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42 미국 배우노조의 탄생(7)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42 미국 배우노조의 탄생(7)
  • 조복행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1.05.10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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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노조의 탄생

1919, 배우노조의 파업(출처 : en.wikipedia.org)
1919, 배우노조의 파업(출처 : en.wikipedia.org)

배우의 직업적 특성은 극단적 불규칙성이다. 부정기적인 일거리, 불규칙한 작업시간, 적은 일거리를 놓고 벌이는 경쟁, 저임 등에 시달리면서 늘 실업의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불안정한 직업이다. 그렇다고 오늘을 잘 견디면 밝은 미래가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늘 그랬다. 그럼에도 배우들은 사용자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배우들은 일반 직종과 달리 결집력이 약하다고 말한다. 노조는 모든 조합원들의 평등을 기초로 해야 하지만 배우는 그렇지 않다. 배우들은 다른 배우들이 나와 동등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스타배우와 엑스트라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고, 그들 사이에는 이기주의와 질투가 작용한다. 배우들의 ‘개인주의’는 자신의 취향을 집단에 종속시키려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배우는 예술가라는 인식이 강해서, 노조를 결성하거나 파업을 하면 일반노동자와 같은 취급을 받기 때문에 단체행동에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경우가 많다.

연극은 공급자의 시장이다. 소수의 스타를 제외하고는 늘 일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한다. 공급자들도 늘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다. 단체행동이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배우들은 또한 이미지에 민감하다. 대중들의 인기를 먹고사는 사람들이 점잖지 못하게 누군가와 싸우는 모습을 보이는 건 볼썽사납다 . 그리고 같이 창작활동을 계속해야 할 공급자들과 대립하는 건 장기적으로는 불리할 수 있다.

그러나 배우들도 권리를 침해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투쟁에 나섰다. 그들도 노동자이고 한계상황에 내몰렸을 때는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다. 외부의 적대적 환경에 맞설 때는 스타와 엑스트라의 차이도 사라진다. 배우들이 권리투쟁에 나서게 된 데는 몇 가지의 내부적 요인과 환경변화가 있었다. 다른 어떤 예술장르보다도 연극은 집단적 작업이 많고, 때로는 집단행동에 의해 해결해야 할 일들이 생긴다. 또한 배우들은 상당기간 같이 어깨를 부딪히면서 동고동락하는 ‘신체적 동시성’에 의해 강한 유대감이 생긴다. 일시적인 ‘확장된 가족’이 되는 것이다. 배우들 사이에는 등급의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고난에 대처하는 동질성이 생기기도 한다. 협상에 의한 합리적 해결이 어려울 때, 사용자들이 노동자들을 기만할 때 그들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파업이었다. 단체행동은 노동자의 중요한 권리이자 힘이다.

배우들의 권리투쟁에는 극단운영시스템의 변화도 영향을 미쳤다. 과거의 스톡 캄퍼니(레파토리 캄퍼니)체제하에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문이나 가족단위의 구성이 많아서 권리투쟁에 소극적이었다. 영국의 경우에도 지방에 산재해 있던 스톡 캄퍼니들은 가문과 가족중심의 극단들이 많았고, 일본 가부키도 몇 대씩 내려오는 가문의 예술이었다. 배우의 캐스팅은 연기능력보다는 연고주의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들은 서로 잘 아는 작은 지역내의 사람들이었다. 1837년에 헤이마켓 극장의 액터 매니저였던 벤 웹스터는 여동생 클라라와 남동생을 댄서로 출연시켰고, 조카는 어린 신동으로 둔갑시켰으며, 아들은 배우로 또 다른 남동생은 무대감독으로 기용하였다(The Rise of Victorian Actor, p70). 다른 극단들도 유사했는데, 특히 도시규모가 작은 지방에서는 이런 상황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배우들의 단체행동은 단원구성의 다양화, 스톡 캄퍼니로부터 컴비네이션 캄퍼니로의 전환, 극단의 상업화와 연관이 있다.

