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발레블랑 40년 최장수 회원 조윤라
[인터뷰] 발레블랑 40년 최장수 회원 조윤라
  • 이종호 기자
  • 승인 2021.05.10 16: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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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블랑은 한국발레 발전사의 징검다리"
바 없으면 벽이라도 잡고 몸 푸는 연습벌레

발레 무용가 조윤라
발레 무용가 조윤라 (사진제공=조윤라)

[더프리뷰=서울] 이종호 기자 = 발레 무용가 조윤라는 올봄 유난히 바쁜 시간을 보냈다. 정년퇴직 이후의 한가로움을 즐기던 그였지만 4월 초 <내 마음의 수채화>로 춤작가12인전 출연에 이어 4월 10-11일 있었던 발레블랑 창단 40주년 기념공연을 진두지휘하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조윤라는 발레블랑의 산 역사다. 3-4대 회장 역임을 포함, 41년째 최장수 회원인 것은 물론이고, 현장에서도 초기부터 지금까지 발레블랑의 대소사를 이끌어왔다. 창단 40주년 기념공연을 전후해 그와 몇 차례 만나 옛날 얘기를 나누다보니 자연스레 발레블랑의 과거 활동과 무용사적 의미가 개괄됐다.

발레블랑은 1980년 가을 창단됐지만 창단공연은 이듬해 6월(국립극장 소극장, 현 달오름극장)에 가졌으니 올해를 40주년으로 봐도 되겠다.

이화여대 무용과 홍정희 교수의 제자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발레블랑은 무용사적 의미가 깊은 ’백색 발레(Ballet Blanc)‘를 기치로 내걸고 초창기에는 매년 정기공연 1회, 젊은 회원들의 창작공연 1회를 열었다. <발레블랑>이라는 회지도 연 2회씩이나 발간했다.

발레블랑 제5회 작품발표회 포스터
발레블랑 제5회 작품발표회 포스터(1985년)

게다가 학술적 측면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신념에서 1982년에는 발레연구학회까지 만들었다. 발레블랑의 자매단체 격인데 이들은 논문집만 낸 게 아니라 이듬해 창단 공연까지 별도로 했다. 조윤라가 현재 이 학회의 대표를 맡고 있다.

발레블랑의 창단은 2년 여 앞서부터 육완순 컨템포러리무용단이 수유리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정기공연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친 데서 자극 받은 측면이 있다. 현대무용은 물론 한국무용까지도 전통이나 신무용에서 본격 창작으로 가는 경향이 점차 가시화하던 시절에 발레만 고전에 머물 수는 없었을 터. 게다가 80년대는 동문무용단의 출범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현대무용 쪽에서는 컨템포러리무용단과는 별개로 조은미(현 이화여대 교수)의 탐 현대무용단이 발레블랑과 같은 해에 출발을 알렸다.

발레블랑 '블루'(조윤라)(제공=발레블랑)
발레블랑 <블루> 조윤라 안무 (사진제공=발레블랑)

홍정희 교수는 발레블랑 단원들과 함께 지방에 가서 ’공연봉사‘를 하기도 하고 당시 공간소극장에서 매월 열리던 ’창작발레의 밤‘ 프로그램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이후 1990년대 들어서는 상계동 미도파백화점 공연장에서도 정기공연을 갖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지만 한편으로는 발레 공연에 필요한 남자 무용수의 부족, 우리 발레계 전반의 취약점인 창작력 빈곤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발레는 대체로 대형 고전발레 아니면 창작발레를 해야 하는데 일개 대학동문 발레단으로서는 ’규모의 한계’가 불가피했고, 이로 인해 발레블랑 40년 역사에서 후반기로 들어서면서 다소 부진해졌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김정은 작품(제공=발레블랑)
김정은 안무 <Life is like a box of chocolates> (사진제공=발레블랑)

 

최장수 회원의 감회(?)

