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44 거대한 분리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44 거대한 분리
  • 조복행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1.06.1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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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게르니카'(출처 : en.wikipedia.com)
피카소, '게르니카'(출처 : en.wikipedia.com)

거대한 분리

안드레아스 후이센(Andreas Huyssen)은 19세기 중반에 나타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분리를 ‘거대한 분리(Great Divide)’라고 부른다. 이는 학문으로도 전이되어 문학이론과 예술연구, 그리고 대중문화 연구 사이에 분열이 발생한다. 거대한 분리를 낳은 예술이념은 모더니즘이었다. 모더니즘은 대중문화를 집어삼키면서 배제의 전략과 오염에 대한 걱정을 통해 문화를 지배해 나갔다. 후이센은 거대한 분리의 담론은 19세기 후반과 2차 대전후에 예술의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고 말하는데,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네오 아방가르드를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더니즘에서의 오염에 대한 걱정은 세기말의 상징주의나 아르누보와 같은 ‘예술을 위한 예술’운동, 2차 대전후 회화에서의 추상표현주의, 문학과 문학비평에서의 고급모더니즘, 비판이론과 박물관 운동 등으로 나타났다. 예술은 대중적이고 상업적이며 오락적인 것으로부터의 오염을 저지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엘리트주의적인 고급예술을 잘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이 곧 모더니즘의 정신주의였다.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도 거대한 분리 현상을 지적하면서 문화산업의 부상과 상업화하는 대중문화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공연에서의 거대한 분리는 다른 예술보다 훨씬 전에, 이미 1660년에 영국에서 등장한다. 모더니즘과 같은 예술운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과 제도에 의한 강제적이고 정치적인 분리였다. 찰스 2세는 왕정복고에 의해 왕이 된 후, 청교도들이 폐쇄했던 극장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 구술연극과 오락적 연극을 구분하여 찰스 킬리그루와 윌리엄 다비넌트에게만 구술연극(spoken drama)을 공연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킬리그루는 킹스 극단을 조직하여 드루리 레인극장에 정착하고, 다비넌트는 듀크 극단을 만들어 도르셋 가든 극장에 정착한다. 이를 칙허극장(patent theatre)이라고 하였다. 칙허극장 이외의 극장은 비주류극장(minor theatre)으로 불렀고 이러한 극장의 분리는 1843년까지 계속된다. 구술연극은 이야기를 구술로 풀어나가는 드라마로, 오늘날 연극이라고 부르는 장르를 말한다. 구술연극은 1737년 제정된 공연법에서 정극 (정통연극, Legitimate Theatre)으로, 정극이 아닌 공연은 비정통 연극( Illegitimate Theatre)으로 불리게 된다. 칙허극장의 독점권은 1843년에 공연법이 개정되면서 폐지되지만 , 정극과 비정통 연극의 구분은 계속되었고 비정통 연극은 20세기까지 차별을 받아왔다.

찰스 2세(출처 : en.wikipedia.com)

정통과 비정통연극의 구분의 배경에는 정극, 즉 ‘진지한 연극’은 위험하지만 검열이 용이한 반면, 비정통 연극은 상업적이고 오락적이며 덜 위험하다는 인식에 기인한 것이었다. 정치적인 목적과 함께 연극의 오락성과 도덕성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이 작용했던 것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연극, 특히 세익스피어의 높은 문학성을 기반으로 하는 정극은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 되는 반면, 음악을 주요한 매체로 사용하는 비정통 연극은 가벼운 오락이었다. 당시에는 아직 예술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이었지만 이미 장르나 형식에 대한 위계화를 통해 연극을 예술적인 연극과 오락적인 연극으로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프랑스에서는 대중적인 연극에 대비되는 예술연극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이는 모더니즘, 특히 ‘예술을 위한 예술’운동과 연관이 있다. 폴 포르(Paul Fort)는 천박한 대중적 취향에 부화뇌동하는 대중연극을 배격하고 예술성이 풍부한 연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소수의 엘리트들만이 감상하는 품격있는 연극, 예술적인 연극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뮤직홀, 멜로드라마, 캬바레, 보드빌, 카페 콘서트 등의 많은 대중적 공연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예술연극의 개념은 이런 대중적 공연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것이었다.

대중연극과 대중 퍼포먼스

- 대중연극

18세기 영국에서 비정통 연극이라고 불린 대중적 공연은 프랑스에서 대중연극(théâtre populaire)으로 불리게 된다. 루소는 대중의 축제를, 메르시에는 대중의 연극을 제안하였으며 디드로도 대중연극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이후 대중연극은 정극에 대비되는 용어로 많은 나라에서 사용되기 시작한다.

