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옥희가 말하는 '살아남은 춤들의 사연'
정옥희가 말하는 '살아남은 춤들의 사연'
  • 이종찬 기자
  • 승인 2020.12.21 15: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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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이 춤의 운명은 - 살아남은 작품들의 생애사’
도서'이 춤의 운명은'(사진=열화당)
'이 춤의 운명은' 표지 (사진제공=열화당)

[더프리뷰=서울] 이종찬 기자 = 처음 가 본 엄숙한 공연장, 그 분위기에 압도된 채 마주한 무용수의 힘찬 발끝, 칼군무를 자랑하며 동선을 딱딱 맞춰내는 텔레비전 속 아이돌 그룹, 혹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마주친 깃발의 펄럭임. ‘춤’이라고 하면 각자 머릿속에 그려지는 어떤 장면, 특정한 자세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기억 속에 남은 장면만으로 그 춤들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춤은 추어지는 그 순간에 존재하며, 그렇기에 매번 새롭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춤은 끊임없는 사라짐을 통해 살아남는다.

신간 <이 춤의 운명은>은 작품을 만든 안무가나 무용수가 아닌 ‘춤’의 존재론이다. 인간의 생을 예측할 수 없듯 작품의 생도 그러한데, 하나의 춤이 탄생해서 어떻게 살아가고 사라지는지 그 굴곡진 사연을 들여다본다.

저자 정옥희는 원작에 대한 기존 관념을 바꾸고 각 작품에 얽힌 우여곡절을 주제로 열두 편의 춤 작품을 골라 이야기한다. 처음 무용을 배운 순간부터 학생들을 가르치고 무용을 연구하게 된 지금까지 자신의 몸에 담았던, 또는 가까이서 함께했던 춤의 기억을 더듬는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고전이나 획기적인 기획과 같은 거창한 기준을 벗어나 선택된 작품들은 춤 자체의 독특한 습성인 자유로운 움직임을 펼쳐 보인다.

흐트러지는 ‘원작’
이 책은 각기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서 존재하고 있던 이질적인 춤 작품들을 마치 별자리처럼 한 자리에 놓고 바라보며 그러한 연결 가운데 ‘원작’에 대한 통념을 비튼다. 오랜 시간 예술작품의 시작이자 중심축이 되어 왔던 원작의 권위를 지우는 작업은 그 자체로 새로운 의미를 형성한다. 춤의 형체를 공중에 흐트러뜨리는 과정에서 또 다른 움직임이 파생되며 원작은 이제 하나의 모티프, 또는 한 조각 파편으로 남는다.

예컨대 대표적 낭만발레인 <라 실피드>(1832)는 시작부터 두 가지 다른 갈래로 이어져 내려오다 이후 둘 모두가 지워지는 혁신을 겪기도 하고,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백조의 호수>(1877)는 이제 원본이 무엇인지 따지는 일조차 무의미할 만큼 무수히 재해석되고 있다. 백조 자체가 발레 무용수를 연상시킬 정도로 발레의 대명사가 된 이 명작은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음으로써 박제된 채 낡아가기를 거부한다. 오로지 해체를 통해서만 그 근원을 이어갈 수 있다는 역설과도 같이 춤은 ‘끊임없이 사라지는 지점’(p.225)에 존재한다.

'백조의 호수' 2막 엔딩(황혜민n콘스탄틴 노보셀로프)(c)Minok Lee(사진=유니버설 발레단)
'백조의 호수' 2막 엔딩(황혜민&콘스탄틴 노보셀로프)(c)Minok Lee(사진제공=유니버설 발레단)

근대 한국춤에서도 작품의 해체와 재해석은 마찬가지다. 학을 모티프로 한 <학춤> 역시 전통과 창작 사이에서 교차하며 원작의 개념으로부터 멀어진다. 전통 궁중학무에 뿌리를 둔 이 춤은, 진짜 학을 관찰해 만든 창작무(한성준의 <학춤>), 무용극(조택원의 <학>), 인간과 새의 교감을 통한 현대무용(뤽 페통의 <라이트 버드>), 심지어는 건축물의 일부로까지 이동한다. 2019년 건축가 프랭크 게리에 의해 루이 뷔통 건물에 그대로 쌓아 올려진 학의 너울거림을 보며, 우리는 차갑고 단단한 콘크리트의 질감과 부드러운 날갯짓의 어우러짐을 감상할 수 있었다. 과연 어디까지 어떤 형태로 춤이 퍼져갈 수 있을까. 저자의 이야기가 점점 더 궁금해진다.

