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공연이야기 28 - 미국 배우노조의 탄생(3)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28 - 미국 배우노조의 탄생(3)
  • 조복행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1.03.02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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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버트가의 형제들

 

슈버트 형제(가운데가 샘, 오른쪽이 리)(출처:shubertarchive.org)
슈버트 형제(가운데가 샘, 오른쪽이 리)(출처:shubertarchive.org)

19세기 후반부터 1930년경까지 미국 공연산업은 큰 호황을 맞았다. 공연은 몇 달을 지나지 않아 손익분기점에 도달했고, 설령 실패하더라도 ‘뉴욕에서 직접’ 또는 ‘브로드웨이에서 직접’ 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지방공연에 나서면 이를 회복할 수 있었다. 공연산업이 정점을 이룬 것은 1차대전 이후 1920년대로, 건설붐과 소비의 증가로 인한 엄청난 경제발전이 이루어졌고 사회적, 문화적 역동성이 강해졌는데 이를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라고 불렀다. 각종 예술적 실험과 수준높은 순수문학작품이 등장했고, 재즈등의 대중음악이 탄생하였으며 상업적 공연도 증가했다.

미국 공연산업의 호황은 진취적 기백이 강한 젊은이들의 모험심을 자극하였고, 이민자들에게는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할 수 있는 희망의 빛이 되었다. 슈버트(Shubert) 형제들도 이들 중 하나였다. 이들이 공연사업을 시작한 것은 1900년대초 20대의 젊은 시절이었다. 이들은 공연에 대한 특별한 경험이나 지식, 자본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또한 이미 신디케이트를 형성한 노회한 임프레사리오들이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이들 형제들은 끈기와 용기로 공연산업의 한 획을 긋는다. 그들은 미국 공연산업의 산 증인이었으며 브로드웨이의 형성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브로드웨이에 여러 극장을 지었고, 대공황 시기에 많은 극장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이들을 매입하거나 유지하도록 도와서 브로드웨이가 지금까지도 건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만약 그 때 슈버트 형제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브로드웨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지금도 브로드웨이에 17개의 극장을 소유하고 있고, 오프 브로드웨이와 지방에 많은 극장을 거느리고 있는 브로드웨이 최대의 극장체인이다. 1920년대에는 전국에 천여개의 극장을 관리했고 많은 극장에 공연프로그램을 공급했다. 7천여 명을 고용하고 있었고 일주일에 백만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렸으며 한 번에 20여개의 공연단이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다. 1900년대에서 1920년대까지 신디케이트와의 살벌했던 ‘공연전쟁’기, 공연시장을 장악했던 화려했던 시절, 대공황과 정부의 규제로 시련을 겪던 시기를 거치면서 온갖 영욕을 맛본 미국 공연사의 역사 자체가 되었다. 거대한 문화권력이었고 그 영향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슈버트 형제들은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경영방식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던 냉혹한 경영자이기도 했다. 유명한 안무가 아그네스 드 밀은 슈버트 형제들에 대해 ‘그들은 예술을 사악하고 역겨운 돈벌이로 전락시킨 사람들로, 혹시 그들을 칭찬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그들은 공연을 예술이 아니라 사업으로 대했고, 배우들은 사람이 아니라 상품으로 보았다. ‘매우 상업적인 장사꾼이며 오늘날의 공연무대를 부패하게 만든 장본인‘ 이라거나, 그들이 내건 개방정책이 연극의 순수성과 예술성을 훼손하는 무분별한 장르개방으로 이어져 상업주의를 부추겼고  이런 풍조가 전국적으로 전염병처럼 번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경쟁자와의 싸움, 약자에 대한 억압, 소송, 회유와 협박 등의 방식을 동원하여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당시 미국사회의 사회현상이기도 하였다.    

슈버트 형제들은 리(Lee, 1871-1953), 샘(Sam, 1878-1905), 제이제이(Jacobs J, 1879-1963)의 삼형제로 동유럽 출생의 유대인들이었다. 1882년 시라큐스에 왔는데, 알콜 중독자였던 아버지는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서 형제들은 일찍부터 생업에 나서야 했다. 큰 형 리는 10살 때 학교를 중퇴하고 신문을 팔기 시작했고 둘째 샘도 구두닦이 등의 여러 가지 막일을 했다. 공연사업을 일으킨 샘은 그랜드 오페라 하우스에서 구두를 닦다가 극장주의 눈에 띄어 뮤지컬 <검은 마법사>를 구경하게 되었고 공연에 매료된다. 극장에서 프로그램을 판매하다가 곧 회계담당직원으로, 이어서 회계책임자로 승진한다.

