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공연이야기 27 - 미국의 배우노조의 탄생(2)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27 - 미국의 배우노조의 탄생(2)
  • 조복행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1.02.10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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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신디케이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토스카'(출처 : Metopera.org)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토스카'(출처 : Metopera.org)

순회공연

극장이 생기기 전, 배우들은 유랑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16세기 이후에 극장이 생기면서 한 곳에 정착하게 된다. 극장은 배우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고 런던이나 파리는 공연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그 대도시를 중심으로 공연은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다. 19세기의 미국 역시 뉴욕을 중심으로 공연산업이 전개되었고, ‘뉴욕에서 직접(Direct from New York)’이라는 말은 세련됨과 화려함을 의미하는 말이자 매력적인 공연홍보 슬로건이었다. 뉴욕은 연극의 수도였다. 뉴욕의 연극은 다른 지역에 영향을 주었고 비평 역시 전국을 지배했다. 뉴욕은 예술센터가 아니라 연극공장이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공연산업은 포드자동차의 대량생산 시스템처럼 대량생산의 시대였다. 극단과 공연관계자는 뉴욕에 거점을 두고 순회하면서 공연을 벌였다.

그러나 지방의 경제적 역할은 뉴욕 못지않게 컸다. 도시와 인구, 경제력이 전국에 고르게 분산되어 있는 미국적 특성이다. 19세기의 임프레사리오들은 지방공연, 즉 순회공연을 통해서 부를 축적했다. 순회공연은 동부에서 서부로, 나중에는 캐나다를 포함하는 광활한 지역에서 벌어졌고 이를 둘러싸고 격심한 비윤리적 경쟁이 벌어졌다. 미국 공연산업은 순회공연, 극장의 폭증, 그리고 약탈적 상업주의를 기반으로 발달해 왔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에 들어와 미국은 거대한 공연시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철도의 발달, 경제성장에 따른 부의 축적과 여가시간의 확대, 이민으로 인한 인구의 증가 등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자 유럽의 스타와 임프레사리오들이 뛰어들었다. 영국의 에드먼트 킨과 그의 아들 찰스 킨, 찰스 맥크레디, 찰스 켐블같은 스타들이 이미 철도가 개통되기도 전부터 미국 순회공연에 나섰고, 대륙횡단철도 개통후에는 헨리 어빙과 사라 베르나르와 같은 대스타들이 순회하였다. 19세기 ~ 20세기 초반의 북미투어는 공연지역이 넓었을 뿐만 아니라 공연기간도 길었다. 보통 1-2년 정도 걸렸고, 이 과정에서 병에 걸려 고생하는 경우도 많았다. 푸치니가 오페라화하여 더욱 유명해진 빅토리앵 사르두의 <토스카> 는 사라 베르나르를 위해 쓴 작품이다. 그 마지막 장면은 토스카가 성벽에서 뛰어내려 죽는 장면인데, 베르나르는 리오 데 자네이로에서 이 죽음의 장면을 연기하다가 잘못 떨어져 무릎에 심각한 상해를 입는다. 그녀는 이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미국공연을 강행했고 결국 다리를 절단하고 만다. 아무리 귀빈 대우를 받는다고 해도 고향이 아닌 이국에서 극장을 계속 옮기면서 이동하는 일은 매우 고단한 일이다. 찰스 킨(Charles Kean)은 네 번에 걸쳐 미국순회공연을 하였는데, 항해도중 배가 좌초되어 죽을 뻔하기도 하였고, 열악한 극장환경으로 고생하기도 하였으며 병에 걸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88번의 공연중 16개의 배역을 소화해야 했다.

이런 고난속에서도 순회공연을 하는 이유는 직업에 대한 성실성과 돈 때문이었다. 씀씀이가 헤펐던 베르나르는 파리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했고, 극장을 운영하면서 큰 빚을 지곤 했다. 그녀는 이를 순회공연 개런티로 청산하곤 했다. 스타들은 순회공연에서 더 많은 개런티를 받는다. 베르나르는 파리에서의 개런티보다 유럽과 미국순회공연에서 몇 배씩 높은 개런티를 받았고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1886년부터 92년까지 중간에 잠깐의 공백이 있기는 했지만 6년 동안이나 해외순회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순회공연은 미국 공연기획자들에게도 역시 큰 돈벌이였다. 극장 신디케이트를 구성한 프로만이나 에어랑거 등은 지방공연을 통해 큰 돈을 벌었고 나중에 이들과 공연전쟁을 벌이는 슈버트 형제들 역시 순회공연을 통해 돈을 벌었다. 무일푼이었던 샘 슈버트는 불과 16세의 나이에 찰스 호이트의 <텍사스 스티어>라는 작품에 대한 뉴잉글랜드 공연권을 확보하여 돈을 벌었고 이어 1897년에는 역시 호이트의 <뉴욕의 이방인>의 순회공연을 성공시킴으로써 공연계에 본격 진출한다. 연극만이 아니었다. 보드빌, 서커스, 기형쇼, 버팔로 빌 와일드 웨스트 쇼, 셔토커(Chatauqua), 민스트럴 등 다양한 엔터테인먼트가 전국을 돌아다녔다.