배우들의 권리투쟁은 19세기 후반에 시작되는데, 이 때는 인권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이 강해지기 시작한 때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으로 생긴 수많은 도시빈민, 노동자들의 삶은 그야말로 참혹했다. 엥겔스는 『영국노동자 계급의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절망적인 삶을 묘사하고 있다. 잉글란드 북부의 공장도시뿐만이 아니라 런던 등 대도시에서까지 시민들의 삶은 한계상황에 몰려 있었다. 시민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많은 투쟁들이 있었고, 배우들도 이런 시대적 상황속에서 스스로의 권리찾기 투쟁에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부당한 대우, 열악한 근로조건, 사용자들의 독점이었다. 미국에서는 신디케이트의 설립(1896) 이후에 배우들의 불만이 폭발한다. 거기에 기름을 부은 건 슈버트사였다. 배우들은 혼자만의 힘으로 이 거대한 악과 대결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경영자들은 일방적인 불평등 계약을 체결해놓고도 이마저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용자들의 횡포는 보드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보드빌 노조(화이트 래츠)의 파업은 실패로 끝났지만, 키스-알비 서킷의 가혹한 근로조건은 신디케이트와 슈버트사 못지 않았다.

미국에서 배우들은 1860년대부터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민스트럴 쇼 출연자들이 만든 녹우회(鹿友會, Fraternal order of the Elks)라는 모임은 배우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만든 단체로 프리메이슨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 모임의 이상과 정열은 노동기사단(Noble and Holy Order of the Knights of Labor)의 영향을 받았다. 노동기사단은 노동자들의 사회문화적 복지를 위해 조직한 단체로, 8시간 노동을 쟁취하기 위해 활동했던 19세기 후반의 중요한 조직이었다. 공연 종사자들의 첫 파업은 1886년에 있었다. 무대종사자들로 구성된 뉴욕시 공연보호조합(Theatrical Protective Union)이 근로조건 개선과 임금인상을 위한 파업에 나선 것이다. 프로듀서들은 대체인력으로 공연을 강행하려 하였지만 배우들이 공연의 질적 저하를 이유로 보이콧하였다. 1893년에는 11개 도시에서 모인 무대종사자들이 노조를 결성한다. 이것이 국제무대종사자 노조(IATSE)다.

배우노조(AEA)가 설립되기 전에 미국배우협회(Actors’ Society of America) 라는 조직이 있었는데 1916년에 배우노조에 흡수된다. 그러나 이 조직은 소수 배우들의 모임으로 집단적 힘을 갖추지는 못했었다. 신디케이트에 대한 투쟁은 1898년부터 시작된다. 1898년 12월 리차드 맨스필드의 주도로 <독립무대 향상과 보호연합회>가 창설되는데, 여기에 제임스 오닐, 프란시스 윌슨, 냇 굿윈, 피스크 부인이 동참하였다. 미니 매든 피스크(Minnie Madden Fiske, 1865-1932)는 20세기 초 미국의 가장 중요한 여배우 중 하나였다. 그녀는 입센 작품의 전문배우로 연극 프로듀서였던 남편과 함께 신디케이트에 저항하였다. 매우 인기있는 여배우였고 대중들은 그녀를 보기 위해 극장에 몰려들었다. 신디케이트가 극장을 개방하지 않자 1901년부터 1907년까지 맨해탄 씨어터를 임차하여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이는 비용이 많이 드는 싸움이었다. <뉴욕 드라마틱 미러>라는 신문사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마저도 처분하고 경제적으로 곤궁한 상황에서도 이 싸움을 이어나갔다. 피스크 부인은 슈버트 형제에 대해서도 분노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수전노였고 오로지 그들의 이익만을 위해 반신디케이트 운동을 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배우조직은 약한 단결심과 일시적 분노로 모인 사람들이어서 저항은 지속되지 못했고, 맨스필드가 철수하자 저항운동은 시들해졌다. 그리고 신디케이트는 좋은 조건을 내세워 배우들을 회유했다. 윌슨과 피스크 부인만이 남았다. 윌슨은 무대에 남아 있느냐 아니면 이 나라를 떠나느냐 하는 중요한 갈림길에 있다고 소리를 높이면서 신디케이트와의 거래를 끊었다. 그러나 슈버트사는 신디케이트를 능가하는 횡포를 부렸다. 배우는 물론이고 극장주, 프로듀서들 모두가 나섰지만 저항은 단편적이었고 개별적으로 이루어졌다, 전체적인 힘을 조직화하지 못했고, 배우들을 하나로 모으는 리더쉽이 없었다.