뤽 페통, '라이트 버드(Light Bird)'(사진=열화당)
뤽 페통 안무 '라이트 버드(Light Bird)'(사진제공=열화당)

‘춤’이라는 공동의 언어
‘몸의 언어’라고도 할 춤은 국경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 세상 사람들을 연결한다. 그리고 그 춤 안에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담아낸 몇몇 작품들은 시간마저 거슬러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특히 차별과 혐오의 문제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질문들인데, 개인과 집단의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다룬 작품들은 창작자가 사라진 뒤에도 춤으로 소통을 이어 간다. 바로 흑인 여성 지식인이자 미국 무용계의 독보적인 존재인 캐서린 던햄의 <사우스랜드>(1951)와, 백인의 영역이라고 여겨졌던 현대무용에 흑인 무용수의 자리를 마련한 앨빈 에일리의 <계시>(1960)이다.

<사우스랜드>는 백인 여성으로부터 성폭행 누명을 쓰고 백인 남성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해 죽은 흑인 청년 ‘리처드’를 통해 뿌리 깊은 인종차별의 역사를 낱낱이 드러낸다. 작품은 폭력 장면과 금기의 단어들을 정면에 노출시키고, 관객과 무용수들은 자기 안에 스스로 내상을 입혀 가며 문제에 주목하게 된다. 나아가 던햄은 인종차별이 특정 국가만의 문제가 아님을 강조하며 전국 투어를 통해 일종의 사회운동을 실천했다. 일부 장면이 삭제 요구를 받거나 언론으로부터 외면당하기도 했지만, <사우스랜드>는 꿋꿋이 살아남아 모두의 마음속에 공명한다.

캐더린 던햄, '사우스랜드'(c)Mary Hart_courtesy of Julie belafonte
캐더린 던햄 '사우스랜드' (c)Mary Hart_courtesy of Julie belafonte

이와 반대로 <계시>는 흥겹고 쉬운 언어로 우리에게 밀착해 온다. 미국 흑인들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을 응축한 ‘블러드 메모리’를 담고 있으면서도, 현대무용이 어렵지 않고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비평가들이 상업적인 엔터테인먼트라 치부했을 때 에일리는 이렇게 응수했다. “쇼 비즈니스라는 게 부끄럽지 않다. 흑인들은 이에 긴 전통이 있고, 이는 또한 우리 무용단이 매우 잘하는 것이다.”(p.169)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탈출해 자유와 희망을 노래하는 <계시>의 메시지와 포용력은, 시간이 흘러 모두가 절망에 빠진 때에도 다시 한번 우리를 위로했다.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 세계 사람들이 서로 격리된 와중에 에일리무용단의 무용수들은 각자의 집에서 <계시>를 춤춘 영상을 편집해 SNS에 업로드했다. 한 무용수에서 다른 무용수로 이어지던 춤은 마지막에 이르러 퀼트 조각처럼 이어 붙인 온라인 군무로 완성되었다. 인종차별의 아픔을 위로하던 노래와 춤은 이제 시공간을 뛰어넘어, 각자의 고통을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계시처럼 다가온다.

앨빈 에일리, '계시'(c)Gert Krautbauer(사진=열화당)
앨빈 에일리 '계시' (c)Gert Krautbauer(사진제공=열화당)

춤과 춤이 아닌 것의 경계에서
다른 형식의 예술과 비교했을 때, 춤은 허무하리만치 빠르게 사라진다. 좀처럼 어딘가에 고정되지 않는 이 예술은 그렇기에 오히려 경계를 넘나들며 곳곳에 흔적을 남긴다. 춤 공연의 극적인 드라마를 지우고 일상의 움직임을 무대 안으로 들여온 작품에서부터, 미술관에서의 춤, 매번 달라지는 구성과 인물로 이루어지는 이벤트, 그리고 드디어 몸 바깥으로 탈출한 춤까지, 춤의 경계는 무한히 확장되고 깨진다.

