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45 뮤직홀(1)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45 뮤직홀(1)
  • 조복행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1.06.29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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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뮤직 홀 (출처 : historic-uk.com)
영국의 뮤직 홀 (출처 : historic-uk.com)

영국의 뮤직 홀과 미국의 보드빌은 19세기 후반에서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텔레비전과 영화에 왕좌자리를 물려줄 때까지 영국과 미국의 대중문화를 지배한 가장 인기있는 대중연극이었다. 뮤직 홀과 보드빌은 하나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드라마를 전개하는 오늘날의 공연과 달리 음악, 서커스, 코메디, 마술, 짧은 드라마 등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보여주던 버라이어티 쇼였다. 뮤직홀과 보드빌은 그 형식이 매우 유사했고, 프로그램에서도 상호 영향을 주고 받았으며, 배우들을 교차로 초청하였고 운영방식에서도 서로를 모방하였으며, 심지어 배우들의 파업에서도 유사한 모습을 보였다.

빅토리아 시대는 근대적인 형태의 대중 엔터테인먼트가 시작된 시기다. 그 중에서도 뮤직 홀은 대중들의 오락욕구를 반영하여 전통적 문화형식들을 통합한 문화의 용광로였다. 전통적 대중오락의 요소들을 집대성한 공연이었고, 과거의 유산들이 살아있는 ‘유산문화’이자 다양한 형식의 엔터테인먼트를 모아놓은 대중연극이었다. 자극적인 내용과 형식, 화려한 스펙터클, 배우들의 묘기, 익살맞은 코미디, 발레, 시사성있는 토크 쇼 등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든 콘텐츠를 끌어들였다. 오락에 중점을 두었지만 때로는 교육적인 콘텐츠를 도입하기도 했다. 뮤직 홀은 많은 문화의 지류들을 흡수한 거대한 저수지가 되었고, 여기서 생성된 새로운 에너지는 다른 문화형식들의 자양분이 되었다. 뮤직 홀은 1850년부터 1950년까지 지속되었지만 그 전성기는 1880년대부터 1919년까지 약 40년간으로, 이 때 대부분의 도시에는 뮤직 홀이 세워졌고 대중들의 중심적 오락으로 자리잡았다. 뮤직 홀은 많은 장르들을 압도하였고, 연극조차도 뮤직홀을 모방하려고 하였다. 연극의 ‘뮤직홀화(music hallization)’ 현상이었다.

뮤직홀은 노동자들의 오락으로 출발하여 저질의 엔터테인먼트라는 많은 비판을 받았고, 사회개혁가들의 끊임없는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뮤직 홀은 점점 내용과 형식을 개선하고 상업화함으로써 중산층까지를 흡수하는 대중문화로 발전하였다. 뮤직 홀은 규제와 개혁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대중들의 취향과 선호를 잘 흡수했던 대중연극이었다. 그리고 법과 제도에 의한 외부적 강제와 자발적인 노력으로 점점 근대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로써 뮤직 홀은 최초의 근대적 형태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출발점이 된다.

뮤직홀의 인기가 상승하는만큼 사회적 논란거리도 많았다. 19세기의 중요한 사회문제는 술과 매춘이었다. 이 문제는 이미 18세기 초부터 시작된 것이었지만 19세기에 들어서도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19세기 영국에서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급격한 인구이동과 사회의 변화가 이루어지면서 사회적 혼란이 극심하던 시기였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사회개혁운동이 다방면에서 일어났다. 여성참정권이나 어린이 노동 등 약자들의 기본권에 대한 논의가 중요한 의제였지만 술과 매춘 역시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였다. 술과 폭음, 매춘은 영국인들의 삶의 모든 방면에 영향을 미쳤고, 엔터테인먼트에서는 더욱 그 영향력이 컸다. 술과 매춘은 펍이라고 불리던 태번과 플레저 가든, 극장, 뮤직 홀 등에서 성행했고 이를 근절하기 위한 많은 법적 제도적 조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는 공연과 엔터테인먼트 산업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1689년의 진 전염병 : 영국에 광기를 불러온 마담 제네바

(출처 : drinkinggroup.net)(17세기 영국에서는 진을 마담 제네바Madam Geneva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진을 뜻하는 네덜란드어 jenever에서 나왔다.)

