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동시대적 고민과 감성으로 마주한 세 작품 – 제11회 대한민국발레축제
[공연리뷰] 동시대적 고민과 감성으로 마주한 세 작품 – 제11회 대한민국발레축제
  • 김혜라 춤비평가
  • 승인 2021.07.01 14: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루다 블랙토 'DYSTOPIA', UBC '트리플 빌', 국립발레단 '말괄량이 길들이기'

​​
​​이루다 블랙토, 'DYSTOPIA' (c)옥상훈

[더프리뷰=서울] 김혜라 춤비평가 = 올해로 제 11회를 맞이한 대한민국발레축제(6월 15-30일)는 ‘혼합된 경험과 감정’이란 슬로건 아래 11개 단체의 작품을 선보였다. 작년에 이어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 아래 대한민국의 모든 축제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어려움 속에서도 각자의 소명의식으로 축제를 개최하며 변화된 환경과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려 노력하는 중이다.

이러한 방향성에 맞추어 대한민국발레축제도 클래식 발레 레퍼토리와 테크닉 중심의 작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현상과 고민이 반영된 컨템포러리한 작품을 소개하면서 오늘의 감성으로 소통하고자 하였다. 그 중 환경문제의 고발을 넘어 지구의 종말을 경고한 이루다 블랙토의 <DYSTOPIA>와 고단한 시기에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 유니버설 발레단의 <트리플 빌>은 주목할 만하다.

어느새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거리두기나 마스크 착용 등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 적응해 가는 듯하나, 여전히 정신적 고립감과 스트레스 증가라는 영역만큼은 익숙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인문학적 토대에서 인간을 이해하려는 관심은 인류학적 관점으로 확대되어, 호모사피엔스로서 자연과 인간 공존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시대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루다의 작품 <디스토피아>(6월 19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한층 심화되어 생명체가 파괴되어 멸망해 가는 지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자연 훼손의 심각성을 환기시킨다. 나아가 안무자 이루다는 외형적으로는 환경문제를 내세우지만 그 이면에 꿈틀거리는 인간의 무지한 욕망을 비추며 결국 인간이 파멸로 이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작품의 구성을 살펴보면, 무대중앙 위에 놓인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시계를 통해 얼마 남지 않은 지구의 운명을 알리고 있었고, 오브제로 등장하는 페트병 커튼, 플라스틱 더미의 인간형상, 검정 쓰레기봉투, 마스크와 방호복으로 무장한 인간(댄서)은 병든 지구에서 살고 있는 생명체의 실상을 은유하고 있었다. SF영화에서 자주 접한 암흑의 디스토피아 세상을 연상시키는 무대에서 살아남은, 아니 살고자 하는 생명체인 댄서들은 단호하고 강직한 톤의 움직임으로 춤을 춘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에서 댄서들이 죽어가는 과정이 절박한 움직임으로 이어지며 지구의 상태가 심각함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여기에 영상을 활용한 연출이 암울한 분위기에 대비되어 회복(회귀)을 상징하는 서정적(하늘, 바다, 숲 영상)인 정서적 표현으로 사용되며, 복합적인 현실사회의 은유(활자 그래픽 등)로 작품의 콘텍스트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좁은 소극장 공간 객석 2·3층을 활용해 플라스틱 사람형상이 떨어져 죽고 쓰레기 더미가 쏟아져 내리는 각각의 장면은 전체 작품의 메시지를 더욱 입체적으로 조명하며 주제를 각인시킨다. 마지막에 모든 것이 폐허로 변한 무대에 방호복을 입고 등장하는 댄서(이루다)는 객석으로 천천히 걸어오며 마지막 경고를 한다. “제대로 숨 쉴 수 없는 디스토피아 세상이 상상만은 아니다”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이루다블랙토, 'DYSTOPIA' (c)옥상훈
이루다 블랙토, 'DYSTOPIA' (c)옥상훈

이루다의 <디스토피아>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코로나19가 뒤덮은 세상의 현실에 안무적 상상력을 잘 투영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주제의식에 부합하지 않는 발레 테크닉과 같은 장식적 요소를 배제하고 영화 스틸컷 같은 이미지와 어우러진 춤을 삽입한 현대적 미적 감각으로 구성된 연출은 작품의 속도감과 집중력을 한층 높였다. 무엇보다 다른 춤 장르보다 상대적으로 사회적인 문제를 다룬 적이 많지 않은 발레창작 분야에서 이번 이루다의 작품은 동시대의 문제와 고민이 반영된 작업으로 의미부여할 만하고, 그녀의 감각적인 연출과 창작력을 확인하게 한 시간이었다.

