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36 미국의 공연산업과 배우노조의 탄생(1)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36 미국의 공연산업과 배우노조의 탄생(1)
  • 조복행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1.01.18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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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퍼토리 극단과 컴비네이션 극단
드라큘라로 분한 헨리 어빙(출처:thetimes.co.uk)
드라큘라로 분한 헨리 어빙(출처 : thetimes.co.uk)

미국의 연극은 영국에서 건너간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의 공연산업은 매우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데, 그 주요한 원인의 하나는 예술후원제도였다. 유럽은 공적 지원이 활발한 반면 미국은 민간기부에 의존하는데, 이는 오랜 전통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럽의 예술에 대한 공적 지원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일찌기 로마시대부터 시작되어 르네상스 시대에는 왕과 귀족들이 예술가와 과학자들을 지원하였다. 약자에 대한 지원은 강자의 권위와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고 자신들의 우군으로 만드는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였으며, 그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는 공연자들에 대한 보상이기도 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순수한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표출이기도 했다. 왕들은 화가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고, 궁정극장을 지어 극단을 운영하면서, 세트를 지어주고 공연을 하도록 지원하였다. 대신 공연의 레퍼토리와 내용은 왕의 기호에 맞추어야 했다. 후원자 한 사람을 위한 공연이었던 것이다.

연극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도시도 같이 성장하면서 전문극단이 생기고 이들은 공연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귀족들도 극단을 지원하였지만 그렇다고 모든 비용을 지원하는 건 아니었다. 이들은 한 지역에서만 공연해서 살아가기가 어러웠고, 지방으로 순회공연을 떠나게 된다. 마차에 몸을 싣고 동가식서가숙하면서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 세트는 최소한도로 만들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많은 의상을 가지고 다녔다. 레퍼토리도 여러가지를 준비해야 했다. 관객들이 원하면 공연을 추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관객이 많은 곳을 만나면 체류기간을 연장하고 새로운 공연을 하게 되면서 여기에 정착하는 공연단이 생겨났다. 이것이 레퍼토리 극단(Repertory Company 또는 Stock Company)의 배경이다. 그렇다고 극단들이 한 곳에 영구히 머무는 것은 아니었다. 지방의 관객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정 기간 공연하고 다시 대도시로 돌아가거나 다른 지방으로 공연을 떠나야 했다.

공연산업에서 중앙과 지역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중앙과 지역은 부족한 프로그램과 배우를 상호보충하는 협동적 관계에 있기도 하지만, 지역은 중앙의 경제적 식민지가 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단순히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글로벌하게 전개되고 있다.

레퍼토리 극단은 변변한 오락이 없던 시절에, 지역의 열악한 공연시장에서 대중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또한 지방에서도 우수한 연기자를 양성하여 중앙에 진출시키기도 하였다. 헨리 어빙은 1880년대부터 1900년경까지 영국 연극의 핵심적인 액터 매니저였는데 그는 원래 영국 남서부의 서머셋에서 태어나 그 지역에서 배우로 데뷔하였다. 스코틀랜드의 레퍼토리 극단에서 배우로 활약하다가 1866년에 런던에서 데뷔한다. 그 이후 라이세움 극장의 액터 매니저가 되어 영국연극을 이끌어가게 되고 배우로서는 최초로 기사작위를 수여받는다.

또한 지역은 중앙 공연의 가공공장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중앙의 공연은 지방에서 트라이아웃을 통해 공연의 완성도를 높인다. 늘 중앙이 흥행의 중심이기 때문에 지방은 중앙의 실험대상이 된다. 많은 공연들, 특히 장기공연을 목표로 하거나 새롭게 제작한 신작들은 관객의 반응을 알 수가 없어 흥행에 대해 자신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작품평가는 직접 본 관객에 의한 평가가 가장 합리적인데, 이를 지방에서 시도하는 것이고 이를 트라이아웃이라고 부른다. 트라이아웃은 특히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등에서 거액을 투자해서 런던이나 뉴욕에 진입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방식이다. 20세기 초 더블린은 런던의 주요한 트라이아웃의 도시였다. 디온 부시코트의 여러 작품들은 더블린에서 공연하고 이를 바탕으로 런던으로 가서 성공하였다.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작품들도 보스턴, LA, 필라델피아 등지에서 트라이아웃을 거치는 경우가 있다. 사실 트라이아웃은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사용된다. 뮤지컬의 경우도 그렇고, 과거에 마당놀이 전국공연도 지방에서 먼저 흥행을 하면서 거기서 드러난 문제점을 보완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중앙에 입성했을 때는 단점들이 보완되어 완성도가 매우 높아지게 되고 흥행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며 이는 투자자 유치에도 도움이 된다. 나쁘게 표현하면 지방은 중앙을 위한 실험대상이 되는 것이다.

