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삶을 기다리는 이야기 ‘굴뚝을 기다리며’
살면서 삶을 기다리는 이야기 ‘굴뚝을 기다리며’
  • 이미우 기자
  • 승인 2021.06.08 07: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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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케트에의 오마주, 2021년 한국사회의 현실풍자
굴뚝을 기다리며 포스터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 포스터(제공=극단 고래)

[더프리뷰=서울] 이미우 기자 = 극단 고래의 신작 <굴뚝을 기다리며>가 오는 6월 10일(목)부터 27일(일)까지 혜화동 연우소극장 무대에 오른다. 평일 8시, 주말 4시. 월요일에는 공연이 없다.

작가이자 연출을 맡은 이해성은 2021년 한국사회의 동시대적 실존을 보다 분명히 말하기 위해 새뮤얼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를 기다린다’는 모티브만을 차용, 굴뚝 위 노동자들의 이야기로 다시 만들었다. <굴뚝을 기다리며>는 작품 내내 실소와 폭소를 자아내는 언어유희가 계속되는 한편, 기계로 대체되는 인간노동의 문제, 고공에서 농성하는 사람들의 삶과 같은 오늘날 한국의 노동현실을 독특한 방식으로 증언하고 있다.

미소       청소 아저씨는 이제 노동에서 벗어나게 됐습니다. 아주 안전하게 된 거죠. 굴뚝 청소는 매우 위험한 일이라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청소 아저씨 대신 저 미소가 하게 됐습니다. 미소~.

나나       그럼 성자가 될 청소 아저씨는 이제 뭘 해요?

미소       청소 아저씨는 탈노탈노 노동탈탈탈 탈노동탈탈 탈노탈노 탈탈탈 죄송합니다. 한 번씩 언어 프로그램에 바이러스가 침투해서 버버벅거리게 되는군요. 아무튼 청소 아저씨는 집에서 편안하게 쉬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노동해방방방 해방해방해방방. 방해방해방해방해방해! 이런 괘씸한 바이러스 같으니라고. 죄송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여전히 고립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는 과연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코로나가 사라지기를? 기본소득이 도입되기를? 우리 역시도,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굴뚝에서 굴뚝을 기다리는 것처럼, 살고 있으면서도 삶을 기다리는 존재들이 아닐까?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두 인물의 이야기로 ‘실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베케트를 차용한 작가 이해성은 “지금 이 순간 여기, 우리의 실존”을 묻고 있다. 결코 유보될 수 없는 우리 삶의 현재적 가치와 그 현재의 순간을 힘겹게 통과하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것.

어쩌면 우리의 실존은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아주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 높은 곳에 있으면 낮아 보이던 곳이 그보다 더 낮은 곳에 임하면 높아 보이듯이.

'굴뚝을 기다리며' 출연진(사진=극단 고래)
'굴뚝을 기다리며' 출연진(사진=극단 고래)

고공농성의 역사는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목숨을 걸고 자신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서야만 이야기를 들어줄까 말까한 노동자의 현실은 무려 30년이 지난 2021년에도 계속되고 있다. 작가 이해성이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는 블랙리스트 사태 당시 광화문 광장 캠핑촌에서 함께했던 유성, 쌍차, 콜트콜텍, 파인텍 등 고공농성을 했던 해고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부터였다.

이후 2018년 겨울, 파인텍 해고노동자인 홍기탁, 박준호의 고공농성에 응해 15일간 함께 단식을 하면서 그는 단식자 천막에서 구체적으로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그리고 408일이라는 최장기 고공 농성자였던 차광호와 함께 지내며 그 경험들을 인터뷰하고 차광호가 고공농성 기간에 작성한 일기를 빌려와 읽으면서 굴뚝이라는 시공간을 체감하고 작품에 반영하게 된다.

그러나 <굴뚝을 기다리며>는 결코 노동 현실에 대한 고발만이 아니다. K-방역, K-팝, 오스카상 수상 등 한국 사회를 치장하는 화려한 문구 뒤에 숨겨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아슬아슬 오가며 줄타기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고공 농성자들에게 투영한 것일 뿐이다. 위트 있는 대사들을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주인공들의 재담을 들으며 한바탕 웃고 일어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당신은 아마도 스스로 묻게 될 것이다.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라고...

출연 이요셉 오찬혁 박현민 김재환 윤새얀. 공연시간 95분.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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