극장의 증가

인구증가도 괄목할만해서 1890년에 6천3백만 명이었던 인구가 불과 20년 뒤인 1910년에 9천2백만 명으로 늘었다. 1906년부터 1915년까지 10년간은 매년 100만 명씩 늘어났다. 게다가 은행.보험.인쇄.패션.회계 등의 화이트 칼라 노동자가 급증하였고 이들은 문화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모두 이민자들이었고, 이들은 자국의 문화를 미국에 들여와 미국문화를 풍성하게 하였다.

그리고 극장건설이 붐을 이루었다. 당시의 서부개척과 건설붐의 영향, 오랜 노동에 지친 노동자들의 오락욕구에 대한 반응이었다. 19세기 후반에 연극 극장은 5천여 개에 달했다. 영화의 경우에도 입장료가 5센트였던 니클로디언(Nickelodeon) 극장은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8천여 개가 건축되었으며 1910년경에 이르면 2-3천만 명의 미국인이 니클로디언을 찾았다. 그러나 니클로디언은 목제의자와 좁은 공간을 가진 작고 불편한 영화관으로, 점점 늘어나는 중상류층 영화인구를 수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화려하게 장식된 거대한 규모의 영화궁정(Movie Palace)이었다. 지금도 남아있는 로스앤젤레스의 쉬라인 오디토리움은 6천4백여 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고, 뉴욕의 라디오 시티 뮤직홀은 5,960석이다. 지금은 없어진 뉴욕의 록시 홀은 5,920석을 가진 거대한 극장이었다.

극장건설붐은 연극이나 오페라 하우스의 건립에서도 나타났고 서커스, 보드빌, 셔토커 등의 대중예술 모두에서 나타났다. 극장은 장르간에 교차적으로 사용하였고, 급하게 공연장이 필요할 경우에는 텐트극장을 설치했다. 서커스의 텐트극장은 유명했고, 이를 전문적으로 설치하는 숙련된 인력이 있었다. 사라 베르나라는 텐트에서 공연을 하여 오히려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셔토커에도 1900년경까지 수백개의 텐트극장이 있었고, 독립적인 강연장이 세워졌으며 150여 개의 셔토커 공연단이 순회공연을 하였다. 셔토커는 목사, 과학자, 정치가, 문인, 가수 등이 성인들의 교육을 위해 오락과 교육을 결합해서 시작한 성인교육운동 또는 평생교육운동이었는데, 보드빌과 경쟁을 벌일만큼 인기가 있었다. 마크 퉤인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보드빌에서도 전국에 보드빌 서킷이 만들어졌다. 보드빌을 안 본 사람은 시골뜨기뿐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는 가히 공연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만큼 공연은 가장 대중적인 오락이었다.

그러자 공연기획자들은 너도나도 전국투어에 나섰고, 이는 극장예약에 큰 혼란을 초래하였다. 대부분의 공연이 하루저녁만 공연하는 일회성 공연으로 진행되었고 이를 위해서는 35-40주 동안 백 개 이상의 극장이 필요했다. 이렇게 되자 매년 가을에 공연관계자들은 뉴욕의 유니온 스퀘어에 모여 다음 시즌의 공연스케쥴을 정하고 배우를 섭외하였지만 이것만으로는 혼란을 수습할 수 없었다. 이를 관리하는 전국 조직이 필요했다. 이런 논의가 가능하게 된 것은 철도와 전신, 즉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면서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의 원인은 독점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던 당시의 미국식 자본주의였다.

쉬라인 오디토리움 (출처 : venuereport.com)
쉬라인 오디토리움 (출처 : venuereport.com)