- 노조의 탄생

1912년 12월에 80여명의 배우들이 표준계약 등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노조창설은 다음 해인 1913년 1월 18일 이루어진다. 배우노조(Actors‘ Equity Association)가 탄생한 것이다. 프란시스 윌슨이 첫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신디케이트 및 슈버트 형제와 싸운 전투경력이 있었고 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배우였다. 찰스 코번, 에드워드 엘리스, 조지 알리스 등 112명의 배우들이 참여했다. 근로조건에 불만을 품은 신인배우들이 아니라 신인배우들을 지원하기 위해 모인 중견배우들이 많았다. 조지 알리스는 데이비드 벨라스코가 백지수표를 제시하면서 영입을 시도한 최고의 배우였다. 창립당시에는 여배우가 없었으나 곧 여배우들의 동참을 유도했고 토마스 휘펜부인이 처음 가입했다. 그녀는 노조의 이름에 에쿼티(equity)라는 말을 넣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노조에 대해 프로듀서들은 처음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회원이 천여 명에 달한다고는 하지만 조직적인 힘을 발휘하는 단체가 아니었다. 회원이 400만 명에 달하는 AFL에 가입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 직종에는 하나의 통일된 규약이 필요했는데 보드빌 노조가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노조는 ‘지옥같은’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었다. 그들은 7개의 요구조건을 담은 표준계약서 체결을 요구했다. 1) 뉴욕에서 다른 도시까지의 왕복교통편 제공 2) 일정기간 이상의 무보수 리허설 금지 3)고용계약 해지는 적어도 2주전 통보 4) 일주일 이상 리허설을 한 경우에는 무보수 해고 불가 5) 추가공연에 대해서는 추가개런티 지급 6)모든 공연에 대해 개런티 지급 7) 여배우의 의상구입과 유지보수비 지급 등이었다.

11월에 사용자 단체인 통합경영자보호협회(UMPA)에 협상을 요구했고 1914년 1월에 만나 표준계약체결을 요구했다. 몇몇 개인 사업자들은 동의했으나 협회차원에서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그 이후 5년간 노조는 표준계약체결을 위해 노력했고, 경영자들도 처음에는 노조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UMPA는 협약에 대해서는 늘 무시와 무관심 전략으로 일관했다. 개인적으로는 협약의 내용에 찬성하지만 단체의 입장에서는 수용하기 어렵다고 했다.

 

프란시스 윌슨(출처 : en.wikipedia.org)
프란시스 윌슨(출처 : en.wikipedia.org)

- 연대

노조는 연구와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해답은 외부, 특히 노총(AFL)과의 연대였다. 초기의 노조집행부는 외부와의 연대보다 스스로의 협상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프란시스 윌슨은 연대없이는 목표 달성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연대를 통해 목표를 달성한 음악인 노조가 좋은 예였다. 지금까지는 점잖게 경영자들을 만나고 예의바르게 입장을 전달했기 때문에 경영자들은 노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강력한 투쟁과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여기에 반대하는 노조원도 있었다. ‘ 우리는 아티스트지 노동자가 아니다’. 그러나 노조원도 예술적으로는 아티스트지만 경제적으로는 노동자였다. 그래서 표결에 부쳤고 718대 13으로 통과되었다.

노총 가입신청을 했지만 보드빌 노조가 이미 AFL의 승인을 받았기 때문에 한 업종에 하나의 조직만 승인하는 AFL의 원칙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AEA는 보드빌 노조(화이트 래츠)에게 기존의 회원자격을 반납하고 다시 신청하여 정극과 보드빌 대표로 각각 승인을 받자고 제안하였다. 화이트 래츠는 거절하였다. 이미 14,000 명의 회원을 확보한 화이트 래츠가 2,500명의 회원을 가진 연극배우노조 때문에 굳이 복잡하게 일을 처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AEA가 보드빌 노조의 지부의 자격으로 화이트 래츠에 가입하라고 권유했디.

외부와의 연대소식을 들은 경영자들은 긴장하였다. UMPA는 협의에 나섰고 1917년 10월에 7개항에 합의하고 두 달 뒤에 계약서에 서명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표준계약서를 갖게 된 것이다. 이는 대단한 성과였다. 연극은 4주, 뮤지컬은 6주의 리허설을 한 뒤 2주간의 출연을 보장받았고 주급 150달러 이하의 여배우들의 의상비와 교통비를 지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주 8회 공연의 원칙도 정해졌다. 무엇보다도 분쟁을 조정을 통해 해결하기로 합의한 것은 큰 소득이었다.

