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39 미국 배우노조의 탄생(4)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39 미국 배우노조의 탄생(4)
  • 조복행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1.03.19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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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디케이트의 몰락
도금시대 (출처 : chronicle.com)
도금시대 (출처 : chronicle.com)

공연산업의 신디케이트

공연산업의 신디케이트는 미국이 처음이 아니었다. 일본 가부키에서 카르텔이 있었고, 이탈리아에서는 오페라 콘체른, 영국의 뮤직 홀에는 뮤직 홀 신디케이트가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정극 단체들이 영국에서 수입된 뮤직 홀의 공연내용을 규제하는 관련법 제정을 요구했지만 시민들의 반대로 무산된 적도 있었다. 신디케이트를 구성하는 이유는 경쟁자의 시장진입을 막기 위해(가부키), 비용절감(이탈리아 오페라 산업)을 위해, 또는 배우들의 권리투쟁에 공동대응하고 회원사들을 획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뮤직 홀)서였다.

가부키와 오페라 산업의 카르텔은 전근대적인 방식의 동업자간 모임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노동쟁의, 경영자와 노동자간의 갈등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영국의 공연산업이었다. 1907년 발생한 뮤직 홀 파업은 배우들이 비로소 자신들의 권리에 눈을 뜨고 단체행동을 벌인 근대적 형태의 노동쟁의였다. 노동조건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지고 출연료 인상요구가 강해지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신디케이트가 생겼고, 이들 사이의 갈등은 파업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갈등의 발생과 진전형식은 미국의 경우에도 거의 흡사하게 나타난다.

  - 뮤직 홀 신디케이트

영국의 뮤직홀은 18세기 후반부터 대중들의 절대적 인기를 얻었던 엔터테인먼트였다. 많은 극장이 생겨났고 경쟁은 심해졌다(뮤직 홀은 Theatre처럼 장르의 명칭이기도 하고 홀이라는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1875년에 런던에 375개의 극장이 있었고, 그 이외의 지역에 384개나 되는 극장이 성업중이었다. 그러나 뮤직 홀은 화려한 연극극장에 비해서 초라했고, 점점 높아지는 대중의 요구를 충족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를 따라잡기 위해 극장을 개보수하였지만 비용이 많이 들었고, 안전과 소방에 대한 행정규제가 강화되어 어려움을 겪게 된다. 반면에 공연은 점점 화려해져서 버라이어티한 쇼로 발전했고 제작비는 상승했다. 내용은 외설스럽고 무질서해졌으며 이로 인해 많은 사회적 비판에 직면하면서, 이에 대한 강력한 규제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1900년대 초까지 근로자와 경영자 사이에는 근로조건을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었고, 극장경영자들은 신디케이트를 구성하여 공동대응키로 한다.

뮤직 홀은 런던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많았다. 규모도 1,500석에서 5천여석에 이르는 대형 홀들이었다. 신디케이트는 런던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맨체스터와 리버풀 등 북부 잉글란드와 스코틀란드의 공업도시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지방 뮤직 홀은 신디케이트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신디케이트는 다른 신디케이트와 제휴하고 있었다. 1899년 에드워드 모스, 오스왈드 스톨, 리차드 손튼이 운영하고 있던 극장들은 연합체를 만들어 ‘모스제국’을 구성하였다. 모스와 손튼은 50여개의 극장들을 네트워크화하여 가장 큰 전국단위의 신디케이트를 조직하였고 뮤직홀 운영의 표준화에 기여하였다. 모스제국은 스코틀란드에서 출발하여 뉴캐슬, 선더랜드, 요크셔로 확장하였고 런던으로까지 진출하였다. 비교적 작은 신디케이트였던 ‘리버모어 형제들’은 뉴캐슬에서 시작하여 1900년에는 북서덜랜드, 블랙번, 브래드포드, 애버딘 등으로 확장하였고 남서쪽으로는 플리머스와 브리스톨까지 넓혀나갔다.

신디케이트는 1914년까지 뮤직홀을 지배하였다. 경영자들은 신디케이트를 구성하고 뮤직 홀의 조직, 내용과 스타일을 바꾸어나갔다. 이는 이름이 주는 통일성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 이름은 특정 홀이 어느 신디케이트의 소속임을 의미하며 각 신디케이트는 자신만의 엔터테인먼트 형식과 연극스타일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아티스트는 체인 전체를 대상으로 예약할 수 있었고, 반면 신디케이트 소유자는 표준화된 원칙에 따라 홀을 관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집중화 과정은 다양성의 부족을 초래했다. 지방에서는 지방의 뮤직 홀과 민속문화가 강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신디케이트는 이 강한 유대를 끊고 문화를 중앙집중화하고 표준화하는 문제를 낳았다.