신디케이트의 탄생

1896년 초 6명의 남자들이 뉴욕에 모인다. 찰스 프로만(Charles Frohman), 알 헤이먼(Al Hayman), 마크 클로(Marc Klaw), 아베 에어랑거(A.L. Erlanger) , 새무얼 너들링거(Samuel Nirdlinger), 프레데릭 짐머만(Frederic Zimmerman)이었다. 이들은 극장주, 극장 예약매니저, 공연프로듀서 등의 공연관계자들로 짐머만을 제외하고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찰스 프로만은 로드 매니저 겸 공연 프로듀서로 헤이먼과 함께 뉴 잉글란드, 뉴욕, 펜실베니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을 관리하고 있었고 알 헤이만은 미국 최초의 뮤지컬 <검은 마법사>의 투어 매니저를 하였으며 서부지역을 관리하였다. 에어랑거와 클로는 남부지역의 대관 에이전트였고 너드링거(닉슨)와 짐머만은 가장 젊은 멤버로 필라델피아,오하이오, 펜실베니아 지역을 관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극장예약과 지방공연의 혼란을 정리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이들의 당초의 의도는 극장을 통제하는 독점조직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느끼는 혼란을 바로잡자는 순수한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신디케이트는 미국의 지역별 극장네트워크를 만들고 이를 통해서 극장을 예 약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렇다고 전국에 있는 수천 개의 극장을 네트워크한 것이 아니라 주요도시의 일급극장만을 편입시킨 것이었다. 이들 일급극장은 도시와 도시의 핵심극장이 되어 주변지역의 공연스케쥴을 짜는 거점이 되었기 때문에 굳이 모든 극장을 대상으로 할 필요가 없었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전국의 500 ~700개의 극장을 관리하였는데, 이들이 모두 신디케이트 계약에 명시되지는 않았고 이익을 다른 멤버들과 공유하지도 않았다. 신디케이트는 독립된 조직으로서 이들 극장을 모두 소유하거나 임차하지 않았다. 신디케이트가 직접 통제하는 극장은 신디케이트 멤버들이 소유하거나 임차하였고 나머지 극장들은 신디케이트 네트워크 안에 들어오도록 한 것이다.

신디케이트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있었다. 공연업계의 혼란을 정리하고, 예약업무를 통합하여 신속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하였으며 예약 시스템을 표준화하였다는 평가가 있었다. 신디케이트가 생기기 전에는 순회공연의 일정은 그야말로 ‘혼돈’이었다. 작은 공연단은 경쟁 때문에 큰 빚을 지게 되었다. 신디케이트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던 마크 클로는 극장 신디케이트가 격심한 경쟁과 혼돈 속에 있던 공연업계에 질서를 부여하였다고 하였다. 극장주가 굳이 뉴욕까지 가지 않더라도 신디케이트를 통하면 프로그램을 확보할 수 있고, 가격도 이미 책정되어 있으니 경쟁이 필요없었고 빈 극장을 없애는 데도 효율적이기도 하였다.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유익한 제도였다. 당시의 상황에서 신디케이트는 불가피한 조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운영과정에서 독점과 배제의 전략을 취하면서 여기에 저항하는 공연관계자들이 등장하였고, 이는 공연시장을 약육강식의 전쟁터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신디케이트의 목표는 모든 지역에 같은 종류의 오락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는 대량생산 시스템의 한 방식이었다. 많은 극장이 일회공연(One Night Stand)을 하였다. 오전이나 오후 일찍 도착해서 세트를 설치하고 저녁에 공연하고 다음날 아침에 이동하는 강행군이었다. 이런 흥행방식은 서커스 등 다른 오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도시와 대도시 사이에 있는 중소도시에서는 일회공연을 하고 대도시에서는 일주일 정도 체류하면서 3-5회를 공연하였다.

신디케이트의 횡포

순회공연은 시간과 거리, 비용관리가 중요했다. 이를 신디케이트가 맡게 되면서 신디케이트는 극장과 공연기획자들을 손아귀에 넣었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시들을 하나의 공연단위로 보고 계획을 세웠다. 만약에 신디케이트가 관리하고 있는 극장에서 예약을 해주지 않으면 그 도시를 건너뛰고 다른 도시로 가야 했다. 신디케이트는 극장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모든 일을 좌지우지했다. 그들이 결정하면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극장은 개별공연단과 협상할 필요없이 신디케이트를 통하면 쉽게 공연을 유치할 수 있었다. 신디케이트에 참여하지 않는 극장은 블랙리스트에 올라갔다. 여기에 저항하는 극장이나 임프레사리오들은 무자비하게 도태시켰다. 중요한 극장들을 통제할 수 없을 때는 경쟁 극장의 건축을 유도하여 그 극장들에게 가장 좋은 공연을 낮은 가격으로 제공하여 경쟁 극장을 파산시켰다. 비협조적인 뉴욕의 제작자들은 예약을 거절당했고 배우들도 자신들이 출연한 공연이 신디케이트의 순회공연경로에 참여하지 않으면 공연길이 막히고 말았다. 신디케이트는 공연의 선택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관객에게 어필할 것 같지 않은 공연을 거절했고 팬이 많은 스타가 출연하는 공연을 선호했다.

