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5)-독일에서 겪은 문화충격 이야기
[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5)-독일에서 겪은 문화충격 이야기
  • 김윤정 무용가
  • 승인 2021.06.27 21: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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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베강에서 바라본 드레스덴(c)
엘베강에서 바라본 드레스덴. (c)Bernd Kreutz

[더프리뷰=뒤셀도르프] 독일 생활 20년이 훌쩍 넘고 보니 그동안 문화가 달라서 겪었던 컬처쇼크 같은 신선한 경험들, 그리고 문화가 다르기에 가졌던 나의 어떤 선입견들이 깨지던 예상 밖의 순간들을 나는 기억한다. 무엇이든 처음 경험하고 느끼는 순간들은 각인되기 마련이다. 나는 독일에 처음 와서 나름대로 내가 좋아하던 독일의 작가나 철학가들의 정취를 느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독일에 와서는 정작 누구도 그런 사람들 이야기를 함께 나눌 사람도 없었고 더구나 관심도 별로 없어 보였다. 싸르트르가 그랬던가, 자신이 태어나서 자라고 사는 곳을 사랑하기는 매우 힘들다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먼 곳을 동경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린 시절 학교에서 음악 시간에 <로렐라이 언덕 Die Loreley>이란 노래를 배웠다.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난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의 시에 독일 작곡가 프리드리히 질허(Friedrich Silcher, 1789-1860)가 작곡한 이 노래를 부르며 가본 적도 없던 로렐라이 언덕이 얼마나 아련하게 신비한 환상으로 남아 있었던가. 그런데 정작 독일에서는 우리처럼 학교에서 이 노래를 배우지 않을 뿐더러 잘 모르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한국에서 지금도 학교에서 이 노래를 배우는지는 모르겠다.

로렐라이 언덕을 바라보며(사진=김윤정)
로렐라이 언덕을 바라보며 (사진제공=김윤정)

내가 그렇게도 한동안 빠져 있던 니체에 대해서도 비슷했다. 내 독일 친구들은 오히려 나보다 독일 철학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니체야말로 어쩌면 독일적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독일적인 어떤 사상들을 넘어선 사람으로서 너무나 광범위하고 초인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행보를 보면 전통적인 독일의 다른 학자들이나 철학가들하고는 확연하게 다르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니체 평전>을 보면 “그를 어떤 논증에 묶거나 세계관 안에 가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니체는 독일의 철학과 기독교, 도덕에서 빠져나왔듯 독일을 탈피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철학하는 방식은 예술을 하는 것과 같았다.” 라고 한다.

아무튼 나는 독일 사람들이 내가 그렇게 관심이 많은 독일적인 것들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이 놀라웠다. 물론 그때는 나와 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쩌면 피상적일 수밖에 없었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독일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서울

나의 독일 파트너가 한국에 왔을 때 그가 던지는 질문들에 당황스럽던 기억도 난다. 그가 던지는 질문들을 통해 평소에 내가 얼마나 우리 것들에 무심하고 무지한지를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지금도 우스갯소리로 그가 한국에서 나에게 들은 대답들은 대부분 “모르겠는데, 검색해봐,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 있어?”였다고 한다. 독일에서 여행을 다닐 때는 적어도 그가 들려주는 역사와 건축에 관한 이야기들로 여행의 즐거움이 배가되기도 했었는데 그런 것에 비하면 나의 한국 문화에 대한 지식은 초라하기 그지없었음을 고백한다. 서울에서 그의 질문들은 내가 평소에 별로 생각해 보지 않던 것들이었다. 지금은 질문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지하철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느냐. 이 건물 건축은 누가 했느냐 ,이렇게 독창적인 한옥 건축양식은 언제부터였고 왜 이처럼 과학적이고 미적인 건축양식을 더 이상 쓰지 않느냐, 삼성미술관 리움에 가서는 이렇게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에서 만든 뮤지엄에 왜 세계적 건축가들을 부르면서 한국 건축가를 함께하지 않았느냐, 너희 나라에도 분명히 훌륭한 건축가가 있을 텐데, 등등등….

