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살인교사죄로 법정에 선 우리 시대의 리골레토
[공연리뷰] 살인교사죄로 법정에 선 우리 시대의 리골레토
  • 이용숙 공연평론가
  • 승인 2021.07.07 21: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페라를 보는 새로운 시선’의 ‘리골레토: 피해자와 피의자 사이’
만토바 공작에게 성폭행 당한 뒤 아버지 리골레토를 만난 질다(사진제공=오페라를 보는 새로운 시선)
만토바 공작에게 성폭행 당한 뒤 아버지 리골레토를 만난 질다(사진제공=오페라를 보는 새로운 시선)

[더프리뷰=서울] 이용숙 공연평론가 = 스스로를 ‘오페라에 미친 사람’이라고 지칭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코로나19가 시작된 2020년에 ‘오페라를 보는 새로운 시선’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상주연출가 조은비는 자신들이 공연 시기와 형식을 자유롭게 결정하고 싶어 ‘오페라단’이라는 표현을 피했다고 설명한다. 이들은 오페라 공연계가 극도의 타격을 입은 지난해에 풀랑의 <인간의 목소리>, 기형도의 작품을 토대로 한 <당신의 두 눈에>,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등 세 차례의 대면 공연과 한 차례의 비대면 공연을 성사시켰다. 그리고 2021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활동 지원작으로 선정된 <리골레토: 피해자와 피의자 사이>를 7월 3일 서대문구 연희동의 소극장인 연희예술극장 무대에 올렸다.

테너 아리아 ‘여자의 마음’으로 유명한 베르디의 인기작 <리골레토>는 <레 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의 <왕은 즐긴다 Le roi s’amuse>를 토대로 했다. 16세기 프랑스 국왕의 타락한 사생활을 비판한 위고의 원작이 베르디의 오페라에서는 정치적 사정상 17세기 이탈리아 만토바 공작의 이야기로 변형되었다. 딸이 세상의 전부인 곱추 궁정광대 리골레토가 딸을 성폭행한 공작을 죽여 복수하려다가 자신의 딸을 죽음으로 몰아넣게 되는 비극이다.

‘오페라를 보는 새로운 시선’은 이 작품을 레지테아터(Regietheater) 연출방식으로 새롭게 각색했다. 연출가가 자신의 의도를 담아 원작의 시대적‧공간적 배경, 인물의 특성, 극의 진행과 결말 등까지 모두 변형 가능한 레지테아터 오페라 연출방식은 국내에서도 드물게나마 볼 수 있었지만, 이처럼 오페라 원작에 새로운 극을 삽입한 과감한 형태의 레지테아터는 이제까지 만나보기 어려웠다. 유럽에서 2000년대 들어 본격화된 연극과 오페라의 ‘해체전략’이 국내 오페라 계에서는 아직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던 것이다. ‘음악으로 작곡된 가사는 결코 바꿀 수 없다’는 오페라의 기본 규율을 깰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오페라 장면 중간에 연출가가 창조한 새로운 극을 삽입하는 일도 거의 시도되지 않았다.

조은비, 최요한, 송우미가 함께 대본과 각색을 담당한 이번 <리골레토>는 2시간이 넘는 공연시간을 100분으로 압축했고, ‘현재’인 법정 드라마와 ‘과거’인 오페라 속 장면을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납치되어 성폭행을 당하고도 만토바 공작(우리 시대로 배경을 바꾼 이번 극에서는 공작이 아닌 ‘만토바 대표’로 등장한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는 리골레토의 딸 질다는 결국 공작을 살리고 대신 죽기 위해 살인청부업자의 칼에 뛰어든다. 소중한 딸에게 입힌 치욕을 응징하려는 리골레토는 살인청부업자 스파라푸칠레에게 만토바 공작의 살해를 의뢰하지만, 스파라푸칠레는 공작에게 끌린 여동생 맏달레나의 애원으로 공작 대신 질다를 죽인다.

딸의 시신이 든 지퍼백을 앞에 둔 리골레토
딸의 시신이 든 지퍼백을 앞에 둔 리골레토(사진제공=오페라를 보는 새로운 시선)

이 오페라를 보는 관객들은 한편으로는 사회적 약자인 리골레토를 동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리골레토의 비극이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리골레토가 평소에 젊은 공작의 악행을 부추기고 공작의 신하들을 독설로 조롱해 원한을 샀기 때문이다. “저 역시 리골레토라는 주인공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 범죄자인 동시에 희생자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중적 갈등상황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 분석해볼 수 있는 수단으로 법정드라마라는 형식을 떠올렸습니다.” 연출가 조은비는 레지테아터의 아이디어를 얻은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딸이 살해된 사건 이후에 리골레토가 살인교사죄, 그리고 귀족들에 대한 모욕죄 및 명예 훼손죄로 기소당해 재판이 진행된다는 설정을 만들어낸 것이다.

