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35 극장의 계급성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35 극장의 계급성
  • 조복행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0.12.21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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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 '로제석(La Loge)(출처=fr.wikipedia.org)
르누아르의 '로주석(La Loge)'(출처=fr.wikipedia.org)

공간의 계급성
공간은 계급성을 지닌다. 작은 공간이든 큰 공간이든, 사람이 모이면 사람간에 위계가 발생하고 이 위계는 공간에 투영된다. 연령이나 신분, 직위에 따라 자리가 달라지고 자리배치 때문에 갈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누가 어느 위치에 앉는가, 중심인물의 좌측과 우측에는 각각 누가 앉는가, 누가 누구보다 먼저 등장하고 먼저 퇴장하는가 등은 의전의 중요한 지식이다. 조선시대에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높은 관직이었던 것은 왼쪽을 오른쪽보다 높다고 보았던 동양적 공간의식의 발현이었다. 이런 위계는 지위의 차이, 계급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로마시대에 연극공연은 무료였다. 공화정 시대에는 누가 어느 좌석에 앉을 수 있는가에 대한 자세한 규칙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원전 2세기 초에는 원로원 의원의 경우에만 좌석이 배정되었다. 이러한 특권의 도입은 기원전 194년에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기원전 67년에 들어서야 두 번째 단계로 기사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원로원 의원들을 위한 좌석 바로 뒤 14개의 열에 배정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고대 그리스 로마연극』, 128) .

콜로세움은 엄격한 계급적 공간이었다. 최대 수용인원은 8만7천명 정도였는데 실제로는 5만명 정도 입장했다. 좌석은 계급에 따라 구분되었다. 황제와 베스타의 무녀(Vestal Virgin)를 위한 특별석이 남쪽 끝과 북쪽 끝에 설치되었고 그 옆에는 원로원 의원들이 앉았는데 그들은 자신의 의자를 가져올 수 있었다. 그 위층에는 원로원 의원이 아닌 귀족과 기사계급이 앉았고 그 위층에는 평민들이 앉았는데 부자와 가난한 평민의 두 구역으로 나뉘었다. 가정교사와 함께 온 소년이나 외국사절 등을 위한 특별석도 마련되었다. 가장 꼭대기 층에는 가난한 서민, 노예, 여성들을 위한 자리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입석이었고 딱딱한 벤치가 일부 설치되기도 했다. 배우, 검투사들은 입장이 금지되었다.

공간의 위계화가 발생하는 또 하나의 원인은 경제력의 차이다. 기차나 비행기에는 일등석과 이등석이 있고, 가끔 가난한 사람들은 서서 가야 할 때도 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 역시 경제력의 차이에 따라 공간이 위계화된다. 스포츠 경기장이나 극장에서의 좌석과 이에 따른 티켓가격의 차이가 대표적이다. 이런 차이들은 퍼포머에 대한 접근성 차이이며 이에 의해 발생하는 시각적 근접성의 차이다. 그리고 우리는 공간을 위계화하기 위해 각 좌석에 이름을 붙이고 가격을 차별화한다.

극장의 배타성
극장은 계급성이 구조화된 공간이다. 극장의 계급성에는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가 모두 작용하며, 이런 차이들이 티켓가격에 적용된다. 그렇다고 모든 극장이 계급성을 지닌 것은 아니다. 소극장의 경우에는 티켓가격의 차이가 없는 경우가 더 많은데, 이를 보면 극장의 계급성에는 규모의 차이가 작용함을 알 수 있다. 공연이 원래부터 계급성을 지녔다기보다는 극장이 생기면서, 그리고 극장이 점점 커지면서 좌석배치의 원칙이 필요해졌고 이를 부득이 구분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이는 공연의 상업화에 기인한다. 