신디케이트는 배우들과 근로조건을 놓고 대립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모스제국’의 경영자였던 오스왈드 스톨은 배우들 사이에 악명이 높았다. 배우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는 모스제국만의 일이 아니었다. 이는 결국 홀본 제국(Holborn Empire)에서의 파업으로 이어지고 이는 ‘뮤직 홀 전쟁’으로 발전한다. 영국의 뮤직 홀 파업은 공연산업 노동자가 처음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단체행동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미국에서도 유사한 과정을 거쳐 배우들의 파업이 발생하는데, 그 진행과정과 사회적 반응에서 미국과 영국은 매우 달랐다. 영국에서는 배우들의 열악한 삶을 걱정하는 지식인들이 등장하고 스타들이 하층 배우들을 배려하는 배우간의 연대와, 그들을 지원하려는 사회적 운동이 일어난다.

반면 미국 공연산업은 노사의 문제만이 아니라 많은 영역에서 전쟁이 벌어진 약육강식의 싸움터였다. 거짓과 사기, 법의 허점을 파고드는 교묘한 악덕상술들이 난무하는 무한투쟁의 장이었다. 공연신디케이트와 이를 무너뜨린 슈버트사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경쟁자를 도태시키고 배우들을 혹사했으며, 늘 소송에 의지하여 상대를 거꾸러뜨리곤 하였다.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이미 1840년대 이후, P.T.바넘때부터 가짜를 진짜로 둔갑시켜 돈을 버는 비윤리적 사업방식이 횡행하고 있었다. 대중들은 사기를 잘 알지 못했고 그래서 큰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바넘은 광고의 천재라는 칭송을 듣고 있지만 사실은 속임수의 천재였다. 그에 대한 영화는 그를 낭만화하고 있고, 그의 잔인한 비인간적 행태들은 전부 생략하고 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서 온갖 속임수를 쓴 탐욕적인 사업가였다. 그는 ‘ 인간은 속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대중을 속이고 동물이나 기형적 인물들을 착취하여 돈을 번 장사꾼이었다. 원래 엔터테인먼트 산업에는 과장과 거짓, 속임수, 선정성 등이 존재한다는 오래된 불신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과도한 경쟁과 상업주의에 기반하여 발전해 왔다. 또한 그 전개의 과정은 비도덕적이었고, 무자비한 방법으로 타자의 이익을 빼앗는 약탈적 자본주의의 세계였다.

강도남작

남북전쟁후 19세기 후반, 산업의 중앙집중화와 독점화 현상은 많은 산업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한 현상이었다. 산업의 규모가 커지고 있었지만 아직 공정경쟁에 대한 규칙이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석유, 철강 등의 중화학 공업에서부터 설탕, 술, 소금, 쇠고기 등의 기초적인 식품산업에 이르기까지 독점이나 트러스트가 있었다. 1904년의 통계에 의하면 319개의 트러스트가 5,300개의 기업을 거느리고 있었다. 예를 들면 쇠고기 트러스트는 6개의 쇠고기 포장업체들이 담합하여 가축시장을 분할하고, 쇠고기값을 높여 부당이득을 거둠으로써 서민들로부터 높은 원성을 산 카르텔이었다. 경쟁자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허위입찰을 하고, 철도업자로부터는 리베이트를 받아 챙겼다. 1900년대 초반에 그들의 매출은 무려 7억 달러를 넘었고 쇠고기 시장의 75%를 차지하고 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까지 나서서야 겨우 해결되었다.

미국에서는 특히 19세기 자본주의의 태동과정에서 산업분야의 독점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다. 마크 트웨인이 도금시대(Gilded Age)라 부른 남북전쟁후 약 20여년간, 임금은 폭등하고 일자리도 많아졌다. 임금이 1860년부터 30년간 무려 60%가 올랐고 이는 유럽이민을 부르는 기폭제가 되었다. 엥겔스의 표현에 따르면 ‘ 스스로 화들짝 놀랄 정도의 경제성장’을 경험했다. 1840년대에 발생한 아일랜드 대기근, 독일의 정정불안등이 겹쳐 1850년대부터는 이민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경제발전은 이를 더욱 촉진하였다. 특히 거대한 토지를 기반으로 한 농업은 1860년대부터 이미 기계화되기 시작해 40여년 만에 농업생산성이 400% 이상이나 높아졌고 이는 공업분야로 전이되어 급격한 경제발전의 견인차가 되었다. 미국은 1870년대 이후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임을 자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국가를 만들고 살찌운 사업가들이 있었다. 사업가들은 19세기말의 미국을 휘어잡았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에 기반한 급격한 경제성장은 많은 불평등과 불합리를 낳았다. 황금으로 도금한 것같은 공허한 경제성장기에 불공정한 경쟁과 비윤리적인 상도덕으로 노동자를 착취하여 돈을 번 많은 사업가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강도남작(Robber Baron)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경쟁을 회피하기 위해 관련기업들과 담합하거나, 동료기업들을 모아 독점적 조직을 만들거나, 경쟁자의 시장진입을 막으려고 강한 진입장벽을 치는 횡포를 부렸다. 이들은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아 횡령하였고, 거대한 땅을 무상으로 불하받았으며 흑인과 아시아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주가조작, 소송과 판사매수, 뇌물공여 등의 방법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기업가들은 오히려 혼란을 수습하고 경제를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경제력의 집중과 법인과 같은 조직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들 법인은 산업의 집중을 초래했고 나아가서는 트러스트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트러스트가 가격의 붕괴를 막고 물자의 원활한 공급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J.P.모건은 트러스트라는 말을 좋아했다. 단어의 뜻처럼 믿을 수 있는 조직이라는 것이었다. 19세기 후반에 생긴 미국의 트러스트는 매우 강고한 조직으로, 관련산업 전반을 장악했고 많은 해악을 끼쳤다. 루스벨트는 ‘ 트러스트를 원래 상태로 돌리기는 미시시피강의 홍수를 막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록펠러는 1863년 스탠다드 석유 트러스트를 결성하여 1868년에 세계 최고의 석유재벌로 부상한다. 미국내 모든 석유회사를 장악하고 자신의 울타리안에 포획함으로써 아예 경쟁회사를 없애버렸다. 이 밖에도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카네기, 수상운송과 철도사업으로 돈을 번 밴더빌트, J.P 모건, 서부와 남부의 철도사업을 독점하여 거대한 부를 축적한 리랜드 스탠포드 등이 모두 강도남작으로 분류되는 비윤리적 부자들이었다. 1890년에 제정된 셔먼 반독점법은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또 대학설립, 예술후원, 사회복지에서 적극적인 패트런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스탠포드는 많은 중국 이민자들의 희생을 통해 건설한 서부와 남부의 철도사업을 독점하여 거대한 부를 축적하였지만 아들이 죽자 아들을 추모하여 스탠포드 대학을 세웠고 밴더빌트는 밴더빌트 대학을 세웠다. 노동착취와 인종주의를 자선으로 속죄하려 한 강도남작들의 기이한 결합이었다.