1백 석 규모의 소극장에 앉은 관객들은 현실의 재판이 진행되어 가는 동안 오페라 장면들이 보여주는 피의자 리골레토의 과거 행각을 마치 배심원들처럼 다양한 관점으로 평가한다. 리골레토를 단순히 살인교사범으로 바라보는 검사의 냉정한 시각, 비정상적인 삶의 상황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인지부조화’를 겪게 된 주인공 리골레토를 사회적 약자로 바라보며 도우려는 변호사의 시각, 그리고 객관성과 중립을 지키는 판사의 태도까지 어우러진 법정드라마 <리골레토>는 관객을 끊임없이 긴장시키고 몰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현재의 법정과 과거의 사건들을 감탄할 만큼 아귀가 맞도록 자르고 배열한 덕분이었다.

LED 바(bar)를 사용한 무대(무대디자이너 신상화) 및 조명의 변환을 통해 현실과 과거의 상황이 효과적으로 구분된 점이 집중도를 더욱 높였다. 일반 오페라극장의 프로시니엄 무대가 아닌 4면 객석의 가변형 무대를 선택했다는 점도 극적 효과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서채아가 디자인하고 제작한 의상은 전체적으로 심플하면서도 인물 각각의 개성을 단번에 설명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내외에서 리골레토 역으로 찬사를 받아온 바리톤 최병혁은 배역의 양면성을 탁월하게 드러내는 깊이 있는 가창과 연기로 극 전체를 이끌었다. 무대의 형태와 공간의 제약은 그를 좁은 우리에 갇힌 상처 입은 동물처럼 보이게 했다. 최병혁은 에너지를 현명하게 조절하며 리골레토의 좌절과 슬픔을 호소력 있게 펼쳐보였다. 만토바 대표 역의 테너 정제윤은 명료하고 힘찬 가창과 자연스러운 연기로 현대적인 만토바를 선보였다, 질다 역의 소프라노 임은송은 대표 아리아 ‘사랑스런 그 이름(Caro nome)’을 맑은 음색으로 뛰어나게 소화해 감동을 주었고, 배역에 어울리는 청순하면서도 강인한 이미지로 관객을 설득했다,

스파라푸칠레 역의 베이스 이승희, 맏달레나 역의 메조소프라노 한혜진, 몬테로네 역의 베이스 송나라 역시 주목할 만한 가창과 연기로 더 큰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만토바 대표의 가신들로 출연한 오페라 전문합창단 노이 오페라코러스(지휘 박용규)는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하며 극 전체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판사, 검사, 변호사 역의 배우 권회득, 송다미, 염창민도 극의 설득력을 높였다.

만토바 공작의 가신들과 맞서는 리골레토
만토바 공작의 가신들과 맞서는 리골레토(사진제공=오페라를 보는 새로운 시선)

관객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두 대의 피아노가 만들어낸 오케스트라 효과였다. 오케스트라 피트가 없는 소극장에서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지만, ‘포핸즈(four hands) 오페랄랄라’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음악코치 최요한과 조은혜는 원래의 피아노 악보를 효과적으로 편곡해, 관객이 오케스트라의 부재를 크게 아쉬워하지 않을 만큼의 파워와 디테일을 제공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한글자막이 전통적인 오페라 자막의 어투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대적 배경과 인물관계가 현대화되고 주인공들이 블루진, 셔츠 원피스, 형광색 재킷을 입고 등장하는 만큼, 번역자막도 구투가 아니라 현대적인 스타일의 언어로 바꿨다면 관객의 몰입도는 더 높았을 것이다.

결말 장면의 선택도 적절하고 참신했다. 스토리가 법정에서 시작되고 마무리되기 때문에, 아버지와 딸이 함께 노래하다가 딸이 목숨을 거두는 오페라 원작의 마무리가 이번 프로덕션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현재의 죽음이 아니라 ‘리골레토가 회상하는 죽음’인 까닭이다. 그래서 연출가는 시신이 든 검은 지퍼 백에서 질다가 걸어 나와 무대 주변을 돌며 피날레를 노래하는 것으로 설정을 바꿨다. 리골레토는 죽은 질다의 환영을 보고 환청을 듣는 셈이다.

살인교사죄로 법정에 선 리골레토
살인교사죄로 법정에 선 리골레토(사진제공=오페라를 보는 새로운 시선)

피아노와 함께 소수의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가 함께했더라면 음악이 더욱 풍성해졌을 수도 있겠지만, 공연의 소규모화를 요구하는 코로나 시대에 이번 <리골레토>의 연주방식이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예술가들의 실험정신과 높은 예술적 수준에 경의를 표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