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1)-포스트코로나 시대, 고도를 기다리며
[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1)-포스트코로나 시대, 고도를 기다리며
  • 김윤정 무용가
  • 승인 2021.04.20 2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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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를 바라보며 드는 단상들

재독 무용가 김윤정. 뒤셀도르프 (사진=김윤정)
재독 무용가 김윤정. 프랭크 게리(Frank Gehry) 건축물 앞에서(사진=김윤정)

*편집자주 = 오늘부터 재독 안무가 김윤정의 칼럼을 월 2-3회 간격으로 싣습니다. ‘철학하는 무용가’ ‘사유하는 예술가’로 불리는 김윤정은 한국에서 태어나 살았던 날들보다 독일에서 살아온 시간이 더 길어지려는 요즘에 이르러 과거에 비해 한결 여유를 갖고 자신의 삶과 예술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합니다.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또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보고 느꼈던 이야기들을 편안하고 자유롭게 풀어갈 것입니다. 그에게 공연예술은 움직이는 미술, 움직이는 문학, 철학, 건축입니다. 공연예술가의 눈으로 또는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펜으로 춤을 추듯 써보고 싶다는군요. 기대됩니다.

[더프리뷰=뒤셀도르프] 서울에서 창작산실 선정작 <그런데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6개월만에 독일로 돌아와 보니 유럽은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코로나 악화로 록다운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국제선을 타고 독일에 입국하는 사람으로서 자가격리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알아서 각자 하려니 하는 상황들이 한국에 입국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독일은 벌써 몇 달 째 슈퍼마켓, 베이커리를 제외한 상점들은 문을 다 닫아야 하고 레스토랑, 카페는 테이크 아웃만 가능한 상황이다.

텅 빈 구시가지(사진=김윤정)
텅 빈 뒤셀도르프 구시가지(사진=김윤정)

친한 친구가 살고 있는 파리는 독일보다 더 심각해 보인다. 저녁 일곱시 이후로는 통행이 금지된다며 통행 직전의 거리 사진을 보내온 걸 보면 어찌나 유령도시 같은지 믿기지 않는 상황들이다. 각자 사는 곳에서 40km 이상은 갈 수가 없다고 한다. 1년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는 코비드 팬데믹에 지쳐가는 사람들은 각 나라의 총리나 대통령 담화가 있을 때마다 귀 기울이며 희망을 가져 보지만 좀처럼 봉쇄정책은 풀리질 않고 계속 연장 중이다. 그런데 이런 정책에도 확진자 수는 늘어가고 있으니 경제 악화를 불러일으킬 봉쇄정책이 맞기는 한 것인지 의심이 가지만 딱히 특별한 수도 없어 보인다.

휴관중인 뒤셀도르프 미술관(사진=김윤정)
휴관중인 뒤셀도르프 미술관(사진=김윤정)

고도를 기다리며

나는 작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특히나 컨템포러리 춤을 추고 만드는 작가로서, 우리가 어떤 시대적 상황에 놓여있고 또 어떻게 현실적 문제들을 예술로 풀어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된다. 요즘같은 팬데믹 상황들을 보면서 나는 문득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떠올린다. 이렇게 전 세계가 간절히 같은 마음으로 무언가를 기다리던 적이 있었던가? 이 모든 현상이 마치 ‘현대판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한 편의 부조리극을 보는 것 같다. 불과 1년 사이에 뉴노멀, 비대면, 자가격리, 재난지원금, 록다운, 셧다운, 사회적 거리두기 같은 신종어(?)들이 일상어가 되어가는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과연 우리 모두가 그토록 염원하는 기다림의 실체는 무엇일까? 1953년 초연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보여지는 고도가 내일이면 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미래지향적인 기다림을 하고 있다면, 현대사회에서는 코로나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과거지향적 기다림을 하고 있다. 지나간 시간과 역사는 되돌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라인강변의 거리두기 써클안에 모인 사람들(사진=김윤정)
라인강변의 거리두기 서클 안에 모인 사람들(사진=김윤정)

부조리란 이성을 통해 인간중심적 사고가 부여했던 의미가 무너지면서 세계와 인간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심연으로 가로놓이게 된 단절을 뜻하는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인간이 더 이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무언가 뚜렷하지 않고 늘 상황에 따라 바뀌어버리는, 목적이나 이상이 불투명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은 부조리할 수 밖에 없다. ‘고도’라는 것을 우리는 만져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고 그것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지만 죽는 날까지 기다림은 계속된다. 그런 우리의 반복된 삶이 어리석다 할지라도 비극적 인식, 인간의 절망, 그러나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묻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삶의 의미를 잃지 않으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기도 하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면 그 기다림은 언제부터였는지 알 길이 없을 정도로 아주 오래 전부터 시작된 듯하다.