그 중에서도 ‘무엇이 춤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골몰했던 포스트 모던댄스의 상징, 이본 레이너의 <트리오 에이>(1968)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는 평범한 움직임을 춤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트리오 비> <트리오 에이 1> 등의 여러 버전들로 원본 자체의 개념을 흔들어 놓는다. 각 공연에서 무용수들의 인원, 성별, 의상, 배경음악 등이 달라졌고 심지어 리허설의 형태, 레이너가 무대 위에서 다른 무용수들에게 동작을 가르쳐 주는 모습 또한 그대로 다시 공연이 되었다. <트리오 에이>는 말 그대로 ‘매일 변화하는 연속 프로젝트’였다.

이본 레이너, '트리오 에이'(사진=열화당)
이본 레이너 '트리오 에이'(사진제공=열화당)

더불어 머스 커닝햄의 <이벤트>(1964)는 레이너의 질문에 대한 동시대의 대답처럼 ‘모든 움직임이 춤이 될 수 있다’ 또는 ‘모든 구성방식이 예술이 될 수 있다’(p.200)는 명제를 몸소 보여준다. 몇몇 작품에서 부분을 발췌해 콜라주한 <이벤트>의 핵심은 우연성에 있으며, 커닝햄은 자신의 작품 안에 어떤 중심도 넣지 않았다. 그에게 춤의 본질이란 내부의 고정된 중심이 아닌 외부의 변화하는 맥락으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이벤트>는 춤의 관습적 형태로부터 벗어나 몸의 언어를 확장했으며, 나아가 전체가 아닌 파편화한 요소들을 결합해 보는 현대 도시인의 시선을 아울렀다.

나아가 이러한 춤의 경계 간 실험이 가장 잘 드러나는 윌리엄 포사이드의 <하나의 편평한 것, 복제된>(2000)은 이름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듯 복제된 춤의 원형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클론들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나의 편평한 것, 복제된>의 영상에서 춤의 다양한 요소들을 데이터로 변환한 ‘동시발생적 오브제’ 작업은 춤을 신체로부터 분리해낸다. 하나의 춤 작품으로부터 비롯된 무수한 오브제들은 다시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따라 궤적을 그리는 그래픽(정렬주), 그 움직임의 형태와 흐름을 입체화한 구조물(입체정렬형태) 등으로 구현된다. 춤을 한 덩이 데이터로 바꿔 독특한 결과물로 완성한 포사이드는 춤이라는 신체적 사고가 어떤 다른 방식으로 제시될 수 있는지, 그 호기심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크기변환_하나의 편평한 것(synchronous objects)'(사진=열화당)
윌리엄 포사이드 '하나의 편평한 것Synchronous Objects'(사진제공=열화당)

<이 춤의 운명은>에는 저자 정옥희가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린 총 열두 개의 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다. 책에선 대체로 초연된 시대 순으로 흐르지만, 얼마든지 다르게 읽어 볼 수 있다. 젠더와 계급, 인종문제, 보존과 복원, 저작권의 독점과 공유, 예술작품의 정체성, 국제정세와 갈등, 테크놀로지의 응용, 전염병 시대의 대안 등 춤을 둘러싼 다양한 이슈와 키워드를 찾아내 쪼개고 다시 연결해도 좋다. 춤은 출 때마다 새롭게 살아나며,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조각난 기록 위에 상상이 더해지든, 다른 예술가에 영감을 주어 새로운 작품으로 이어지든 간에 언제나 새롭게 추어지는 춤은 대견하고 장하다.”(p.31) 이 책이 지금까지의 춤을 향한 우리의 고정된 시선을 흔들고 자유롭게 바라보게 하는 첫걸음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춤 현장의 다양하고 역동적인 모습을 전하기 위해 작품별 이미지들을 엄선해 실었고, ‘들어가는 말’에는 고전발레, 모던댄스, 포스트 모던댄스, 컨템포러리댄스로 이어지는 예술춤의 역사가 간추려져 있어, 자칫 생소할지 모를 춤의 세계로의 진입을 돕는다. (열화당, 256쪽, 도판 73점, 1만9천원)

저자 정옥희(鄭玉姬)는 춤과 춤이 아닌 것, 무용수와 무용수가 아닌 이의 경계에 대해 탐구한다.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무용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니버설발레단과 중국 광저우시립발레단의 정단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초빙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공역서로 <발레 페다고지>(2017), <미디어 시대의 춤>(2016)이 있고, <월간 객석>과 <조선일보> ‘일사일언’ 등에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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