로 비정규직을 뜻한다. 불안정한(precarious) 프롤레타리아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비정규직은 2019년 말 기준으로 748만 명이고 전체 임금노동자의 21%에 해당한다. 5명중 한 명은 비정규직인 것이다. 이 비율은 2018년 기준으로 스페인(26%), 폴란드(24.4%)보다는 낮지만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은 비율이다. 우리나라의 비정규직 임금은 정규직의 36%로 정규직의 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우리나라에서 비정규직은 많은 사회문제의 원인이다. 저출산과 비혼의 문제는 비정규직 문제에서 출발한다. 실제로 주변의 많은 비혼자들에게 물어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돈과 변변한 직장이 없는데 어떻게 결혼할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사회는 비정규직에 대해 비정한 것이 아닌가?

예술인들은 대표적인 비정규직이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예술관련 대학이 있다(외국과 비교해도 결코 적지 않은 숫자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 대학은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곳이 되고 말았다. 예술인들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과도한 예술관계인을 배출하는 것이 효율적인 자원의 배분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계급은 불평등을 낳고 이는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지원을 둘러싼 갈등도 있다. 지원의 규모나 방식은 늘 갈등의 원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연예술의 국영화’가 두드러지게 진행되고 있다. 영국의 재닛 미니한은 영국의 로열 아카데미가 생긴 1768년 이후의 영국의 예술지원과 간섭을 ‘문화의 국영화’(Nationalization of Culture)라고 표현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문화를 국영화하려는 시도는 많다. 개인화가 진전되면서 과거에는 가족이라는 집단에서 해결이 가능하던 문제도 지금은 국가가 담당해야 한다.

사회의 모든 문제는 국가의 과제가 되었다. 이는 예술에도 적용되는데, 특히 공연예술에서는 점점 공공부문의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무려 50%를 상회한다. 이는 공연예술이 가지는 취약한 산업적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히 우리나라의 예술지원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확한 통계를 가지고 비교해야 하겠지만 이는 우리나라의 예술에 대한 강박관념과 관계가 있다. 필자는 이를 ‘예술강박증’ 또는 ‘문화강박증’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공연예술의 국영화는 다양한 부문에서 나타나고 있다. 하버마스는 공론장 영역에서 민간부문의 역할이 감소하고 이를 점점 국가가 담당하는 현상을 재봉건화라고 하였다. 예술의 국영화든 재봉건화든 공적 부문의 과도한 역할이 바람직한지는 자원배분의 효율성이나, 예술의 효과 등에서 잘 따져보아야 할 문제다. 우리는 흔히 팔길이 원칙만을 말하지만 오히려 과도한 지원도 문화에 대한 은밀한 간섭이 될 수도 있고, 창작자의 외부의존성을 강화할 수도 있으며 자원분배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는 문화에 대한 지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이 매우 강하게 확산되어 있다.         

공연의 계급성은 극장에도 나타난다. 극장의 구조와 좌석의 구분, 이에 따른 티켓가격의 차이 등은 대표적인 계급성의 표지다. 이런 사실들을 보면 극장과 공연예술에서는 계급성이 내재되어 있고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미시권력

미쉘 푸코(britannica.com)
미쉘 푸코(britannica.com)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계급이라는 말이 있다. 계급은 인류가 집단을 이루어 살면서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인간은 무리를 지으면 무리를 이끌어갈 리더를 선출한다. 가정, 작은 모임, 학교나 군대, 국가 등 모든 집단은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조직을 이끌어가는 주도적인 사람이 있어야 조직이 운영되기 때문일 것이다. 계급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 힘의 차이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권력작용을 동반한다. 권력은 정치만이 아니라 사회의 곳곳에, 인간사이의 작은 집단에도 권력은 존재한다. 아버지와 아들, 스승과 제자, 상사와 부하,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까지. 푸코는 이를 미시적 권력이라고 불렀다.

공연예슬에는 미시적 권력이 작동한다. 문학이나 미술과 같은 개인예술과 달리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서 창작하는 협동의 예술이다. 따라서 타분야에 대한 이해, 동료들과의 소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협동과 종합의 메카니즘이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모이면 계급과 권력관계, 불평등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창작과 인간관계속에는 지시와 복종의 메카니즘이 작용하고, 때로는 갈등과 불협화음이 발생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문화와 계급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생산보다는 주로 소비의 문제를 다루어 왔다.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거대한 문화소비자 집단은 계급적 성격을 띠기 때문에 학자들의 시선이 소비문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두 번째로는 경제적 차이와 생산수단의 차이를 중심으로 하는 생산중심의 계급관념이 퇴조하고 소비중심의 사회계급 개념으로 이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 번째로는 문화소비의 계급성을 연구한 부르디외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예술의 불평등과 계급성은 소비에서만이 아니라 생산에도 존재한다. 예술의 생산과 소비는 하나의 가치사슬속에 있는 상호적 과정이다. 생산이 불평등하면 소비에서도 불평등이 발생하고, 소비의 불평등은 생산에도 반영된다. 생산에서의 불평등이 많은 장르가 공연예술이다. 생산과정에서 미시권력이 다양하게 작동한다. 공연은 사람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공연의 문명화
공연산업은 다른 어떤 예술보다 산업화가 빨리 시작되었다. 그러한 오랜 역사속에서 공연은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오락으로 기능하기도 했고, 대중들의 절대적인 오락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의 공연의 생산과 소비의 과정에서의 무질서, 불평등, 계급성은 매우 강했다. 이런 무질서와 혼란은 19세기 중엽을 지나면서 점점 개선된다. 이를 필자는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라는 용어를 빌려 ‘공연의 문명화 과정’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 문명화 과정은 사람을 존중하는 인본주의적인 인식의 전환, 공연의 상업성, 제도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서 발전된다. 그러나 승자독식이나 극장의 계급성 등 구조화된 계급성은 여전히 상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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