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43 샌프란시스코 중국극장 폭동과 국가인종주의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43 샌프란시스코 중국극장 폭동과 국가인종주의
  • 조복행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1.05.25 11: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엘리스 섬(출처 : britannica.com)
엘리스 섬(출처 : britannica.com)

1. 중국인 차별

뉴욕의 엘리스섬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엔젤섬은 유럽인과 아시아인을 대하는 미국의 차별적 태도를 극명하게 보여주던 곳이다. 이 섬들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이민심사를 하던 곳으로, 엘리스섬에는 1892년에 엔젤섬에는 1905년에 이민국이 설치되었다. 그런데 엘리스섬에서는 유럽인들에게 빠르게 입국을 허용한 반면, 엔젤섬을 통하는 아시아인들 특히 중국인들에게는 온갖 구실을 붙여 입국을 지연시키거나 거부했다. 중국인들은 한 두 달에서 삼년까지 구류를 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구류되어 있으면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사업은 파산할 수밖에 없었다.

백인들은 자신들이 싫어하는 철도공사 등 힘든 일에 중국인을 투입하여 노동력을 착취하면서도 그들이 낮은 임금으로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구실로 중국인을 차별했다. 1850년대부터 1880년대까지 중국인 차별법이 지속적으로 제정되었는데, 그 정점은 1882년에 제정된 <중국인 배척법>으로 이는 특정 민족의 이민을 금지한 사상 유례가 없는 법이었다. 1870-80년대에는 서부 곳곳에서 대량학살이 벌어져 많은 중국인들이 살해되었다. 한 마을에 사는 중국인 전체를 추방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1875년부터 78년까지 네바다주의 트럭키(Truckee)에서는 백인들이 중국인들을 쫓아내려고 수차례 시도했지만 거세게 저항하자 나중에는 중국인 마을에 들어가는 생필품을 차단하여 쫓아내는 방법까지 동원되었다. 캘리포니아 곳곳에서 1890년대까지 중국인 추방은 계속되었고 약탈과 방화도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관련기록에 의하면 캘리포니아에서 34개의 중국인 마을이 방화와 약탈을 당했다. 작은 폭력사건들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았고 기록되지도 않았다. 광기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차별이었다.

최근에 나타나고 있는 미국인들의 반중정서, 아시아 혐오정서는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우연한 일도 아니다. 미국인들과 서양인들에게 잠재돼 있는 뿌리깊은 반중정서와 아시아 혐오정서의 표출이다. 세계의 지성이라고 할 수 있는 칸트, 헤겔, 마르크스조차도 오래전에 서구의 우월성과 동양의 열등성을 말했다. 19세기 중반에는 아시아의 위협을 의미하는 황화론이 나돌았고,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뒤에 더욱 기세를 떨쳤다. 20세기 초반에 미국의 신문에는 황화론이 자주 등장하였는데, 중국.일본. 인도, 심지어 우리나라도 서양을 침략할 것이라는 마타도어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황화론은 서구열강이 아시아를 침략하기 위해 만든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 실체가 없는 것이었다. 황화론은 지금도 살아있다. 1980년대에 일본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때 미국은 강한 압박을 하였고 최근에는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고 있다. 아시아의 열등성과 위협이라는 어쩌면 상반되는 주장들이 서양인들이 아시아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중국인의 미국이민은 1848년에 시작된다. 19세기에 중국인들은 영국과의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으로 극도로 피폐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태평천국의 난으로 2천만 명 이상의 주민이 사망했는데 특히 전란이 집중된 남부지방은 그 피해가 막심했고, 미국이민은 주로 이 남부지역의 농민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이민은 골드러쉬가 한창이던 1850년대부터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한다. 1849년 323명에 불과했던 이민은 1852년 18,434명, 1860년경 35,000명으로 증가하고 1860년대 후반에는 6만여 명으로 급증한다. 이들은 특별한 기술과 지식, 언어능력이 없어서 세탁. 일용직, 구두수선, 선원, 수레꾼, 목수, 담배제조 등의 잡역에 종사한다. 중국인들은 낮은 보수를 받으면서도 장시간 일을 하였고 이는 유순하고 부지런하며 일잘하는 민족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아시아인들의 근면성과 손재주는 지리적. 문화적 이유가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직업소개하는 분들의 의견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농촌이나 공장에서 선호하는 외국인 근로자는 동남아시아 근로자들로, 이들은 매우 부지런하고 성실하다고 한다.