술마시는 사회

- 미국

19세기 미국의 술소비는 현대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술소비량이 오늘날의 3배나 되었는데, 어린이들조차 술마시는 게 큰 흠이 아니었고 많은 사람들이 온 종일 취해서 비틀거리고 다녔다. 지역,젠더, 계급을 넘어 음주는 중요한 가정의 행사이자 사회적 의례였고 상업적. 정치적. 사회적 교류에 있어서 음주는 필수적인 행위였다. 18세기 미국에서는 매일 맥주나 와인이나 브랜디같은 강한 사이다를 마셨다. 집에서 술을 담그는 것, 이웃집에 가서 술맛을 보고 샘플을 가져오는 것은 주부의 중요한 일이었다. 이웃집을 방문하면 아무리 이른 아침이라고 해도 술마시기를 권유하는 것은 일종의 예의였다.

병에 걸리면 치료제는 술이었다. 감기, 열, 소화불량, 염증, 뱀에 물렸을 때, 동상, 다리골절, 기타 많은 병에 술은 최고의 처방이었다. 여성은 럼주나 브랜디, 와인을 마셨고 남성은 위스키 같은 독주를 마셨다. 교회조차도 가정사나 의료행위에서 술소비를 권장하였다. 결혼식, 장례식, 세례 및 기타 의식에서 술을 마셨고 평신도만이 아니라 목사도 술을 마셨다. 교회에서 주취는 죄로 여겨졌지만 목사들은 술은 ‘신의 선한 창조물’이고 적당한 음주는 권장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이처럼 술은 미국의 사회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남자들이 모이는 곳에는 늘 술이 있었다. 마을의 회합이나 정치행사에서도 술은 필수였고 남성들이 작업능률을 올리는 데는 술이 최고였다.

과거의 술집은 여행자들의 안식처였고 주민들의 만남의 장소이자 문화 공동체의 공간이었다. 술집은 점점 여행자들의 휴식공간에서 주민공동체의 공간으로 변해갔다. 술집은 주민들 삷의 중심이 되어갔다. 사람들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면서 거래를 하고 마을의 정보를 교환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술집이 교회옆에 있어서 일요일 예배후에는 술집으로 가는 것이 정해진 경로였다 . 술집은 또한 커뮤니케이션의 중심지였다. 신문이 비치되어 있었고 각종 정보가 교환되었다. 모든 사람들은 ‘술병앞에서 평등’했다.

초기 식민지 시대에는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지 않았다. 청교도의 교리가 사람들을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증류주 생산기술이 개선되고 노동자와 기계공들이 많은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음주는 급격하게 증가했다. 음주풍습은 미국의 독립과도 관계가 있었다. 미국독립이 식민지 사회의 계급구조를 해체하는 역할을 하였다. 미국은 점점 공격적이고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로 변화하였고, 음주도 이러한 자유와 해방의 한 형태였다. 그러나 음주로 인한 피해는 엄청났다. 가정폭력, 살인, 강도, 근친상간, 성적 방종, 빚, 나태 등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폭음은 단순한 오락과 건강의 문제가 아니었다. 경제.사회적 격변의 시기에 폭음은 사회질서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었고 진보와 근대화에 대한 방해물이었다.(Theatre Culture and Temperance Reform in Nineteenth Century in America, 1-10) 그러자 교회와 시민사회는 광범위한 금주운동을 벌였다. 1825년에는 미국금주협회가 결성되었고, 사회개혁론자들은 사회의 진보는 전적으로 새로운 가치관에 근거해야 하고 전통적 태도에서 탈피하여 근면.검약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각성 운동’을 시작하였다. 음주는 이런 새로운 정신과 상반되는 행위였다. 금주운동은 19세기 중반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이슈였다.

금주운동은 연극과 문학에서도 중요한 문제였다. P.T.바넘은 1844년 아메리칸 뮤지엄에서 <주정뱅이 Drunkard>라는 작품을 공연하였는데, 이 작품은 <엉클 톰스 캐빈>이 극화되기 전까지 가장 롱런한 연극으로 금주운동의 연극적 형식이었다. 이후 브로드웨이에서는 금주운동을 주제로 한 많은 연극들이 제작된다. 1920년에는 금주법까지 제정되었지만 많은 부작용을 낳은 채 실패하고 말았다.