지역은 중앙의 경제적 식민지가 된다. 유럽의 공연지원제도는 나라마다 조금씩 달라서, 19세기에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지역극단에 보조금을 지원하였지만 영국에서는 지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국은 1737년 공연법을 제정하여 대중적 공연의 범위를 제약하였고 지방에서의 극장건립과 연극활동도 1843년에 가서야 일부 해금되었다. 런던과 지방의 문화격차는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영국에서는 이미 엘리자베스 1세 때부터 지역에 레퍼토리 극단이 있었다. 그러나 지역에서 극단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고, 오히려 런던의 임프레사리오가 지역을 자신들의 흥행 대상으로 삼았다. 게다가 런던의 극단은 스타를 보유하고 있고, 공연이 스펙터클해지면서 지방극단들은 런던의 극단과 경쟁할 수 없게 되었다. 지방은 런던극단의 경제적. 문화적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고 지방문화는 빈사상태에 빠지고 만다. 영국에서 1880년경이 되면 지방의 레퍼토리 극단은 대부분 사라진다.

애니 호니만(출처 : ich.pro)
애니 호니만(출처 : ich.pro)

이런 상황을 개선해보려던 문화운동이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출발하여 세계적으로 확산된 소극장 운동(Little Theatre Movement)과 영국의 레퍼토리 운동(Repertory Movement)이었다. 영국의 애니 호니만(Annie Horniman, 1860-1937)은 독일에 갔다가 정부가 지역극단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고 이를 영국에 도입하기로 한다. 1904년에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한 낡은 건물을 <애비 극장>으로 바꾸었고, 1908년에 맨체스터에서는 <게이어티 극장, Gaiety Theater)을 인수하여 영국의 첫 레퍼토리 극장을 시작한다. 맨체스터에서 쓰여진 작품으로 맨체스터 시민과 노동자들을 위한 연극을 제작해보자는 의도였다. 10여년간 200여편의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고전에서부터 현대극까지 다양한 연극을 제작하였고 특히 절반 이상이 신작이었다. 레퍼토리 운동은 인근 도시에도 소문이 나서 랭카샤이어의 시민들이 휴일에는 기차를 타고 게이어티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녀는 미술을 전공하였지만 예이츠의 시의 매력에 빠져 그의 비서가 되어 그의 연극을 지원하였으며 재정이 어려운 극단을 남몰래 지원하기도 하였다. 지방도 독자적인 레퍼토리와 프로그램을 통해 지방 연극의 발전을 도모하자는 취지였다. 그녀는 전근대적인 여성관에 반기들 든 신여성이기도 했다. 대중앞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알프스를 두 번이나 자전거 여행을 하였고 여성참정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예술지원이 가능했던 건 부유한 차(茶)회사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집안에서 물려받은 유산덕분이었다. 레퍼토리 운동은 영국연극의 변화에 큰 기여를 했다. 버밍험, 리버풀, 글래스고우 등지로 확산되었고 지역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레퍼토리 극단도 맨테스터나 글래스고우 등 비교적 큰 도시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인구가 적은 마을에서는 아예 불가능한 사업이었다. 그녀는 1917년에 경제적 어려움으로 극단을 해산하게 된다. 그녀가 깨달은 것은 ‘공연사업은 지속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 엄청난 경제적 곤경을 동반한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의 레퍼토리 극단
미국의 공연산업은 역사자체가 일천하다 보니 왕정체제를 경험할 수 없었고 국가의 문화지원의 역사가 없었기 때문에 공연기획자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이는 시작부터 강한 상업성과 과도한 경쟁에 노출될 수 밖에 없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전통의 차이는 미국과 유럽의 공연산업의 전개를 판이하게 다른 방향으로 이끌고 갔다.

