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승무>의 춤꾼, <바람맞이>의 춤꾼 이애주 - 큰 별이 떨어졌다
[기고] <승무>의 춤꾼, <바람맞이>의 춤꾼 이애주 - 큰 별이 떨어졌다
  • 김영희 전통춤이론가
  • 승인 2021.05.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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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주 진혼춤(사진=김영희)
서울대 아크로폴리스에서 있었던 이애주의 춤 (사진제공=김영희)

[더프리뷰=서울] 김영희 전통춤이론가 = 춤꾼 이애주(1947-2021)는 국가무형문화재 27호 승무의 예능보유자였고, 1980년대 민중문화운동의 중심에서 춤을 통한 시대적 발언의 선봉이었으며, 만물생명의 온전한 살림과 보존을 위해 자리를 가리지 않았던 인물이다. 이 일들을 모두 춤으로 풀어냈고, 춤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펼쳐 보인 춤꾼이며, 시대의 예술가이고 문화운동가였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갑작스런 소식에 문화예술계는 모두 황망하였다. 전통춤계를 포함한 문화예술계의 큰 별이 떨어졌으니, 그의 활동은 이제 과거형으로 남게 되었다.

춤의 첫 발을 떼게 해주신 스승 김보남

이애주 선생은 1947년 서울 운니동에서 출생했다. 부모님의 고향은 황해도 사리원이었으나 서울로 이주하였고, 이애주 선생은 운니동에서 창덕여중고까지 다녔다. 운니동에는 국립국악원이 있었다. 국립국악원의 악사이며 춤 교육을 도맡았던 김보남(金寶男, 1912-1964)에게 그의 어머니는 이애주를 입문시켰다. 교동국민학교를 다니던 이애주는 학교수업이 파하면 스승 김보남의 연습실로 달려가 춤을 학습하고, 국립국악원 국악사들의 연주를 귀담아 듣고 그들의 반주에 맞춰 춤을 추었다. 최고의 예술 환경에서 이애주 선생의 춤이 발아되었던 것이다.

이애주 학창시절(사진=김영희)
학창시절의 이애주 (사진제공=김영희)

스승 김보남이 작고하기 전까지 이애주 선생은 궁중무의 기본부터 <기본춤가락> <승무> <검무> <풍물소고춤> <무고> <춘앵전> <민요가락>(아리랑, 밀양아리랑, 노들강변, 양산도, 천안삼거리 등) 등을 배웠다. 주목할 점은 김보남에게 배운 <승무>가 후에 한영숙에게 배운 <승무>의 뼈대를 고스란히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김보남이 이왕직 아악부의 아악수로 활동하던 1937년에 민간에서 활동한 한성준에게 <승무>를 배웠기 때문이었다. 이애주 선생이 김보남에게 배운 <승무>도 한영숙에게 배운 <승무>도 한성준의 <승무>였던 것이다.

(사진=김영희)
대학교 졸업식장의 이애주 (사진제공=김영희)

춤 인생을 결정한 스승 한영숙의 맏제자가 되어

이애주 선생은 1965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과에 무용 전공으로 입학한 후, 국립무용단에서 객원으로 공연하기도 했고, 대학 4학년이었던 1968년에 문화공보부 주최 ‘신인예술상’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작품은 <산조–바닷가에서>였다. 이렇게 이애주 선생은 춤계에 공식적으로 데뷔할 즈음, 두 번째 스승이자 춤 인생을 결정짓게 되는 한영숙(韓英淑, 1920-1989)을 만나게 되었다. 한영숙은 1930년대에 전통춤을 집대성했던 한성준(韓成俊, 1875-1941)의 손녀이자 수제자였다. 한성준은 사위어가는 조선춤의 독특한 미와 정조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1937년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설립했고, 한영숙은 이 무용단체에서 핵심적으로 활동했다. 한성준 타계 후 전통공연예술계는 한영숙을 한성준의 후계로 인정했으므로, 1969년에 〈승무 僧舞〉의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었고, 1971년에는 한성준에서 한영숙에게 계승된 〈학무 鶴舞〉도 중요무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었다.