오랜 시간 습관이 되어버린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죽이기 위해 지칠대로 지쳐있는 그들은 온갖 노력을 다 해본다.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기 위하여, 여전히 살아있음을 실감하기 위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서로 질문하기, 되받기, 욕하기, 운동하기, 장난하고 춤추기, 역할놀이 하기 등등, 이 모든 노력은 고도가 오면 기다림이 끝난다는 희망 속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기다림의 한계가 왔을 때 나타나는 것은 고도가 아니라 고도의 전갈을 알리는 소년이다.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혼란스러운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그것은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삶을 지배하는 고통을 잊기 위한 유일한 행위 또는 의식이 고도를 기다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언제 어떻게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고도를 기다리는 그 순간들인 것이다.

텅 비어버린 헬싱키 공항 모습. 끝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사진=김윤정)
텅 비어버린 헬싱키 공항 모습. 끝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마음이 이럴까(사진=김윤정)

나는 사상 초유의 사태, 온 세계가 함께 겪고 있는 팬데믹 상황에서 예외일 수 없는 동시대인 들을 바라보면서, 또 그 현상들을 경험하면서, 안무가로서 작가로서 작품의 영감을 받는다. 인간의 삶에 본질적, 철학적인 메시지가 강하게 묻어 나오는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팬데믹 상황에서 바라보는, 또 다른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현대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작품으로 풀어보고 싶다.

또다른 고도를 기다리는 현대인들

전 세계가 시간이 정지한 듯 기다리고 있는 이 시간과 갇혀 있는 공간 안에서 묻어 나오는 공간적, 시간적 상황들을 무용언어로 재해석하여 절망과 불안 속에서도 막연한 기대의 기다림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이야기를 표현해 보고 싶다. 기다림은 그 자체로서 삶의 존재이유가 되어가고 있지만 희극 속의 비극, 비극 속의 희극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렇게 떠오르는 영감 속에 아직은 나의 머리 속에서만 존재하지만 새롭게 하고 싶은 작품은 베케트적이면서도 또 전혀 베케트적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대 베케트의 고도는 ‘지금 그리고 여기’라는 공간에 갇혀 있을지라도 내일이면 올지도 모를 습관적이지만 미래지향적인 능동적 기다림을 하고 있었다면, 현대인들의 고도는 코로나 이전 시대의 일상을 돌려받고자 하는 또는 이전 시대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과거지향적인 수동적 기다림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일상을 더이상 예측할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예측이 점점 요원해지는 이 상상은 끊임없이 현재로 돌아올 것이다. 어차피 실존은 끝날 수 없는 것이며 영원히 완수될 수 없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는 끊임없이 서로를 반영한다. 그러나 미래에는 실존이 결핍되어 있고 그런 과거와 같은 미래를 돌려받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은 항상 현실을 출발점으로 삼음으로써만 가능하다. 일상이 되어버린 기다림의 시간들에 실존의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들 스스로의 존재방식을 찾아가는 여정을 작품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

인간은 기다리는 존재인지도 모른다(사진=김윤정)
인간은 기다리는 존재인지도 모른다(사진=김윤정)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포기해야 하는 공통의 절망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고도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들로 시작되는 작품을 말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1년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는 팬데믹의 지금 세상은 고정되어버린 시간들이 쌓이는 공간이 될 것이다. 무대는 현대인들의 통로가 없는 현재의 공간이 될 것이며 그 무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고도의 부재’의 현존만이 남을 것이다.