서울 골목의 전신주. (c)Bernd Kreutz

그는 서울 강남의 화려한 거리는 다른 아시아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풍경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면서 동대문 주변의 시장들, 그리고 궁 위주로 보고 싶어 했다. 가끔 작품 때문에 한국으로 온 독일 친구들은 서울에 오면 전깃줄을 찍는다. 그렇게 마구 엉켜 붙어서도 제 기능을 하고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다는 듯이 말이다.

한 행상의 모습. 을지로에서(c)Bernd kreutz
한 행상의 모습. 을지로에서. (c)Bernd Kreutz

현대적이고 활기찬 도심의 거리에서 불과 한 블록 안에 펼쳐져 있는 시장의 풍경들, 작은 가게 안에서 졸고 계시는 주인 할아버지, 폐지를 줍고 계시는 할머니,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인쇄소에서 메르세데스 벤츠 카탈로그를 찍고 있는 광경(아마도 중고차 광고 전단지를 찍는 듯)부터 다양한 서울을 담은 그의 스트리트 포토는 심지어 나에게조차 이국적이었다. 서울은 최첨단의 현대적인 모습과 그 이면에 전혀 다른 모습의 다양한 상황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굉장히 초현실주의적인 도시라며 마치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서울의 한 공구상(c)Bernd Kreutz
서울의 한 공구상. (c)Bernd Kreutz

예술이 먼저인가 경제가 먼저인가

나에게는 독일에 아주 오랜 화가 친구가 있다. 그녀는 뒤셀도르프의 전통 있는 쿤스트아카데미(Kunstakademie, 공립미술대학)에서 공부했고 베네치아 비엔날레에도 참가했던 작가로, 지금도 작품이 꽤나 잘 팔리는 작가다. 그녀의 쿤스트아카데미 학생 시절은 요셉 보이스가 교수로 있을 때였다. 그녀의 지도교수였다고 한다. 그녀는 언제나 시대에 앞서는 참여적 정신의 요셉 보이스의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했다. 만나면 늘 에너지 넘쳐서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그녀가 요셉 보이스와 백남준 시절의(한때 백남준도 요셉 보이스의 초청으로 쿤스트아카데미 교수로 있었다) 추억을 이야기할 때면 비로소 그녀가 나보다 조금(?)은 나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몇 년 전 그녀는 뒤셀도르프 시내에 오래된 나무들이 잘려 나가고 큰 빌딩이 들어서는데 지역 예술가들이 모여서 이에 반대하는 집회와 이벤트를 한다며 함께 참여하자고 연락이 왔다. 나는 춤을 추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참여하면 좋을지에 대해 회의를 하고 돌아와 파트너인 베안트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자기는 예술가들을 늘 존중하고 존경하지만 가끔 너무 자기들 입장에서 세상이 아름답게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떤 환상에 빠지는 것을 본다고 했다. 경제가 살고 돌아야 예술계에 대한 지원도 이루어지는 것이라며, 예술가들에게 지원되는 예산이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게 아니라며 다시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는 내가 참여를 할 것인지 아닌 지에는 관심도 없어 보인다.

친구의 작품을 전시중인 Frauen Museum(사진=김윤정)
친구의 작품을 전시중인 Frauen Museum에서. (사진제공=김윤정)

늘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하고 결과는 어떻게 하든지 그냥 받아들이는 자세가 고마운 건지 서운한 건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늘 주정부 지원을 받아 활동하는 우리가 나무를 살리자는 취지하에 그런 경제에 이익이 되는 도시계획에 반대를 한다는 것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관점이었다. 이전 글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모두 자기 박스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다 보니 다른 관점의 시각으로 전체를 보는 게 쉽지 않을 때가 있다. 가끔 그런 그의 역발상적인 사고는 나를 당황시키기도 하고 또 가끔은 치열하게 논쟁에 빠지게도 한다. 물론 문화적 차이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의 역발상적 사고는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때로 그렇게 생각해 볼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어 보인다. 그동안 내가 기억하는 그의 다른 시각의 이야기들을 몇 가지 해본다.