40주년 기념공연을 준비중이던 조윤라를 잠깐 만났다. 1985년이던가, 그가 발레블랑 회장이 됐을 때 함께 만나 반포(압구정동?)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누던 기억이 났다. 신진 평론가와 막 단체의 대표로 뽑힌 의욕 넘치는 무용가가 자정을 넘겨가며 무슨 얘기를 그리도 열심히 했는지는 다 잊어버렸다. 둘 다 의욕이 넘쳤으리라. 그리고 현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현실이고...

찻집에 자리잡고 앉자마자 ’최장수 회원‘으로서 감회가 남다르겠네요, 했더니 봇물 터지듯 말이 쏟아져 나왔다.

발레 무용가 조윤라
발레 무용가 조윤라 (사진제공=조윤라)

“네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어요. 사실 1984년 최초의 본격적 민간 직업발레단인 유니버설 발레(UBC)의 출현과 1996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개원이라는 두 사건이 한국 발레 발전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그런 큰 사건들에 비하면 발레블랑은 소박한 존재이지요. 하지만 그 이전의 국내 발레 수준을 감안한다면 발레블랑은 한국 발레의 본격적 발전을 이끌어내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나도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국립발레단이 생긴 것이 1972년(정확히는 국립무용단에서 분리독립)이고 <백조의 호수> 전막을 초연한 것이 1977년이다. 대학을 갓졸업하고 기자 생활을 하던 나는 당시 국립극장 홍보담당자의 흥분된 목소리를 아직도 기억한다. “대한민국에서도 드디어 <백조의 호수> ’전막‘을 공연합니다! 크게 써주세요!”

발레블랑 공연(백연)(제공=발레블랑)
백연 안무 <dot-line-light> (사진제공=발레블랑)

 

그러므로 일개 동문발레단에서 <파키타> <돈키호테> <라 실피드> 같은 대형 클래식 발레의 발췌공연(비록 전막공연은 아니지만)을 만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창작발레까지 정력적으로 제작했다는 사실은 결코 과소평가할 일이 아닌 것이다.

나로서는 한국 발레발전사의 결정적 모멘텀으로 조윤라가 언급한 두 사건 외에 국립발레단의 독립창단, 그리고 1990년 초반부터 본격화한 러시아 발레와의 교류(김지영과 김주원 등을 만들어낸)를 추가하고 싶다. 이런 전반적 과정에서 발레블랑은, 마치 한국무용 분야에서 배명균 등 일부 탁월한 안무가들이 신무용에서 본격 창작무용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를 만들었듯, 한국 발레의 본격 발전을 위한 가교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발레의 창작력이 현대무용이나 한국무용에 비해 저조한 건 사실이지만 그런 속에서도 발레블랑은 상당수의 안무가를 배출했다. 명석한 두뇌에 안무력과 감수성이 뛰어난 김나영을 비롯해 안윤희, 김선아, 이고은(현 발레블랑 회장), 문신하 등등, 그리고 이번 40주년 기념공연에 신작을 올린 김정은 탁지현 이지혜 백연 이해니 등도 차세대 실력파 기대주다.

조윤라는 이들의 대선배로서 동문무용단의 한계를 안타깝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대형 단체로 들어가거나, 일자리가 많고 수입이 보장되는 교육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발레블랑의 활동은 과거에 비해 다소 조용해졌고, 그러다보니 각종 창작지원금 혜택도 다른 단체들에 비해 적게 받는 편이다.

발레블랑 공연(이지혜)(제공=발레블랑)
이지혜 안무 <피워내는> (사진제공=발레블랑)

 

“화장실 벽이라도 잡고 연습해야죠“

발레계에서 조윤라는 상상초월의 체력과 지독한 연습으로 유명하다. 교수가 되기 전까진 당연히 매일 훈련했고, 1998년 9월부터 2020년 8월까지 22년간 충남대 교수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틈만 나면 혼자 연습을 했단다. 그전에 부산대, 경성대 등 타지역 대학들에 출강할 때는 서울서 오고가는 데 장시간이 소요되는 탓에 따로 연습시간을 내기가 어려워 새벽 4시에 연습실로 나간 적도 많았다.