극장은 닫힌 공간이다. 내부와 외부를 가르고, 부자와 빈자를 구분한다. 극장이 탄생하기 전, 인구가 적고 교통이 매우 불편하던 시절에는 공연단이 사람을 찾아 나서야 했다. 이 때의 공연은 수준이 높지 않았고 대중적이며 유희성이 강한 오락이었으며,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개방적 오락이었다. 그러나 실내극장이 생기면서 공연은 화려해지고 수준이 높아졌지만, 특정 조건을 갖춘 사람에게만 개방되는 폐쇄적 공간이 된다. 극장의 탄생은 공연의 상업화를 촉발하였고, 이는 극장의 계급성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공연기획자들은 좌석의 차이를 이용해 티켓가격에 큰 차이를 만들어냈다. 자본이 최대의 이익을 올리기 위해서는 관객의 위신을 높여주고 관객간의 차이를 차별화하는 전략이 필요하게 되었다. 극장은 일정한 자격과 조건을 갖춘 사람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그 조건이란 취향, 시간, 경제력 등이다. 이들 조건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조건이 아니라 상당한 시간의 교육과 훈련, 본인이나 가족의 경제력 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들 조건들은 극장의 계급성과 배타성으로 나타난다.

극장은 흔들리던 것들, 유동하던 것들을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로써 공연은 장기적인 경영계획을 수립할 수 있게 되었고 미적 형식을 창조할 수 있었다. 드디어 예술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리얼리즘으로 가득찬 환영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고 배우들은 본격적인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떠돌던 사람들, 세트들, 떠돌던 돈까지도 한 곳에 모이게 됨으로써 공연은 산업화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극장은 이러한 고정적 성질로 인해 내부에 견고한 계급성을 낳았고, 계급과 신분에 의해 차별화하는 배타적 공간으로 변하였다. 폐쇄된 공간 안에 예술을 유폐시킴으로써 공연의 자유로움과 해방적 성격을 가로막기도 한다. 또한 무대의 한계로 인해 표현의 한계에 봉착하게 되기도 한다. 

좌석의 명칭

1) 서양의 극장
극장은 100석 미만의 소극장에서부터 6천석이 넘는 극장까지 있다. 그리고 이들 극장의 공간에는 각자의 이름이 부여된다. 이들 이름들은 유럽에서 극장이 탄생한 16-17세기부터 사용되던 것으로 여기에는 강한 계급적 성격이 담겨있다. 좌석의 명칭은 나라마다, 때로는 극장별로도 조금씩 다르다.

1층석은 오케스트라, 피트(pit), 스톨(stall) 등으로 부른다. 프랑스에서는 파르테르(parterre)라고 부른다. 피트는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에 투계장(cock pit)에서 나온 말로 무대 앞쪽을 의미한다. 2층 다음으로 좋은 좌석으로 여기지만, 사실 1층이 좋은지 2층이 좋은지는 관객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과거 오페라 극장의 1층석 또는 피트석에는 부자들이 주로 앉았다. 그들은 피트석을 시즌회비를 내고 미리 구매하거나 공연별로 구매하였는데, 피트석은 팝 앨리라고 불리는 넓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관객들간의 모임도 볼 수 있고, 다른 쪽 좌석의 손님들을 바라볼 수도 있는 좋은 자리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파르테르에는 의자가 설치되지 않아 서서 보면서 온갖 소란스런 행위가 벌어졌다. 반면에 관객의 적극적인 반응이 공연 분위기를 제고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극장의 좌석별 명칭
극장의 좌석별 명칭


2층석은 드레스 서클이라고 말한다. 미국에서는 이를 메차닌(mezzanine)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극장에서 드레스 서클의 맨 앞쪽을 가장 좋은 자리로 본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VIP의 관람에 대비하여 극장측에서 이 곳의 티켓 중에서 일정 수량의 판매를 유보하기도 한다. 이를 하우스 시트라고 부르는데, 대통령석이 이 곳에 위치한다. 워싱턴의 케네디 센터에는 2층 앞에 아예 대통령석으로 명명된 좌석이 있다. 로주(Loge)석이라는 용어는 2층 중에서도 VIP석을 의미한다. 르누아르의 그림 중에 <La Loge>라는 그림이 있는데 일등석에 앉아 있는 여성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가끔 추락방지를 위해 핸드레일을 설치해 놓아 시야가 방해를 받는 경우도 있다.