샘은 여기서 많은 작품들을 보게 되었는데, 특히 스타가 출연하는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된다. 샘은 1894년, 그의 나이 16살에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찰스 호이트의 <텍사스 스티어 - 강도남작시대에 워싱턴에서 벌어지는 코미디극>의 공연권을 획득한다. 여기에 필요한 자금 5천 달러는 친구와 지인들에게서 빌렸고, 특히 유대인 상인들이 많이 도와주었다. 이 작품을 5년후인 1899년에 순회공연을 하여 많은 돈을 번다. 프로듀서가 된 것이다. 1897년에는 시라큐스의 배스터블 극장의 경영자가 된다. 극장경영에 대한 입찰이 있었고, 필요자금 7천 달러는 유대인 상인들의 도움으로 충당하였다. 

슈버트사 설립
이들 형제들은 1900년에 뉴욕에 슈버트 사(Shubert Organization)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공연산업에 나선다. 이 회사는 법률적 조직으로, 샘이 사장이고 리와 제이콥은 부사장을 맡았다. 투자자들은 이사회 멤버들이었고, 경영은 슈버트 형제들이 맡은 것이었다. 이들은  철저한 상업성을 추구했다. 뮤지컬 코미디나 레뷔와 같은 재미있고 스펙터클한 공연이 중심이 되었다. 수익이 나면 바로 투자자에게 배분하여 그들의 신뢰를 쌓았다.

사업을 주도한 건 샘이었다. 그는 162CM의 작은 키에 노인과 같은 구부정한 자세, 병자와 같은 창백한 피부와 왜소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상황판단이 빠르고 ‘ 머리칼에서조차 전기가 일어날만큼’ 언제나 에너지가 넘치는 청년이었다. 누구보다도 강한 신념과 성실성을 가지고 있었다. 매일 극장에 가서 공연을 보고 ‘물건’을 찾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샘은 형과 동생을 뉴욕으로 불러 같이 사업을 펼쳐 나갔지만 그들은 보조자에 불과했다. 리는 샘에 대한 불만이 가득차 있었다. 마치 샘이 형처럼 행동하고 자신은 그의 부하가 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리는 샘에 대한 불만을 동생 제이제이에게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면 제이제이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는 경쟁과 질투심, 적대감이 작용했다. 그럼에도 외부의 적에 대해서는 똘똘 뭉쳐 대항했다.


뉴욕에서 공연으로 돈을 벌러 온 어느 누구보다도 샘은 보잘것없는 집안출신이었다. 샘은 문학과 연극에 대해 문외한이었다. ‘젖소가 우유의 성분을 아는 정도만큼도 몰랐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무지와 소년같은 순진무구함이 그의 자산이었다. 신디케이트 멤버들은 이 가냘픈 청년을 경계하지 않았고 그들의 경쟁자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지난 번 글에서  Theatrical Syndicate를 극장 신디케이트로 번역하였는데 앞으로는 공연 신디케이트로 번역하고 신디케이트로 표기하고자 한다. 신디케이트는 우선 극장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고 이를 바탕으로 공연의 장르, 배우, 스케쥴 등을 총체적으로 통제하는 조직이었다. 따라서 일차적으로는 극장 신디케이트를 의미하고, 이를 바탕으로 공연 전반을 통제한다는 면에서는 연극이나 공연 신디케이트를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극장 신디케이트나 공연 신디케이트의 어느 것도  Theatrical Syndicate의 완전한 의미를 담아내지는 못한다. 극장 신디케이트와 연극 또는 공연 신디케이트라는 두 가지 개념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말에는 이 두 가지를 포괄하는 적합한 단어가 없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하나를 택한다면 공연 신디케이트가 극장 신디케이트보다는 약간은 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샘은 기회를 포착하는 감각, 저돌성, 남을 설득하는 언변이 있었다. 나쁘게 말하면 권모술수에 능한 모사가였다. 공연사가들은 미국에 서너 명의 천재적인 공연사업가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P.T. 바넘, J.H 해벌리(Haverly, 민스트럴 쇼의 기획자), 그리고 슈버트 샘이었다. 샘은 자신의 의도를 감추고 겉으로는 순진하고 겸손한 척했지만 내심으로는 무서운 발톱을 숨긴 위장의 대가였다. 그는 공연이나 예술을 공부한 적은 없었지만 대중의 감각을 읽어내고, 시대의 흐름을 간파하는 능력이 있었다. 철저하게 상업성을 추구했고 돈버는 일에만 집중하였다.