그러나 이런 합의에도 불구하고 정작 전체의 5분의 1인 14명의 사업자만이 합의안에 동의하였다. 이마저도 1918-19시즌에는 시행되지 않았다. AEA는 다시 AFL과의 연대를 추진하였지만 보드빌 노조를 이미 승인하였기 때문에 이를 수용하기가 불가능했다. 경영자를 대표하던 슈버트사도 불과 몇 주전에 서명한 계약서도 지킬 의사가 없었다. 노조는 일주일 8회 공연을 요구했지만 그들은 9회를 고집하였고, 리허설에 대해서도 무보수와 무제한 회수를 고집했다. 어떤 공연에 대해서는 아예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다. 슈버트사에 고용을 요청하는 배우들에 대해서는 비노조원임을 입증하라고 지시하였고, 매니저들은 본사로부터 노조원들은 아예 배제하라는 서면지시를 받았다고 했다. 블랙리스트였다.

노조가 AFL과 연대하려 하자 리 슈버트는 UMPA를 해산하고 프로듀서 연합회(PMA)를 조직하였다. 노조는 회원들에게 오직 계약서내용에 따라 출연하도록 지시하였고 이를 어길 때에는 강제탈퇴시키겠다는 지시를 내렸다.

한편 보드빌 노조인 화이트 래츠의 파업은 실패로 끝난다(1917). 화이트 래츠는 1919년 7월 <미국배우 및 아티스트 연합> 산하로 들어온다. 이 단체는 배우노조, 보드빌 노조, 유대인 배우노조, 독일인 배우노조등 4개 단체를 통합한 연합체로 Four As( Associated Actors and Artistes of America)로 불렸다. 이로써 배우노조와 보드빌 노조가 같은 <연합>의 산하단체가 되었고 AFL가입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PMA 회장 샘 해리스는 배우들과의 개별협상을 요구했다. 이는 노조로서는 노조의 존재를 부정하는 수용 불가능한 제안이었다. 그러자 오히려 배우노조원이 급증하고 지도자들도 강하게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초기 노조설립자들은 노조결성과 흥행주가 그들의 조건을 수용하는 것은 별개의 일임을 깨달았다. 경영자들과 노조는 몇 차례에 걸쳐 만났지만 결과는 매번 결렬이었다. 거의 타결에 다다랐지만 타결이 임박했을 때 경영자들은 반대했고 또 다른 협상을 요구했다. 1919년까지 무려 6년동안 협상했지만 타결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이는 호전적인 보드빌 경영자 E.F 알비 때문이었다. 보드빌 노조를 성공적으로(?) 와해시킨 그는 배우노조에게도 같은 와해공작을 펴도록 사주했다. 노조의 유능한 간부들을 빼내어 그들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라이벌 노조를 결성토록 유도할 것, 그 노조에는 모든 것을 약속하되 기존노조와는 협상을 거부할 것 등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알비의 악질적인 정책은 블랙리스트로, 자신에게 반대하는 모든 배우들의 출연을 금지했고 이는 엄청난 효과가 있었다.

1919년 시즌 캐스팅이 막 시작될 때 또 다른 배우들의 모임이자 경영자들이 승인한 어용단체인 배우연합회 (Actor Cooperative Association)가 조직된다. 160여명이 참여하였는데, 여기에는 놀랍고 실망스럽게도 노조설립에 참여했던 액터 매니저 찰스 코번(Charles Coburn)도 있었다. 이런 움직임은 알비가 이미 보드빌 노조를 파괴할 때 사용한 방식이었다.

배우연합회 가입자들은 그 전보다 더 높은 임금을 받을 것임을 경영자들로부터 듣고 있었다. 게다가 리허설이 시작될 때까지는 작은 무엇을 추가로 제공할 것이라는 말도 돌았다. 알비는 더 거대한 계획을 제안하였다. 보드빌, 벌레스크, 영화관계자, 연극종사자들을 망라하는 거대조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노조앞에 놓인 이 거대한 힘 ! 더욱 위협적인 것은 슈버트 형제들이었다. 그들은 미국 곳곳에 극장을 소유하고 있었고 많은 배우를 고용하고 있었다. 슈버트사의 협력자 중에는 플로렌스 지그펠드 주니어(Florence Ziefeld Jr), 존 골든(John Golden), 벨라스코 등이 있었고 신디케이트의 클로와 에어랑거, 배우 조지 코핸 등도 동조했다. 경영자들의 의도는 배우노조를 와해시키는 것이었고 그럴만한 충분한 자원도 있었다.