2001년 한성준 춤 예술제에서(사진=김영희)
2001년 한성준 춤 예술제에서 (사진제공=김영희)

이렇게 민속춤의 맥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한영숙은 이미 이애주 선생을 눈여겨보고 있었고, 그를 당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스승 한영숙의 문하에서 민속춤의 정수를 올곧게 학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애주 선생은 <승무>와 <살풀이춤> <태평무> <학춤> <검무> 등을 정성스럽게 배웠고,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전수평가발표회에서 1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한영숙은 1971년 국립극장에 올린 자신의 전통무용발표회에 이애주 선생을 아낌없이 무대에 세웠다. 1부 공연에서 이애주는 <칼춤> <학춤>을 추었고, 김천흥 선생과 송범 선생이 찬조출연한 <봉산탈춤>의 노장과정에서는 소무를 추었다. 그리고 2부 <법열곡 法悅曲>에도 출연하였다. <법열곡>은 불교의식무와 승무의 원형을 살려 현대무대에 맞게 구성한 접속곡 형식의 작품이었다. 이애주 선생은 스승 한영숙을 떠올리며 1994년에 <법열곡>을 공연하기도 했다.

공연 후 무용평론가 이병임은 “무형문화재에 대한 보호와 후계자 양성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한영숙씨가 우리 한민족의 찬란한 문화적인 유산을 보전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진통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한영숙씨의 정열과 후계자 이애주양의 성장이 우리가 기대하는 곳에서 어긋남이 없기를 믿어마지 않는 바이다.”(「한국전통무용의 정수-인간문화재 한영숙씨의 공연의의」, 『월간무용』 4호, 1971.)라 평했다. 당시 25세의 이애주 선생이 한영숙의 후계자로서 춤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대 문제의식을 표출한 첫 공연 <땅끝>

이 무렵 이애주 선생은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처용무의 사적 고찰과 그 전승문제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인문학적 소양을 넓히기 위해 서울대학교 국문과에 편입하였다. 이때 문화운동 1세대들을 만나 교류하였는데, 그들에게 춤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함께 춤추며, 밤늦도록 한국 춤과 문화에 대한 열띤 토론을 했었다. 이 만남은 이애주 선생이 자신의 춤관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974년 6월 국립극장 소극장에 올린 이애주 선생의 첫 번째 춤판은 자신의 인생 행로, 춤의 행로를 결정한 공연이었다. 1부는 전통춤 공연이었고, 2부는 <땅끝>이라는 창작 작품이었다. <땅끝>은 외딴섬을 장악한 섬주의 처녀 공출을 통해 당시 폭압적인 정치상황을 묘사했으니, 공연의 서문에 “우리 춤의 현실은 어떠한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우리 춤이 무의식적인 태만과 무(無)사상(思想)의 몸짓으로 저급하게 전락되어버렸고, 더구나 소수인에 의해 독점적인 전유물로 고립되었다. … 이번 춤판은 우리 춤의 원형을 최대한으로 살리면서 우리의 몸짓에 바탕을 두고 오늘의 문제의식을 표출코자 하였다.”고 하였다.

이애주 선생이 사용한 ‘춤판’이라는 용어는 당시 무용계에서 매우 선언적이었다. ‘춤’이라는 용어가 ‘무용’이라는 용어에 대해 상대적으로 후진적이고 저급하게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용’은 일제강점기에 본격적으로 사용된 외래용어이므로, 이애주 선생은 본래 우리 춤을 일컫는 ‘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우리 문화의 원형성을 내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백두산 천지에 오른 이애주(사진=김영희)
백두산 천지에 오른 이애주. 1995년 7월 7일 (사진제공=김영희)