윈터가든극장 (출처: pinterest.com)
윈터가든극장 (출처: pinterest.com)

극장확보
샘의 첫 목표는 극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극장을 확보해야 공연도 할 수 있고, 극장은 곧 돈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신디케이트의 극장네트워크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었다. 극장은 공연정복의 중요한 공간이었고, 공연요소를 집적할 수 있는 파워게임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급극장은 신디케이트가 장악하고 있어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슈버트사가 처음으로 확보한 헤럴드 스퀘어 극장은 낡아서 다들 외면하고 있는 극장이어었다. 샘은 초라한 극장은 스타를 써서 극복해 나갔다. 신디케이트에서는 슈버트가 누구지?하는 비아냥거림이 나왔다. 곧 망해서 시라큐스로 돌아갈 거라고 예상하였지만 샘은 이를 극복해 나갔다. 1902년에는 카지노 극장을 인수하였다. 뉴욕에 확보한 체인이외에 1905년에는 보스턴 필라델피아 시카고 클리블랜드 등 주요도시에 좋은 극장을 확보해 나갔다. 신디케이트는 이를 방해했다. 이들 극장에서 공연하면 블랙리스트에 올리겠다고 협박하였다. 샘은 소송으로 맞섰다. 1905년에는 런던에도 진출하여 월도프 극장을 임차하였다. 그러나 런던 공연사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906년에는 부자들이 모여 유럽의 국립극장을 모델로 뉴 시어터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리는 여기에 회계책임자로 참여하여 펀딩, 자금, 회계등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극장은 너무 컸고 음향도 좋지 않았으며 오페라 하우스를 모델로 해서 만든 말발굽 모양의 객석은 관람에도 불편했다. 신디케이트와 친했던 모닝 텔레그래프는 1910년 1월 7일자 칼럼에서 ’ 슈버트는 뉴 시어터를 트라이아웃의 장소로 이용했고 슈버트는 용기.지성을 필요로 하는 세계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라고 비판하였다. 1913년 뉴 시어터의 경영진은 극장경영을 포기하고 재건축하기로 결정한다. 그러자 슈버트사는 재빨리 이 자리를 구입하여 슈버트 극장과 부스 극장을 건설하였고 이후 이 곳은 브로드웨이의 중심이 되었다.

뉴잉글란드, 펜실베니아, 오하이오 지역 등에서도 극장확보노력을 지속했고 서서히 극장수를 늘려나갔다. 공연신디케이트에 맞서는 또 다른 신디케이트를 구축해 나간 것이다. 1909년에 가서야 슈버트사는 제대로 된 전국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42주 동안의 공연을 예약할 수 있게 되었다. 슈버트사는 자기충족적인 회사가 된 것이다.

1906년 시즌초에 리와 제이는 히포드롬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큰 극장을 확보했다. 이는 슈버트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1905년 4월에 개장한 히포드롬은 1902년에 코니 아일랜드에 있는 루나 파크의 오락을 브로드웨이에 도입하려고 지은 극장이다. 루나 파크의 설계자인 프레데릭 톰슨이 기획한 공간이었다. 히포드롬은 어머어마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일반극장의 12배가 되는 무대와 5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객석, 여기에 호수, 폭포, 달의 풍경, 아라비아 시장, 동양의 궁전같은 스펙터클을 재현하려 하였다. 대중을 위한 오락을 표방하고 서커스, 보드빌, 뮤지컬, 판토마임, 발레등을 공연하였다. 처음 두 번의 공연은 성공했다. 그러나 투자자는 톰슨이 너무 제작비가 많이 드는 공연을 제작한다고 불만을 가졌고, 슈버트에게 운영을 넘겼다. 그러나 히포드롬은 자체 제작진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운영과정에서 슈버트사는 이들과의 사이에 의견차이가 발생하였다. 결국 슈버트사는 극장운영에서 손을 뗀다. 정극을 선호하던 리는 히포드롬의 거대한 스펙터클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제이제이는 히포드롬의 스펙터클을 되살려보고 싶었다. 이는 뒷날 제이제이의 대중연예의 밑바탕이 되었으니 히포드롬이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1911년에는 윈터가든 극장을 임차한다. 이 극장은 그 이후 슈버트가의 각종 작품을 공연하는 대표극장으로 자리잡는다. 운영은 제이제이가 담당했다. 제이제이가 관리한 유일한 극장은 윈터가든이었고 그는 여기서 레뷔와 엑스트라바건자 등의 대중적 레파토리를 선보였다. 윈터 가든의 레뷔는 특히 유명해서 많은 배우들이 이 곳에 출연하고 싶어했고,  ‘윈터 가든에서 나온(direct from Winter Garden)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윈터 가든은 슈버트사에서 가장 성공한 극장이었다. 뮤지컬 <캣츠>공연도 이 곳에서 이루어졌다.