공연산업에도 강도남작과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였으니, 보드빌 산업의 키스(B.F.Keith)와 알비(E.F.Albee), 슈버트가의 형제들 그리고 공연 신디케이트의 멤버들이었다.

클로와 에어랑거

마크 클로(왼쪽)와 아베 에어랑거(출처 : alamy.com)
마크 클로(왼쪽)와 아베 에어랑거(출처 : alamy.com)

신디케이트의 핵심인물은 독일계 유대인 출신의 마크 클로(Marc Klaw)와 아베 에어랑거(Abe Erlanger)였다. 이 중에서도 에어랑거는 신디케이트를 잔인한 방식으로 관리해나간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자수성가한 이민의 모델이었다. 당시의 공연계는 누구도 독일계 유대인들을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약육강식의 정글이었다. 유대인 이민은 독일계 유대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19세기초 프로이센 유대인의 70%는 떠돌이 행상이나 걸식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고, 지식인들은 차별을 받았다. 그들은 대거 이민을 택했다. 많은 유대인들이 프랑스로 이주했고 일부는 미국이민을 택했다. 1880년대에는 러시아에서 포그롬(pogrom)이라 불리우는 잔혹한 유대인 학살이 있었고, 이를 피해 많은 유대인들이 이민을 왔다. 뮤지컬과 영화로 제작된 <지붕위의 바이올린>은 포그롬을 피해 뿔뿔이 흩어지는 유대인 가족의 슬픈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1880년대 이후 10년동안 유대인이 해마다 9천명씩 뉴욕으로 이주했고 1890년대에는 연평균 3만7천명으로 급증했으며 1903년부터 1914년까지 12년 동안에는 연평균 7만6천명을 기록했다(폴 존슨, 『미국인의 역사 Ⅱ』,118).

많은 이민자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면서 공연산업에 뛰어들었고, 그 중에서도 유대인들은 높은 상업적 수완을 발휘한다. 그런 정글속에서도 에어랑거는 공연산업의 강력한 지배자로 등극한다. 사무실에는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잔뜩 걸어놓고 공연계의 황제를 꿈꾸었다. 그래서 그는 ‘공연계의 나폴레옹’으로 불렸다.

유대인 이민자들은 행상, 공장노동자 등으로 근근히 생활해 나갔고 자식들도 일찍부터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 했다. 이런 환경속에서 에어랑거가 공연산업에 뛰어든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집안에는 공연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을 가진 사람도 없었고, 당시는 배우에 대한 인식이 아주 안 좋았던 때였다. 여배우는 타락한 매춘부로, 남자배우는 도박꾼이나 범죄자로 여겨지던 때였다. 에어랑거는 어릴 때 극장에서 오페라 글라스를 나누어주는 일을 한 적이 있었고 이어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다가 다시 극장에서 안내원, 물품보관소 직원, 회계담당자, 티켓판매, 무대조감독 등을 거치면서 공연산업에 발을 들여놓는다. 이런 경험들은 나중에 신디케이트 형성에 큰 자산이 된다.

그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뉴욕으로 간다. 유니온 스퀘어는 당시 배우, 작가, 극장주등 공연관계자들이 모여서 일자리를 찾고 프로그램이나 극장예약들을 협의하는 장소였다. 에어랑거는 거기서 독일어 방언을 전문으로 하는 극단관계자를 만나 선발대의 일원으로 순회공연에 참여한다. 당시는 오늘날처럼 인터넷 등의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보통 공연 2주전에 선발대를 보내 숙박, 교통, 극장상황, 공연계약, 세트, 홍보등을 점검하도록 하였다. 특히 이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홍보였다. 커다란 풀통을 들고 다니면서 적당한 곳에 포스터를 부착했고, 때로는 불법적 공간에 부착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고 다른 공연단의 포스터를 뜯어내고 자신들의 포스터를 몰래 부착하여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지역신문과의 관계를 중시하였다. 센세이셔널한 뉴스를 만들어야 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홍보팀의 능력이었다. 슈버트사의 그레네커(C.P.Greneker)는 현지에서 채용된 홍보용역으로, 그 홍보능력이 탁월하여 나중에 본사의 홍보책임자가 되었다.