전통춤에 대한 관심은 더욱 넓어지고 깊어지고

다음 해 이애주 선생은 무형문화재 27호 <승무>의 이수자로 인정받으면서, 우리의 전통예술에 대한 관심이 더욱 확장되었다. 이 당시 한국학에 대한 높은 관심과 함께 민속예술들이 속속 발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들을 지켜보며 이애주 선생은 우리 춤에 대해 더욱 넓고 깊게 사고하기에 이르렀다. 민속예술 속에 숨어 있는 민속춤들을 보고 배우며 전통예술의 춤과 소리와 음악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종합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민속춤들이 민간의 삶을 반영하였으며, 다양성과 자유로움이 전통춤의 특성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봉산탈춤>이 1960년대에 복원될 무렵 이근성(李根成)에게 <봉산탈춤>을 배웠고, <경기도당굿>의 최고 예인이었던 이용우(李龍雨)옹에게 경기도당굿의 가락과 춤을 배웠으며, 역시 경기도당굿의 조한춘(趙漢春)옹에게도 배웠다. 봉원사의 박송암(朴松岩) 스님에게는 작법을 배우고, 가곡 명창 김월하(金月荷)에게는 가곡도 배웠다. 박상화(朴相和)옹에게는 영가무도(詠歌舞蹈)를 전수받았다.

이애주 선생은 춤과 소리와 악기 뿐 아니라 회화에서도 전통춤의 원형과 정신을 찾고자 했다. 서울대 개교 40주년 기념공연으로 1986년에 올린 <민족적 예술형식의 모색을 위한 춤과 미술의 만남> 공연은 전통춤과 관련된 회화작품들을 짝지어 구성하였다. 1부에서 조선시대 <의궤도 儀軌圖> <계회도 契會圖>와 <일무> <춘앵전>을 연결하고, 2부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불화와 <승무>를 연결하여 비교하였다. 3부에서는 조선시대 풍속화, 불화, 민화, 장승을 <허튼춤> <양반춤> <병신춤>을 연결하여 모색했던 것이다.

스승 한영숙에게 배운 주요 종목들로 이애주 선생의 독자적인 춤판도 열었다. 1983년 공간사랑에서 공연한 <한영숙류 이애주 전통춤>의 프로그램은 <살풀이춤> <태평무> <승무>가 중심이었다. 특히 <승무>는 염불로 시작하여 잦은 염불, 허튼타령, 잦은타령, 굿거리, 잦은 굿거리, 법고, 당악, 굿거리로 장장 30분에 걸쳐 추었다. <승무>는 우리 몸의 뼈 삼천마디를 모두 움직여 우주 전체를 내 몸 안에 끌어안아 추어야 한다는 춤이다. 더우기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공간사랑의 전통예술 기획공연들은 숨겨진 전통춤의 명인들을 세상에 알리는 매우 의미 있는 무대였다. 이애주 선생이 공간사랑에 올린 <한영숙류 이애주 전통춤> 공연에서 이 춤 세 바탕을 단독의 춤판으로 추어냈으니, 스승 한영숙의 춤맥이 명실공히 이애주에게로 이어진 것이었다.

이애주의 '승무' (출처:youtube.com)
이애주의 <승무> (출처:youtube.com)

1980년대의 <진혼춤>, <바람맞이>

1982년 서울대학교 체육교육과의 무용 전임교수가 된 후, 1984년에는 ‘춤패 신’을 창단하여 그간 배우고 익힌 전통춤들을 기반으로 공연활동을 하였다. 창단공연으로 국립극장 실험무대에 올린 나눔굿 <밥>은 송암스님에게 배운 식당작법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재구성한 작품이었다. “굿판에 오셔서 밥과 떡과 술을 나누어 먹읍시다.”라는 짧은 해설은 곧, 밥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작품 <도라지꽃>은 1985년 6월 23-24일 서울 놀이마당에서 벌린 공연이었다. 정신대에 끌려간 조선의 누이들을 참혹하게 짓밟히는 도라지꽃에 비유하여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1980년대에 이어진 열사들의 장례식에서 시퍼렇게 큰 칼을 양 손에 들고 추었던 춤은 밀양의 춤꾼 김타업에게 배운 <휘쟁이춤>이었다. <휘쟁이춤>은 망자의 상여가 집을 떠날 때, 상여 앞에서 잡귀를 물리치기 위해 추었던 춤이다. 또 1980년대에 열사들의 장례식과 대중집회에서 이애주 선생이 추었던 <진혼춤> <한풀이춤> <넋풀이춤>은 살을 푸는 진혼굿에 다름 아니었다. 이는 작가 이애주가 1970년대 유신정권 이래 1980년대에 군부정권이 집권했던 한국사회를 통과하며 ‘개인의 살풀이춤’이 아닌 ‘사회의 살풀이춤’으로 <살풀이춤>의 의미를 확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춤들은 모두 전통춤, 전통예술들을 근거로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춤들이다. ‘전통을 온존히 알면 창작은 저절로 된다.’는 이애주 선생의 말은 바로 그 뜻이다.

