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LG청소노동자 파업이 뱀춤 저작권 투쟁을 상기시키는 이유?"
[인터뷰] “LG청소노동자 파업이 뱀춤 저작권 투쟁을 상기시키는 이유?"
  • 이종호 기자
  • 승인 2021.02.08 13: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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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춤의 운명은>저자 정옥희
“전문가 안목을 대중과 공유하는 글 쓰고 싶어”

무용학자 정옥희 (c)정옥희
무용학자 정옥희 (c)정옥희

[더프리뷰=서울] 이종호 기자 = 세상에는 수많은 예술작품이 태어나지만 모두가 인정받거나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문학, 미술, 음악, 무용 등 끊임없이 신작들이 탄생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단명한다. 이따금 젊은 작가 지망생들을 만나는데 이 친구들은 대부분 요즘 인기 있는 작가들만 읽는 것 같다. 20세기 전반의 한국 작가들, 가령 염상섭, 현진건, 나도향 등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김동리 얘기를 해도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괴테나 셰익스피어 얘기를 꺼내도 마뜩잖다는 표정을 짓는다. 내가 학생 시절에 밤잠 설쳐가며 빠져들던 작가들을 전혀 모른다는 반응을 접할 때마다 섭섭하기도 하고, 이 친구 문학도 맞아? 하는 생각도 든다.

문자를 매개로 하는 문학작품도 그럴진대, 하물며 무용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속성상 다른 장르에 비해 훨씬 더 빨리 사라지는 편이고, 나중에라도 재발견, 재평가되기가 어렵다. 무보법(舞譜法)이 있긴 하지만 문학이나 미술처럼 형태가 분명한 장르에 비해 매우 불리하다. 음악의 악보에 비해서도 물론 그렇다. 그렇다면 지금껏 살아남아 계속 공연되고 사랑 받는 무용작품들에게는 어떤 비결,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얼마 전 <이 춤의 운명은: 살아남은 작품들의 생애사>(더프리뷰 2020년 12월 21일자 참조)로 이런 궁금증을 나름 풀어준 무용학자 정옥희(鄭玉姬)를 만나보았다. 지난 2019년 월간 <객석>에 9회에 걸쳐 연재했던 내용을 보완하고 새로이 3개 장(章)을 추가해 만든 이 책은 정옥희의 첫 단행본 저작이기도 하다. 글도 글이지만 관련 사진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아 1년 내내 매달렸다고 한다.

정옥희 저, '이 춤의 운명은: 살아남은 작품들의 생애' 표지(제공=열화당)
정옥희 <이 춤의 운명은: 살아남은 작품들의 생애> 표지(사진제공=열화당)

“저작권 문제가 까다롭잖아요. 더구나 출판사(열화당)측도 사진은 물론 논문 출처 등 저작권에 대해 아주 원칙주의적인 입장이어서 글 한 줄, 사진 한 장도 허술하게 사용할 수 없었어요. 근데 자료가 대부분 외국 것이다 보니 사용을 허락해줄 당사자를 찾아내는 일부터 지난했습니다. 여러 단계를 거쳐 저작권자를 찾다보니 이본 레이너의 경우는 직접 이메일을 보내 허락을 받는 경험도 했네요. 하지만 꼭 넣고 싶었는데 포기한 사진이 더 많아요.” 글 쓰는 데 1년, 사진 확보에 또다시 1년이 걸린 셈이다.

이렇게 해서 나온 노작(勞作)의 가치는 결코 가볍지 않다. 요즘 나오는 국내 무용 관련 글이나 책들을 보면 너무 학술적이어서 대중의 눈길을 끌지 못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비전공 애호가들이 쓴, 잘 읽히는 대신 안목과 지식의 수준에 한계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의미에서 이번 책은 두 측면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주목할 만한 성과다. <백조의 호수>, 로이 풀러의 <뱀춤>, 앨빈 에일리의 <계시>, 한성준의 <학춤> 등 무용사를 관통하는 명작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살아남았는가를 실제 사실들을 통해 확인하는 동시에 그 살아남음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적시함으로써 작품에 얽힌 스토리와 존재론, 의미론을 동시에 제공한다는 점에서다.