그는 처음 독립해 자기 회사를 운영하게 되면서 직원을 채용할 때는 자기에게 배울 사람보다는 자기가 배울 수 있는 사람을 고용하는 데 집중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자신의 월급보다 높은 급여를 주어야 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또 때로 고학력 지원자가 자신의 월급 가치를 높이려 할 때는 “당신이 공부를 많이 한 것은 당신의 문제이고 나는 당신의 능력만큼만 보수를 책정한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회에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들에게는 나라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과연 자신은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도 생각하라고 한다.

언젠가는 독일에 사업차 들르신 지인이 베안트와 친분이 생겼고 한국에 와서 사업하는 젊은 사람들을 위한 강연을 부탁했다. 베안트는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건강하고 발전하는 사회는 성공했다는 기성세대들이 젊은 사람들을 앉혀놓고 가르치기보다는 그들의 소리를 들어주고 뒤에서 밀어주고 격려해야 한다고 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과거 경험으로 조언을 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가끔 동독 쪽으로 여행을 가거나 지나갈 때마다 잘 닦인 길, 통일이 되고 발전한 동독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낸 세금이 허투루 쓰이지 않고 이렇게 나라의 발전을 위해 쓰였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했다. 자기가 낸 세금을 그렇게 사회와 직접적으로 연관시켜서 뿌듯해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나름 신선했고 독일의 건강한 한 면을 보는 듯했다. 친구들이 세금이 너무 많이 나왔다고 불평을 하면 세금이 많이 나왔다는 건 그만큼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이니 자축을 하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언젠가 방문한 그의 친구가 어마어마한 책들을 보며 이걸 다 읽었냐고 하니 자기는 책을 꼭 읽기 위해 사는 게 아니고 그 책을 쓰느라 수고한 사람들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시하는 차원에서 책을 산다고 했다. 난민 수용에 관해서는 결코 장기적으로는 좋은 방법이 아니고 주변 나라들이 힘을 모아서 그들이 자신의 나라를 떠나지 않도록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며 반대적 입장을 취한다. 그러면도 난민이 하는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자른다. 이미 들어온 그들도 먹고 살아야 한다며, 정치적 견해와 휴머니즘은 별개라고 한다.

아른험(Arnhem) 예술대학의 자유로움

내가 졸업한 새로운 콘셉트의 학교 EDDC(European Dance Development Centre, 현재 명칭은 ArtEZ University of Arts)는 다양한 커리큘럼을 통해 학생들이 자기의 길을 찾아가도록 해주는 과정의 중요한 장이었다. 아르트 후헤(Aart Hougee)가 세운 이 학교는 암스테르담에 설립되었다가 나중에 아른험(Arnhem, 독일식으로는 아른하임 Arnheim)이라는 도시로 옮겨졌는데, 개교 당시부터 워낙 혁신적인 콘셉트의 예술대학으로 인식되던 학교였다. 졸업생 중에는 현재 베를린에서 제2의 피나 바우쉬라고 불릴 만큼 독일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자샤 발츠가 있고 그 외에도 전 세계에서 크고 작게 활동하는 무용가들을 키워낸 학교이기도 하다. 학교 안에 극장과 스튜디오는 학생들에게 24시간 개방되고 조명실, 음악실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며 특히 조명이나 음악 수업은 극장과 녹음실에서 일대일 수업으로 진행됐다. 그리고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안무가들이 학교에 와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하고 거기서 뽑힌 사람들은 무용단에 가서 작업하고 공연하는 것도 수업의 일환으로 간주되어 학교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렇게 외부 프로젝트에 함께 뽑혀 공연을 했던 이탈리아 출신 동기가 있었다. 우리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3개월간 머물며 컴퍼니 블루 단짜의 공연을 함께했었다. 늘 깊고 진지한 그의 태도와 정확하면서도 자신만의 색깔이 있는 움직임을 나는 경외감으로 바라보곤 했다. 졸업반이던 마지막 학기에 그는 안 테레사 드 케에르스매커가 이끄는 로자스 무용단에 오디션을 보러 간다고 벨기에로 떠났고 전 세계에서 모인 무용수들 속에서 거의 400대 1의 경쟁을 뚫고 무용단에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축하하며 작별 파티를 열어 주었다.