극장은 가장 중요한 자원에 속했다. 신디케이트 멤버들의 수입은 극장에서 가장 많이 나왔다. 신디케이트는 1907-8년 시즌에 <메리 위도우>를 공연해서 142,254달러를 벌었다. 이는 동부에서 22주 동안 92,177달러, 서부에서 13주간 50,077달러를 합산한 것이다. 주당 평균수입은 4,064달러였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5년 동안 클로와 에어랑거가 25개 극장에서 벌어들인 극장수입은 5백4만 달러였다. 오늘날의 환율로 환산하면 1억 달러가 넘는 거액이다. 일급극장을 확보하고 이를 거점으로 효율적인 공연루트를 짜는 일은 수입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손해나는 공연도 많았는데 이를 중도에 해약하지 못하는 것은 극장이나 극단과의 사전계약 때문이었다. 그러나 극장으로부터 큰 이익을 취하던 신디케이트는 결국 극장의 과잉으로 몰락하고 만다.

공연단 역시 개별 극장의 책임자와 협상할 필요없이 신디케이트와 협상하면 되었다. 그러면 신디케이트가 그들의 순회공연 전반을 기획해 주었다. 신디케이트는 이런 독점을 통해 공연프로듀서까지 장악할 수 있었다. 신디케이트의 정책에 따르지 않으면, 공연경로를 어렵게 짜서 적자에 빠뜨릴 수도 있었다.

신디케이트는 법률적인 조직이 아니라 유사한 사업에 종사하고 있던 사람들이 모인 임의단체와 흡사한 것이었다. 따라서 공동으로 자본을 투자하거나 조직을 구성하여 집행부를 구성한 일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디케이트는 강력한 지배력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극장과 배우, 콘텐츠 등 공연의 중요한 요소들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벨라스코 (출처 : britannica.com)
데이비드 벨라스코 (출처 : britannica.com)

신디케이트는 연극의 제작, 자금조달,공연스케쥴 조정 등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까지 신디케이트는 어떤 극장에서 어떤 작품을 공연할지를 결정했고 어떤 배우를 어떤 조건에 고용할지도 좌지우지했다. 신디케이트 사업자들에게 배우는 공연의 핵심요소가 아니라 오로지 돈벌이를 위한 상품일 뿐이었다. 표준계약서도 없었고 최저임금의 개념도 없었다. 리허설에 대해서는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리허설 기간도 제한이 없었다. 평균 10주 정도였고 18주 이상의 공연도 많았다.

신디케이트의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정한 프로그램과 배우 등을 마지못해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공연이 어떤 배우와 어떤 극장에서 공연되어야 한다는 것까지 제약한 것이다. 또한 수백명의 철도 에이전트를 고용하여 공연단의 이동 스케쥴도 전문적으로 조정하였다. 만약 극장주나 배우가 이에 저항하면 예약이나 출연에서 제외되곤 하였다. 무자비한 배타적 전략을 펼쳤고 이는 배우들과 공연단으로부터 커다란 원성을 사게 되었다. 이들은 직접 제작에 나서기도 했는데, 찰스 프로만, 클로와 에어랑거는 1890년부터 1910년까지 매시즌 13-14개의 연극, 뮤지컬, 프랑스 소극등을 제작하였고 이를 위해 600여 명의 배우들을 고용했다. 신디케이트가 제작한 작품은 작품질과 관계없이 늘 흥행에 유리한 루트를 독점했다. 경쟁작품은 불편한 루트를 배정하였다.

데이비드 벨라스코는 20세기 초반 미국을 대표하는 연출가였다. 그는 1903년 그의 히트작 <신들의 연인(Darling of Gods)>에 대한 극장예약을 신청했지만 신디케이트는 <신들의 연인>을 복제한 <일본 꾀꼬리(Japanese Nightingale)>의 흥행을 위해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이 <일본 꾀꼬리>는 곧 막을 내리고 말았다. 벨라스코는 <신들의 연인>을 다른 극장에 신청하였지만 신디케이트에서는 벨라스코에게 앞으로는 더 이상 신디케이트와 일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협박했다. 심지어 벨라스코의 <신들의 연인>이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서 아예 공연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도 하였다.

신디케이트의 지배는 언론과의 유착도 한 몫을 했다. 프로만은 12살 때 낮에 학교에 다니면서 저녁에는 뉴욕 트리뷴에서 일한 적이 있고, 이어서 데일리 그래픽이라는 신문사에서도 근무한 적이 있어서 기자들과는 친분이 있었다. 이런 친분을 이용하여 신디케이트의 작품에 대한 유리한 기사를 쓰도록 유도했다. 때로 양식있는 비평가들이 신디케이트 작품을 비판하는 기사도 쓰긴 했지만, 극작가를 꿈꾸거나 언론에서의 성공을 바라는 기자들은 작품의 질과 관계없이 좋은 기사만을 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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