1913년에 리와 제이제이는 비주극장을 건설하였고, 1916년 이후에는  대규모 극장건축을 추진한다. 브로드허스트 극장(1917), 모로스코 극장(1917), 플리머스 극장(1916-7) 등을 잇따라 건설하였고 이들은 모두 브로드웨이의 핵심극장들이 되어 갔고, 슈버트 형제들의 ‘권력놀이’의 공간이 되었다. 1916년 이후 21개의 극장 디자인을 완성하였고 그 중 14개는 아직도 사용중이다. 문화권력으로서의 슈버트가의 중요한 기반이 1910년대 중후반에 더욱 다져진 것이다.

알 졸슨(출처:fineartamerica.com)
알 졸슨(출처:fineartamerica.com)

 

스타영입
극장을 확보하면서 슈버트는 스타들의 영입에 공을 들인다. 그러나 공연사업의 초심자였던 샘 슈버트에게 누구도 선뜻 그와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초기에는 그들에게 변변한 극장도 없었다. 샘은 신디케이트에 반감을 품고 있었던 스타들에 접근한다. 이이제이의 수법이랄까, 적의 적을 유인하는 방식이었다. 맨 처음에 영입한 배우는 당시의 거물급 스타였던 리차드 맨스필드로, 20대의 젊은 샘은 40대의 대스타를 영입하는 데 성공한다. 이어서 1905년에는 미국공연사상 P.T.바넘의 제니 린드 공연에 이어 가장 센세이셔널한 성공으로 기록되는 사라 베르나르의 공연을 성사시키면서 슈버트는 공연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어서 윈터가든에는 알 졸슨(Al Jolson)이 출연하여 선풍을 일으킨다. 그는 처음에 민스트럴 쇼에서 흑인분장을 하고 나와서 인기를 얻은 뒤 제이제이에게 스카웃되어 윈터가든에 출연하게 된다. 레뷔, 보드빌 등 다양한 엔터테인먼트에서 활동하였고 최초의 유성영화인 <재즈싱어>에도 출연하였다. 1950년에 한국에서 6.25 전쟁참전 미군위문 공연후 병을 얻어 사망하기까지 오랫동안 큰 인기를 누린 스타였다.  

샘의 죽음
샘은 1905년 뉴욕에서 피츠버그로 가던 기차가 탄약을 실은 기차와 충돌하면서 사망한다. 그의 나이 불과 26세였다. 샘에게 극장을 확보하는 일은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고, 피츠버그에 두케스네 극장을 확보해 둔 터였다. 그러나 이는 신디케이트와 송사에 휘말렸고 피츠버그에서 이에 대한 재판이 예정되어 있었다. 샘은 변호사만 보내도 됐지만 워낙 중요한 일이어서 자신도 가기로 했다. 그러나 그가 탄 기차는 탄약을 실은 화물열차와 충돌하였고, 침대차에서 홀로 자던 샘은 큰 부상을 당하고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결국 숨을 거두고 만다. 뉴욕 타임즈는 1899년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급서한 오커스틴 댈리(Augustin Daly, 1838-1899, 연출가 겸 작가로 당시 미국최고의 연출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의 죽음 이후, 이보다 더 쇼킹한 연극뉴스는 없다고 썼다.  

프로듀서로서의 슈버트 형제
샘이 일구어놓은 공연사업은 형 리 슈버트가 이어받는다. 샘은 사망하기 2년전에 작성해 놓은 유언장에서 모든 권한과 재산을 리에게 위임한다고 유언한 바 있었다. 리는 한동안 망연자실했으나 샘이 일궈놓은 사업을 더 확장하겠다고 결심한다. 그의 사업방향은 샘과 같이 극장의 확보, 스타의 영입, 콘텐츠의 개발이었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거대한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다. 신디케이트였다. 슈버트사와 신디케이트는 1905년 이후 거의 20여년 이상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리는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사업을 물려받은 1905년부터 1930년경까지 매우 정력적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1910-20년대에 매 시즌 15편 내외의 공연을 제작하였다. 그는 대중적 오락보다 연극이나 오페레타 등 예술적 공연에 더 관심이 많았다. 미국작가는 물론이고 막스 라인하르트나 버나드 쇼 등의 대가들의 작품도 제작했다. 리의 예술적 취향을 보완한 건 제이제이였다. 1900년대까지도 미국공연은 영국공연의 복제였다. 아직도 자신만의 목소리가 없었고 영국에서 수입한 뮤지컬 코미디나 오페레타, 버라이어티쇼 등을 미국화한 것들이었다. 따라서 좋은 외국작품이나 아티스트는 흥행성공의 관건이었다. 당시의 미국 공연기획자들은 이들을 어떻게 대중의 구미에 맞게 변형시킬 것인가를 늘 고민하였다. 그래서  보드빌, 레뷔, 벌레스크, 민스트럴 쇼 같은 버라이어티한 공연과 엔터테인먼트가 탄생했다. 제이제이는 음악이 들어간 레뷔나 뮤지컬 코미디등을 제작했다. 그는 대중들의 기호를 잘 이해한 프로듀서였다.