일본에서도 대중연극이라는 용어가 일찍부터 사용되었다. 일본인들은 에도시대에 연극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에도삼좌의 가부키를 큰 연극(大芝居- 대가부키), 신사의 경내에서 하던 연극을 작은 연극(小芝居)이라고 하였고, 지방을 순회하면서 공연하던 연극을 유랑연극(旅芝居)이라고 하였다. 작은 연극과 유랑연극은 점점 내용과 형식이 다양해지고, 새로운 장르도 생겼다. 그리고 작은 연극과 유랑연극을 통칭해서 20세기 초반부터 대중연극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가부키나 정극등의 고급연극에 대비되는 대중적이고 서민적이며 오락적인 연극을 말하는 것으로 검극, 여검극, 레뷔, 스트립쇼, 무용극, 시대극, 신파극과 가부키에서 파생된 대중성이나 오락성이 강한 연극 등을 의미했다. 이들 장르들은 정극의 재료들을 차용하여 대중적 정서에 맞게 변형하거나, 정극의 형식을 사용하여 드라마를 전개하는 방식을 택하기도 하였으며, 정극과는 전혀 다른 형식의 오락을 보여주기도 했다. 콘서트나 코미디등과 같은 공연도 대중연극에 포함한다. 일본에는 대중연극 전용극장과 대중연극협의회 등의 단체가 있다.

이처럼 대중연극은 전통적인 연극에서 벗어난 연극을 말하는 것으로 그 범위는 매우 넓고 다양한 형식을 띤다. 1960년대부터는 대중연극에 대한 실천적.학문적 관심이 높아진다. 피터 브룩은 『빈 공간』(1968)에서 대중연극(popular theatre)을 ‘시대를 구원할 연극’으로 규정하면서 대중연극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섰다. 학문적으로도 대중연극의 미학적 성격에 대한 여러 연구들이 시작되었다.

- 대중 퍼포먼스

최근에 아담 에인스워스 등은 대중연극이라는 용어대신 대중 퍼포먼스라는 용어를 제안하였다.(Adam Ainsworth외, 2017, 『Popular Performance』). (popular performance를 대중공연이나 대중 퍼포먼스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서는 대중 퍼포먼스라는 용어로 번역한다). 저자들은 대중연극과는 다른 , 보다 포괄적으로 여러 가지 형식의 공연들을 지칭하기 위해서 이 말을 사용한 것이다.

대중연극이란?

대중연극에는 판토마임이나 코메디아 델라르테와 같은 즉흥기반의 비문학적 연극형식에서부터 대중지향의 상업극까지, 사회개혁지향의 진보적이고 정치적인 연극에서부터 거리행진과 축제 등 매우 다양한 장르들이 있다. 데이비드 메이어(David Mayer)는 1979년, 『서양대중연극』이라는 책에서 대중연극을 정의하였는데, 그는 대중연극을 정의하기보다는 여러 대중연극의 장르를 기술하는 것이 더 쉽고 효율적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패트리스 파비스는 무엇이 대중연극인가를 정의하는 것보다 무엇이 대중연극이 아닌가를 말하는 편이 더 좋은 방식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엘리트적이고 학문적인 연극이나 프로시니움 아치에서 벌이는 재현연극 등은 대중연극이 아니다. 메이어는 서양연극의 지배적 형식, 즉 작가와 작품, 개념적-미학적-구조적 통일성의 이념에 충실한 연극이나 관객의 수동성을 특징으로 하는 연극등은 대중연극이 아니라고 말한다.

대중연극은 ‘민주적이고, 프롤레타리아트적이며,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인 연극이다. 연극을 민중해방의 수단으로 보거나 체제저항적이고 정치적인 기능을 강조하는 관점이다. 이 경우에는 대중연극보다는 민중극이 더 적합할 것이다. 아우구스또 보알의 <억압받는 자의 연극>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보알은 전통연극, 즉 심리극이나 감정이입을 강조하는 연극은 작가나 연출가의 주관적인 관점만을 제공하기 때문에 사회변혁이나 저항, 개혁을 성취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억압의 시학이다. 세계는 확고한 지향성을 가지고 완성되었거나 완성으로 가는 도정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이런 세계를 잘 이끌어가는 가치만이 관객에게 소개되고, 수동적인 관객은 그들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해서 관객은 그들의 비극적 과오, 즉 사회를 변경시키려는 능력에서 소외된다. 보알은 이를 ‘억압받는 자들의 시학’으로 부르면서, 이를 해방의 시학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브레히트의 연극관과도 맞닿는다.