살풀이춤 공연중인 이애주 (출처:youtube.com)
이애주의 <살풀이춤> 공연 (출처:youtube.com)

1987년 6월 연우소극장에 올렸다가 ‘이한열열사 국민장’ 이후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4만의 관객이 보았던 <바람맞이>(1987. 8. 21-22) 또한 전통춤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었다. 씨춤, 물춤, 불춤, 꽃춤으로 구성된 <바람맞이>는 1980년대 후반 격변의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예술가이자 지식인으로서 자기 발언이었다. <바람맞이>에 대해 일부 비평가는 선생의 춤이 춤이 아니라, 움직임, 몸부림일 뿐이라는 반론을 제기했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춤을 바라보는 입장의 차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었다. 춤은 시대와 더불어 시대를 대변해야 한다는 이애주 선생의 춤 개념이 생생히 반영된 춤이었기 때문이다. 김근태 국회의원은 1980년대 이애주 선생의 춤에 대해 “전통춤을 갖고 당대의 문제, 당대의 아픔을 이렇게 절실하게 출 수가 있구나. 아, 이렇게 해서 한(恨)은 가슴에 남되 원한(怨恨)으로 남지 않을 수 있는 어떤 승화가 이루어지는구나.”(‘The Earlist Dancer’ Arirang TV, 1999. 8. 10.)라고 회상하였다. 이애주 선생의 <바람맞이>는 시대를 마주하며 발언했던 예술가의 행보를 보여준 춤판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다시 전통춤으로의 침잠, 한영숙에 이은 <승무>의 계승

그렇게 격정의 세월이 흐르는 중 1989년에 이애주 선생의 스승인 한영숙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스승의 타계와 동시에 이애주 선생은 전통춤 자체로 침잠해 들어갔다. 1990년 호암아트홀에서 <한영숙류 이애주춤판> 공연 후, 교육과 강습을 통해 전통춤을 다시 성찰하기 시작하였다. 우리 춤의 기원을 찾고자 1995년 중국의 고구려 고분과 백두산을 둘러보았고, 후에 「고구려 춤의 상징체계」(1999)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이애주 선생은 1996년에 스승 고 한영숙에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한영숙은 애제자 이애주에게 <승무>는 우리 춤의 기본이고, 우리 춤의 정신이 담겨있는 춤이라고 생전에 늘 말씀하셨다. 예능보유자 지정은 춤꾼으로서 크나큰 영광이었다. 그러나 영광보다는 스승의 춤을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였다. 스승 한영숙과 그의 스승인 한성준의 예술적 의미를 되짚어보았으니, 아무도 찾지 못했던 한성준의 묘를 1997년에 홍성에서 찾아냈고, 1998년에는 홍성에 한성준의 춤비를 세웠다. 매년 홍성에서 ‘한성준 춤소리기념예술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또한 한영숙춤보존회의 회장으로서 스승 한영숙의 제자들과 함께 매년 정기공연을 주최하여 한영숙류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학춤>의 맥을 지켰다. 2020년에는 한영숙 탄생 100주년 행사도 주도하였다.