신디케이트는 찰스 프로만을 제외하고는 제작능력이 없었다. 닉슨과 짐머만은 가끔 제작했고 헤이만은 평생 6편을 제작했을 뿐이었다. 그들의 킬러 콘텐츠는 벤허로, 10여년 동안 지역극장주들에게 강요하다시피 공연하게 하고 수입의 대부분을 챙겼다. 이런 열악한 제작능력은 훗날 공연전쟁의 패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샘처럼 리와 제이제이는 단순한 극장주가 아니라 훌륭한 프로듀서였다. 500여편 이상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리는 정극이나 코미디, 제이제이는 뮤지컬을 제작하였다. 특히 제이제이는 음악이 들어가지 않은 작품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윈터 가든의 레뷔는 유명했다. <패싱 쇼>는 1894년에 레더러(Lederer)가 만든 미국 최초의 레뷔였다. 샘은 뉴욕에서 이 공연을 보고나서 레더러를 쫓아다녔고, 그에게서 <뉴욕의 미인>이라는 뮤지컬 코미디 작품의 공연권을 샀다. 슈버트사는 나중에 <패싱 쇼>의 공연권도 구입하여 흥행에 나섰다. 이 레뷔는 코러스 걸, 노래, 춤, 코미디, 벌레스크 등이 혼합된 버라이어티 쇼였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슈버트사의 대표공연이 되었다.

1916년에는 <로빈슨 크루소>를 제작하여 성공하였고 1918년에는 <신바드>,  1918년에는 <몬테 크리스토 2세> 등이 연이어 히트하였다. 슈버트의 제작방식은 표준화 체제와 공장식 대량생산이었다. 대공황 이전까지는 적어도 1년에 12편 이상을 제작하였고, 지방공연까지 하였다. <꽃피는 시간>이라는 작품은 9개의 공연단을 구성하여 순회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세트, 타이틀, 인력운용계획 등을 표준화였고 레뷔, 보드빌, 오페레타 등을 제작하면서 음악공장과 유사한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여러 가지 요소들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돌려서 사용하고, 이미 사용한 것은 재구성하는 방식이었다. 

리는 케이스- 알비가 장악하고 있던 보드빌 사업에도 도전했다. 1907년에는  신디케이트와 제휴하여 미국어뮤즈먼트사(US Amusement Company)를 설립하여 보드빌 산업에 진출했다가 그 다음 해 케이스- 알비로부터 백만달러를 받고 해체했고 1921년에는 2천백만 달러를 들여 고급슈버트 보드빌(Advanced Shubert Vaudeville)을 설립했다. 그러나 제이제이는 이 사업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이미 케이스-알비가 장악하고 있는 산업에 후발주자로 나서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이 사업은 다시 실패했다. 
 
코러스 걸
리는 매우 사무적이고 차가운 성격이었다. 어느 날 작가하고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일어서면서 약속이 있어서 가야 된다고 하였다. 나중에 보니 점심을 같이 하던 작가와의 약속이었다. 약속장소에서 만나니 정색을 하고 딴 사람처럼 대하는 것이었다. 리는 자기통제가 매우 강하고 강인한 성격이었다. 리와 제이제이는 매너나 성격이 좋아서 영웅이 된 것이 아니었다. 거칠고 타인이 자신들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 성공의 공식이었다. 그들은 누구도 믿지 않았다. 지휘자는 바뀌었고 전쟁터에 들어가 강한 전사로 바뀐 것이었다. 리는  동생을 사업의 전면에 나서지 못하게 하였다. 제이제이가 윈터가든의 경영을 맡게 된 건 리가 경영을 맡은 지 한참 뒤였다. 리는 제이제이를 완전한 파트너로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1914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어머니는 생전에 제이제이에게 적당한 파트너쉽을 주라고 당부했고, 이 부탁은 어머니가 죽은 후에야 이루어졌다. 어머니는 형제가 다투지 않고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기 때문에 리는 어머니의 유언을 지켜야 했다. 그러나 둘 사이는 리가 죽을 때까지도 그렇게 순탄하지는 않았다.