또한 대중연극은 예술에 관심이 없는, 오락을 선호하는 무지한 대중들의 공연이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이루어지는 대중오락을 말한다. 민중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민속극과 많은 대중오락도 대중연극에 포함된다.

에인스워스 등은 대중연극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 번째로 관객에 초점을 맞추는 연극으로 ‘대중의’ 연극이다. 관객은 노동자계급이나 가난한 사람들, 교육받지 못한 계층, 심미안이 없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로 가난한 자를 해방시키려는 무기로서의 연극이자 민주적인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연극이다. 커뮤니티 연극이나 응용연극등이 이에 해당한다.

세 번째로는 민속드라마, 대중오락 등이 이에 포함된다.

대중연극은 정극에 대비되는 장르로 코미디, 음악, 감정, 버라이어티, 즉각성, 지역성, 직접대면, 참여, 스펙터클, 기교, 감정, 섹스와 호러, 즉흥성. 자발성.비전문 배우들간의 협동, 관객과의 거리감 소멸 등의 특성을 지닌다. 한편 대중연극은 텍스트, 스크립트, 문학적 표현 등의 결여를 특징으로 한다.

다비드 테니어스, '태번' (출처 : en.wikipedia.com)
다비드 테니어스, '태번' (출처 : en.wikipedia.com)

대중 퍼포먼스란?

에인스워스 등은 대중연극과 대중 퍼포먼스를 약간 다르게 해석한다. 대중연극은 <관객>에 초점을 맞추어 왔는데, 대중 퍼포먼스에서는 공연의 <테크닉>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한다.

대중 퍼포먼스는 ‘거대한 분리’의 부정적 측면에서 파생된 공연, 그 동안 저속하고 낮은 미학적 수준 때문에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공연을 말한다(『Popular Performance』, 7). 다시 말하면 전통적 연극에서 벗어난 공연이다. 피터 브룩이 ‘극장이 아닌 공간에서 벌어지는 연극’이라고 말한 전통적 극장의 외부에서 벌어지는 연극이다. 술집(tavern)에서 출발한 뮤직홀, 보드빌과 같은 연극들, 야외공연, 거리연극 등이 이에 해당한다.

대중 퍼포먼스의 네 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배우와 관객간의 직접적인 소통이다. 제4의 벽을 없애고 관객이 공연에 참여하게 하는 직접 커뮤니케이션의 형식이다. 관객은 예술연극에서의 수동성에서 탈피하여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자로 바뀌게 된다

두 번째는 기교와 신선함, 새로움이다. 관객은 과거에는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기교의 퍼포먼스를 선호한다. 새로운 기교는 즐거움을 주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새로움은 과거를 비틀어서 현재에 맞게 창작하거나, 과거에는 없던 테크닉을 개발하는 것이다. 테크닉없는 공연은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단순한 연기나 노래는 관심을 끌지 못한다. 노래건 춤이건 아크로바틱이건 탁월한 기교는 대중연극의 일차적 조건이다.

세 번째는 현재에 근거한다. 대중공연은 직접성과 자발성을 기초로 늘 현재의 상황과 사건을 표현한다. 정극은 이미 완성된 대본을 재현하기 때문에 내용과 시제가 늘 똑같지만, 대중공연은 현재의 이야기에 뿌리를 둔다. 코미디나 캬바레에서 내용은 늘 오늘에 맞게 변형되어야 한다. 대중공연은 회를 거듭할수록 새롭게 수정되고 현재를 반영한다

네 번째는 배우와 역할의 상호작용이다. 배우가 공연하는 등장인물이 되는 것이다.