- 영국

영국에서는 미국보다 폭음습관이 먼저 시작되었다. 영국에는 1720년경부터 1750년경까지 진 광풍(Gin craze)이 있었다. 값이 매우 싸고 언제 어디서나 구할 수 있어서 남녀노소 할 것없이 엄청난 양의 진을 마셔댔다. 심지어 개도 진을 마셨다. 진을 마시는 것이 영국인다운 행동이었고 영국인들은 그들의 음주습관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가난한 자들의 허기를 채워주었고, 추위로부터 보호해 주었으며 야만적인 빈곤을 잊을 수 있는 축복어린 도피처였다. 그러나 진은 런던을 파괴했다. 노동자들은 일하기 싫어했고 나태해졌다. 많은 범죄를 낳았고 사회는 사회.경제적인 비효율에 시달려야 했다.

Beer Street and Gin Lane (1751) (출처:wikipedia.org)

영국의 진 소비는 1688년 윌리엄 오렌지공이 즉위한 뒤 프랑스 브랜디를 금지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당시 영국은 종교적. 정치적 이유로 프랑스와 갈등상태에 있었는데 이런 이유로 프랑스 브랜디의 수입을 금지하고 네덜란드로부터 진을 수입하였고, 곧 영국에서도 진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윌리엄 오렌지 공은 네덜란드 출신이었고 진은 네덜란드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그리고 곡물생산의 풍작으로 곡물가격이 급락하자 이의 소비를 촉진할 수단이 필요했다. 진이 이를 대체했다. 진은 가격이 싸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당시에는 어떤 허가도 필요없이 독주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영국 전역에 수천 개의 진가게가 생겼고 이는 진 광풍으로 이어졌다. 1727년에 런던에 7,000여개의 술집이 있었는데, 그 중 절반이 진을 팔았다. 남녀노소 가릴 것없이 술을 마셨다. 많은 사람들이 낮부터 취해서 거리를 배회하였고, 10대의 어린 소녀들까지 ‘물고기처럼’ 마셔댔다. 폭음은 종교와 건강의 적이었다. 정부에서는 1729년부터 1751년까지 5차례에 걸쳐 이를 규제하는 법(Gin Act)을 공표했다. 진광풍은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었고 수많은 술집이 생긴다.

 

술집 그림

진 광풍은 많은 사회적 폐해를 낳았다. 폭력과 살인, 매춘이 급증했고 출산률도 낮아졌다. 건강에 해로운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도둑과 강도들이 들끓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이들 도둑을 의적처럼 여겼다. 진광풍의 모습은 공연과 미술에도 반영되었다. 발라드 오페라 <거지 오페라>에 등장하는 의적 맥히스는 진광풍이 불러온 당시의 사회상황을 묘사한 것이었다. 위의 그림은 윌리엄 호가스가 그린 <맥주거리(왼쪽 Beer Street)>와 <진 골목(오른쪽, Gin Lane)>이라는 그림이다. 맥주거리는 매우 평화로운 반면, 진 골목은 무질서하다. 좋은 맥주, 나쁜 진이라는 이미지가 태어났다. <진 골목>에는 앞 부분에 한 여성이 죽어가는 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술만 찾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장면은 당시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1734년에 주디스 디푸어(Judith Defour)라는 여성이 두 살난 여자아기를 구빈원에 맡겼다가 목졸라 죽이고, 아기가 가지고 있던 옷으로 진을 샀다는, 실제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이었다. 메아리 에스트위크라는 여성은 진을 마시다가 아기가 불에 타죽는 것도 막지 못한 사건도 있었다.