그렇게 모든 친구들의 부러움과 축하를 받으며 브뤼셀로 떠났던 그는 두 달 뒤 갑자기 학교로 돌아왔다. 반갑기도 하고 너무 뜻밖이어서 물어보니 무용단의 콘셉트와 취지가 자신과 맞지 않아서 정식계약 체결 직전에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꿈처럼 가고 싶어 하던 무용단에 힘들게 들어갔다가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박차고 나오는 용기에 놀랐다. 그러나 난 그의 느낌이 어떤 것일지 알 것도 같았다. 예술도 직장생활(?)이 맞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도 있는 것이다. 무용수도 안무가를 선택할 기본적 권리와 자유가 있는 것이다. 현재 그는 자신의 나라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단체를 이끌며 작업을 하고 있다.

독일의 교육 시스템

독일의 교육 시스템은 한국하곤 많이 다르다. 초등학교를 4년 다니고 5학년부터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 너무 이른 감이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회적 균형을 보면 합리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상위 20-30%의 아이들만이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대학에 갈 수 있는 인문계 학교 김나지움(Gymnasium)에 갈 수 있는데 그 후로도 성적이 안 되면 유급되거나 다른 실업계 학교로 가야 한다. 그리고 선행학습을 하지 못하게 하며 학교 외에 학원도 없고, 끝까지 살아남은 학생들만이 대학에 갈 자격시험을 보게 되는 것이다. 내가 가장 신기하게 생각했던 것은 학생들이 힘들게 노력해서 공부하는 걸 원치 않는 시스템이었다. 학교 수업에 집중하고 그걸 소화할 수 있는 아이들만 데리고 가겠다는 것이다. 그건 물론 독일 사회가 그렇게 모두 아카데믹한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업계 학교 과정을 마친 아이들이 취업도 빨리 되는 편이고 기술직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보수도 꽤 높은 편이다.

김나지움 졸업식(사진=김윤정)
김나지움 졸업식. (사진=김윤정)

아무튼 김나지움 과정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었기에 아들이 아비투어(대학입학 자격시험)까지 무사히 잘 마치고나자 나는 평범한 한국 엄마로서 기뻤다. 그런데 일단 1년 동안 ‘갭이어(Gap Year, 대학에 가기 전에 다른 경험을 해보는 1년)를 갖고 대학은 그 후에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정말 아들은 무전여행하듯 몇 나라를 돌며 외판원, 블루베리 농장, 공사장 등에서 일하고 자신의 힘으로 여행을 다니며 다른 문화들을 체험하고 1년 뒤 그야말로 거지꼴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독일이 생각보다 제법 괜찮은 나라라고 해서 나는 웃었다. 나름 호주 같은 선진국에서 태국까지 돌아다니며 사기도 당해보고 부조리한 일들도 겪고 고생을 많이 한 듯했다. 그리고 여행을 통해 자신이 깨닫게 된 것은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고 깨끗한 물로 씻을 수 있고 내 침대가 있다는 것만도 엄청난 행운이며 행복한 것이라고 했다. 돈은 어떻게 버느냐 보다도 어떻게 쓰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도 실제 경험으로 깨달았다고도 했다. 그리고 웬만한 일은 스트레스 받을 일도 아니더라며 제법 성숙해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독일어를 모국어로 쓰지만 동양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 만나는 사람마다 어디서 왔느냐,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는 질문들에 자신의 정체성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고 한다. 자기 안에서 어려움을 겪을수록 더 강해지는 동양인의 기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창의적이고 독립적인 서구식 교육을 받은 다문화적 배경에서 성장한 자신은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들은 정보공학(IT) 전공으로 대학을 시작했다. 그런데 1년 반이 지나면서 학교를 접고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음악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일단 대학은 마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게 어떻겠냐며 보통 부모들이 지닌 뻔한 의견을 내 놓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후회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지만 반대로 대학을 마치지 못한 사람들이 나중에 후회하는 건 보았노라며 궁색한 조언을 해주었다. 그런데 나의 독일 파트너는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모를 때 또는 가야 할 방향을 잡지 못했을 때 대학에 가는 사람도 꽤 많은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확실 하다면 그 일을 하면 된다고 했다. 자신이 만난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대학 덕분에 성공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며 대학에 너무 큰 의미를 두지 말라고 했다. 현대사회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카데믹해야 한다는 이미지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시간과 돈을 낭비하게 한다고 했다. 학벌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생에는 다 때가 있으니 공부할 수 있을 때 하면 좋겠다 하니 아들은 공부가 하고 싶을 때, 그때가 ‘때’라며 그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독일은 한번 아비투어를 하면 언제고 다시 대학에 갈 수가 있다. 그리고 아비투어는 꼭 대학을 위한 교육만이 목적은 아니라며 자기는 김나지움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사물을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힘도 학교에서 배운 거라고 했다. 독일 학교는 논리적인 토론을 워낙 중요시해서 그런지 무엇 이든 끝까지 논리적으로 토론하려는 통에 나는 가끔 진땀을 흘린다.