ㅇ
엔젤섬 이민국(출처 : britannica.com)

유럽계 이민자들은 점점 중국인들의 삶의 방식을 혐오하기 시작한다.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쉬는 5-6년만에 끝났고 대륙횡단철도가 완성(1869)되자 일자리가 부족했다. 백인사회에서는 중국인들이 적은 임금을 받고 장시간 노동을 함으로써 백인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번 돈은 모두 본국에 송금함으로서 경제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정작 어렵고 힘든 일을 기피하던 코카시안들은 막상 중국인들이 그 일자리를 차지하자 불만을 터뜨린 것이다.

중국이민은 캘리포니아 지역에 집중된다. 당시의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1870년에 중국인 63,254명중 49,310명이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있었고, 1880년 캘리포니아 인구 864,494명중에서 중국인은 75,132명이었다. 그 중에서도 중국인들은 특히 샌프란시스코에 많이 살았는데 , 샌프란시스코는 골드러쉬의 중심지였고 동서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중국인들이 캘리포니아에 집결한 것은 골드러쉬와 함께 당시 한창 대륙횡단철도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어서 값싼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서부의 철도공사는 중국인들의 기여가 절대적이었다. 1865년 리랜드 스탠포드는 앤드류 잭슨 대통령에게 "대륙횡단철도는 중국인들이 없다면 불가능한 공사"라고 말할 정도였다. 노동자 모집광고를 내자 불과 몇 백명의 아일랜드계 이민들이 지원했을 뿐이었고, 이들마저도 10명에 9명은 일주일만에 이탈하고 말았다. 이들을 대신해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투입되었지만, 처음에는 중국인들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신뢰할 수 없는 인종이라는 편견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인들에게 광산에서의 노동이 막혀 있었기 때문에 철도공사는 좋은 일거리였고 그들은 일을 매우 잘 했다. 게으르고 술고래로 소문난 아일랜드인들보다 중국인들은 손재주도 좋고 빠르고 술도 많이 마시지 않았다. 1865년부터 1869년까지 2만여 명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투입되었는데 이는 전체 철도노동자의 90%에 달했다. 중국인들은 유타주의 프로몬토리에서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까지 1,100킬로미터에 이르는 험준한 구간을 담당했고, 대부분의 일은 수작업으로 해야 했다.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터널을 뚫고, 다리를 놓고, 트랙을 깔아야 했으며 나무통을 타고 높은 산을 내려가 구멍을 뚫고 폭약을 설치해야 했다. 무거운 돌덩이를 온 종일 나르고 던지고 깨야 했다.

백인들은 아일랜드인들에게는 좋은 숙소를 제공했고 힘든 일은 주지 않았으며 임금은 중국인들보다 30-40% 더 주었다. 모든 중국인들은 백인들에게는 ‘타자’였고,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의 고난과 기여는 잘 평가되지 않고 있다. 공사감독관들은 아일랜드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중국인들이 잡답을 하거나 일을 게을리 하면 채찍으로 구타하였다. 살을 에는 추위, 40도를 넘나드는 뜨거운 더위, 홍수와 5미터가 넘는 폭설 등을 견뎌내면서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험준한 지형과 단단한 화강암 암반을 뚫는 일은 ‘등골이 부서지는’ 힘든 일이었다. 산사태, 눈사태, 폭발사고, 추락사고, 질병 등으로 천여 명 이상이 사망했다. 1867년에 2천여명의 중국노동자들은 저임과 장시간노동, 그리고 차별에 항의하는 파업을 벌였다. 그러자 경영자는 음식과 생활물자의 공급을 차단하여 파업을 진압했다. 중국인들의 희생으로 횡단철도를 개통한 리랜드 스탠포드는 비정하게도 중국인 노동자들의 이민을 반대했다. 그리고 이는 중국인 배척법의 도화선이 되었다.