- 파업

7월 30일 배우노조는 계약이행을 거부하는 경영자측에 대항하여 <추 친 초우(Chu Chin Chow)>라는 뮤지컬 코미디의 리허설을 거부하라고 지시한다. 그러자 프로듀서는 재빨리 배우들과 재협상하자고 설득하였고, 배우들은 이에 따랐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조는 조직적인 대응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전면파업을 결정한다.

노조는 1919년 8월 5일 <라이트닌(Lightnin)> 이라는 공연을 보이코트하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이를 ‘라이트닌 파업’이라고도 부른다. 8월 7일 노조총회가 열렸다. 위대한 세익스피어 배우였던 소던(E.H.Sothern)이 등장했다. 그는 배우연합회와 같이 일하는 방안을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그를 환영하던 분위기는 금방 야유로 변했다. 회원들은 만장일치로 파업을 결의하였다.

<라이트닌>에 캐스팅된 배우들은 그날 저녁 극장경영자에게 공연하지 않겠다고 통보하였다. <라이트닌>은 20여년간 지역극장에서 고생한 프랭크 베이컨이 처음으로 브로드웨이에 입성하는 첫 성공작이었다. 베이컨은 돈을 벌 수 있는 첫 번째 기회를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만약 스트라이크가 실패라도 한다면 그는 모든 걸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 나는 배우이자 작가이자 경영자입니다. 그러나 파업이 시작되자 아내는 내게 동료들과 행동을 같이 하세요. 석탄 난로 하나로 밥해 먹으면서 견딜 수 있어요’ 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파업이후 12개의 공연이 추가로 파업에 동참했다. 에드 윈(Ed Wynn)이라는 인기 코미디언도 동참하였다. 대중들은 기꺼이 배우들을 응원하였고 브로드웨이에서 행진을 하기도 하였다. 퍼레이드는 배우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투쟁방법이었는데, 이를 통해 시민들에게 직접 파업의 당위성을 홍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월 스트리트에서 잘 차려입은 인기여배우들이15대의 차량에 탑승하여 파업의 정당성을 홍보한 거리행진은 유명했다.

경영자들은 반격에 나섰다. 노조 와해에 수십만 달러를 투입하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노조는 완강했다. 노조원들은 극장 외부에서 피케팅을 하기도 하고 박스 오피스를 왕복하면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조지 그래함이라는 여성은 AEA에 매달 1,000달러씩 기부하기 위해 도넛 가게를 열었다. <라이트닌> 배우들은 버스 한 대를 빌려 파업에 돌입한다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8월 12일 배우들을 태운 15대의 리무진이 ‘역사상 가장 예쁜 파업노동자’들을 태우고 5번가를 지나 월 스트리트 방면으로 나갔다. 현수막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 우리는 AEA회원들입니다. 만약 오늘 저녁 공연티켓을 구입하셨다면 조심하세요. 우리는 충분히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경영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급료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공정한 게임을 원할 뿐입니다(No More Pay, Just Fair Play).” 커브 거래소(지금의 증권거래소) 직원들은 이 행진에 힘을 실어주고자 잠시 휴장을 선언했다.

이날 오후 늦게 코러스 노조가 탄생했다. 파업에 대한 제안이 이루어진 순간부터 코러스 노조는 이 파업을 돕기 위해 나섰다. 그들은 배우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배우노조에 합류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었지만 전부 파업에 나섰다. 코러스는 스트라이크가 계속되면 일자리에서 쫒겨나기 때문에 이 파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는 스스로의 조직을 가지고 표준계약과 경영자와의 협상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뉴 암스테르담 극장에 모였다. 코러스 걸로 출발한 마리 드레슬러(Marie Dressler)는 만장일치로 코러스 노조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날 저녁 1,100명의 신규회원이 노조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우편배달부들의 우편배달 때문에 경찰은 파업노동자들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오히려 이를 거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알곤퀸 호텔 사장은 홍보와 행정공간을 무료로 제공하였고 코러스 걸들이 집단거주하고 있던 집들의 주인들은 집세독촉을 중단하였다. 헤럴드 스퀘어의 김벨 브러더스 백화점은 배우들이 일자리가 필요하면 일자리를 제공하겠다고 하였고 담배가게 여주인은 ‘ 파업배우들은 여기 와서 담배를 가져가되 담배값은 파업에서 이기면 갚으라’고 하였다.