”바가 없으면 벽을 잡고라도 했지요. 해외여행중에는 화장실에서라도 연습을 합니다. 여행용 트렁크엔 당연히 연습복이 들어가 있구요. 안하면 불안해요. 오죽하면 안은미가 ’언니 혹시 정신병 아냐‘ 하고 놀렸겠어요. 어쨌든 그 덕분에 버텨온 것같아요. 집착은 아니구요, 하여간 연습하고 나면 행복해요.“

발레 무용수로서는 고령에 속하는 그이지만 체력은 말할 것도 없고, 턴아웃 좋고 발등 좋고 무릎도 안나오고, ’낙지‘라고 불릴 정도의 유연성 등등, 아직도 젊은 무용수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다. 4월 초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열렸던 현대춤작가12인전 무대에서도 조윤라는 예의 힘과 기술력을 100% 과시했다.

그런 조윤라가 요즘은 아주 피곤하면 연습을 건너뛸 때도 있단다!

조윤라는 발레의 기초를 일본에서 배웠다. 원래는 이화여대 졸업 후 미국에 갈 생각이었는데 홍정희 교수가 일본의 타니 모모코발레단을 다녀오더니 강추를 거듭, 조윤라는 1978년 8월 도쿄로 떠나 만 2년간 모모코발레단 연수단원 자격으로 그곳에 있었다. 나중에 한국에 와서 일하게 된 로이 토바이어스도 거기서 만났다고.

발레블랑 '아가'(신은경)(제공=발레블랑)
홍정희 <아가> (재안무 신은경) (사진제공=발레블랑)

”일본인들은 체격 조건이 나쁘다보니 기본기에 더욱 치중하더군요. 저도 거기서 모든 걸 배운 것같습니다.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아야 해요.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튼튼한 기본이 필수죠.

조윤라에게는 남자 제자들이 많다. 와이즈발레단의 김길용과 홍성욱을 비롯해 정형일 박태희 유장일 김형민 등 쟁쟁한 발레리노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발레계에서 전반적으로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편안하고 굴곡 없는 그의 품성 덕분일 터. 하지만 그에게도 인간관계의 상처가 없지는 않다.

“발레계가 좀더 단합했으면“

”1990년대 만들어 활동했던 발레20 같은 단체가 요즘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당시의 풍토에서는 이례적으로 출신 학교의 울타리를 넘어 발레계의 화합을 보여준 아름다운 사례였지요. 박인자 최성이 조윤라 전홍조 서미숙 김긍수 (고)김종훈 등등. 공연도 함께하고 고민도 서로 털어놓고 참 좋았어요. 이후 다들 발레계의 중요한 인물들이 됐지요.“

하긴 발레인들은 무용계 내에서도 워낙 의가 좋아 ’우리 발레‘라는 말을 자주 쓰곤 했다. 한데 언젠가부터 ’우리 발레‘가 없어지고 ’니네 발레‘가 됐다. 명분 없는 싸움과 과도한 경쟁에 몰두하는 인상을 준다. 조윤라도 4-5년 전 한국발레협회 이사장 선거에 나갔다가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당선이냐 낙선이냐를 떠나 예의와 원칙이 있어야 하는데 언제 이렇게 발레계가 삭막해졌는지 서글프다고 했다.

”경선을 하지 말고 과거처럼 추대로 회장을 뽑으면 좋겠어요. 발레협회 회장이 무슨 대단한 벼슬이라고, 사람들 관계만 망쳐놓고...게다가 이해관계와 파벌에 따라 말도 안되는 사람에게 상을 주질 않나, 여기도 진영논리가 판을 칩니다. 암울해요.“ 조윤라 교수님, 그게 어디 발레계 뿐인가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아름다운 발레까지 좀먹고 있는 모양이네요.

발레 무용가 조윤라
발레 무용가 조윤라 (사진제공=조윤라)

발레계 풍토가 예전처럼 서로 보듬어주고 아껴주는 가족적 분위기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힘들고 보람있게 40년 역사를 기록해온 발레블랑이 전환기를 맞아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 그의 두 가지 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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