드레스 서클은 말 그대로 드레스와 관계가 있다. 과거의 극장은 ’보고 보이는‘ 공간이었다. 미학적 공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드러내고 남이 나를 보아주는 ’사회적 공간‘이기도 했다. 특히 오페라 하우스는 사교의 공간이었고 과시의 공간이었다. 관객중에 이름이 알려진 귀족이나 귀부인이 입장하면 그는 모든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를 위해 그들은 좋은 옷을 입고 갔는데, 드레스 서클은 거기서 유래한 말이다. 드레스 서클은 최고의 좌석이라는 의미에서 로열 서클로도 불린다. 드레스 서클 뒤쪽을 그랜드 서클로 부르기도 한다. 3층 이상의 좌석은 어퍼 서클로 불리기도 하고, 때로는 발코니 또는 갤러리로 불린다. 갤러리나 발코니는 일반적으로 층에 관계 없이 평지에서 올라간 난간형태의 공간을 말하기 때문에 2층 이상의 층을 갤러리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무대에서 멀어서 가격이 저렴하다. 

2) 박스석
박스석은 신분이나 계급의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공간이었다. 박스처럼 별도로 분리된 좌석으로, 과거에는 귀족들이 이를 연간 임차하거나 수시로 임차하여 사용했다. 연간회비를 내야 했고 이 금액은 꽤 비쌌다. 박스석은 극장의 좌우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공연을 관람하는 공간으로서는 오히려 불편하다. 그럼에도 귀족들이 박스석을 고집한 것은 신분의 차이를 과시하려는 목적이었다. 박스석은 대중석과 개인석이 있었는데, 개인박스석에는 칸막이가 설치되어 매춘부들이 출입하기도 하였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오페라 극장에서는 박스석 판매수입이 가장 중요한 재원이었고, 주요 구매자는 귀족들이었다. 중산층이 형성되지 않았던 16세기 경까지는 공연제작은 주로 왕실의 후원에 의지하였지만 18-19세기에는 귀족과 부자들의 후원에 의존하였다. 이 때는 소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 아래 후원이 사회적으로 권장되는 시기였고, 때로 후원자들은 정부관리로도 나아갈 수 있었다. 오페라 후원이 매관매직의 방편이기도 했던 것이다. 당시의 극장은 이러한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공연을 해 나갔다. 킹스 극장의 사례를 보면 박스석이 당시에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 알 수 있다. 1770년에서 1804년 사이에 킹스 극장의 박스석은 36석에서 198석으로 5배 이상으로 증가하였고 시즌회원은 1781년 223명에서 1783년에 358명으로 대폭 증가하였다. 화재로 극장 신축이 이루어진 1792년 이후에는 663석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이들은 ’경(sir)’이라는 호칭을 가진 상류 귀족들로부터 나왔다. 귀족의 숫자는 빅토리아 시대로 이동하면서 더욱 늘어났다. 1780년에 189명이던 것이 1800년에 267명으로 41%의 증가를 보였다( 『The Fashionable Acts』, 111). 이들 중에는 대단한 재력가들이 많아서 시즌제 박스석을 구입하는 경우도 있었고 수시로 극장에 출입하기도 하였다.  

  . 1845년 샬로트 게스트의 딸은 1층 왕실소유의 박스석 바로 건너편에 박스석을 구입하였는데 남편 조슈아 게스트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철강회사의 사장이었다. 사망 당시 50만 파운드(약 1천100억원)의 유산을 남겼다.
  . 수잔 노스는 킹스 극장을 가끔 방문하였다. 그녀는 은행가 토마스 쿠츠의 공동상속인으로 그는 사망 당시 60만 파운드(약 1천370억원)의 재산을 남겼다.
  . 토마스 베어링이라는 백만장자는 코벤트 가든의 후원자로, 가끔 극장을 방문하였다.
  . 철도왕 조지 허드슨은 허 머제스티 극장에 수시로 출입하였다(Fashionable Acts, 177).

1780년경부터는 박스석 구입자 명단을 담은 인쇄물이 판매되기 시작했고 1820년경부터는 정기적으로 발매되었다. 여기에 게재된 이름들은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여 인쇄물을 판매하기 위한 상술이기도 했다. 신문에서도 신규 구입자 명단을 발표했다. 이처럼 오페라 관람은 신분을 과시하고 문화인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사회적 이벤트였다. 박스석 구입자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이동했다. 1743년에는 21%가 여성이었지만 1782년에는 43%로, 1840년 이후에는 70-80% 정도로 높아진다.