ㄹㅇㅁㄴ
중국인 철도 노동자들

- 중국인 배척법

중국인 차별은 법과 제도에까지 반영되었다. 공권력에 의한 공공연한 차별이었다. 1854년 캘리포니아 주법원은 중국인들을 흑인. 인디언과 같은 인종으로 분류했다. 법정에서 백인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권리도 거부되었다. 백인들은 중국인들의 노동행태에 대해 끊임없이 주정부에 진정을 넣었고 정치인들을 압박했다. 정치인들로서는 선거에 이용할 수 있는 좋은 재료였다.

반중정서는 1860년대에 들어와 노골화하기 시작한다. 1862년에는 반 쿨리법 (Anti Coolie Act)이 제정되는데, 쿨리는 백인들이 중국인들을 비하하는 말이었다. 백인노동자들을 달래기 위해 광산에서 일하는 모든 중국인에게 매달 2.5달러의 세금을 부과한 법이었다. 당시 중국인 노동자의 월급은 3-5달러였기 때문에 이 세금은 그들의 생존을 어렵게 할 정도로 과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중국인과 아시아인 차별의 서막에 불과했다. 1868년에 미국은 중국정부와 자유로운 이민을 허용하고 무역에서도 최혜국 대우를 해 주겠다는 벌링게임 조약(Burlingame Treaty)을 체결했지만 이는 외교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미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던 현상들, 앞으로 벌어질 차별적 현상들과는 매우 다른 조약이었다.

1870년에는 귀화법(Naturalization Act)을 제정하면서 흑인에게는 귀화를 허용했지만 중국인들은 귀화자체를 거부하였다. 중국인은 흑인보다도 더한 차별에 시달렸던 것이다. “흑인은 미국 사회 안의 타자인 반면, 중국인과 아시아인은 미국 사회에 들어오지도 못하는 타자”였다(한겨례 신문 2021년 5월 21일).

1875년에는 페이지법(Page Act)이 제정되었다. 저임의 중국인 남성과 부도덕한 중국인 여성의 이민을 금지한 법인데 특히 여성이민금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초기 이민은 대부분 남성이었지만 여성도 점점 증가했다. 그러나 중국인 여성들에게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고 이들은 매춘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1870년에 중국인 63,254명중 4574명이 여성으로 전체 중국인의 7%에 지나지 않았고, 이들은 대부분 매춘에 종사하고 있었다. 페이지 법 시행 이후 여성이민은 더욱 감소했고, 이런 성적 불균형은 중국인들이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지 못하도록 하였고 중국사회를 총각사회로 만들었다.

1879년에는 15인 여객법이 발의되었다. 한 배에 15명 이상의 중국인을 태우면 안 되고 위반시에는 선장에게 벌금을 부과한다는 법안이었다. 이는 벌링게임법에 저촉된다고 하여 통과되지는 않았다.

1880년에는 안젤조약이 체결된다. 화이트 칼라를 제외하고 당분간 비숙련 중국노동자들의 이민을 금지한다는 중국이민 금지법이었다.

중국인에 대한 차별대우의 결정판은 1882년에 제정된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이었다. 이 법은 교사, 학생, 외교관, 관광객을 제외한 모든 중국 이민을 전면적으로 불허한 법안으로 특정 인종에 대한 최초의 이민금지 법안이었다. 이 법은 1892년에 다시 10년 연장하였고 1902년에는 무기한 연장으로 바뀌었다가 1943년에 가서야 폐지된다. 이 법이 제정된 후에 중국인들은 ‘축출‘의 시련을 당한다. 1880년대에 있었던 많은 학살사건들은 이 법의 영향을 받은 사건들이었다.

1924년에는 각국의 이민을 미국거주자의 2% 이내로 제한하는 이민법이 통과되었는데, 특히 아시아인 이민을 전면금지하는 법안이었다. 이는 특히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법안으로 일본인 역시 중국인처럼 번 돈을 본국에 송금만 하고 소비는 하지 않으며 일본인들끼리만 뭉쳐 산다는 이유때문이었다. 이 법의 뿌리는 중국인 배척법이었고 이를 아시아인 배척법이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 학살

