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고독이 부르는 추억과 회한, 용서의 노래들
노년의 고독이 부르는 추억과 회한, 용서의 노래들
  • 이종호 기자
  • 승인 2021.05.13 21: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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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작가 손용상 운문집 <부르지 못한 노래...허재비도 잠 깨우고>
손용상 운문집
손용상 운문집 <부르지 못한 노래...허재비도 잠 깨우고>

[더프리뷰=서울] 이종호 기자 = 재미작가 손용상의 운문집 <부르지 못한 노래...허재비도 잠 깨우고>가 시산맥출판사에서 나왔다.

저자의 두번째 운문집인 이 책에는 주제별로 ‘사랑에 대하여’ ‘바람과 바람(希), 추억과 회한’ ‘나의 그 꽃들‘ ’망향의 章‘ ’시간의 춤, 계절 단상(斷想)‘ ’나의 고백‘ ’사모곡 사모별곡‘ 등 7개 장으로 나뉘어 모두 64편의 시가 실려 있다. 때로는 시로, 때로는 시조체로 나이 들어감에 따른 갖가지 감정과 생각의 굴곡을 드러낸다.

특히나 20년이 넘는 타향생활에서 겪는 망향의 서러움,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또다른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 그러면서도 삶에 대한 희망과 낙관적 수용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리저리 국내외를 떠돌던 그는 지난 1998년 홀연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는 어찌된 일인지 아직껏 한 번도 한국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여러 가지 현실적 어려움과 맞닥뜨리는 시간의 한가운데서 그는 늘 힘들었고 급기야 2009년 어느 날 중풍의 습격을 받는다. 그 절망감이 어땠으랴.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절망과 좌절이 등단 이후 한동안 놓고 있었던 원고지 앞으로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부르지 못한 노래...허재비도 잠 깨우고>는 이렇게 추억과 회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유년기의 기억들, 친구와 가족, 나이 들어 새삼 깨닫는 이치, 손주와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며 문득 깨닫는 세상과 인생에 대한 희망의 시편들로 가득하다. 아울러 시작(詩作) 메모를 곁들여 작품을 쓰게 된 동기라든가 연관된 기억을 소개하기도 한다.

나 학생 때/그녀는 누나 같았다/궁할 땐 물주(物主)였고/가끔은 사랑도 가르쳐 주었다//장가 간다 하자 그녀는/통 크게 웃어주었다/그녀는/싸롱 드 미라보의/큰 언니가 되어 있었다//나이 들어/어쩌다 만 리 이역에서 만난/미시즈 캐서린 토마스 - <그때 그 여인> “이 광활한 아메리카 천지에서 그녀를 만나는 순간 나는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아, 인연이 이런 거구나...” (시작 메모)

길을 걷다가 좀 넘어지면 어때/다시 일어나면 되잖아/무릎 까지고/발 삐끗 아픈 건/바로 살아있다는 것이야//(중략) 어느 날/갑자기 사지(四肢) 뒤틀리고/입도 비틀어지고/목 잠겨 말이 나오지 않을 땐/슬퍼하지만 말고/그냥 가슴에 손을 얹어 봐//콩닥콩닥/심장 박동 소리가 들리면/그 또한 네가 살아있다는 기쁨이야 - <다시 일어나면 되잖아>

일터 벗어나자/해 저물고/거리에 불이 켜진다//집엘 가려 하니/바람 한 자락 어깨를 스친다/뭔가 허전타//(중략) 예라, 혼술하며 감자탕이나 한술 뜨자/혼자 중얼거리며/먹자골목으로 발길을 돌린다//문득 혼자 사는/한때의 여친을 떠올렸지만//지금 전화한들...어쩌자고! - <그 시절 퇴근길>

봄날/손주 손잡고 공원엘 갔다//(중략) 하부지, 여기 싹이 트고 있어요!//들여다보니/나뭇가지에서/여린 새순이 돋고 있었다//나는 마른 나무였지만/손주는 새싹이었다 - <노인과 손주> “아이들은 새처럼 조잘대고 다람쥐처럼 재롱을 부렸다. 이 티 없는 순수는 아이들이 크면 이제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어린 새싹들을 보면서 뜬금없이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나도 모르게 노인이 되어 있었다.” (시작 메모)

자투리 헝겊에 색실을 묶어 옷을 입힌 인형은/배를 누르면 빼애 울었다/그럴 땐 우리 집 대청은 무대였고/누이는 감독 겸 배우였고 나는 관객이었다//(중략) 누이와 내가/그 시절 육간(六間) 대청에서처럼/다시금 마법의 당세기를 뒤적이며/인형극을 해볼 날이 있을까 - <시간의 춤> (그 누이가 원로 국민연기자 손숙이다. ’당세기‘는 반짓고리를 가리키는 경상도 방언이고.)

작가의 고백을 들어보자.

“어느 날 문득 엄습한 이른바 중풍(中風)… 누구든 당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 일이 ‘나’에게 닥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느 날 불시에 내 앞에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억장이 무너지지요.

좌절해 있던 어느 날, 당시 잠깐 서울에 돌아갔던 아내가 전화를 하였습니다.