신문에 게재되는 명단은 문화적 교양과 경제력의 과시였다. 시즌회원 명단은 10년에 한 번씩 발표되었다. 가끔 신문에는 신규가입자 명단도 게재되었다. 이들 리스트를 보면 1822년에 영국 귀족의 28%가 오페라를 관람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숫자는 오페라 관람이 얼마나 중요한 사회적 행위이자, 나아가서는 의례적 행위인지를 보여준다. 오페라 관람은 귀족계급을 다른 계급과 차별화하는 수단이었다. 제도화된 오페라 하우스를 금전적으로 후원하고 가끔씩 찾아가서 스스로를 알리는 것은 오페라를 통한 자기과시행위였다. 오페라 관람은 경제력이나 문화적 교양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배타적 행위로, 귀족과 대중을 구분하는 수단이었다. 국가와 사회를 위해 희생하는 일은 귀족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여겼고, 이런 면에서 오페라 후원 역시 사회를 위한 희생이기도 했다. 이후 박스석 구입은 점점 줄어든다. 반면 여성회원은 남성보다 많아졌다. 여성회원들은 오페라 관람을 다른 사람과의 차별화 기제로 생각했고, 일종의 유행처럼 보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의 오페라는 교회, 군대, 정치와 같은 영국사회의 중요한 제도였다. 따라서 귀족들은 전쟁이 나면 군인이 되고 기독교인으로서 교회에 나가고 봉사를 하고, 정치를 통해 국가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처럼 오페라 관람과 후원은 귀족의 의무였던 것이다. 그리고 박스석은 공연후원자가 왕에서 시장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귀족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수행하는 매개자였다.     

런던 프린스 에드워드 극장의 좌석배치도

 

3) 무대 위 좌석
과거에는 무대 위에도 앉을 수 있었다. 그들은 주로 권력자들이거나 돈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무대 위에서는 관람하기가 더 불편한데 굳이 이들이 여기에 앉는 것은 관객들의 시선을 끌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18세기 중엽 프랑스 극장의 무대는 배우와 관객이 뒤섞이는 혼잡스런 공간이었다. 배우들은 관객들 사이로 들어와 언제 퇴장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무대 위에서는 관객들이 서성거리고 무대 밑 파르테르에서는 관객들이 소란을 피웠다. 관객들로서는 무대 위 관객이 관람에 방해되는 방해자일 뿐이었다. 그들은 무대 위로 오렌지등을 던지면서 항의하곤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객들은 그런 무질서에 그렇게 신경쓰지 않았다(Political Actors, 23-26).

프랑스에서는 1759년에 무대 위 객석이 철거되었다. 이는 무대 위 관객의 소란행위를 제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배우들의 연기공간을 확보하고 공연진행을 원활히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영국에서는 데이비드 개릭이 1762년에 무대 위 객석을 철거하였다. 그러자 관객들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 극작가 샤를 콜레는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의자가 철수되자 관람 분위기가 좋아지고 배우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무대조명도 달라졌다. 무대를 비추는 조명이 가능해지고 객석에 그림자를 만드는 일도 가능해졌다. 그러자 객석에서는 서로를 바라보던 습관이 사라지고 무대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변화들은 연극의 문명화에 큰 도움을 주는 조치들이었다. 드디어 환영의 창조와 연극의 창작에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는 공연이 예술화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1808년의 드루리 레인, 1762년부터 무대위 좌석은 폐지되었지만 무대옆의 박스석(Stage Box)석은 남아있는 것이 보인다.
1808년의 드루리 레인. 1762년부터 무대 위 좌석은 폐지되었지만 무대 옆의 박스석(Stage Box)석은 남아있는 것이 보인다.

바그너는 극장의 계급적 성격을 없애고 관객의 집중을 촉진하기 위해 대륙형 좌석제(continental seating)를 도입했다. 객석 사이사이에 있던 통로를 하나로 줄임으로써 관객의 이동을 제한한 것인데, 실제로 이런 좌석배치는 인터미션 시간에 관객들의 이동을 불편하게 하는 단점이 있지만 미국이나 유럽에는 이런 형태의 좌석을 가진 극장들이 있다. 바그너는 또한 이중의 프로시니움을 도입했으며 2층 박스석과 갤러리도 없앴다.