중국인에 대한 차별은 법이나 제도뿐만이 아니라, 신체적 폭력과 살인으로 나타났다. 1870년대부터 서부 곳곳에서 중국인 학살 사건이 벌어진다. 1871년 10월에 로스 앤젤레스에서 중국의 라이벌 갱단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져 경찰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중국인들이 백인을 대량학살하고 있다는 헛소문이 퍼졌고, 이에 흥분한 500여명의 백인과 히스패닉이 차이나타운을 습격하여 19명의 중국인을 살해한다. 로스앤젤레스의 인구는 5천 7백명을 조금 넘었고, 이 중 중국인은 172명이었다. 10%의 군중들이 10%의 중국인들을 학살한 것이었다. 군중들은 중국인을 끌고다니면서 발로 차고, 칼로 찌르고, 고문을 가했다. 일부는 공개처형했다. 이 사건은 미국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린치로 기록되고 있는데, 당시 경찰이 6명밖에 없었던 치안 부족상황에서 대중재판에 의해 사건이 해결되던 시기였고 심각한 음주로 인해 사고가 빈발하던 때였지만 중국인에 대한 편견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 대학살을 촉발시킨 건 언론이었다. 1850-60년대까지만 해도 반중기사가 거의 없었지만 1870년대에 들어와 갑자기 많아졌고, 사고 직전에는 부정적 기사를 계속 게재하였던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중국인 대학살(출처 : ppaccone.medium.com)

1877년에는 샌프란시스코 학살사건이 벌어진다. 대륙횡단철도 완공후에 중국인들은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나서야 했고, 중국인들은 샌프란시스코로 몰려들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한 중국인이 15만 명이나 되었다. 1877년 7월 샌프란시스코 시청앞 광장에서는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노동자들의 모임이 열렸다. 여기서 반중 정서를 자극하는 발언들이 나오고 이것이 폭동으로 이어진다. 주로 중국인 세탁소가 많이 습격을 당했다. 백인들이 중국인 상점을 약탈하여 10만 달러 이상의 재산손실과 4 명의 사망자,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다.

1885년 9월에는 와이오밍주의 록 스프링스에서 폭동이 일어나 중국인 28 명이 사망하고 15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15만 달러의 재산손실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 역시 표면적으로는 중국인과의 일자리 갈등으로 벌어진 학살이었다.

1886년 2월에는 시애틀에서 노동기사단이 주동이 된 폭동이 발생하여 중국인 3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의 이상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쫓겨났다.

1887년에 오레곤주 헬스 캐년에서도 중국인 학살사건이 벌어져서 34명이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중국인들이 오레곤의 금광을 채굴했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노린 주민들이 중국인을 습격한 사건이었다.

2. 중국극장 폭동

중국인 차별은 중국인들의 삶의 모든 곳에 그늘을 드리웠고, 문화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870-80년대 샌프란시스코는 매춘, 도박, 살인이 난무했던 미국 제일의 범죄도시였다. 전국에서 모인 광부, 철도노동자들이 뒤섞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찰과 공무원은 이들 범죄를 제어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낮선 땅의 중국인들은 누구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고 스스로 자구책을 찾아야 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은 낮선 이국땅에 정착한 디아스포라의 슬픔을 위로해주고 강도와 도적들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는 안식처였다. 그런데 차이나타운에서도 많은 범죄가 발생했다.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을 지켜준 건 삼합회 등 6개의 조직이었고, 중국인들은 이 중 어느 하나에 가입해 있었다. 차이나타운은 중국 전통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기도 했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하면서 극장을 지었다. 중국인들은 캘리포니아를 금이 묻혀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금산(金山)이라고 불렀는데, 1852년에 금산극장을 세우고 광저우의 전문배우들을 초청해 경극 등 중국전통연극을 공연했다. 이후 극장은 부침을 거듭하면서 중국인들의 가장 사랑받는 오락공간이 되었다. 변변한 오락이 없었던 시절, 차이나타운에서 연극은 중국인들에게 최고의 볼거리였을 것이다. 또한 고국에서 온 전문배우들이 벌이는 높은 수준의 경극은 향수를 달래주고 힘든 일에 지친 심신을 위로해주는 최고의 오락이었을 것이다.