에어랑거는 작지만 터프한 싸움꾼이었다. 당시로서는 흔한 일이기는 하였지만 늘 총을 지니고 다녔고, 실제로 총을 쏘아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에어랑거가 마크 클로를 만난 것은 남부지역 순회공연을 하면서다. 그리고 곧 그들은 한 팀을 이루게 된다.

반면에 클로는 에어랑거와는 다른 엘리트였다. 클로는 공립학교를 졸업하고 책방점원, 담배판매, 복권판매 등을 하다가 루이스빌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된다. 그는 자신의 고향에 있는 레파토리 극단에서 공연관계자들을 만나서 극단운영에 대한 지식을 쌓았고, 순회공연의 메카니즘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에 대한 소식이 뉴욕 신문에 보도되고 이를 보고 찰스 프로만이 법률자문을 위해 그를 찾는다. 당시에는 작품의 표절이나 도용은 매우 흔한 일이어서 공연기획자들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브로드웨이에서 500회 이상의 공연을 하면서 공전의 인기를 얻고 있던 <헤이젤 커크(Hazel Kirke)>는 여러 곳에서 허락없이 공연되고 있었고, 이를 단속하려는 사람들을 오히려 협박하는 일도 있었다. <헤이젤 커크>는 스틸 맥카예가 쓴 코미디극으로 486회를 공연하여 당시까지의 롱런기록을 갈아치운 당시의 최고의 히트작품이었다.

에어랑거는 2년여의 고단한 순회공연을 마치고 자신의 첫 상사였던 존 엘슬러의 딸인 에피 엘슬러(Effie Ellsler)라는 스타의 매니지먼트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많은 공연관련 업무를 요청받아 혼자서 처리할 수 없을 지경이었던 클로의 일도 돕기 시작한다. 클로는 변호사로서 저작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프로만과 함께 이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프로만은 6개의 공연단을 관리하고 있었고 10여 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클로를 가장 신임하였다.

1883년에 클로는 패니 다벤포트(Fanny Davenport)라는 스타의 매니저가 된다. 그녀는 미국의 사라 베르나르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배우로, <헤이젤 커크>에도 출연한 스타였다. 빅토리엥 사르두가 베르나르를 위해 쓴 세 편의 작품의 미국공연권을 따내서 큰 돈을 벌었다. 클로는 이런 대스타와의 인연을 통해 업계의 유명인이 된다. 에피 엘슬러의 정식 매니저가 되었고, 엘슬러와의 순회공연을 성공시켰다. 이 때 에어랑거는 조셉 제퍼슨의 순회공연을 매니지먼트하고 있어서, 둘은 스타들의 순회공연을 관리하는 일이 주업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스타는 건강도 좋지 않았고 거의 은퇴상태에 있어서 이들은 보다 크고 새로운 일을 찾아야 했다.

   - 예약사무소 설립

두 사람은 1888년에 공동으로 예약사무소를 운영하기로 합의한다. 클로와 에어랑거사(Klaw & Erlanger)라는 기획사가 탄생한 것이다. K&E는 당시 최대의 기획사로서 20세기 초반에 가장 강력한 문화권력이었다. 아티스트 매니지먼트만으로는 사업이 불안정하고 수익성에 한계가 있으며 사업의 규모가 커지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사업에 도전한 것이었다. 그들은 뉴욕에 예약사무소를 차린다. 도박에 나선 것이다. 1889년에는 새로운 건물로 이사하여 규모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당시에 이미 50개 극단을 관리하였고 이에 필요한 극장과 네트워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프로만은 벌써 300여 개의 극단을 관리하고 있었다.

이들의 업무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순회공연단의 극장예약과 공연루트의 기획 또 하나는 순회공연단에 대한 프로그램제공과 관리였다. 클로와 에어랑거는 공연과 관계되는 복잡한 일들을 처리해주고 프로그램을 공급하면서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당시의 인기프로그램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수입한 외국공연물, 스펙터클한 공연, 어린이용 발레, 서커스 등이었다. 이런 작품들은 몇 시즌 동안 계속할 수 있었고, 클로와 에어랑거는 이를 통해 큰 돈을 벌었다.