리는 밤새 일하고 정오에 일어났다. 매일 오후 4시에 이발사가 와서 면도를 해주고 이어서 코러스 걸과 ‘5시 소녀’ (Five O'clock Girls)를 불러 도착적인 성행위를 하기도 했다. 리와 제이제이의 성도착은 브로드웨이에서 유명했다. 코러스 걸들은 성적 노리개였다. 리가 동침하지 않은 소녀들은 배역을 얻지 못했다. 리허설 도중 제이제이는 모든 코러스 걸이 자신의 섹스 파트너라고 고백하면서 어느 코러스 걸의 가슴속으로 손을 집어넣기도 했다. 모든 사람이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고, 심지어 나이 어린 아들까지도 알고 있었다. 어떤 코러스걸도 슈버트 형제로부터 안전하지 못했다. 유대인 프로듀서들은 비유대인 소녀들을 좋아했고, 기독교계 프로듀서들은 유대계 코러스 걸을 좋아했다. 그리고 코러스 걸을 이렇게 대하는 것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공연도 매우 선정적이었다. 극장에 통행로를 설치하여 관객들이 코러스 걸들이 입장하는 모습을 잘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코러스 걸들은 반 누드상태였고 상체가 훤히 보이는 실크의상을 입었다.  

당시의 캐스팅 디렉터 마 시몬스(Ma Simmons)는 동성애자였다. 마는 코러스 보이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아그네스 드 밀은 코러스 보이들이 마 시몬스로부터 안전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는 항상 목에 스카프를 매고 자신의 성적 취향을 표현하였다.  

제이제이 역시 코러스 걸과의 염문이 끊이지 않았다. 역시 코러스 걸 출신이었던 와이프 캐더린 메이와 이혼한 것도 그의 여자문제 때문이었다. 리는 결혼하여 아들을 하나 두었음에도 이 사실을 철저히 숨겼지만 나중에 드러나게 된다.    

대공황(출처:businessinsider.com)
대공황(출처:businessinsider.com)

대공황
이렇게 활황을 보이던 공연산업은 1930년대에 들어와 시련기를 맞는다. 유성영화가 등장했고, 대공황이 시작된 것이다. 슈버트 사는 1929-30 시즌에 21편, 30-31년 시즌에 23편을 제작하였지만 실패했다. 1930년도에 123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고, 1931년에는 167만 달러 적자가 났다. 1931년에 알 졸슨이 <원더 바 Wonder bar>라는 쇼에 출연하였지만, 인기는 예전같지 않았다. 그 사이에 대중의 기호가 변한 것이다.   

1924년에 설립된 슈버트 공연주식회사(Shubert Theatre Corp.)는 70여개의 극장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1931년에 이르자 총부채가 1천7백만 달러에 이르렀다. 슈버트는 법정관리를 신청하였다. 제작을 중단하거나 대폭 감축하였고 인력도 극장운영에 필요한 필수인력을 제외하고 전원해고하였다. 노조에게는 지금은 고통을 분담할 때라고 설득하였다.

1932년에는 차입금으로 연명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회사를 청산해야 하는 상황으로까지 몰렸다. 투자자들이나 채권자들은 면밀한 재산실사를 요구했다.

부채보다 순자산이 더 많을 것으로 의심했던 것이다. 리는 은닉한 자산이 있었지만 이를 다른 법인이나 타인명의로 은닉했기 때문에 발각되지는 않았다. 실제로 슈버트사는 브로드웨이와 다른 지역에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법정관리를 받기 시작한 뒤 1년 2개월 동안에도 98만 달러의 손실이 발생했고 1933년에 법원은 슈버트에게 청산을 명령했다. 경매처분을 하면 슈버트사가 해체되는 것이다.

그런데 판사가 리에게 경매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였다. 슈버트사에게 매우 관대한 처분을 내려서 리에게도 청산법인을 인수할 수 있는 입찰자격을 부여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입찰자는 한 명이었고 그는 리였다. 1929년도 장부가액은 2천4백만 달러, 33년 1천2백만 달러였지만 실제 인수액은 40만달러에 불과했다. 리는 투자자에게 손을 벌리기보다 법정관리의 연장을 요청하였다. 당시 신문들은 슈버트가 곧 파산할 것으로 전망하였지만 법원과 정부가 직원들의 대량해고를 막고, 가장 큰 엔터테인먼트 기업을 살리기 위해 여러 가지 관대한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그리고 리는 사태를 재빨리 솜씨있게 수습하였다. 만약 리가 그 사태를 잘 수습하지 못했더라면 미국공연계 전체가 매우 침체했을 것이고, 브로드웨이도 오랜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리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공연산업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와 함께 공연계를 떠나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지만 다시 돌아왔다. 슈버트 공연(주)을 해체하고 실렉트 공연주식회사(Select Theatres Corporation)로 바꾸었다. 1932-33시즌에는 5편의 공연을 제작하는 등 재기에 나섰다. 대중들의 인기오락이었던 지그펠드 폴리스도  1930년대에 빚더미위에 올라 앉았다. 지그펠드 폴리스(Ziegfeld Follies)는 1907년부터 1930년경까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인기 레뷔쇼였다. 코러스 걸들이 등장하였고 춤과 노래, 코미디가 결합된 매우 인기있는 공연이었다. 공연의 아이디어는 지그펠드 폴리스의 부인인 빌리 버크로부너 나왔다. 그러나 지그펠드 폴리스 역시 대공황과 영화의 내습을 이겨내지 못했다. 미망인은 슈버트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슈버트사는 빌리 버크에게 저작권료를 지급하고 그녀와 함께 제작에 나섰다.