미국 연극은 1665년에 버지니아에서 최초의 연극이 공연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18세기가 되어서야 활발해진다. 1749년에 영국의 월터 머레이와 토마스 킨이 이끄는 극단이 필라델피아에서 공연한 일이 있는데, 이는 미국공연사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세기의 식민지 연극은 영국 지방극단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국의 공연문화가 미국에 그대로 이식된 것이다. 영국배우들은 미국 주요 도시에서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 중에서도 18세기의 대표적 사례는 루이즈 할람(Lewis Hallam)과 데이비드 더글라스 극단이었다. 루이스 할람과 그의 부인은 자마이카를 거쳐 미국에서 순회공연을 한다. 1752년 윌리엄스버그에 극장을 열고 전문연극을 시작하였는데, 이 때 자마이카에서 만난 데이비드 더글라스 극단과 자신의 할람극단을 합병하여 본격적인 연극을 시작한다. 이들은 상설극장을 지탱할만한 여유가 없었고 부득이 지방순회공연을 떠나야 했다. 이후 많은 영국의 극단과 배우들이 미국으로 순회공연을 떠난다. 미국은 영국의 한 지방처럼 극단들로서는 좋은 돈벌이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19세기 중엽에 미국에도 레퍼토리 극단(RC)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세기 중엽부터 불어닥친 서부개척과 골드러쉬, 이민붐은 오락수요를 낳았고 이는 미국의 주요도시로 확산되었다. 특히 골드러쉬의 거점이던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서부와 보스턴, 필라델피아, 워싱턴 등 동부도시와 시카고 등이 공연의 거점도시가 되었다. 이들 도시에서 다시 주변의 중소도시로 점점 연극이 퍼져나가 전국에 많은 극장이 지어졌다. 엔터테인먼트는 돈과 사람이 모이는 곳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레퍼토리 극단은 1850년부터 1880년대까지 미국 공연산업을 지지한 중요한 기둥이었다. 미국의 레퍼토리 극단에는 세익스피어극이나 다른 연극의 조연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이급배우가 있었다. 여기에 전국을 순회하는 스타 배우와 그의 조력자들이 레퍼토리 극단에 합류하여 완성된 배역을 이루게 된다. 마치 오늘날 오케스트라 공연시 해당 지역의 솔로이스트와 협연을 하는 시스템과도 흡사한 제도였다. 그러다 보니 레퍼토리 극단배우와 순회하는 스타배우들과의 연기호흡이 문제가 될 때도 있었다. 1849년에 뉴욕의 애스터 플레이스 극장에서 폭동이 발생하여 31명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영국의 찰스 맥크레디와 미국의 에드윈 포레스트라는 배우의 세익스피어 연기에 대한 관객들의 견해차이에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찰스 맥크레디는 지역의 레퍼토리 극단에서 순회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이후 레퍼토리 극단의 배우들의 연기를 혹평하곤 하였고 이런 그의 생각은 미국연극에 대한 그의 인상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의 레퍼토리 극단은 아직 본격적인 전문극단으로서의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지역민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는 중요한 한 축이었다.

 

마당놀이 (출처 : youtube.com)
마당놀이 (출처 : youtube.com)

레퍼토리 극단의 와해와 컴비네이션 극단의 등장
미국의 레퍼토리 극단도 1880년대에 들어서 급격하게 와해되는데, 이는 지방극단이 중앙극단과의 경쟁에서 졌기 때문이다. 그 패배의 원인은 매스 미디어로 인한 스타의 등장,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한 중앙의 지방침투, 롱런 시스템, 그리고 제작시스템의 전문화 때문이었다. 1880년경에 완성된 대륙횡단철도는 공연단의 이동을 편리하게 하였고, 뉴욕의 스타들의 지방공연을 촉진하였다.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기에는 스타들의 지방공연이 원활하지 못했고, 일단 이동하더라도 인근 지역을 순회하는 일도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철도가 발달하자 전국을 쉽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공연흥행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다. 순회공연중심으로 흥행방식이 바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철도의 이동성을 이용한 컴비네이션 극단(Combination Company,CC )이 생겨서 레퍼토리 극단을 구축하게 된다. 컴비네이션 극단은 뉴욕에서 출발한 극단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공연하는 단체였다.