1896년. 클로와 에어랑거는 네 명의 공연기획자들을 뉴욕으로 불러들였다. 서로가 가진 장점, 그 동안의 경험을 살려 보다 효율적인 예약시스템을 구축하자는 의도였다. 오랫동안 로드 매니저를 지낸 에어랑거와 프로만은 굳이 열차시각표가 없어도 공연루트를 기획할 수 있는 경험이 있었고, 지역내 서비스, 수송, 숙박등의 문제도 훤히 알고 있었다. 이런 지식들은 에어랑거의 독특한 자산이었다. 1909년 클리블랜드에서 어떤 기자가 에어랑거에게 물었다. ‘지금 로버트 만텔은 어디에 있을까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3일을 묵을 것입니다’. ‘조지 코핸George Cohan은요?’ 그러자 ‘디트로이트에서 밀워키로 가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공연현장에서의 경험은 극장예약과 공연경로를 효과적으로 짜는 큰 자산이 되었다. 그들은 숙박, 교통, 현지에서의 지원 등에 대한 노우하우를 가지고 있었다, 해안에서 해안으로 이동하는 경로, 하루 공연후 이동하는 코스, 대도시에서의 주단위 공연 등을 기획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극장 소유주와 극장 경영자등에 대한 정보도 가지고 있어서 이를 활용할 수도 있었다. 신디케이트로서는 순회도시의 주요극장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신디케이트가 장악한 첫 번째 도시는 필라델피아였다. 이는 닉슨과 짐머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처음에 33개의 일급 극장이 신디케이트에 포섭되었다. 프로만, 클로와 에어랑거가 전체조직의 예약 책임자로 일하였다.

많은 공연관계자가 유니온 스퀘어에 모여 벌이던 혼란스런 예약시스템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지역의 공연애호가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어하던 공연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극장주들은 효율적인 예약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리한 관찰자들의 눈에는 이타주의라는 외투속에 감춰진 이기주의를 읽어내고 있었다. 신디케이트의 멤버들은 극장주이자 공연기획자이기도 했고, 이는 그들의 예약과 공연경로확정에 바로 반영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극장과 공연을 우선시했다.

클로와 에어랑거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켰다. 자신들의 정책에 순응하는 사람들에게는 작품내용에 관계없이 가장 좋은 극장과 공연루트를 제공했고,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이급극장을 배정하였다. 신디케이트에 반기를 든 미니 매던 피스크에게는 <벡키 샤프Becky Sharp>라는 히트작품을 전부 이류극장에만 배정해 주었다.

많은 공연관계자들은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다. 뉴욕 모닝 저널이라는 신문은 이 싸움은 몇 년동안 숙성된 결과로서 모든 공연관계자들은 이런 사태가 올 것임을 알고 있었으며, 매우 처참한 싸움이 될 것이고, 어느 일방이나 다른 편으로 모든 돈이 몰려갈 것임도 이미 예견할 수 있었다고 비판하였다.

신디케이트의 행태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였다. 패니 다벤포트는 독점하는 자들을 절대 좌시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해리슨 그레이 피스크는 1897년 11월부터 지속적으로 신디케이트의 불공정과 독점사례들을 소개하고 비판하는 기사를 뉴욕 드라마틱 미러지에 기고하였다. 그는 미니 매던 피스크의 남편이었다. 그러자 신디케이트측에서는 뉴욕 드라마틱 미러 불매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피스크는 계속했다. 기사의 제목은 ‘ 신디케이트는 해체되어야 한다. 그들의 행태는 치졸하고 참을 수 없다.’ 그러자 신디케이트는 피스크를 제소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비판기사를 썼고, 피스크는 반신디케이트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벤허 (출처 : en.wikipedia.com)
벤허 (출처 : en.wikipedia.com)

   - 벤허

K&E는 1899년 <벤허>를 론칭했다. 1880년 류 월리스가 쓴 히트소설을 무대화한 것으로 20여년간 많은 공연기획자들이 이 작품의 저작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월리스는 이들 제안들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1899년 월리스는 K&E의 무대화 제안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원하는 추가조건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승낙하였다. K&E는 이국적인 장소, 기독교적 주제, 스릴넘치는 마차경주장면의 재현을 제안했다. 그 중에서도 특이한 것은 닐 버게스(Neil Burgess)가 제안한 스펙터클한 무대 메카니즘이었다. 극장지하에 거대한 회전드럼을 설치하여 실제의 말이 무대위에서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도록 한 스펙터클이었다. 관객들은 모두 경악하였다. 음악에서는 동양음악을 사용하고 풀 오케스트라가 반주토록 하였다. 또한 예수를 사람이 연기하지 않고 25,000촉광의 촛불조명으로 예수를 표현하였다. 좌초된 노예선과 그 구출장면도 관객들의 흥분을 자아냈다.

K&E는 이 작품에 75,000달러(오늘날의 2백만 달러 가량)를 투자했다. 그 어떤 작품보다 제작비가 많이 든 작품이었다. 도박은 보기좋게 들어맞았다. 뉴욕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불과 몇 달만에 지방공연에 나섰다. 그 규모가 서커스 못지않게 커서 2량의 특별열차를 동원하였고, 세트설치팀은 공연전에 도착하여 세트를 설치하였다. 연극사상 이만한 스펙터클은 일찍이 없었다.