1870년대에 들어와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공연을 새벽 1시까지로 제한하는 ‘오락통금령’이 내려졌다. 차이나타운에만 적용된 법으로, 공연이 시끄럽다는 주민들의 민원때문이었다. 과거의 경극은 매우 시끄러웠다. ‘ 극장에서 왔다갔다 하는 많은 사람들과 배우들의 떠드는 소리, 등장할 때에 연주되는 악기소리 , 요란한 징과 북소리,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뒤섞여 마치 까마귀떼가 다투어 우는 것 같았다’. 목조로 된 당시의 극장은 방음도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주민들은 소음과 수면방해 등을 이유로 지속적으로 민원을 제기하였다. 차이나 타운내의 범죄와 마약등도 골칫거리였다. 당시의 공연은 공연시간이 보통 8시간 정도에 이를 정도로 길었다. 저녁 6시에 시작하더라도 1시에 끝내기가 어려웠고 어떤 경우에는 새벽 4시까지 계속되는 공연도 있었다. 따라서 공연을 1시까지로 제한하는 것은 공연 도중에 중단하라는 것이어서 극장주나 관객 모두가 수용할 수 없는 지시였다. 극장주는 법을 지키고 싶어도 관객들이 오히려 1시 이후에도 계속하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는 징의 사용을 금한다는 지시가 내려졌지만 중국인들은 듣지 않았다. 징을 치는 일이 범죄가 된 것인데, 나중에 벌금을 무는 것이 오히려 이익이었다 .

신문은 단속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자극적인 기사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극장측은 경찰단속을 무시했다. 1875년부터 경찰은 단속을 강화하였고 곤봉을 휘두르거나 권총을 발사하는 등 폭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은 중국인들은 유순하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시아인에 대한 이런 인식은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 최근 급증하고 있는 아시아인 혐오현상도 ‘직장이나 일상에서 아시아 아메리카인은 공격당해도 보복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한겨레 2021.5.21.일).

배우나 극장관계자 뿐만이 아니라 관객까지도 단속대상이었다. 관객들은 심각한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극장주는 늘 문앞에 경비를 세워두고 단속에 대비하기는 했지만 경찰은 갑자기 들이닥쳐 출입구를 잠근 다음 그들을 연행하기 시작하면 속수무책이었다. 패닉이 된 배우들은 분장실로 도망가고 관객들 역시 도주할 길을 찾아 여기저기로 뛰기 시작한다. 잘못하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 재미를 찾아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늘 경찰 출동에 민감했다. 경찰은 통금 위반만이 아니라 때로는 무기소지자를 찾아낸다는 이유로 관객들을 검문하기도 했다. 통금시간이 지나자마자 들이닥쳐 공연을 중단시키고 출구에서 나가는 관객 하나하나를 조사하였다. 무기를 소지한 관객은 몰래 칼과 총을 버리고 나왔다.

중국관객들은 단속이 계속되자 저항에 나섰다. 그들의 즐거움을 빼앗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중국인을 대하는 경찰에 중국인들 역시 폭력으로 응수했다. 무대에 오른 경찰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고 벤치를 부숴서 이를 던졌다. 경찰은 공포탄을 쏘면서 진압했지만 중국인의 불만은 점점 높아져 갔다 . 극장주들은 통금시간을 지키려고 했지만 관객들의 저항 때문에 쉽지 않았다.

극장주들이 통금시간에 맞추기 위해 공연을 몰래 줄이는 일도 있었다. 나중에 이를 알아챈 관객들은 무대에 벤치, 의자, 조약돌, 썩은 과일 등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관객들의 이러한 행태는 경찰들로 하여금 더욱 통금시간 준수를 압박하면서 단속을 강화하게 하였다. 이러한 지나친 단속은 중국인들의 강한 반감을 샀다. 차이나타운에만 적용된 통금은 중국인에 대한 차별이라는 인식을 낳게 된다. 언론은 시민들의 부상을 위로하면서도 경찰의 무력진압을 오히려 칭찬했다.

1878년 10월 어느 중국극장에서 새벽 2시에 종료한다는 예고를 하고 공연을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들은 1시에 들어와 해산하려 하였다. 관객들은 매우 흥분했고 전투적이 되었다. 경찰은 귀가를 명령했지만 관객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경찰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일부관객은 경찰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증원되고 공포탄이 발사된 후에야 진정이 되었고, 일부 관객은 구속되었다.