반면 뉴욕 극장경영자들은 매일 거액의 손실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대도시의 순회공연을 통한 수입이 이를 상쇄해주고 있었다. 그러자 노조는 파업을 제 2의 도시 시카고까지 확대하였다. 근거없는 루머가 돌기도 하였다. 경영자들은 약해지고 있고 리 슈버트는 다시 극장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였다. 경영자들은 아주 단호하게 극장을 폐쇄하려고 하였다. 이런 협박을 접한 프랭크 길모어는 ‘ 배우가 공연하는 극장만이 극장이다. 배우가 없는 극장은 단순한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배우의 재능은 홀에서 텐트에서 빈 공간에서 쉽게 발휘된다. 대중들은 그들이 어디에서 공연을 하든 그들을 보려고 모여든다. 만약 극장을 폐쇄한다면 우리도 별도의 순회공연단을 만들어 공연을 떠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조는 경영자보다 더 자금난에 부딪혔다. 매일 수천달러의 자금이 필요하였다. 파업이 시작될 때 남은 돈은 불과 3,50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노조가 필요한 건 기금과 기금모금을 위한 이벤트였다. 8월 18일 월요일은 기금모금 공연주간의 첫 날이었다. 이들은 거리행진을 하였다. 첫 날 공연티켓은 바로 매진되었고 500여석에 달하는 입석까지 팔려나가 복도까지 관객으로 가득찼다. 150여 명의 코러스에 둘러쌓인 마리 드레슬러는 ‘ 프로듀서는 준비에 6-16 주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나는 6~16분만에 춤을 가르친다’ 고 기염을 토했다. <코러스 라인>의 예고편과도 같은 공연이 관객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에델 배리모어(출처 : pinterest.com)
에델 배리모어(출처 : pinterest.com)

에델 배리모어를 포함하여 중요한 배우들이 대거 모였다. 극장에는 떠나갈듯한 함성이 일었다. 특히 에델 배리모어(Ethel Barrymore)는 파업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한 여배우로, 그녀의 부모와 오빠, 삼촌 모두 배우였고, 오빠 라이오넬과 남동생 존도 같이 파업에 참여하였다. 배리모어는 10대에는 주로 대역으로 활동하다가 찰스 프로만에게 발탁되어 스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부모가 배우생활을 하면서 건강을 해쳤지만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사망한 슬픈 사연 때문에 파업에 참가한 것이었다. 파업이 발생하자 가장 먼저 참여한 것도 에델이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윈스턴 처칠이 배리모어에게 반해 청혼을 했었다는 소문도 있을 정도로 배리모어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지만, 동료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던 인간적인 배우이기도 했다. 여배우들의 동참은 파업에 큰 힘이 되었는데, 영국에서도 미국보다 먼저 여배우의 파업참여가 큰 힘이 된 사례가 있었다. 1907년에 있었던 런던 뮤직홀 파업에서 당시 최고의 인기 여배우 마리 로이드(Marie LLyoid)가 큰 활약을 했다. 그녀는 노조의 대변인을 하면서 피켓 시위에 참여하거나 기금모금공연에 참여하였고, 동료들을 파업에 동참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에델 이외에도 에디 포이, W.C.필즈, 에디 캔터 등의 스타들도 무료로 출연했다.

8일간의 자선공연 끝에 31,000달러의 파업기금이 모였다. 반면 경영자들의 호주머니는 점점 비어갔다. ‘이 정도의 금액으로 충분할까요?’ 에델 배리모어는 노조원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 우리들의 무기는 돈입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울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 기부할 수 있는 사람은 기부를 합시다. 199명의 배우를 찾을 수 있다면 내가 먼저 500달러를 내겠습니다.” 그녀가 이 말을 하자마자 에드 윈은 수표를 건넸고 잠시 후에 노조위원장 프랜시스 윌슨은 두 배의 돈을 냈다. 회의가 끝날 무렵 21,500달러에 달하는 기금이 모였다. 그리고 에델 배리모어와 마리 드레슬러를 <10만 달러 모금위원회>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8월 26일 AFL의장 새뮤얼 곰퍼스가 미국 노동계를 대표해 참석한 파리 평화회의에서 돌아왔다. 그는 배우노조에게 이렇게 말했다. “AFL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힘과 영향력이 무엇이든지간에, 끝까지 여러분 뒤에서 여러분들을 돕는데 사용하겠습니다.” 새뮤얼 곰퍼스(1850-1924)는 미국노동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영국에서 출생하여 1863년에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이었다. 1886년에 미국노총(AFL)을 결성하여 1894년까지 위원장을 하였고 다시 1895년부터 1924년까지 위원장을 역임한 미국노동운동의 대부였다.