K&E는 벤허를 장기공연 프로그램으로 만들었다. 20여년 동안 전국을 순회했고 가장 큰 돈벌이가 되었다. 만약 1차대전 때 정부의 열차징발이 없었다면 공연은 더 계속되었을 것이다. 벤허는 1921년 종료시까지 2천만명이 보았고 천만달러(현재 환율로 2억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당시에는 이른바 토가(Toga)소설, 토가연극이 유행하고 있었다. 토가는 로마시대에 입던 소매를 길게 내려뜨린 옷이다. 로마시대를 제재로 한 작품들을 토가소설, 토가연극으로 불렀는데 이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인기가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와 K&E는 번창하기 시작한다. <벤허>와 K.M.배리의 히트작 <작은 목사The Little Minister>, 그리고 <예수The Christ>에서 계속 돈이 들어왔다. 이들 작품들은 모두 프로만이 기획한 것이었다. 거기에 극장예약수수료, 순회공연수입등이 추가되었다. 1902년에는 런던에서 벤허공연을 추진한다.

   - 이로쿼이극장 화재

가시적 성과를 보이기 위해 극장건설에도 나선다. 1903년에 1700석의 뉴 암스테르담 극장을 착공한다. 아르 누보 스타일의 아름다운 건축으로, 오프닝 작품으로 <한여름 밤의 꿈>을 공연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시카고에서도 극장건축에 나서, 이로쿼이(Iroquois) 극장건축에 백만 달러 이상 투입하였고 이는 K&E의 자금난의 원인이 된다. 12월 30일에는 이 극장에서 K&E에 큰 시련을 안겨주는 극장화재가 발생한다. 개장한지 불과 한 달만의 일이었다. K&E는 완벽방화를 내걸었지만 불과 한 달만에 거짓임이 드러난다. 여성관객을 주요 대상으로 건축한 극장이었고, 화재당시에도 어린이 관객을 타겟으로 하는 드루리 레인의 <푸른 수염>이라는 뮤지컬을 공연하고 있어서 관객도 대부분 여성과 어린이였다. 객석이 1600석이었지만 사고당일에는 입석표까지 팔아서 2000여명 이상이 입장하였고 일부 관객은 복도에까지 앉아서 출입구를 막았다. 불은 아크 등에서 발화하여 커튼으로 옮겨 붙으면서 시작되었다. 불은 삽시간에 천정에 있는 페인트칠을 한 인화성이 강한 천으로 옮겨붙었다. 공연은 마티네(낮공연)여서 창문은 전부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출입문은 하나밖에 없었다. ‘보고 보이는’ 전통적 형식의 극장으로, 관객이 입장하면서 1층부터 2층을 거쳐 3층까지 올라가면서 보고 보이는 구조였다. 2층과 3층의 출입구는 전부 잠겨 있었다. 인터미션 시간에 몰래 좋은 자리로 이동하는 관객들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그런데 이 잠금장치(bascule lock)를 쉽게 풀 수가 없었다. 겨우 창문을 깨고 서너 개의 출구를 만들었지만 출구에 당도하는 동안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 말았다. 출구쪽에는 시체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오프닝 당시 완벽한 소방시설을 갖추었다고 광고하였지만, 소방시설은 미비하였고 출구가 잠겨있어서 6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미국 화재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피해가 난 사건이었다. 극장안은 탈출하려는 관객들의 몸부림으로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이 작품에 출연했던 에디 포이(Eddie Foy)는 ‘ 미친 동물처럼 울부짖는 소리, 신음소리, 고함소리. 반은 울음소리고 반은 절규하는 소리였다. 서로가 먼저 나가려고 밀치는 모습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고 하였다. 신문에서는 단테가 묘사한 지옥의 모습보다 더 처참한 광경이었다고 썼다.

시카고에서는 1871년에 ‘시카고 대화재’가 발생하여 300여 명이 사망한 참사가 있어서, 화재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도시였다. 시카고 시기(旗)에는 시카고를 상징하는 네 개의 별이 그려져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시카고 대화재다. 이로쿼이 극장은 화재에 대한 시카고 시민들의 공포심을 알고 있었고, 완벽한 방화시설을 갖추었다고 홍보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정반대였다. 시민들은 분노했고 클로와 에어랑거는 강한 사회적 비판에 직면하였다. 반유대인 만화까지 등장하였다. 이 화재는 신디케이트의 이미지에 악영향을 주었고, 계속 신디케이트를 괴롭혔다.

이로쿼이 극장화재(출처 : printerest.de)
이로쿼이 극장화재(출처 : printerest.de)

이로쿼이 극장 화재는 전국의 공연에까지 영향을 주어 시카고에서는 모든 극장을 6주간 폐쇄하였고 많은 지방공연이 취소되거나 연기되었으며, 뉴욕에서는 아예 입석을 없애버렸다. 유럽의 극장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공연기획자들의 수입은 줄고 비용은 계속 발생하면서 극장주와 임프레사리오들은 신디케이트에 강한 반감을 갖게 된다.

피해시민들은 K&E에 소송을 걸었다. 그러나 변호사들의 지연전술과 시카고시의 안전법규의 허점을 파고드는 전략으로 소송은 지지부진하였다. 이로쿼이 화재 이외에도 K&E는 수많은 소송에 휘말렸다. 소송을 당하면 많은 비용과 시간을 투입해야 했지만 대부분의 소송에서 승소하였다. 에어랑거의 동생이 대법원 판사였고 법관들과의 인맥, 그리고 정부인사와의 유착등으로 인한 것이었다.