경찰이 단속을 나오면 관객들은 패닉에 빠지고 이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도망가는 것이었다. 앞문을 통해서 나가거나 창문을 깨고 도망갔는데, 도망가다가 서로 부딪혀서 발목이 부러지거나, 머리가 깨지거나 경찰에 저항하다가 갈비뼈가 부러지기도 하는 등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많은 관객이 입장했을 때 단속이 나오면 극장은 대혼란에 빠졌다. 관객들은 때로는 창문을 통해 지붕으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 공짜손님

이런 혼란을 이용하는 공짜 손님도 있었다. 옆 가게의 지붕으로 올라가서 창문으로 구경하다가 갑자기 "불이야"를 외치면 극장안의 관객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대혼란에 빠지고 서로 먼저 빠져나가려고 싸울 때 공짜손님들이 몰래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는 방법이었다

한 장의 티켓으로 두 명이 들어가려다 경비가 제지하자 갑자기 총을 꺼내 경비를 저격하는 사건도 있었다. 당시의 극장경비는 매우 위험한 직업이었다.

공짜손님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일도 있었다. 1884년 6월, 중국제화공협회에서 기금마련을 위한 공연을 개최했는데, 6천 장의 티켓이 팔렸다. 저녁공연이 시작될 때쯤 5-6백 명이 티켓도 없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은 낮공연 관객이 나올 때를 틈타 진입을 시도하였다. 입구에 검표원이 있었지만 2-3 명의 검표원만으로 밀고 들어오는 5, 6백 명의 관객을 감당할 수 없었다. 관객간에 충돌이 발생하였고, 경찰관은 이를 말리다가 폭행을 당했고, 범인은 바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러자 500여 명의 중국인이 2 명의 경찰관에게 돌멩이를 던지면서 저항하였고, 경찰은 다른 경찰의 지원을 받아 간신히 해산하였다. 또 경찰단속에 협조하는 중국인들을 갱단이 저격하는 일도 있었다.

금문교 (출처 : britannica.com)
금문교 (출처 : britannica.com)

사고

1876년 10월 30일에는 19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로열 차이니스 극장에서 인기배우를 위한 기금마련공연이 있었다. 1,500명을 수용하는 극장에 2,000명이 입장하는 성황을 이루었고, 관객은 대부분 중국인이었지만 일부 백인들도 있었다. 12시까지는 공연이 잘 진행되었는데, 12시경에 "불이야" 하는 외침소리가 들리고 관객들은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는 관객이 휴지통에 버린 담뱃불에서 발화되었다가 곧 진화된 것으로 화재로 발전하지는 않은 해프닝이었다 . 그러나 불이야라는 외침이 들리자 관객들은 공포에 사로잡혔고, 출구를 향해 뛰어나갔다. 극장안은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다. 2층 갤러리의 보호대가 부서졌고, 내려가는 계단은 꽉 막혔다. 비좁은 복도는 사람들로 꽉 차서 오도가도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계단 밑에 있던 육중한 이중문은 잠겨 있었다. 이를 간신히 부수고 나가려는 순간 쓰러진 문이 사람들을 덮쳤고,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다. 서로 나가려고 밀치다가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9명이 사망하고 500여명이 부상을 당한 처참한 사고였다.

그러나 관객들의 공포의 원인을 몰랐던 배우들은 공연을 계속하였다. 나중에 진짜 불이 아니라는 걸 안 관객들은 그제서야 사체수습에 나섰고, 쓰러진 문을 세우고 문밑에 깔린 사람을 구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언론은 사고소식을 보도하면서 중국인들의 전통장례식을 야만인들의 의식이고, 이방인들의 문화이며 중국인들은 이교도라고 조롱하였다. 그들은 중국인은 ‘아먄인’이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하였다.