위의 논의들을 보면 대중연극과 대중 퍼포먼스가 모두 정극에 대비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의문이다. 에인스워스 등이 주장하는 차이는 <관객>으로, 대중연극의 관객은 가난한 근로자나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트들은 대중연극을 보지 않는 것일까? 엘리트들도 옴니보어(omnivore)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고급예술도 좋아하고 대중연극도 좋아한다. 대중연극은 전적으로 무학의 노동자계층만이 선호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가 아닐까? <기교>역시 대중 퍼포먼스에는 필요하고 대중연극에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배우와 역할의 상호작용 등에 대한 논의도 이것이 반드시 퍼포먼스에만 적용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대중 퍼포먼스를 강조하려고 대중연극의 성격이나 범위를 축소시킨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저자들이 연극 대신 퍼포먼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유추컨대 20세기 후반에 탄생한 퍼포먼스학 Performance Studies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저자들은 대중연극이라는 용어가 과거의 용어라고 말하고 있다. 퍼포먼스가 연극보다 훨씬 광범위한 장르와 형식을 포괄할 수 있고, 연극theatre이라는 용어만으로는 점점 증가하는 다양한 공연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theatre보다는 퍼포먼스를 사용해야 예술연극 이외의 공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의 이유는 그동안 관객의 취향이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노동자 계급과 엘리트 계급의 취향이 확연하게 구분되었지만 지금은 점점 옴니보어 취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왜 대중연극인가?

대중연극이나 대중퍼포먼스가 특별하거나 새로운 형식은 아니다. 이미 예술연극이나 정극에 대립하는 대중적 공연은 오래 전부터 모든 나라에 존재하고 있었고, 우리나라라고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예술연극의 뿌리는 대중연극으로 ,대중연극을 세련되고 정교하게 만든 것이 예술연극이다. 대중연극은 1960년대에 들어와 새로운 형식의 연극과 퍼포먼스들이 등장하면서 많은 관심을 받게 된다. 대중극(대중연극)이 학문적 명칭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대중연극은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온 용어이고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학문의 대상이 되었다.

대중연극이 이렇게 미학적.실천적 관심사가 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첫 번째로는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 때문이다. 모더니즘은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집착과 대중문화에 대한 적대적 태도, 일상에서 분리된 문화, 그리고 정치.경제.사회적 현상에 대한 무관심등으로 인해 점점 도전을 받기 시작하였다(Andreas Huyssen, 『After the Great Divide』, ⅶ). 아방가르드는 모더니즘이 지향해 온 순수예술, 고급예술, 삶과 분리된 예술을 지양하고 삶과 예술의 종합을 지향한다. 연극에서는 전통연극 또는 구술연극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연극운동이 시작된다. 아방가르드의 등장은 이를 더욱 강화한다. 두 번째로는 전통연극의 부정적 성격 때문이다. 언어에만 의지해서 작품의 재현에만 치중하는 구술연극, 정신성만을 강조하는 연극은 대중의 기호에서 멀어질 뿐, 삶의 다양성을 담아내지 못한다. 연극과 공연에서의 매체사용과 표현의 다양성, 자유로운 장소의 선택등은 창작자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과제였다. 관객과의 상호작용, 자유로운 소재등은 창작자들에게 매력적인 영감의 원천이었다. 세 번째로는 장소의 제약을 벗어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다. 대중연극은 장터든 거리든 가리지 않고 관객이 있는 곳으로 찾아간다. 반대로 장소특정적 연극처럼 작품에 적합한 특정 장소를 찾아나서기도 한다. 이처럼 대중연극은 극장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어디든 찾아가는 해방과 자유의 연극이다. 대중연극은 관객과 함께 한다. 네 번째로는 공연의 끊임없는 변화 때문이다. 공연은 잠시도 정체하지 않으며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선다. 다른 장르와 형식을 차용하기도 하고, 기존의 형식에 변화를 도모하려고 한다. 새로운 장르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건 공연의 특성이다. 공연은 또한 특별한 원칙이 없다. 일반적 규칙이나 확정된 창작원리가 없으며 배우에게는 정해진 연기법칙도 없다. 공연창작은 시대와 상황에 맞추어 늘 새로워져야 한다. 그리고 공연은 대중의 취향의 변화에 맞추어야 한다. 피터 브룩은 변하지 않는 연극, 굳어진 형식을 보물처럼 여기는 연극을 ‘죽은 연극’이라고 하였다. 전통은 가장 중요한 가치이며 정전(canon)을 가장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것이 죽은 연극이다. 세익스피어는 최고의 작가이며 그를 신앙처럼 믿고 따르는 것이 죽은 연극이다. 다섯 번째로는 퍼포먼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다. 문자와 문학에 집착해 왔던 과거의 문화에서 행위와 퍼포먼스로의 전환(performative turn)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퍼포먼스는 다양한 공연의 원천이 된다.