이루다블랙토_DYSTOPIA_(c)옥상훈
이루다 블랙토, 'DYSTOPIA' (c)옥상훈

한편 유니버설발레단(UBC) 예술감독 유병헌이 선보인 신작 <트리플 빌>(6월 19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은 복잡한 감정의 상흔을 담아 관객에게 위로를 전하려는 의도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유병헌은 ‘분(憤), 애(愛), 정(情)’이라는 주제 감정의 세밀함을 전달하기 위해 음악에 내재한 정서에 비중을 많이 두고 안무를 했다.

첫 번째 작품인 <파가니니 랩소디 Paganini Rhapsody>는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발레로 시각화하는 데 충실했다. 댄서들은 분(憤)의 감정이 절제된 동작 바리에이션(variation)으로 네오클라식 스타일의 발레를 선보였다. 다시 말해 특정 내용이나 역할보다는 음악과 춤이 대등한 관계로 상응하며 적절한 균형감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피아노 부분 듀엣의 사랑이 잘 묘사되었고, 유연한 상체곡선이 강조된 부분에 입혀진 바이올린 현의 소리는 가슴을 파헤치듯 절절하였다. 더불어 골반을 쓰며 미끄러지듯 변용된 동작도 라흐마니노프 곡의 감정을 분출하는 부분의 맥락과 일체감을 주었다. 전체적으로 춤과 곡의 잘 맞아떨어지는 조합으로 관객들에게 시청각적 만족감을 선사하였다. 굳이 아쉬운 점을 말하자면,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랩소디>가 너무 말끔하게 안무되어 ‘분(憤)’이라는 감정이 삭혀진 느낌이었기에 조금 더 격정적인 안무도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트리플빌_Paganini Rhapsody' (c)Kyongjin Kim (제공=유니버설발레단)
'트리플빌_Paganini Rhapsody' (c)Kyongjin Kim (제공=유니버설발레단)

두 번째 작품인 <버터플라이 러버즈 The Butterfly Lovers>는 중국의 민간설화인 <양산백과 축영대> 이야기를 드라마발레로 구성한 작품이다. 핵심 줄거리를 요약하면 중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비극적인 죽음 후 나비로 환생해 완전한 결실을 맺는다는 내용이다. 허잔하오(何豪)와 첸강(陈钢)이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 나비연인 Butterfly Lovers’ Violin Concerto>의 중국적 색채가 이국적인 풍취로 신선하였고, 무엇보다 빠른 내용 전개로 어떻게 보면 뻔한 스토리로 예측되는 지루함이 완화되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부모의 요구로 결혼을 준비하며 엇갈린 운명의 고통과 내적인 갈등을 춤으로 표현하는 부분이었는데, 아쉽게도 실제 작품에서는 이 부분이 집중되기 보다는 ‘사랑(愛)’을 이룰 수 없는 장벽 정도로만 조명되었다. 따라서 이 작품이 동시대적 공감과 설득력을 갖추려면 부모와 공동체의 가부장적 논리에 대비되는 신부 축영대의 고뇌 부분을 집중력 있게 다루었더라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트리플빌_The Butterfly Lovers' (c)Kyongjin Kim (제공=유니버설발레단)
'트리플빌_The Butterfly Lovers' (c)Kyongjin Kim (제공=유니버설발레단)

마지막 작품인 <코리아 이모션 Korea Emotion>은 한국인의 ‘정(情)’을 표현하고자 국악 크로스오버 음악을 선택했다. 한류 드라마 OST의 대표 작곡가 지평권의 앨범 <다울 프로젝트>(2014)에서 발췌한 ‘미리내길’ ‘달빛 영’ ‘비연’ ‘강원 정선아리랑’의 선율에는 한국인 고유의 ‘정’이라는 정서에 내재한 그리움과 ‘아리랑 고개’로 연상되는 강인한 한국인의 의지가 담겨 있다. 여기에 이미 <춘향> <심청> 같은 한국적 발레를 창작한 노하우와 노련미를 갖춘 유니버설발레단은 <코리아 이모션>에서도 한국적인 정서를 발레에 적절하게 녹여냈다.