극장운영에는 갱단이 개입했는데, 그들은 극장을 소유하거나 직접 운영하였으며 치안에 관여했다. 갱단은 폭력으로 경쟁극장의 공연을 방해했다. 어느 극장은 대륙횡단철도 공사에서 철수한 노동자 600여 명을 고용해서 라이벌 극장의 출입구를 봉쇄하고 관객입장을 막거나 공연통금시간 미준수를 경찰에 고발하기도 하였다. 중국 본토에서 온 스타로 인해 손님이 줄어들면 갱단을 동원하여 극장을 습격하여 아예 공연을 못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극장은 폭력배들의 싸움터이기도 했다. 라이벌 갱단이 상대극장에 가서 싸움을 벌여 영업을 방해하는 일도 많았다.

왜 경찰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샌프란시스코 경찰은 중국극장을 집요하게 단속했을까? 백인들은 차이나타운을 몇 차례나 습격했고 백인과 중국인들간에는 자주 싸움이 벌어졌다. 이러한 갈등을 관리하는 일은 경찰의 골칫거리였다. 이러한 귀찮은 업무에도 불구하고 차이나타운은 경찰들에게는 다른 수입을 챙길 수 있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차이나타운에 많이 유통되던 아편, 법을 어기는 자들에게 베푸는 호의는 경찰들에게는 부수입을 챙길 좋은 재료였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중국인에 대한 백인들의 편견이었다.

3. 국가인종주의

캘리포니아 전역에서 벌어진 1870-80년대의 중국인 차별과 학살은 중국극장폭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백인들의 반중정서와 경찰단속으로 인한 갈등이 절정에 달했고 중국인들은 이에 저항했다. 경찰들은 이를 야만적인 방식으로 진압했고 백인들은 오히려 이를 지지했으며, 신문은 마치 경찰들의 폭력을 부추기려는 듯이 자극적으로 보도했다. 기자들은 실명(바이라인)도 없이 무책임한 발언을 쏟아냈다. 샌프란시스코의 경찰, 언론, 시민들이 합세하여 만들어낸 사회적 린치였다.

오락통금은 소음의 규제만이 아니라 중국문화에 대한 탄압이었다. 백인들은 중국문화를 경멸하였고 언론은 그들을 이교도나 야만인으로 표현하였다. 중국관객들의 폭동은 중국인 멸시에 대한 중국사회의 항의이기도 했다.

19세기 후반의 중국인 혐오정서와 학살이 대중들에게서 나온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폭력인가, 아니면 법과 제도로부터 파생된 위로부터의 정치적 폭력인가? 둘 다일 것이다. 백인들 사이에 확산된 광범위한 중국인 혐오, 아시아인 혐오의 근저에는 인종적 편견이 자리잡고 있었다. 문화의 차이도 작용했을 것이다. 아시아인들의 집단주의적 사고, 돈을 중시하는 생활방식, 상명하복과 어른에 대한 존경심 등이 서양의 개인주의적 사고와 충돌하였을 것이다. 이를 악용한 것은 정치인들이었다. 그들은 반중정서를 선거에 이용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관련법률을 발의하고 이를 민중들에게 전파했다. 그리고 언론은 이를 부추겼다. 미국의 반중정서는 일자리(19세기 후반), 이념(매카시즘과 반공, 20세기 중반), 전염병(코로나 바이러스, 21세기) 등 다양한 원인으로 생겨났고, 이는 정치인들의 좋은 프로파간다의 재료였다. 19세기의 반중정서는 정치인들이 법과 제도를 활용하여 자행한 국가적 테러였고 언론이 가세한 사회적 린치였다. 미국문화 전반에 깊게 드리운 전염병과도 같은 반중정서를 ‘국가 인종주의(National Racism)’라고 부를 수 있다. (britannica.com). 중국인 배척 또는 아시아인 혐오현상은 인종을 위계화하고 나아가서는 그 인종이 속한 국가를 악으로 규정하는 ‘제도’였다. 유럽중심주의와 아시안들을 미개한 인종으로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에 기초한 강고한 이데올로기다. 이는 상당히 뿌리가 깊어서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잠복해 있다가 ‘필요’에 의해서 언제든 다시 솟아오르는 전염병과도 같은 것이다. 정치인들은 누군가를 적으로 만들고 이를 지지자들과 같이 공격하는 ‘주술적 동일시’ 방식을 택해 왔다. 누군가를 악마화하고 이를 혐오의 대상으로 삼는 일은 가장 효율적인 프로파간다이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