   - 결별

클로와 에어랑거는 1919년 불화끝에 헤어진다. 몇 달 동안 말도 안하고 지내다가 마크 클로가 없는 틈을 타 에어랑거는 클로의 아들을 해고했다. 그러자 클로는 에어랑거가 수만 달러의 자금을 횡령했다고 비난하였고, 에어랑거는 클로가 일에 성실하지 못했다고 비난하였다. 마크 클로는 K&E에서 나와 별도의 회사를 설립한다. 그런 뒤 이번에는 슈버트사와 제휴하였다. 에어랑거 역시 독자적으로 사업을 이어나갔다.

K&E는 1차대전 전 가장 큰 공연기획사였다. 그들은 유대인이었지만 동료들은 그들의 정체성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선한 유대인들이 아니었다. 무자비한 방식으로 경쟁자를 도태시켰고, 약한 경쟁자들은 제풀에 나가 떨어졌다. 유일한 경쟁자는 슈버트사였다.

찰스 프로만

찰스 프로만(Charles Frohman)의 영향력도 클로와 에어랑거 못지않게 컸다. 에어랑거에 비해 프로만은 매우 관대한 인물이었고 많은 배우들이 그를 따랐다. 700여 편의 연극을 제작한 유능한 프로듀서이기도 하였다. 그는 극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1889년부터 공연사업을 시작하였다. 1893년 뉴욕에 엠파이어 극장을 열어 여러 해 동안 훌륭한 레파토리 극단을 운영하였고, 1896년부터는 런던으로 관심을 돌려 웨스트엔드에서도 많은 공연을 기획하였다. 극장주로서 다섯 개의 극장을 소유하기도 하였다. 공연기획자로서 그는 두 가지의 신념을 따랐다. 대중의 취향은 수시로 바뀐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스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프로만은 브로드웨이의 스타시스템을 확립한 프로듀서였다.

프로만은 1856년 오하이오 주에서 태어났다. 14살 때 뉴욕으로 와서 낮에는 학교를 다니고 저녁에 신문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나중에는 뉴욕 트리뷴으로 옮겨서 일을 하면서 공연티켓을 판매하는 일을 하였다. 1878년부터 공연제작에 관여하기 시작하였고, 1883년에 <셰난도아>의 권리를 획득하여 뉴욕에 진출한다. 1890년에 이 작품이 성공하면서 임프레사리오로서의 입지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스타 시스템은 그의 가장 중요한 흥행방식으로, 마담 모스, 에드나 메이, 에델 배리모어, 빌 버그 등이 그가 배출한 스타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만들어낸 가장 유명한 스타는 영국의 폴린 체이스였다. 1904년에 제작한 <피터 팬>은 최고의 히트작으로 12월 런던에서 첫 공연을 하였다. 제임스 배리(James Barrie)의 작품인데 어떤 프로듀서도 이를 연극으로 제작하려 하지 않았다. 동화로서 새로운 무대효과를 도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라이온 킹>에 의아해했던 디즈니 직원들과 유사한 반응들이었다. 프로만은 피터 팬역을 여배우 모드 아담스에게 맡겼고 1905년 뉴욕 엠파이어 극장에서 공연하였다. 주인공을 여성에게 맡긴다는 생각을 한 건 런던에서였다. 만약 주인공을 소년이 맡는다면 다른 출연자들은 그보다 더 어려야 하고, 당시 14세 미만의 어린이들의 고용을 금지하는 영국법에 저촉되기 때문이었다. 영국에서서는 1850년대부터 판토마임의 남자주인공을 여성이 맡는 전통이 있었다. 이 전통은 뮤직 홀과 벌레스크 등으로 확대되었다. 여성이 남성역할을 하는 사례는 점점 줄어들기는 했지만 20세기에 바지역할(Breech Role)은 관객을 유인하는 한 전략이기도 했다.

<피터 팬>은 아담스, 배리와 프로만에게 큰 이익을 안겨주었다. 런던에서 1400여 회를 공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고 1906년부터 1914년까지 순회공연을 한 폴린 체이스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롤스 로이스를 굴리고 있었다. 프로만은 미국연극에 대해 걱정하였다. 스타시스템이 관객으로 하여금 점점 스타의존성을 강화하고 내용은 소홀히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냉철한 사업가이도 했지만 공연에는 많은 돈을 썼다. 그의 공적중의 하나는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를 잇는 가교역할이었다. 작가, 배우, 디자이너 등의 교류를 도왔다. 그는 영국을 매우 좋아했는데, 특히 영국의 비상업적 풍토를 좋아했다. 위대한 영국의 작품을 미국에 수입한 걸 큰 공적으로 여겼다.