'트리플빌_Korea Emotion'(c)Kyongjin Kim(제공=유니버설발레단)
'트리플빌_Korea Emotion'(c)Kyongjin Kim(제공=유니버설발레단)

문법(형식)이 완벽하면 그 문장 속 내용의 명확한 전달력이 강화되듯이, <코리아 이모션>은 내적 힘이 단단하여 이 위기의 시기에 우울한 관객들의 정서를 북돋는 위로의 춤으로 와 닿았다. 서두에서 언급하였지만 발레와 음악의 관계는 창작자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유병헌 감독은 오랜만에 발표한 신작 <트리플 빌>(세 작품 중 ‘파가니니 랩소디’는 2003년 초연작을 다소 보완한 것)을 통해 한·중·러 음악가들의 폭넓은 음악적 스펙트럼을 모던발레로 흡수하고 우리의 보편적 감정들을 적절히 정제, 희망의 메시지로 환원하여 전달하였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부분으로, 대한민국발레축제 개막작인 국립발레단의 <말괄량이 길들이기>(6월 19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가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단원들의 능숙한 연기와 기량으로 무사히 공연되었다.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드라마발레의 거장 존 크랑코(1961-1973,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예술감독)의 희극발레로 국립발레단이 2015년 국내 초연했으며 라이선스를 갖고 있다.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극중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인 표현(2막 1장, 남자 주인공 페트루키오가 말괄량이 카테리나를 길들이는 과정에서 지체장애인 흉내를 내며 괴롭힘)과 여성학대(밥을 굶기고 치마를 들추는 등) 장면으로, 이에 대한 지적이 국가인권위원회에 제기되었던 점이다.

국립발레단 '말괄량이 길들이기' (c)손자일
국립발레단 '말괄량이 길들이기' (c)손자일

이후 국립발레단측은 이미 작고한 존 크랑코 안무의 저작권을 가진 재단(John Cranko Gesellschaft e. V.)측과 장애인 관련 부분에 대한 합의를 거쳐 문제의 두 장면을 수정했다. 환상적인 세계를 다룬 <지젤>이나 <백조의 호수> 같은 낭만발레와는 달리, 비교적 일상적인 결혼에 얽힌 현실적인 내용이 친근감을 자아내어 발레애호가들에게 사랑을 받는 작품인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급변하는 시대적 감수성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에 휘말리게 된 것이었다.

국립발레단, '말괄량이 길들이기' (c)손자일
국립발레단, '말괄량이 길들이기' (c)손자일

다행히 국립발레단의 발 빠른 대처로 무사히 공연이 성사되었으나 창작자의 오리지낼리티와 과거의 작품을 재해석할 사회문화사적 의미의 입장에서 보면 작품의 수정이 과연 최선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예술의 딜레마이긴 하지만 예술작품의 본원성(originality)에 초점을 둘 것인지, 현대적 수용성에 방점을 둘 것인지는 쉽지 않은 과제이다. 결과적으로 창작자(존 크랑코)의 오리지낼리티도 고수하지 못하고, 시대적 인지 감수성의 명분도 갖지 못한 국립발레단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사건을 보며 공공단체로서 국립발레단의 신중한 레퍼토리 선택을 요청하게 된다.

국립발레단, '말괄량이 길들이기' (c)손자일
국립발레단, '말괄량이 길들이기' (c)손자일

결론적으로 코로나19 팬데믹 시대 우울감에 빠진 국민의 정서를 달래줄 수 있는 문화적 다양성 확보 차원에서 발레 관객의 증가는 춤 예술계 전반에 매우 긍정적인 시그널로 해석되며, 이를 더욱 발전시켜 시대적 공감을 이끌어낼 컨템포러리 발레가 대한민국발레축제를 통해 지속적으로 창작되고 지원되길 기대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