'계시' (c)Gert Krautbauer
앨빈 에일리의 <계시> (c)Gert Krautbauer

융합의 시대에 무용학자는 무엇을 할 것인가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이지만 무용계 역시 실기와 이론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하루에 몇 시간씩 춤(실기)을 추어야 하는 무용가들이 어떻게 논문까지 잘들 써내고 석사, 박사님이 되는지 경이로울 때마저 있다. 실기와 이론의 융합은 이상적이지만 성취하긴 쉽지 않다. 너도나도 대학원 다니고 논문 쓰지만 그 양적인 팽창에 비해 무용학 수준의 향상 속도는 매우 더뎌 보인다. 학위 내지 학문의 인플레이션화 혹은 물타기 현상이 만연함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무용학자는 이 융합의 시대에 어떡해야 살아남을까?

“순수 아카데미시즘이 약화된 상황에서 저 나름대로 일종의 차별화를 시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몇 해 전부터 공연 리뷰와 프리뷰, 에세이 등을 기고하기 시작했어요. 일종의 ‘대중적 글쓰기’라고나 할까요? 순수학문을 지향했던 저로서는 변화라면 큰 변화인 셈이죠.”

그렇다고 그의 취향이 ‘말랑말랑한 대중화’를 지향하는 건 결코 아니다. “선수들끼리 쓰는 어휘를 일반관객에게 이해시키자. 일종의 번역이지요. 무용계의 이야기가 무용계에만 의미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카피라이트(copyright)와 카피레프트(copyleft), 글로벌 문화콘텐츠 기획, 불공정계약 등 문화계의 주요 논쟁들이 무용에도 있어왔음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역으로 무용인들에게 말을 건다면 ‘무용이 무용가들만의 것은 아니다’가 되겠지요. <이 춤의 운명은>은 양측 모두를 바라보며 쓴 책입니다.”

이런 지향점을 취하게 된 데에는 미국 무용학계의 어머니로 불리는 셀마 진 코언(Selma Jeanne Cohen)의 <Next Week, Swan Lake: Reflections on Dance and Dances, 1982> 같은 책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제목 그대로 다음 주에 <백조의 호수>를 보러 가려면 뭘 알아야 하나 말을 건네는 책입니다. 매우 대중적이고 위트 있게 쓰였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심층적인 무용미학 지식을 담고 있는 깊이 있는 모범 저작입니다. 오래 전 책이지만 처음 읽었을 때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우리 나라에도 이렇게 쓰는 저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의 말을 듣다보니 전문가들이 낸 책들 가운데 무용학 내부의 논의를 보편적인 인문학적 지식으로 치환시킨 책, 대중의 눈높이를 고려하면서도 학문적 무게감을 쉽사리 손절하지 않은 책이 드물다는 생각이 들었다.

셀마 진 코언 저, 'Next Week, Swan Lake: Reflections on Dance and Dances, 1982'표지(제공=amazon.com)
셀마 진 코언의 책 <Next Week, Swan Lake: Reflections on Dance and Dances> 표지(출처=amazon.com)

<이 춤의 운명은>에서 다루는 열 두 작품 중에서 특히 현실과 공명하는 작품은 로이 풀러의 <뱀춤>이다. 19세기 말 미국과 유럽에서 선풍적 인기를 누린 이 작품은 무용계 저작권 논쟁의 가장 유명한 사례이기도 하다. <뱀춤>이 인기를 끌자 풀러는 출연료 인상을 요구했으나 극장은 이를 거부하고 다른 무용수에게 맡겼으며, 이에 격분한 풀러가 소송을 걸었으나 패배했다. 정옥희는 풀러의 분투를 미국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와 소속사 간의 저작권 소송과 연결시켜 현재적 문제로 제기한다. 예술작품이 예술가의 것이라는 상식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당연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남성 고용인과 여성 피고용인 간의 권력 차이도 읽어낼 수 있다. 풀러가 출연료 인상 대신 공연 포스터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달라고 제안했으나 극장측은 거절했다. 백인 남성이 좌지우지하던 쇼 비즈니스에서 여성 계약직 노동자의 몫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장의 이득보다도 업계의 관행 및 카르텔을 깰 수 없다는 논리는 현재 진행 중인 LG 트윈타워 청소노동자 파업 사태에도 투영된다.