피터 브룩(출처 : euronews.com)

대중연극은 대중의 언어로 공연한다. 난해한 언어, 대중들의 정서와 유리된 언어가 아니라 대중들의 삶속에서 솟아나는 연극,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낮은 언어로 공연하는 것이다 . 대중연극에는 불결함과 외설스러움, 상스러운 표현과 동작도 있다. 그러나 이들 일탈적 요소, 비일상적 표현방식이 오히려 관객들에게 해방감을 부여한다. 관객들은 깔깔거리면서 발을 구르면서 연극에 참여한다. 대중들과 함께 하는 공연이나 축제는 에너지가 넘쳐나고 약동하는 생명력을 불러온다. 이렇게 대중연극은 대중의 정서를 반영하고 공연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곧 대중들의 기쁨과 슬픔이 된다.

대중연극에서는 특정계급이 문화를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공유한다. 공유문화(shared culture)다. 엘리트 계급이나 노동자 계급중 어느 한 계층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연극이다. 마치 텔레비전이 모든 사람을 위한 매체인 것처럼 대중연극은 모든 계급, 계층의 사람들이 뒤섞일 수 있는 매체다.

대중공연은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새로운 장르의 생성과 기존 장르의 발전의 과정에 관여하며, 공연의 생산과 소비네트워크를 형성한다. 미국에서는 민스트럴에서 보드빌로 보드빌에서 뮤지컬로 발전하였고, 다임 박물관에서 기형쇼로, 그리고 서커스로 발전하였으며 연극과 보드빌은 영화와 텔레비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엔터테인먼트 네트워크는 거대한 산업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대중연극은 다양한 영역의 사람들이 만나서 경험과 지식을 나누는 인적 네트워크이기도 하다. 민스트럴 매니저를 하다가 보드빌과 연극프로듀서를 하고 뮤지컬에 참여함으로써 과거의 경험을 미래의 자산으로 만든다. 장르. 산업. 사람간의 네트워크는 대중문화의 선순환에 중요한 기여를 한다.

대중연극이 이렇게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공연이 부단한 변화의 도정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한 한 방향으로의 변화라기보다는 변화 그 자체다. 하나의 공연양식은 다른 공연양식을 모방하고 흡수하여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공연은 사회와 대중의 변화에 맞추어 변해가는 살아있는 생물이다.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공연들은 과거와 미래, 장르와 장르사이에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다.

대중연극은 대중의 문화적 자발성을 기초로 한다. 누군가의 권유로, 부탁으로 억지로 극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과 즐거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가는 자발성이다. 따라서 대중연극의 관객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다. 그들은 박수를 치고 일어서서 환호하며 소리를 지른다. 관객의 즉각적인 반응은 퍼포머의 공연을 더욱 흥겹게 만들고 이를 통해 강한 상호작용이 생성된다. 관객은 공연의 관람자만이 아니라 창조자다. 공연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내면 퍼포머는 계획된 공연, 예정된 공연을 수정한다. 대중연극은 퍼포머와 관객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예술이다. 예술연극의 제4의 벽을 허물고 관객과 퍼포머가 직접 대면하는 연극이다.

대중 연극에는 고유한 스타일이 없다. 대중연극은 즉흥적으로 순간적으로 모습을 바꾸면서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대중연극이 현재에 뿌리를 두고 있고, 현재의 관객과의 소통을 통해 변해가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대중연극은 수많은 재료를 보관하고 있는 저장고다. 고급 공연에서는 필요한 모든 요소를 적재적소에 통일성있게 배치하지만 대중연극은 ‘ 양동이를 두드려 전쟁을 표현하거나 얼굴에다 밀가루를 발라 하얗게 겁에 질린 장면을’ 표현한다. 따라서 그들의 무기고는 무한정하다. 연극을 되살리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대중연극에서 재료를 찾곤 했다. 대중연극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저수지이고, 삶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는 만화경이다.

대중연극은 대중오락(mass entertainment)이다. 따라서 대중들을 불러낼 수 있다. 정통연극은 주인공의 심리묘사와 사건의 전개에 중점을 두고 , 관객에게 생각하게 하는 메시지의 전달 또는 삶과 인생에 대한 반추,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반성 등을 주제로 한다. 따라서 재미보다는 진지한 성찰을 강요한다. 반면에 대중연극은 기교, 신기함, 관객과의 어울림 등을 통해 신나고 재미있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이들이 결합되면 공연은 활기차고, 흥미진진하며 강한 상업성을 띠게 된다. 대중연극은 기교와 신기함, 스펙터클 등이 등장하는 오락적 퍼포먼스로서, 저속하고, 비정통적이며, 비공식적이고, 즉흥적이며, 상업적이며, 오락적이고 가벼운 연극이다.

