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시대를 앞선 서부활극의 주인공은 여성이었다
[공연리뷰] 시대를 앞선 서부활극의 주인공은 여성이었다
  • 한혜원 음악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7.08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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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지 않아도 감동적인 오페라 <서부의 아가씨>
[크기변환]12 atto3 scena1 - Fanciulla del west
3막 1장 무대 모습(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더프리뷰=서울]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1800년대 중후반 미국 캘리포니아. 서부개척시대라고 불리는 이 시기에 미국 전역에서 사람들이 금을 찾아 몰려들었다.

서부의 광산에서는 금이 나왔다. 금을 캐러 온 광부도 있었지만 은퇴한 보안관이나 현상금 사냥꾼이나 카우보이, 혹은 아내의 원수를 갚으려는 분노의 로맨티스트들도 있었다. <셰인> <장고> <황야의 7인>이 우리가 환호했던 주인공들이다.

주인공이 악당들과 맞닥뜨리던 장소는 바로 선술집. 바텐더가 술을 따르고 남자들은 도박을 하다가 총을 겨눈다.

캘리포니아의 작은 탄광촌에 자리한 선술집 ‘폴카’. 푸치니의 오페라 <서부의 아가씨>는 그곳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오페라 <서부의 아가씨>는 1910년 뉴욕 메트에서 초연되었다. 서부개척시대가 지난 지 오래 되지 않았을 때이기도 하고, 이탈리아의 유명 작곡가가 미국을 무대로 쓴 작품인지라 미국인들이 열광했음은 물론이다. 최초의 서부영화는 1903년 무성영화 <대열차강도>지만, 본격 서부영화들의 전성시대는 1950년대 이후다. 푸치니는 이들보다 훨씬 앞서나갔던 것이다.

리허설 장면(제공=국립오페라단)
리허설 장면(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무려 111년 전의 이 작품이 지난 7월 1-4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국립오페라단의 제작으로 올려졌다. 국내 초연이었다.

무대는 서부개척시대의 배경을 그대로 재현했다. 총 3막으로 이루어진 작품의 배경은 술집 ‘폴카’, 주인공 미니의 오두막, 그리고 산속이었다.

이 작품이 왜 111년 동안이나 국내에서 공연되지 않았을까. 1막 중반부까지도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아서일까. 여자라고는 미니와 2막에 잠시 나오는 인디언 여인 워클 뿐, 어두컴컴한 무대에 칙칙한 차림의 광부들만 수 십 명이 등장하기 때문일까. 궁전이나 사교계 배경의, 화려한 파티와 눈부신 드레스를 입은 여주인공들이 나오는 오페라에 친숙한 국내 관객들에게 지루하다는 인상을 줄 것 같아서였을까.

1막 1장 무대(제공=국립오페라단)
1막 1장 무대(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이번 국립오페라단의 시도는 매우 의미 있었다. 작품이 꼭 화려하지 않아도, 비련의 주인공이 없어도, 심지어 유명한 아리아들이 없어도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피에트로 리초의 지휘로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강렬하면서도 낭만 가득한 음악을 만들어냈다. 확실히 푸치니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현대적 느낌이 물씬 나는 음악이다. 미국의 인디언 민요와 재즈적 요소, 사교춤곡 같은 여러 스타일이 녹아들어 있다.

딕 존슨(라메레즈) 역의 마르코 베르티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딕 존슨(라메레즈) 역의 마르코 베르티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미니 역의 카린 바바잔얀은 강인한 서부 여성이자 로맨스를 꿈꾸는 아가씨를 적절히 연기했다. 미니는 광부들이 캔 금을 보관해주고, 드센 광부들을 성경 공부를 통해 교화시켜가는 정신적 지주다. 남성들은 모두 미니를 좋아하지만 그녀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미니는 어릴 적 아버지 같은 남성과의 사랑과 행복을 꿈꾸는 천상 소녀이기도 하다. 극중 미니의 나이가 18세라고 하니 얼마나 어리고 당찬 소녀인가.

미니 역의 카린 바바잔얀(제공=국립오페라단)
미니 역의 카린 바바잔얀(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딕 존슨(도적 라메레즈)을 맡은 마르코 베르티 역시 인상적이었다. 그의 소리는 명료하게 꽂혔다. 그가 3막에서 부르는 ‘자유의 몸이 되어 떠났다고(Ch'ella mi creda libero e lontano)’는 연인에게 자기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절절한 유언으로 마음을 울렸다.

가장 돋보였던 인물은 잭 랜스의 양준모였다.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는 보안관이지만 실상은 졸렬한 도박꾼인 잭 랜스. 고향에 아내를 두고 왔으면서도 미니를 탐하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 인물이다. 양준모는 이방인을 스캔하는 보안관으로서의 예민함, 미니의 마음을 빼앗은 존슨에 대한 질투심, 그리고 도박에 져 존슨을 눈앞에서 놓치는 분노를 탁월히 표현함으로써 잭 랜스 그 자체가 되었다.

잭 랜스역의 양준모(제공=국립오페라단)
잭 랜스역의 양준모(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그 외에도 애시비의 손철호, 소노라의 이규봉, 닉의 안대성 등 조연들 모두 노래와 연기가 훌륭했다. 우리나라에 정말 좋은 성악가들이 많구나 생각했다.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을 짚어본다. 배경은 캘리포니아인데 2막에서 눈이 온다. 심지어 산에서 길을 찾지 못할 정도로 폭설이 쏟아진다. 푸치니나 대본을 쓴 벨라스코가 캘리포니아의 기후를 잘 모르고 쓴 것 같다. 또 미니가 존슨과의 밀회를 위해 눈 오는 밤 집안일 도와주는 인디언 여인 워클을 밖으로 쫓아내는 장면이다. 인종차별적인 장면이나, 당시에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로 보인다.

2막 2장의 눈오는 장면(제공=국립오페라단)
2막 2장의 눈오는 장면(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천하의 도적 라메레즈가 처음부터 끝까지 미니의 도움을 받아 숨고 달아나는 전개도 당시로서는 파격이리라 생각했다. 서부의 아가씨는 미국식 신여성인 것일까. 메트 초연 당시 반응은 뜨거웠다고 하는데 당시 관객들도 미니의 캐릭터에 반했을 것 같다.

마음을 앗아간 남자를 질투하여 미니가 없을 때 죽이려다가, 미니의 간곡한 부탁에 미니와 함께 떠나보내는 광부들의 마음을 상상해 보았다. 그들의 상실감을 누가 위로할 수 있을까. 아무도 죽지 않고 주인공들이 사랑을 이루었으니 해피엔딩은 맞지만, 미니와 존슨 커플이 아닌 수십 명의 광부와 보안관은 슬픔 속에 미니를 보냈다. 사랑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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