아들이 김나지움에 다닐 때 1년간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가게 되었을 때이다. 가기 전 선생님이 주는 주의사항을 듣기 위한 학부모 미팅이 있었다. 미국에서 호스트 부모들이 유난히 독일 학생들을 힘들어 한다면서, 아이들을 책임지려면 각 집마다 규칙도 있고 하니 그냥 따라줘야 하는데 끝까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서 힘들다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장려되는 ‘끝장토론 문화’가 다른 문화에서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워낙 독일 학교들도 외국 학생들이 많은데 아들이 다니던 김나지움은 외국인 학생이 거의 없었다. 아들 말에 의하면 독일 사람들은 은근히 선입견이 있어서 자신이 아무리 영어랑 독일어를 잘 해도 절대 최고 점수를 주지 않는다며 불만을 토로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어차피 그런 시련도 네 운명이고 헤쳐 나가야 할 문제라고 했다. 어느 날 학교 수업 중에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학교에서 연락이 와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방금 독어 선생님 앞에서 받은 성적표를 던져 버리고 절대 인정할 수 없다고 하고 나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독어 시험이 수학처럼 답이 나와 있는 게 아니고 어떤 논설문이나 책을 읽고 분석해서 쓰는 것이기 때문에 그 성적의 기준은 나름 선생님의 판단이고 권한이므로 학생의 관점으로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침착하게 이 세상은 다 네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각 개인의 논리에 맞는 공정함이 항상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논리적으로 정당하지 않아 싸워야 할 때가 있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다고 했다. 다행히도 선생님은 아들이 그 성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박한 논리를 인정, 문제 삼지 않고 점수도 올려 주었다. 나는 그 와중에도 너의 행동은 절대 옳은 일은 아니었고 네가 운이 좋았다고 했다. 참 교육이란 게 어렵다. 정답은 없고 내가 생각하는 적절한 답은 그저 많은 답 중에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김나지움 졸업식에서 합창하는 학생들. 아들이 노래를 만들고 피아노 반주도 했다.(사진=김윤정)
김나지움 졸업식에서 합창하는 학생들. 아들이 노래를 만들고 피아노 반주도 했다. (사진=김윤정)

아들은 대학을 중단하고 지금은 베를린에서 음악을 하며 독립적으로 살고 있다. 어차피 아들에게 다른 사람의 의견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사실 정답이긴 하다. 그리고 스스로 택한 길을 가야 스스로 책임질 수 있고 언제고 다른 길을 선택할 권리도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발 하라리의 한 문장으로 마무리하겠다.

“우리 삶의 질은 서로가 각자 자신에 대해 얼마나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느냐에 좌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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