‘무대에서 기다린다’의 ‘기다린다’는 것은 ‘살고 있다’와 동격일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 그 자력의 정체는 바로 삶 자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살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고 탈출이 불가능한 삶, 갇힌 공간으로서의 삶의 양식이 기다림이 되는 것이다. 미래의 전개가 불가능한 현재진행형의 공간, 무대 실현화를 위한 공간을 그리고 있노라면 여러 극적인 단상들이 머리 속으로 끊이지 않고 밀려든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장면(벨기에 극단 앙상블 레포렐로) (c)Ensemble Leporello(출처=wiki commons)

나는 컨템포러리 춤을 작품으로 무대에 올리는 작가로서 우리는 어떤 시대적 상황에 놓여 있고 이 시대가 어떤 지점에 와 있는지를 관찰하고 자각해야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시작하기 이전에 콘셉트를 세우고 발전시키는 과정이 그래서 나에겐 가장 중요하다. 어차피 추상적인 움직임과 이미지로 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명확한 언어(주제)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이미지가 먼저냐 단어가 먼저냐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지 또는 사물이 있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우리 머릿속에 ‘북두칠성’ 이라는 단어의 개념이 없다면 밤하늘의 별들은 그냥 별들이지 그 별자리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일화가 있는데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당시 원주민들에겐 그 커다란 배가 보이질 않았다고 한다. 배라는 개념의 말도 없었고 그런 큰 배를 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는 인식되질 않았던 것이다. 인식하고 있어야 보이고 떠오르고 창작하는 데 원동력이 된다. 코로나 시대에 한국과 유럽을 오가며 보고 느껴지는 이 모든 상황들이 나에게는 예술로서 올려지는 무대 위의 작품을 생각하는 데 큰 영향을 준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작품과는 상관없이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새롭게 깨닫는 것들도 있다. 아니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늘 잔재해 있었지만 간과했던 문제들이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표면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국가적, 사회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성격도 평소에 드러나지 않던 성향들이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극도의 예민함과 불안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구시가지 바닥의 거리두기 싸인(사진=김윤정)
뒤셀도르프 구시가지 바닥의 거리두기 표식(사진=김윤정)

슬라보예 지젝, 유발 하라리, 마이클 샌델

나는 팬데믹 사태 이후 각계각층의 사람들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증명되지 않은 수많은 정보들, 의견들을 듣고 보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에게 울림을 주었던 세 사람(슬라보예 지젝, 유발 하라리, 마이클 샌델)의 의견에 깊게 공감하기에 그들의 생각을 전하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큰 일이 벌어진 게 비극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이 변했다는 게 비극이고 더 이상 원하는 것을 꿈꾸고 생각할 수 있는 안정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게 이 시대의 비극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 인류가 그동안 만들어온 시스템의 한계를 드러내며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의 무지와 착각을 깨달아야 한다고 한다. 어찌보면 우리가 싸워야 하는 대상은 코로나 바이러스 자체가 아니라 사회적인 시스템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유발 하라리의 지적처럼 이제는 지구 어느 곳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먼 나라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문제가 어디서 발생하더라도 세계가 더욱 긴밀히 공유하고 연대하며 풀어나가야 하는 공동의 과제인 것이다.

아울러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마이클 샌델의 관점도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된다. 전 세계가 코로나 전염의 두려움으로 격리 속에 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다니는 배달원들, 청소원들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과연 그들의 노동임금이 하이칼라 직장인들보다 작아야 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지식인들의 성찰들은 참으로 울림 있다. 어떤 재앙도 완벽하게 다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부디 우리 모두가 이번 팬데믹을 겪으며 새로이 깨닫고 발전하고 성숙해지는 시간들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김윤정은 어떤 주의, 이즘, 장르에도 속하지 않고 아웃사이더, 세계인으로 살면서 경계를 넘나들며 춤추고 작업하는 예술가이다. 그에게 공연예술은 움직이는 미술, 문학, 철학, 건축이다. 이화여대 대학원, 네덜란드 ArtEz(EDDC) 예술대학 디플롬. 독일 NRW(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정부 해외연수(뉴욕 view point) 지원작가 선정,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올해의 예술상(닻을 내리다), <몸>지 무용예술상 작품상(베케트의 방), 한국춤비평가협회 작품상(Inter-View) 수상. 현재 yjkdance project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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