그는 위트와 부끄러움이 많았다. 절대로 호화식당에서 식사하지 않았고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 빅토리아 시대에 노동자들을 가르켜 ‘위대한 씻지 않는 사람들 great unwashed’라는 풍자가 있었는데 프로만은 ‘위대한 사진찍지 않는 사람 great unphotographed’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가 남긴 사진은 불과 10여 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미래의 미국연극은 멜로드라마, 피비린내나는 잔혹한 연극이 유행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연극에 대한 그의 태도는 ‘최면’상태에 있는 것 같았다. 늘 대본을 보고 있었고 세트와 의상을 생각했으며 배우들의 처지를 걱정했다. 그는 배우들을 어린애처럼 다루었다. 25년간 그에게 반기를 든 배우는 패트릭 캠벨이라는 배우 하나뿐이었다. 그의 공연 제작방식은 배우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고 정작 내용과 질에 대해서는 둔감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진지한 연극보다는 가벼운 연극을 선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도 역시 신디케이트의 멤버로서, 신디케이트의 사업방식에 동조한 무자비한 사업가라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의 공연시장은 침체되기 시작한다. 많은 극장들이 문을 닫았고 흥행은 어려웠다. 그의 건강도 좋지 않았다. 1915년 그는 루지타니아 호를 타고 런던으로 향했다. 당시 주미 독일대사관에서는 루지타니아호가 영국선박이니 주의하라는 경고를 내렸다고 하는데 프로만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출발했다. 그는 류마티스를 앓고 있어서 거동이 불편하였고 늘 지팡이에 의존해야 했다. 지팡이를 마누라라고 불렀다. 루지타니아호는 독일함정으로부터 어뢰를 맞아 침몰했고 프로만은 시가를 피면서 배에서 최후를 맞는다.

신디케이트의 몰락

신디케이트는 권리와 의무관계가 명확한 법률조직이 아니어서 멤버들은 자신들의 사업이 우선이었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에 공동대처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이익과 손해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닉슨은 다른 신디케이트 멤버들 몰래 슈버트사와 내통하기도 했고, 슈버트사는 이를 이용했다. 이런 비공식적인 느슨한 조직은 영속성을 가지기 어려웠다.

극장을 확보하는 일은 슈버트사로서는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신디케이트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들은 전쟁을 시작했다. 전국의 극장을 우군화하는 일과, 새로운 극장을 건립하는 일은 사업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한 중요한 과제였다. 곳곳에 극장을 신축했고, 기존의 극장들은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는 극장의 과잉과 콘텐츠의 부족으로 이어진다. 신디케이트는 1908년경부터 운영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다. 많은 극장을 통제하려면 공연스케쥴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우수한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했지만 점점 콘텐츠 부족에 시달리게 되고, 이는 순회공연의 차질로 이어졌다. 극장은 많고 콘텐츠는 부족한 악순환에 빠지게 된 것이다. 회원사 극장들을 관리하기도 힘들어졌다. 그러자 극장주와 임프레사리오로부터 불만이 터져나왔고, 이탈자가 생겼다.

또한 제작비와 순회공연비용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공연비용은 늘 상승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관객들은 입장료가 비싸다고 불평하였다. 당시 연극입장료는 25센트였고 영화와 보드빌 입장료는 1니켈에 지나지 않았다. 연극이 5배나 비쌌던 것이다. 게다가 배우들은 개런티의 인상을 요구했고 이급배우들도 적정한 개런티를 요구했으며 무대용역들은 ‘ 연극무대 종사자 국제연합회’라는 국제조직에 가입하여 권리투쟁에 나섰다. 철도요금도 지속적으로 상승했는데 지방공연의 수입은 교통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극단으로서도 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극장이 다 수익을 내는 것은 아니어서, 경영이 어려운 극장은 다른 극장의 수입으로 보전해주어야 했다. 하드웨어의 건설과 관리비용은 하얀 코끼리(white elephant)라고 불리는 공연산업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신디케이트는 이로 인해 몰락이 빨라졌다. 신디케이트의 멤버들은 자체자금과 수익금으로 재투자를 하였지만, 곳곳에서 발생하는 누수로 인해 경영은 점점 어려워져갔다. 순회공연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1910년에는 ‘전국 극장주 연합회’가 결성되고 1,200여개의 독립극장들이 여기에 참여하여 신디케이트에 대항한다. 이 연합회의 결성은 신디케이트 몰락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배우들의 이탈도 계속되었다. 신디케이트는 서서히 힘을 잃어갔고, 점점 유명무실한 조직으로 전락한다.

신디케이트는 공연의 모든 것을 독점했던 절대권력이었다. 이들을 통제할 어떤 제도도 없었다. 극장과 배우를 손아귀에 넣고 공연관계자들을 자신들의 발아래에 엎드리게 하였다. 처음의 선한 의도와는 달리 권력을 가진 신디케이트는 리바이어던으로 변해갔다. 그러자 배우들이 저항했고 언론이 비판에 가세했다. 그러나 초기에는 그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조직화가 되지 않았고, 이를 끌고 나갈 리더쉽도 없었다. 이 때 슈버트의 형제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들은 신디케이트와의 ‘공연전쟁’(Theatrical Wars)을 시작한다. 불과 20대에 지나지 않았던 이들과 노회한 신디케이트의 싸움은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연상케 했지만 결국 신디케이트는 서서히 몰락한다. 그러나 멤버들의 개별 사업체는 사업을 지속하였다. 슈버트사와 K&E의 공연전쟁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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