배우들은 기쁨에 들떴다. 경영자들은 갑자기 경계하기 시작했다. 트럭운전수조합(Teamsters Union)은 노조가 사용할 수 있도록 순회공연용 트럭을 준비하였고, 경영자들에게는 물건배달을 중단하였다. 9천명에 달하는 홍보포스터 부착자 조합원들은 비노조 극장을 위한 포스터 부착을 거부하기로 의결했다. 무대종사자와 음악가들은 워싱턴 DC에서의 쇼를 거부했다. 영화관으로 바뀐 극장의 영사기 조작자들은 어떤 극장에서도 크랭크를 돌리지 않겠다고 결의하였으며 보스턴과 필라델피아에서도 파업이 발생하였다.

노조지도자들은 9월 5일 금요일 저녁에 경영자들과 만났다. 9월 6일 오전에 양측은 첫 단체협약에 서명하고 회의장 로비에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에게 이를 보여주었다. 노조의 협상책임자 W.B. 루빈은 경영자 측 변호사에게 이제는 코러스 계약을 매듭지어야 한다고 독촉했다. 상대에게 깊이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루빈은 코러스에 대한 양보를 얻어냈다. 리 슈버트는 더 이상의 전쟁은 무의미하고 계속할수록 손실만 늘어날 것이라고 판단하고 백기를 들었다. 에어랑거에게도 이 사실을 통보했다.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경영자는 분열되고 노조는 단결했다. 파업은 30일 동안 계속되었다. 8개 도시로 확산되어 37개 공연이 취소되었고, 16개 공연이 연기되었다. 경영자들은 대체배우로 파업을 극복하려 했지만 , 이들은 매우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8월말 경영자들의 손실은 약 2~3백만 달러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세트, 의상, 홍보 등의 비용을 추가하면 손실은 더욱 커졌다.

배우들의 거리행진(출처:mentalfloss.com)
배우들의 거리행진(출처:mentalfloss.com)

파업의 성공은 많은 시민들의 협조로 인한 것이었다. 단체행동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AFL의 지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언론도 노조편이었다. 뉴욕타임즈는 며칠 동안 일면에 노조파업기사를 게재했고 뉴욕 트리뷴은 배우들의 집단행동을 지지하는 칼럼을 실었다. 영국 배우연합회에서도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파업의 결과 코러스 노조도 탄생했다. 파업은 끝이 났다.

 

 

- 클로즈드 샵, 에쿼티 샵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파업종료후에도 노조는 경영자들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슈버트사는 협약을 완전하게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노조는 경영자들에게 1919년에 맺은 협약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PMA는 슈버트와 결별해야 한다고 압박하였다. 슈버트와 에어랑거의 결합이후에 극장예약은 슈버트가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 노조의 시각이었다 . 신임 노조위원장 존 에머슨은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클로즈드 샵을 요구했다. 노조는 이를 표결에 붙였는데 찬성 3398표 반대 115표로 압도적인 찬성률을 보였다. 이는 PMA와 배우의 관계를 악화시킨다. 그러나 노조의 힘을 감당할 수 없었던 리 슈버트는 1923년 9월 노조에게 클로즈드 샵을 양보하겠다고 하였다. PMA내의 에어랑거파는 이에 반대하였지만 리 슈버트는 노조와의 대립이 실익이 없고 노조는 매우 단결심이 강해서 그들을 이길 수 없음을 알았다.