―그냥 살기가 버겁고 귀치가 않네. 끝내버릴까…어쩔 수 없이 혼자서 투병생활을 하며, 시시로 엄습하는 외롭고 막막한 심정을 독백처럼 내뱉으며 그녀에게 투덜거렸습니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녀가 약간은 물기 젖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노래를 한번 불러보세요. 거울을 보고… 노래를 부르세요!

―노래…?

송수화기를 끄고 혼자서 중얼거리며 거울 앞에 서 보았습니다. 아직도 비틀어졌던 입술의 흔적이 남아있어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만, 그냥 무시한 채 그녀가 말한 것처럼 정말로 노래를 불러 보았습니다. 조그만 목소리로.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공연히 쑥스럽기가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내가 곧잘 18번처럼 부르던 노래가 도무지 음정 박자는 물론 발음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는 참담함이었습니다.

―당연하죠! 입 다물고 말 안 하고 있으니까 신경이 무뎌지는 게…. 그러니까 노래를 하라구요. 지루하면 책을 읽거나 시 낭송도 해보고… 그것도 아주 큰 소리로요. 뭐가 부끄러워요?

<망부석>도 부르고 <꿈에 본 내 고향>도 부르고 더하여 군가나 학창시절의 학교 응원가도 부르고… 곡이 쉽고 가사가 까다롭지 않은 노래는 생각나는 대로 모두 불러 보았습니다. 그러나 혼자만의 리사이틀은 오래가지가 않습니다. 금방 싫증이 일며 불과 십여 분을 버티지 못하고 거울 앞에서 물러서고 맙니다. 그냥 머릿속엔 잡생각만 가득하고 생각과 행동이 달라 집중력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 빈 가슴을 후비며 혼자만의 알 수 없는 억울함에 공연히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순간 뭔가의 절규가 귀청을 때렸습니다.

―될 수만 있다면,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지금이라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비록 내 여생이 길지 않다 하더라도, 꼭 그만큼일지언정 후회 없고 회한이 남지 않을 인생을 다시 한 번 살았으면 좋겠다는 목소리였습니다.

그리고 생소했던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한 손으로 토닥거리며 잃었던 언어의 ‘새’를 다시 잡기 위해 머리에 쌓였던 녹을 닦고 못다 불렀던 마음속의 피리를 불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는 누군가 내 피리 소리를 듣고 조금씩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아, 나는 지난날처럼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에 다시 한 번 멍석을 깔았습니다.”

시인/소설가 이윤홍(미주가톨릭문인협회 회장)은 추천사에서 “이 책을 읽으며 문득 떠오른 것은 자크 프레베르였습니다. 피묻은 열쇠를 들고 나서는 멋쟁이 옥지기.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면, 피를 묻혀 가면서까지 가둔 사랑을 풀어주기 위해 나서는 사람. 가두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갇힐 수밖에 없었던 사랑을 풀어주기 위해 나서는 시인에게서 나는 손용상님을 떠올립니다. 시인은 어디에 사랑을 가두었을까?”라고 말한다.

또 재미시인 김미희는 지난 2013년 미주문학상 수상식 자리에서 손용상 작가와 역시 중풍 후유증으로 실어증을 겪고 있던 <무진기행>의 김승옥 양인이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던 장면을 소개하면서 "반백 년 방랑 세월 역마살 등에 업고/한 순간 북풍 맞아 죄업(罪業)을 받았으니/똬리 진 흉중 회한(悔恨)에/짚 동 한숨 깊어져//백일홍 흐드러진 돌담길 가로질러/눈감아 꿈길 따라 고향 집 찾아드니/비로소/가슴 저미는/따습던 엄마 약손//얼룩진 상흔(傷痕)들로 한(恨) 깃든 창호 문짝/그리움 별빛 되어 먹물로 스며들고/버선발/뛰어나오시는/엄니 모습 저만치"(<풍객 일기> 전문) 같은 구절들을 읽으면서는 많이 울었다고 털어놓았다.

김 시인은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손용상 이름 석 자는 한국문학사에, 미주문학의 산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열정은 세대를 이어가며 회자할 것입니다. 그는 천상 글쟁이, 안에 쟁여 있는 글 씨앗을 모두 파종하지 않고는 죽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손용상은 경상남도 밀양 출생으로 경동고등학교와 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했으며, 대학 재학중이던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방생>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그대 속의 타인> <따라지의 꿈> <토무 土舞> 등 장 ·단편 소설을 다수 냈으며 <우리가 사는 이유> <天痴, 시간을 잃은> 등 에세이, 운문집 20여 권을 출간했다.

재미작가 손용상(사진=미주한국문인협회)
재미작가 손용상(사진=미주한국문인협회)

미주문학상, 한국평론가협회 동포문학상, 고원문학상, 재외동포문학상, 해외한국소설문학상, 미주가톨릭문학상, 윤동주문학 해외작가특별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현재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 거주하고 있으며 글로벌 한미종합문예지 <한솔문학> 대표로 일하고 있다.

이번 책은 시산맥 해외기획시선 제16권으로 나왔다. 174쪽,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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