이동동물원(출처 : sl.nsw.gov.au)

피터 브룩은 연극을 죽은 연극, 성스런 연극, 거친 연극(rough theatre), 살아있는 연극(immediate theatre)으로 분류하고 거친 연극을 대중연극의 주요개념으로 사용한다. 성스런 연극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연극이다. 껍데기에 불과한 현상계에 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잠재돼 있는 세계, 내면의 세계를 세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성스런 연극이다. 아르토의 잔혹극과 새뮤얼 베케트의 부조리극 등을 성스러운 연극의 예라고 본다. ‘도취되고 감염되며 형식을 통해서 말하는’ 연극이다. 죽은 연극은 굳어진 형식을 보물처럼 여기며 변화하지 않는 연극이다. 전통은 가장 중요한 가치이며 정전(canon)을 가장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것이 죽은 연극이다. 세익스피어는 최고의 작가이며 그를 신앙처럼 믿고 따르는 것이 죽은 연극이다. 살아있는 연극, 즉 즉각적인 연극은 ‘현재에 뿌리박은 연극’이다. 관객이 연기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현재에 몰입한다. 살아있는 연극은 관객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변해가는 연극, 놀이성을 회복한 연극을 말한다.

거친 연극은 삶의 숨결이 살아있고 권위적이지 않고 전통에 얽매이지 않으며 허세와 가식을 배제한 연극이다. 거친 연극은 소란스럽다. 삶이 살아서 꿈틀대기 때문이다. 성스런 연극에 성스런 에너지가 있는 것처럼 거친 연극에는 거친 에너지가 살아 숨쉰다. 거친 연극은 인간의 행위로, 사악함과 웃음을 모두 받아들인다. 거친 연극은 형식이나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대중들이 자유롭게 수행하는 연극을 말한다. 그렇다고 극장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길에서나 공원에서, 장터나 산에서 아무런 제약없이 공연하는 것, 극장의 제 4의 벽을 허물고 배우들과 어울려 노는 것, 그래서 형식을 파괴하여 삶의 에너지를 충만케 하는 공연을 말한다.

거대한 분리에 대한 저항담론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도 스타일의 문제에만 집착했을 뿐 본질에 접근하지 못했다. 모든 문화현상을 질(quality)의 문제로만 환원하는 것은 오염에 대한 우려의 징후다. 질을 숭상하는 모더니즘 담론은 이미 낡은 것이 되었으며 오늘날의 문화현상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고급예술과 대중문화의 경계는 소멸되었다. 오늘날의 문화를 질적인 하락으로 슬퍼하기보다는 새로운 문화의 과정, 기회의 등장으로 이해해야 한다(『After the Great Divide』 ⅳ).

공연의 질적 수준과 우월성, 정신성만을 강조하는 고급연극은 대중들의 기호를 담아내지 못한다. 오늘날 공연산업이 당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는 관객이다. 공연이 예술성만을 강조하여 삶이나 세상과 분리될 때, 그 공연은 연극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소수의 엘리트들만이 소비하는 연극이 될 것이다. 대중연극은 대중들의 구체적인 삶속에 살아있는 놀이들이다. 대중은 그 놀이를 통해 삶과 예술을 연결하고 타인과 교류하며, 세상속으로 나가서 대중들을 연극의 자장속으로 끌어들인다. 관객이 연극의 허기를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대중연극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형식을 가리지 않고 모든 대중연극에 나타나는 공통된 단 하나의 요소는 거칢(roughness)이다. 소금땀, 소음과 냄새가 있는 연극, 극장 아닌 곳에서 상연되는 연극, 수레와 마차, 가대위에서 펼쳐지는 연극, 관객이 선 채로 혹은 원탁에 둘러앉아 술 한잔 걸치면서 배우들과 주거니 받거니 참여하는 연극.... 언제나 시대를 구원하는 것은 대중연극( popular theatre, 번역서에는 민중극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대중연극으로 표기하였다)이었다’.(『빈 공간』, 124).

커피하우스, 플레저 가든, 태번, 퍼블릭 하우스 , 서커스, 디오라마와 파노라마, 이동동물원, 뮤직 홀 , 캬바레, 마술, 보드빌, 벌레스크 , 민스트럴 쇼, 레뷔 등 보통 엔터테인먼트라고 칭하는 다양한 공연이나 스펙터클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이들은 오늘날의 공연산업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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