에쿼티 샵
에쿼티 샵

당시 공연노조들의 공통된 요구는 클로즈드 샵이었다.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보드빌 노조도 강하게 주장했다. 1921년 가을 코러스 노조의 표결결과도 찬성 1823표 반대 1표로 절대적인 찬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배우노조는 이를 클로즈드 샵이 아니고 에쿼티 샵(Equity Shop)이라고 불렀다. 클로즈드 샵은 노조원만을 고용하는 폐쇄적인 시스템이지만 에쿼티 샵은 비노조원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1924년에 슈버트사와 노조는 협약을 체결했고 노조는 100% 클로즈드 샵을 80%의 클로즈드 샵으로 양보한다. 20%의 배우는 비노조원 중에서도 고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에쿼티 샵을 ‘오픈 샵의 성격을 지닌 클로즈드 샵’이라고 불렀다.

당시 산업계에서는 클로즈드 샵의 폐쇄성에 대한 강한 비판이 있었다. 공산주의적 투쟁방식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행부가 이를 주장한 것은 강력한 경영자들의 방해공작에 대응하는 방법은 클로즈드 샵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노조원을 확보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파업이 시작될 때 노조원은 2,700명이었지만 끝날 때는 14,000명에 달했다. 또 노조가 오랜 핍박을 받으면서 이뤄낸 승리를 아무런 희생과 금전적 기여를 하지 않은 비노조원과 공유할 수 없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단체교섭권이었다. 클로즈드 샵은 사용자와의 강한 단체교섭권을 가지게 되고 이것이 바로 노조의 힘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탄생한 영국의 배우노조도 클로즈드 샵을 채택했지만 1980년대에 들어와 강한 사회적 비판에 직면하여 이를 포기한다. 그러나 미국배우노조는 이를 지켜오고 있다. 비노조원 배우중에도 훌륭한 배우들도 있지만 AEA회원이 된다는 것은 전문배우로 인정을 받는 일이다. 노조 회원자격은 노조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고 이를 바탕으로 노조는 회원들에게 각종 혜택을 부여함으로써 강한 유대를 형성한다. 이로써 미국에는 강력한 배우노조가 탄생한다. 오랫동안 경영자들에게 당한 고초에 대해 분풀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지나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늘날 노조의 힘과 협약의 내용이 강하다.

이후 슈버트사는 전통적인 반노조정책에서 유화정책으로 바꾼다. 그러자 이번에는 작가들의 요구가 분출하기 시작했다. 1917년에 이미 몇몇 작가들이 표준계약체결을 요구했지만 리 슈버트는 그럴 바에는 극장을 폐쇄하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노조의 승리에 고무된 작가들은 최소기본계약을 들고 나왔다. 작가들은 그 동안 들쭉날쭉한 로열티, 작품사용료 지급지연, 대본의 임의수정 등의 문제를 제기했고 5개월간의 협상 끝에 1926년 4월 협상을 타결한다. 슈버트만이 반대하였지만 1년후에 동의한다.

지그펠드 폴리즈(출처: pinterest.com)
지그펠드 폴리즈(출처: pinterest.com)

파업은 독재적인 공연사업가의 폭력에서 비롯되었다. 극소수의 경영자가 만든 불합리한 룰이 전체를 지배한 전횡이었다. 외로운 개인은 거대한 힘앞에서 개인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고, 배우노조는 약한 배우들의 힘을 결집한 조직이었다. 후세의 사가들은 만약에 당시 노조가 없었다면 야만적이고 약탈적인 공연환경이 얼마나 지속되었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정직한 사업이 불가능하게 된 환경속에서 배우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경영자들이 오랫동안 반대해 온 협약에 어느 날 갑자기 찬성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그것은 협약의 내용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투쟁방식, 협상방식에 대한 반대였다. 곧 집단협상, 집단행동에 대한 반대였다. 노동자들의 힘은 연대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1919년의 배우파업은 공연산업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 개인주의적 사고에 매몰되어 있던 배우들이 조직의 울타리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아티스트로만 생각하던 배우들은 자신들을 노동자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사회의 외부에 고립되어 있던 배우들을 점점 사회속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일반 산업노동자와의 간극을 좁히고 다른 산업노동자들의 투쟁에도 커다란 격려가 되었으며, 다른 엔터테인먼트산업 노조 탄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AEA의 파업은 뉴욕시의 경제에 커다란 충격을 줄 정도로 그 영향력이 커서 시장이 직접 나서서 중재를 할 정도다. AEA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파업을 했고 심지어 1960년대 공연시장이 심한 불황에 허덕일 때도 파업을 벌인 적도 있었다. 미국의 배우노조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배우노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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