진 광풍은 정부의 연이은 규제와 곡물생산의 감소로 인한 생산감소로 1757년경에 매우 약화된다. 그러나 진소비는 약화되었지만 폭음풍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노동자들은 술로 고된 노동의 스트레스를 풀었다. 엥겔스는 『영국노동계급의 상황』에서 18-19세기 영국노동자들의 음주풍습을 기술하고 있다. 그들의 유일한 오락은 술과 섹스였다. 노동자들은 일에 치여서 여가를 즐길 시간이나 공간이 없었다. 그들은 온 종일 일했고 갈 수 있는 곳은 교회와 맥주집뿐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늘 닫혀 있었고 맥주집은 늘 열려 있었다. 교회는 재미가 없었고 맥주집은 재미있었다’. 온 종일 고된 노동에 시달린 노동자들은 술을 마시면서 세상사의 괴로움을 나누었다. ‘ 맨체스터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은 음주였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즐거움은 있어야 하지만 노동자들은 모든 즐거움으로부터 차단되었기 때문에 술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특히 아일랜드 이주민들은 술을 좋아해서 필요한 것을 사고 남은 돈은 술마시는 일에 썼다. 그들의 유일한 즐거움은 술마시는 일이었다. 남방인같은 태평스런 기질, 야만인보다 별반 나을 것 없는 상스러움, 그런 상스러움 때문에 공유하지 못하는 모든 인간적인 즐거움에 대한 경멸, 불결함과 가난, 이 모든 것이 아일랜드인의 음주를 부추겼다. 음주의 유혹이 너무 강해서 아일랜드인은 돈이 생겼다 하면 참지 못하고 술에 쏟아붇고 말았다. 아일랜드인만이 아니었다. 모든 노동자들에게 거의 유일한 쾌락은 술이었고 세상만사가 공모해 그들을 술로 이끌었다. 술은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과 괴로움을 잊게 해주는 유일한 오락이었다. 노동자들의 사교욕구는 술집에서만 충족될 수 있었는데, 다른 장소에서는 친구들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엥겔스는 19세기 대중들의 폭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폭음의 일반적인 경향은 차치하고라도 남자와 여자, 심지어 어린이까지 , 때로는 아기를 품은 어머니까지 술집에서 도둑, 사기꾼, 매춘부를 만났다. 그리고 아기를 업은 어머니가 아기에게 진을 먹이기도 했다( 『영국노동계급의 상황』 176-77)’. 이처럼 술집은 당시 영국의 서민들, 가난한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였고 음주는 오락이었다.

이에 대한 대안이 맥주집을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1830년에는 지방세를 내는 시민은 누구나 맥주의 제조와 판매를 허용하는 비어하우스법이 제정되었다. 그렇게 되면 경쟁이 생겨 맥주가격이 내려가고 독주 대신 맥주를 마시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맥주는 진에 비해 해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술소비는 줄지 않았다. 1840년대 글라스고에는 열 집가운데 한 집이 술집이었다. 기대와 달리 이 법 덕분에 허가를 받은 주인이 점포안에서 맥주를 파는 가게를 개업하기가 수월해졌고 집근처에 맥주집들이 생겨 폭음이 더 빠르게 퍼져나갔다. 거의 모든 거리마다 맥주집이 몇 개씩 있었으며 시골에서는 인접한 두세 집 가운데 한 집은 틀림없이 맥주집이었다. 스위스의 한 여행가는 영국에서는 곡식을 음식만드는 데보다 맥주를 만드는 데 더 많이 사용했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허가를 받지 않은 무허가 술집이 수두룩하고 무허가 양조업자도 많았다. 다른 대도시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대중적 술집을 펍(pub, public house)이라고 불렀고 이들은 건물의 모양도 개인집과 달랐다. 펍에서는 술만 파는 것이 아니라 오락을 제공하였다. 볼링, 쇠고리 던지기, 합창, 과일과 야채쇼, 화웨쇼, 아마추어 연극 등을 제공했고 인력정보, 각종 상거래의 상담, 친구들과의 모임도 가능한 곳이었다. 사회적 단절의 시대에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펍은 사교와 빛이 있는 곳이었고 초라하고 불결한 오두막집을 벗어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따뜻한 공간이었다.

영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술과 관계가 깊었다. 술집은 술과 오락을 제공하면서 점점 산업화된 것이다. 17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술집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고된 일에 지친 노동자들은 술집을 찾았고, 술집 경영자들은 술판매를 촉진할 방도를 오락에서 찾았다. 그러나 오락은 단순히 주류판매의 증대만이 아니라 술집을 문화적 공간으로 변화시켰다. 음악과 오락이 도입되면서 거칠기만 하던 주점은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퓨리턴들이 인간을 타락시킨다고 믿었던 엔터테인먼트는 오히려 인간을 구원하는 구원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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