CC는 RC에 비해 여러 가지로 유리한 미학적. 경제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RC가 많은 레퍼토리를 가지고 공연한 반면, CC는 한 작품을 공연하였다. 게다가 뉴욕이나 영국에서 온 스타배우들이 출연하니 레퍼토리 극단이 이를 이겨낼 수가 없었다. 또한 RC는 극단의 모든 일을 액터 매니저 혼자서 수행하는 1인체제였지만 CC에 이르면 창작, 관리, 기술과 미술 등의 업무가 분화되고 전문화된다. 극단운영시스템이 합리화되고 문명화되는 것이다. CC는 경제적으로도 매우 효율적이었다. 레퍼토리 시스템은 공연프로그램을 매일 바꾸는 제도를 말한다. 당시 인구가 적었던 지방에서 롱런은 불가능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부득이 매일 프로그램을 바꾸어 공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매일밤 레퍼토리를 바꾼다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다. 배우들로서도 매일 새로운 작품을 공연한다는 건 대단한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배우들은 하나의 역할이 아니라 여러 가지 역할을 감당해야 했고(오늘날 우리가 멀티라고 부르는), 이는 자신의 역할을 잊어버려 공연진행을 방해하는 일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래서 나중에 공연기획자들은 자신의 역할을 잊어버리면 벌금을 부과하는 계약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불합리를 개선한 것이 컴비네이션 극단이었다.

대륙횡단철도는 전국을 연결했을 뿐만 아니라, 운송량에서도 과거의 마차나 도보여행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많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과거에는 산이나 강에 막혀 갈 수 없었던 곳도 갈 수 있었고 사전에 정한 시간에 맞출 수도 있었다. 이는 공연산업을 획기적으로 바꾸어놓는 계기가 되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소비자들 역시 과거에는 자신들이 살던 작은 마을을 찾아오는 극단만 구경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기차를 타고 멀리까지 갈 수도 있었다. 철도가 만든 새로운 공연환경은 전국적인 공연붐, 연극붐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철도는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고가 많았다. 철도로 이동하던 순회공연단, 서커스단 등에 많은 사고가 발생하였고 버팔로 빌 와일드 웨스트나 P.T.바넘 서커스단도 예외없이 사고를 당했다. 1년에 만여 명이 사고로 죽었고 8만여 명이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사고는 사람에 한정되지 않았다. 기차로 이동하던 서커스단과 동물도 많은 사고를 당했는데 , 사고가 나면 동물들이 도망가서 서커스를 취소하는 경우도 있었다. P.T.바넘도 캐나다에서의 열차사고로 <점보>를 잃었다. 철도요금도 계속 올랐다. 1907년 아틀란타에서 버밍험으로 가는 순회공연단 63명의 기차요금은 157달러였는데 그 다음해에는 261달러로 오르는 일도 있었다. 이런 많은 사고와 철도회사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철도는 공연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의 스타들도 철도를 이용하여 미전역과 캐나다까지 순회공연을 하였다. 헨리 어빙은 1883년에서 1902년까지 8차례나 미국순회공연을 하였고, 사라 베르나르는 1880년에서 1918년 사이에 9회를 순회하였다. CC는 단 하나의 극단만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었다. 복제극단(duplicate company)을 만들어 동시에 여러 곳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1880년대에 스틸 맥카예(Steele Mackaye)는 자신이 쓴 <헤이젤 커크(Hazel Kirke)>라는 코미디 작품을 무려 14개의 복제극단을 조직하여 전국에서 공연하였다. 마치 오늘날 영화의 전국동시개봉과 같은 흥행방식이었던 것이다.