윈터가든의 히트작인 <패싱 쇼>도 1936년, 1943년에 각각 하나씩 더 제작하였고 1938년에는 <헬자포핀(Hellzapoppin)>을 제작하여 1404회의 롱런을 기록함으로써, 당시의 브로드웨이 롱런 기록을 돌파하였다. 이 작품은 웃음과 스펙터클, 특수효과 등을 사용하여 사회적 의미보다는 대중들에게 웃음을 주려고 했던 공연이었다. 슈버트는 서서히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제작을 대폭 줄인다.

이런 온갖 시련을 겪었음에도 슈버트 사는 재기했다. 리는 건재했고 큰 부를 일구었으며 이는 가족과 친지들간에 재산을 둘러싼 소송의 원인이 된다. 슈버트 형제는 1945년에 샘을 기리기 위해 1945년에 슈버트 재단을 설립한다. 비영리 극장지원과 영리극장의 운영이 주임무였다. 재능있는 아티스트의 예술활동과 작품창작에 대한 펀딩을 지원해 왔다. 슈버트사의 극장들은 이 재단소속이다. 텔레차지라는 티켓팅 서비스 회사와 아카이브도 운영하고 있다. 
 
반트러스트 법
1950년 2월 21일 미국정부는 반트러스트법을 적용하여 슈버트사의 계열사인 지, 제이, 마커스 하이만(Marcus Heiman)과 통합예약사무소(UBO), 실렉트 공연(주), LAB 어뮤즈먼트 등의 회사를 극장예약을 독점하여 자신들의 공연제작과 흥행에 유리하도록 시장을 왜곡한다는 이유로 기소하였다. 실렉트 공연(주)은 1933년에 전체 그룹을 재편할 때 설립된 그룹의 중추적 회사였고 LAB 어뮤즈먼트는 UBO와 마찬가지로 슈버트와 마커스 하이만의 공동소유로 불과 세 개의 극장을 관리할 뿐이었다. UBO는 리가 지속적으로 주장해 온 것처럼 정부의 승인아래 파산의 위기에 빠진 연극을 되살리기 위해 리가 만든 회사였다. 그럼에도 정부가 늘 주시해 온 것은 UBO였다. UBO는 브로드웨이에서는 32개 극장중 16개 극장, 뉴욕 이외의 지역에서는 90% 정도의 극장예약을 통제하고 있었다. 필라델피아의 4개의 주요극장과 보스턴의 9개 극장중 6개 극장도 장악하고 있었다.

경쟁을 원천적으로 없애기 위해 슈버트사는 클로와 에어랑거(K&E)의 예약사업을 1932년에 매입했다. 인수합병이라는 명분이 붙어있기는 했지만 뉴욕 이외의 지역의 극장예약 독점을 위한 것이 주목적이었다. 이 회사를 운영하기 이해 리는 시라큐스의 오랜 친구인 마커스 하이만을 영입했다. 하이만은 보드빌 전쟁에서 별다른 실적을 내지 못했고 오히려 배우노조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곤경에 처한 적도 있었다. 하이만은 UBO는 독점을 위한 것이 아니라 뉴욕 이외의 지역의 효과적인 극장예약을 위한 것임을 주장하였다. 예약금액의 5%를 극장측으로부터 징수하였는데, 이 수수료가 매우 큰 돈이 되었다. 하이만의 급여는 많지 않았지만 이 수수료를 받아 큰 부자가 되었다.

미국정부는 슈버트의 독점을 비판하였다. 과거 신디케이트의 행동을 슈버트가 되풀이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공연에 필수적인 40여개의 극장예약을 장악하고 있는데, 이를 관리하거나 소유하지 말라는 지침이었다. ‘ 공연산업의 대부’
라는 브랜드를 달고 일해온 슈버트사의 50여간의 사업을 근본적으로 해체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항하여 리는 다시 한 번 싸우기로 결심한다. 비난받을 게 아니라 오히려 격려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법무부 책임자와 만나서 이런 주장을 되풀이했다. 각종 싸움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에 또 하나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지그펠드 폴리스(출처 : blog.samys.com)
지그펠드 폴리스(출처 : blog.samys.com)

일부에서는 동정론도 있었다. 독점문제를 제기한 프로듀서들은 공연경험이 일천한 사람들로 공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슈버트의 불공정 예약, 공연수입의 상당액을 징구한 불평등 계약, 대본의 사전제출과 임의수정, 순회공연 방해 등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온 문제였다. 이런 불만은 엘레노어 루스벨트의 귀에도 들어가 있었고 FBI까지 조사에 나섰다.