한성준-한영숙으로 이어진 춤들을 계승하며 이애주 선생은 “스승님께 우리 춤을 이어받은 것을 좀 더 잘 정리하고 정립시키면서 제 후대 제자들 밑에 길이길이 맥이 이어지게 하는 게 책임이면서 의무라고 볼 수 있지요. 그것이 옛날 것을 보존하고 그걸로 끝나면 안되고, 우리 춤의 그 시대 시대 생활이나 몸짓이 축적되어 춤이 되었듯이 제가 전수받고 추고 있는 이 춤도 시대정신과 막 부닥치면서 다시 극복이 되면서 이렇게 잘 살아나서 이 시대 현대의 춤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이 또 제가 해야 될 일 같습니다.”(KBS-TV의 「TV명인전-이애주」편 1999)라고 했다. 한국춤의 정수를 계승하고 더욱 단단한 한국춤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이애주 선생의 막중하면서 절실한 책임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시대와 함께하며 당대의 춤으로 추어져야 한다고 했다.

‘생명 살림’과 ‘한밝춤’의 구현을 위해 춤추라

이애주 선생은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모두 춤출 수 있다는 춤의 본질을 사회화하고자 했다. 인간 뿐 만이 아니라 우주 만물이 온존하게 생명을 유지하고 발전하기를 희망하면서 다양한 현장에서 춤추었다. 성덕대왕신종 타종식에서 <살풀이춤> <관동대지진 한국인 희생자 추모굿> <독도지킴이춤> <바이칼 천지굿> <소나무살림기원춤> <북관대첩비 고유제> 등 생명의 현장에서 춤추었다. 바로 1년 전 2020년 봄에도 ‘사북항쟁 40주년을 기념하며 희생자들을 위로한 영혼 천도제’에서 춤추었다.

민교협  연석에서 장회익 백낙청 김진균 교수 등과 담소하다 파안대소했다.(사진=김영희)
민교협 연석에서 장회익 백낙청 김진균 교수 등과 담소하며 파안대소하는 이애주 (사진제공=김영희)

그리고 생명 중심의 정신과 그 구체적 방법이 우리의 전통춤 안에 이미 내재하고 있음을 ‘춤을 통한 길닦음’이란 화두로 제시하며, ‘한밝춤’을 추자고 했다. 예컨대 고구려 무용총 춤 그림에서 분출되고 있는 기운을 감지하고, 우리 춤은 몸 안 기(氣)의 흐름은 물론 몸 밖의 기와 상응하는 무아일체를 몸으로 느끼게 만듦으로써 어디에도 없는 깨달음의 춤-한밝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이다. 박상화로부터 전수받은 영가무도(詠歌舞蹈) 역시 이애주 선생이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생명 살림’의 사상과 한밝춤을 구현하는 방법이었기에 무대 공연에서도 제자들과 함께 여러 차례 실행했다.

명무(名舞)의 의미를 되새기며

문득 명무(名舞)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무용평론가였던 고 강이문은 명무에 대해 “모름지기 명무(名舞)란 천부적 자질을 가진 자라도 오랜 세월을 거친 피나는 규범적 학습과 보고 듣고 행하는 풍부한 미적 체험에 의해 적어도 한 시대 한 민족의 심미적 규범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춤』 1986년 6월호.)라고 정의했다. 그렇다. 명무란 춤이 처할 위치를 잘 알고, 한 시대의 복판에서 당대의 진(眞)과 선(善)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애주 선생은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전반에 걸쳐 춤춘 진정한 명무였던 것이다.

이제 이애주 선생은 2021년 5월 13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영면했다.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첫 번째 노제를, 과천의 승무전수관에서 두 번째 노제를 지내고, 모란공원까지 함께한 자리에서 동료, 후배, 제자들이 흐드러진 춤판을 벌였다고 한다. 선생은 영면했지만,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셨고, 춤추고자 하셨고, 또 당신의 춤을 전승하고자 하셨기에, 아마도 이애주 선생과 선생의 춤은 후학들에 의해 계속 회자되고 되짚어질 것이다.

5월 13일 장지에서 민주문화운동의 평생동지였던 채희완 한국춤비평가협회 회장이 진혼의 춤을 추었다. (사진제공=채희완)
5월 13일 장지에서 민중문화운동의 평생동지였던 채희완 한국춤비평가협회 회장이 진혼의 춤을 추었다. (사진제공=채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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