1905년에는 300개 이상의 일급 공연단과 100여개의 이급 공연단이 순회공연에 나섰다. 그 진원지는 시카고였다. 콤비네이션 극단이 공연계를 지배하게 된다. 이런 상황속에서 RC가 이들과 경쟁하기는 불가능했다. CC는 1876-77년 시즌에는 100여개, 1880년대에 CC는 282개, 1904년에는 420개로 증가한 반면, 레퍼토리 극단은 이미 1880년대에 8개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레퍼토리 극단들은 컴비네이션 극단에 밀리자 대부분 문을 닫았지만 순회공연 사이의 공백을 메우는 공연을 하기도 하였고, 작은 마을들을 돌며 순회극단의 절반값에 공연을 하기도 하면서 명맥을 이어나갔다.

극장 신디케이트의 등장
19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영화가 아직 대중화되기 전까지 미국의 공연산업은 매우 활황이었다. 서커스나 버팔로 빌 와일드 웨스트, 보드빌 등의 오락이 급성장했다. 연극 역시 뉴욕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인기있는 오락으로 성장하였다. 1870년 이후 뉴욕과 동부지역의 도시는 물론이고 중서부의 많은 도시에 오페라 하우스와 극장이 세워졌다. 심지어 인구 5천명의 소도시에도 오페라가 하우스가 들어설 지경이었다. 오페라 하우스 경영자들은 배우뿐만이 아니라 티켓판매, 인쇄업자, 소방수, 목수, 화가, 음악가 등 많은 인력을 고용하였다. 극장 경영자는 도시의 영향력 있는 인사였고 때로는 공익적 행사를 실시하여 힘을 더욱 키워나갔다. 그러자 극장을 예약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 연극중심지인 뉴욕에서는 장기공연의 히트가 목표였고, 뉴욕 주변의 경영인들에게는 공연작품들의 예약이 큰 문제가 되었다. 지역의 극장경영자 또는 흥행주들은 여름이 되면 다음 시즌의 공연예약을 위해 뉴욕으로 몰려들었다. 1870년-1890년에 3,500여개의 도시에 5천여개의 극장이 있었는데, 이들은 좋은 공연을 선점하기 위해 경쟁을 벌여야 했다. 하룻밤 공연으로는 수익성이 없었고 적어도 3-4일 또는 1주일 정도의 예약이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작은 도시에서는 한 번 이상의 공연을 하기가 어려웠다. CC가 이들 지역극장들에서 공연을 예약하거나 지역극장들이 뉴욕의 CC와 연락을 취하고 확인하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에 한 시즌에 40주의 공연을 한다고 하면(Week Stand), 40여개의 극장과 접촉하여 공연계획을 짜야 했고, 주단위가 아닌 일단위 공연(One Night Stand)을 한다면 그 숫자는 훨씬 더 늘어나게 된다. 이를 위해 공연단 관계자들이 일일이 지방극장을 찾아가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떤 극장은 아예 예약에서 누락되거나 때로는 배우가 등장하지 않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고. 반대로 극장경영자들은 만약에 대비하여 같은 날짜에 복수의 공연단에 극장을 내주는 이중예약을 하기도 했다. 컴퓨터도 없고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열악했던 당시에 5천여개의 극장에 자신들이 원하는 예약을 차질없이 예약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고, 행정적으로 이는 악몽이었다. 좋은 계약을 했다고 좋아했던 흥행주들은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는 다른 흥행주들에게 공연을 빼앗기는 경우도 많았다. 이와 같은 이중계약은 순회공연 중이던 공연단을 오도가도 못하게 하곤 하였다. 게다가 제작자들은 종종 합의를 이행하지 않아 지방의 극장은 갑자기 공연을 취소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러한 문제들을 치유하기 위해 새로운 방식이 개발되었다. 한정된 지역의 극장들은 연합하여 순회망을 만들고 예약 대행업체는 제작진들과 경영인들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시작하였다. 지역별로 하나의 극장서킷을 만드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이는 개별극장의 입지를 강화해주었다. 혼자서 독립적으로 운영하기보다는 여럿이 힘을 합쳐서 운영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7-8개의 극장이 하나의 서킷을 만들어 이들을 대표하는 한 사람의 대표자가 예약을 이끌어나갔다. 1880년대 극장서킷이 효율적인 서킷 조직임이 드러났다. 그 결과는 성공적이어서 극장독점의 우려가 나타났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서 극장 신디케이트(Theatrical Syndicate)가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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