바이로이트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콘티넨탈 시팅(출처: 위키피디아)



가부키 극장

- 토마석(土間席, 1층석)
2013년에 개축한 가부키 극장의 좌석 명칭은 1등석, 2등석, 3층 A. B석, 1층 사지키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이와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극장을 여러 등급의 좌석으로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은 지붕 설치가 허용되면서부터다. 서양극장의 오케스트라나 피트석에 해당하는 1층 좌석을 토마석(土間席)이라고 부른다. 토마석도 무대에서 가까운 쪽은 히라토마(平土間)라고 하였고 먼 쪽은 타카토마(高土間)라고 하여 가격에 차이를 두었다. 토마라고 부르게 된 것은 초기 가부키 극장에는 지붕 설치를 허락하지 않아서 바닥에 앉아 관람하였는데 비가 오면 관람을 중단하거나 비를 맞으며 보아야 하는 땅이라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거에 토마석에는 한 석당 4-6명이 앉을 수 있도록 칸막이를 하고 방석을 놓아 두었는데 이를 마스석(枡席)이라고 한다. 마스석은 일본의 전통 엔터테인먼트에서 사용하던 방식으로, 지금도 스모에서는 마스석을 유지하고 있다. 가부키 극장에 의자가 설치된 것은 연극개량운동이 진행되던 1889년의 일로, 좌식문화 중심의 일본에서 관람방식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 사지키석(桟敷席)
사지키석은 토마석의 좌우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페라 하우스의 박스석에 해당한다. 가부키 극장에서 가장 비싼 좌석이다. 과거의 가부키 극장에는 1층과 2층에 사지키석이 있었다. 관극에 가장 불편한 3층 맨 뒤쪽은 무코오사지키(向桟敷)라고 하였고 가격은 가장 쌌다.

토마석 왼쪽에 하나미치(花道)가 있는데 , 이는 가부키의 독특한 무대로 이를 통해 스타 배우들이 등장한다. 하나미치에는 슷뽕이라는 승강무대가 있어서 이를 통해서도 스타 배우가 입장하기도 한다.

가부키 극장의 좌석배치도

 

스모경기장의 마스석 (출처 : tokyostory.net)
스모경기장의 마스석 (출처: tokyostory.net)

 

- 1막 관람석(一幕見席, 히토마쿠미)
가부키는 3막으로 이루어져 있고 공연시간은 4-5시간이나 걸린다. 티켓가격도 1층 사지키석(1階 桟敷席)은 2만엔으로 원화로 20만원이 넘는 고가다. 그래서 한 막만 감상할 수 있는 히토마쿠미석(일막관람석)이라는 티켓 시스템이 있다. 3막이 시작될 때 입장하는데 객석의 맨 뒷 부분에 의자를 놓고 앉거나 아예 서서 본다. 입구도 별도로 설치되어 있다. 현재의 가부키 극장의 4층 맨 뒤쪽에 의자석 90석, 입석 60석 등 총 150석이 설치되어 있고 가격은 의자석 1천500엔, 입석 1천엔이다. 가부키를 배우려는 초심자나 가난한 가부키 매니아가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에도시대에는 막이 끝날 때마다 기도(木戶)라고 부르던 극장의 출입담당 직원이 한 막이 끝났으니 다음 막 입장권을 사라고 입구에서 호객행위를 했다. 

영국에서도 19세기까지 3막이 시작될 때, 또는 9시 이후 입장하는 관객에게는 반값을 받는 제도가 있었다. 대개 이들 관객들은 공연 매니아로 돈이 부족할 경우, 또는 특별히 뒷부분에 중점을 두고 감상하는 경우에 반값 티켓을 구입했다. 그러나 오페라의 경우에는 반값 입장이 없었다.

 

중국의 극장

세계에서 가장 먼저 공연을 상업화한 것은 중국이다. 중국은 북송 때 당시 수도였던 변경에 구란(勾欄)이라는 천막식 극장을 설치하고 유료공연을 시작하였다. 아마도 오늘날의 빅톱과 유사한 모습이었던 것 같다. 구란은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였고, 그 이후 송나라의 각 지방으로까지 확대되었으며 명나라 중엽까지 지속되면서 약 400년간 대중들의 인기있는 오락공간의 기능을 담당했다. 유럽에서 공연을 상업화한 것이 르네상스 시기였던 점을 감안하면 중국의 공연상업화는 거의 400년 이상 빨랐던 것이다. 그리스 시대에 야외극장 입장료로 2오볼(obol)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는 출입통제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지 돈벌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경극극장 (출처 : operabeijing.com)
경극극장 (출처: operabeijing.com)