로이 풀러, '뱀춤 Serpentine Dance'
로이 풀러 <뱀춤 Serpentine Dance> (사진제공=정옥희)

“LG 트윈타워 청소노동자 파업 기사를 읽으면서 풀러의 좌절감을 떠올렸어요. 그렇게 큰 기업이 왜 매일같이 일해 온 청소노동자들을 집단해고했을까? 기업 이미지에 막대한 해를 입히는 충돌을 불사하면서도 굳이 직접고용을 거부할까?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당한 몫의 임금과 인정을 받는 건 예나 지금이나 왜 이리 어려울까? 말이죠.”

윌리엄 포사이드, 'Black Flags' (c)Dominik Mentzos
윌리엄 포사이드 <Black Flags> (c)Dominik Mentzos

부산 출신인 정옥희는 이대 무용학과(1996년 입학)에서 발레를 전공하고 중국 광저우 시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UBC)을 합쳐 3년간 직업무용수 생활을 했다. 객원 출연까지 포함하면 무용수 경력이 5년쯤 된다. 동아무용콩쿠르(1999년)에서 은상, 전국대학생무용경연대회(2000년)에서 대상인 문화관광부장관상을 차지, 상금으로 거금 500만원을 탄 적도 있다.

“당시 중국에서 무용수 생활을 했다니까 특이하다며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아요. 학생 때인 1998년 초 베이징무도학원의 쉬딩중 교수님이 한국발레협회 초청으로 서울에 와서 워크숍을 했는데, 제 춤을 보시더니 당장 광저우 시립발레단에 추천하시겠다는 거예요. 신 났죠. 휴학계 제출하고 2주 만에 비행기 탔어요. 당시 외환위기(IMF 사태) 때라 조선일보에 ‘발레로 외화벌이하러 간다’는 기사가 나기도 했지요.”

귀국 후에는 UBC에 입단해서 <라 바야데르>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등 여러 작품에 출연했고, 해외 순회공연에도 두루 참가했다. 직업발레단 단원으로 지냈던 경험은 발레를 전공하며 품었던 로망을 실현할 기회이자 무용의 현장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혀준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실기 못지않게 공부 역시 그의 로망이었다. 해운대여고를 다닐 때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학업성적이 뛰어났던 그는 이화여대에 예체능계열 수석으로 입학했고, 대학에 다니면서는 무용이 아니라 영어, 수학, 물리 등 학과목으로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을 정도다. 무용수의 삶을 살면서도 가슴 한편이 허전했던 그는 결국 학교로 돌아갔다.

“UBC에 다니면서 이대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했어요. 문훈숙 단장님은 허락해 주셨는데 정작 학교에선 겸업(?)은 안된다고 하더군요. 많은 고민 끝에 발레단을 그만두었어요. 공부도 제 꿈이었거든요.”

그리고는 이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바로 미국으로 유학, 무용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의 무용학은 종합적 성격이 강합니다. 하위분야 구분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무용학의 어떤 이슈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가 중요하지 그것이 사회학이냐, 인류학이냐, 공연학이냐는 크게 따지지 않아요. 미셸 푸코가 한 특정 분야 학자가 아니라 ‘종합사상가’인 것처럼요. 서양에 관련된 것들은 무용미학이나 무용사 범주에 넣고 비서양의 것은 무용인류학에 포함시키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마저도 나중엔 해체되었어요. 이런 분위기에서 영역과 장르를 넘나들면서 제 나름의 시각과 목소리를 찾으려고 노력했는데 막상 학문분야의 구분에 민감한 한국에 돌아와서는 ‘전문성 부족’이라고 지적 받기도 했어요.”

그는 3월에도 책 한 권을 낸다. 이번 책은 발레 전공자로서 성장하며 느낀 점들을 풀어내는 한편, 발레를 둘러싼 환상과 선입견을 깨뜨리는 에세이다. ‘제대로 공부한 전공자가 알기 쉽고 재미있게 대중에게 다가가는’ 또 다른 일례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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