이미 영화산업에서는 1948년에 5대 영화제작사에 반트러스법이 적용되어 극장소유가 제한되고, 스튜디오 시스템이 붕괴된 사례가 있었다. 이 조치는 특히 당시에 가장 큰 영화제작사였던 파라마운트를 주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이를 < 파라마운트 법>으로 불렀다. 당시 메이저 영화사들은 자체 제작시스템인 스튜디오와 이를 상영할 수 있는 자체 극장, 유통을 전담하는 조직 등 생산에서 유통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수직계열화하여 영화시장을 과점하고 있었다. 게다가 영화유통에서는 작품을 개별적으로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편을 묶어서 판매하는 블록 판매, 작품을 보지도 않았는데도 사야하는 블라인드 구입등의 불공정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부는 이런 영화의 과점경향이 공연산업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민주당 의원이었던 에마우엘 셀러도 슈버트사를 비판하였다. 트루만 대통령으로부터 독점문제에 대한 조사를 부탁받은 그는 철강, 신문, 비누, 주류 산업등의 독점을 조사하고 있었고 슈버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공연산업은 슈버트로부터 목이 졸리고 있다. 뉴욕극장의 60%, 전국의 90%가 슈버트의 통제하에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리는 결국 극장을 처분해야 했다. 6개 도시에서 12개를 처분하고 UBO와 LAB 어뮤즈먼트를 폐쇄하고 티켓관련 사업도 중단하기로 하였다. UBO는 극장리그에 소속되어 독립에이전시로 분리되었다. 사실상 예약업무가 없어져서 유명무실한 조직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반트러스트법 위반으로 기소된지 6년만에 종결(1956)되었는데,  슈버트로서는 완전한 패배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연방전부로부터 제재를 받은 첫 번째 공연회사가 되었다. 그러나 슈버트사는 이를 수용하기로 하였고, 2년간 12개의 극장을 팔았다.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슈버트는 그래도 가장 강력한 공연관련 회사로 살아남았다.
 
경영방식
슈버트는 신디케이트와 오랫동안 살벌한 싸움을 계속했다. 신디케이트에 속하지 않은 독립극장을 위한 싸움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마치 악마로부터 탄압을 받는 천사의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실제로 초반에는 그런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일차적 목적이 타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슈버트 형제들은 자기이익에 철저했고, 필요하면 적과의 동침도 서슴지 않았으며 약하다고 생각되면 가차없이 배척했고, 강자에게는 약했다. 경쟁자를 따돌리기 위해서 과감한 투자를 감행하였지만, 어느 때는 수전노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배우들을 과도하게 혹사해서 원성을 샀고, 이는 배우노조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한편 슈버트 사의 등장은 공연산업을 전문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뉴욕에 본부를 둔 신디케이트와 슈버트는 지역의 주요극장을 통제하였고, 이들은 다시 지역의 공연관계자들을 관리하면서 마치 군대처럼 계층화된 생산시스템을 갖추었다. 극단 관계자들은 본부에 늘 공연상황을 보고해야 했고 본부는 이를 근거로 극단이나 극장에 지시를 내리고 관리해 나갔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면서 가능해진 생산시스템이었다. 본부에서는 작은 지역의 상세한 공연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고 이렇게 집적된 정보들은 많은 극단을 관리하는 큰 자산이 되었다. 공연제작에서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비용을 줄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슈버트는 제작의 표준화 시스템을 도입하였고, 동시에 최대한 많이 공연할 수 있는 대량생산시스템도 도입하였다. 당시 미국에 불어닥친 포드자동차와 같은 대량생산시스템이 공연에도 적용된 것이다.  

슈버트사의 성장배경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하나는 샘의 자금조달능력이었다. 1894년부터 시라큐스의 유대인 투자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또 하나는 조직의 성격이었다. 신디케이트는 풀이나 느슨한 결합체로서 비공식적이고 친구간의 친목모임과도 같은 모임이었다. 자신의 사업체를 굳건히 지키며서 이를 기반으로 결합한 조직으로 개인들의 신뢰에 기초한 전근대적 형태의 비공식 단체였다. 그러나 슈버트사는 법률적 조직으로 구성원들 사이에는 법적인 권리와 의무가 규정되어 있었고 이를 준수할 필요가 있었다. 보다 근대적인 형태의 회사형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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