그러나 중국의 극장은 유럽의 극장에 비해 단순하였다. 신묘(신사)나 사원에서 하던 대중적 공연들은 모두 야외공연이었고, 구란은 매우 허술한 구조였다. 구조가 튼튼하지 못해 무대가 무너져 배우가 압사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송.원대에는 술을 팔면서 공연하던 주루(酒樓)도 있었는데, 나중에는 주루는 쇠퇴하고 차와 음식을 먹으면서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다원(茶園)으로 변한다. 이는 돌출형 무대(Thrust)로서 정교한 세트를 설치할 수 없는 구조였다. 이는 중국의 연극이 리얼리즘보다는 상징성이 강한 연극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중국의 극장에서도 어김없이 강한 계급성이 나타나는데, 극장구조가 근대화되고 상업성이 강해질수록 계급성 역시 강해진다. 

- 다원의 좌석
다원극장은 돌출형으로 3면에 객석이 설치되었다. 2층의 희대(무대) 가까이에 설치된 좌우의 최상석을 관좌(官座)라고 하였다. 관좌의 모든 좌석 사이에는 병풍을 놓아 서로 격리시켜 놓았고 좌우 발코니에는 각기 서너 개의 특별예약석이 있었다. 발코니에는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이 탁자들을 관좌라고 불렀다. 관좌의 지불방식은 좌석을 전세내는 형식이었다. 무대를 기준으로 오른쪽 발코니의 관좌를 등장문, 왼쪽의 관좌를 퇴장문이라고 불렀는데 퇴장문 쪽의 관좌가 더 비쌌다. 퇴장문 쪽에서 여배우를 희롱하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여배우를 희롱하려는 자들이 다투어 퇴장문에 앉았고, 여배우들은 관좌의 손님 중 낯익은 손님이 보이면 올라가서 시중을 들었다(19세기 말이 되면 경극에서 여배우 출연금지 조치가 유명무실해진다). 관좌의 가격은 산좌의 8배 정도 비싼 경우도 있었다. 오페라 하우스의 박스석, 가부키 극장의 사지키석과 유사하지만 병풍으로 갈라놓은 걸 보면 오페라 하우스의 박스석에 더 가까운 형태였다. 아래층은 산좌(散座)와 지좌(池座)로 나누어졌는데 산좌는 관좌 다음으로 좋은 좌석으로 1층의 무대 바로 앞쪽이었고 지좌는 1층 뒤쪽이었다.

- 구란의 좌석
구란의 객석은 요붕(腰棚)과 신루(神樓)로 나뉘었다. 요붕은 희대(무대)에서  뒤쪽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관람석이고, 신루는 희대의 정면을 약간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위치에 있던 관람석이었다. 입장료는 전석 동일했고 선착순 입장이었다. 그러나 희대에서 가장 가까운 좌석을 청룡두라고 하여, 이들 좌석에 대해서는 나중에 별도로 추가하든지, 자발적으로 더 내게 하든지 하여 추가요금을 받았다. 때로는 공연 도중에 배우가 관객들에게 사례를 부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극장의 공간기획 
전좌석을 단일가격으로 책정하는 소극장을 제외하고 어떻게 좌석을 구분하고 이에 따라 가격을 달리할 것인가는 티켓판매 수입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또한 각 좌석에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에 따라 관객이 받는 인상도 달라진다. 이를 극장의 공간기획이라고 부를 수 있다. 1층의 전부를 S석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일부분만을 S석으로 할 것인가? 2층과 3층은 어떻게 구획할 것인가는 공연수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공간을 합리적으로 분할하고 때로는 계급화하는 방식이다.

좌석의 이름을 통해 은근히 계급성을 자극하고 이를 티켓판매에 활용하기도 한다. 로주석, 사지키석 등은 이미 오랜 전통적 명칭에 속하지만 S, A, B 등으로 구분하는 방식은 최근의 방식들이다. 때로는 VIP, 심지어 VVIP등의 좌석이 등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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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수 2021-01-13 14:49:08
깊이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객석이 달리 보이네요. 시리즈 글이 매우 유익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