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6)-쿠사마 야요이 전시를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들
[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6)-쿠사마 야요이 전시를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들
  • 김윤정 무용가
  • 승인 2021.07.1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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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피우스 미술관 입구의 쿠사마 야요이 설치작품(사진=김윤정)
그로피우스 미술관 입구의 쿠사마 야요이 설치작품(사진=김윤정)

독창성을 도둑질당한 야요이, 표절 오해를 받으면서도 그녀를 사랑한 조셉 코넬, 조셉 코넬을 알게 해준 앤 보가트의 뷰포인트, 뷰포인트는 원래 자신의 아이디어라는 나의 스승 메어리 펄커슨......

“중요한 것은 어디서 왔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가져가느냐이다.“

[더프리뷰=뒤셀도르프] 독일에서는 이제서야 록다운이 서서히 풀리면서 몇 달 동안 공연장, 전시장도 못가는 답답함이 그야말로 극에 달할 즈음 드디어 뮤지엄, 극장들이 서서히 문을 열기 시작했다. 공연을 하는 극장들은 아직은 대부분 스트리밍으로 하고 있고 막상 라이브 공연을 하는 극장들의 프로그램은 아직 눈에 띄는 게 없다. 나는 우선 베를린에서 열리고 있는 쿠사마 야요이(草間彌生, Yayoi Kusama)의 전시를 가보기로 했다. 독일에서는 언제나 예매하지 않아도 큰 문제없이 전시들을 봤었는데 쿠사마 야요이 전시는 적어도 이주 전에 온라인으로 예약을 해야 했다. 모두들 기나긴 록다운으로 인해 문화에 목말랐던 사람들이 몰리는 현상인 듯하다.

나는 가끔 고급 아파트 단지 또는 백화점이나 갤러리에 소장된 그녀의 작품들을 보아왔고, 생존하는 작가 중에 최고가로 팔리고 있고, 세계에서 제일 전시를 많이 하는 작가이며, 그리고 편집증적으로 무수하게 점을 찍는 작가 정도로만 알고 있었기에 전시를 보러가기 전에 좀 더 그녀에 대해서 알고 싶어 <쿠사마 야요이>라는 다큐 영화를 먼저 찾아보았다. 이 영화는 나에게 시작부터 엄청난 추억의 연쇄작용을 불러일으켰는데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에서 영화를 보는 동안 내 머릿속은 또 다른 필름이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일본 작가들 중 최초로 야요이가 60년대(1958) 뉴욕에 가서 치열하게 작업할 당시 그녀를 열렬하게 사랑했던 조셉 코넬(Joseph Cornell, 1903-1972) 이야기의 등장부터, 쿠사마의 전시에 왔다가 그녀의 아이디어를 가져가 성공한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나에게는 기억이 기억의 꼬리를 물게 했다. 여기서 잠시 미국의 초현실주의 작가 조셉 코넬에 얽힌 나의 추억 여행을 해보기로 한다.

설치작품 '거울의 방' 앞에서(사진=김윤정)
설치작품 '거울의 방' 앞에서(사진=김윤정)

앤 보가트의 뷰포인트 워크숍 주제였던 조셉 코넬

독일에서 안무작업에 한창이던 2000년대 초, 나는 주정부에서 주는 ‘젊은 예술가 해외연수 지원 작가’로 선정되어 6개월 동안 해외로 나가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런 좋은 기회에 나는 뉴욕의 씨티 캄퍼니(SITI Company)라는 극단의 예술감독이면서 뮤지컬, 오페라 연출가로 유명한 앤 보가트(Anne Bogart)가 하는 뷰포인트(View point)와 스즈키 메소드(Suzuki method)를 집중적으로 배우는 워크숍에 참가하게 되었다. 각지에서 지원하는 예술가들이 많아서 우선 서류심사로 주최 측에서 뽑아 주어야 했고, 독일 주정부에서는 그 워크숍이 해외연수에 적합한 지도 심사를 받아야 했다. 복잡한 과정을 거쳐 나는 뉴욕 주의 사라토가 스프링스의 스키드모어 칼리지(Skidmore Collge)에서 열리는 뷰포인트 워크숍에 참가하게 되었다. 워크숍에 오기 전에 신체적, 정신적 강훈련이 될 것이니 준비를 많이 하고 오라는 협박 수준(?)의 메일들이 왔고 그해 워크숍의 주제가 조셉 코넬이라는 작가이므로 그에 대해서 충분히 공부를 하고 오라고도 했다. 그에 관한 자료와 필독서 목록까지 보내주면서 제출 하라는 서류는 또 얼마나 복잡하고 많은지 가기 전부터 나에게는 그야말로 부담 그 자체였다.

워크숍에는 다양한 연령대, 다양한 국적의 배우, 감독, 연출가, 무용수, 안무가, 연주자, 화가 같은 예술가들이 모였다. 스키드모어 칼리지의 기숙사에 모두 머물면서 학교 내 극장, 그리고 아름다운 캠퍼스를 무대로 워크숍은 아주 타이트하게 진행되었다. 오전 수업은 신체훈련, 스즈키 메소드 같은 피지컬한 수업으로 시작하고 오후에는 그야말로 조셉 코넬을 파고들며 그의 인생과 작품에 얽힌 이야기들을 분석하고 다양한 관점의 공연을 만들어 주말에는 팀별로 돌아가면서 쇼잉(Showing)을 해야 했다. 조셉 코넬은 작품도 특이하지만 그의 독특한 성격으로 인해 어떤 관점으로 접근할 것인가에 따라 무궁무진한 주제를 품게 만드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특별 수업으로 극작 수업과 연기법 수업이 있었는데 영어로 대사를 외워가야 하는 시간이 나에게는 그야말로 고문 같은 시간이었다. 한국말로도 안 해본 연기를 영어로 대사를 하는 수업이라니! 그럼에도 연기는 나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연기를 어떻게 반응하고 받아들이는지를 중점적으로 공부하던 수업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극작 수업은 씨티 캄퍼니 단원들이 직접 간단한 상황을 보여주고 우리는 그 상황에서 오고갔을 만한 간단한 대사를 각자 자유롭게 즉흥적으로 써보고 십 년 뒤 그들이 만났을 때 어떤 대화를 하게 될까?를 상상하면서 대사를 만들어 내야 했다. 그리고 그 대사를 가지고 바로 다음 연기를 해야 했다. 생각보다 짧은 시간에 상상력만 있으면 재미있는 대사들이 만들어졌고 극작 시간은 생각보다 그렇게 어렵지 않은 흥미로운 수업이었다. 나는 작품을 만들 때 영어가 달리기도 해서 주로 안무를 맡거나 몸으로 표현하는 역할을 했는데, 매주 팀이 바뀌면서 서로 분담하는 역할도 바뀌다 보니 언젠가는 배우의 역할도 해야 했다. 몇 마디 안 되는 대사였지만 나는 긴장과 걱정으로 얼마나 연습에 연습을 했는지 모른다. 쇼케이스 날 제발 배탈이라도 좀 나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얼마나 엄청난 경험이었고 특별한 추억이었는지 모르겠다. 쇼케이스를 하는 동안 어떤 좋은 아이디어들이 나오면 앤 보가트는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에게 정중하게 자신이 그 아이디어를 자신의 작품에 써도 되는지 물었고 거기서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잠시 그렇게 비싼 수업료를 받고 또 학생들에게서 저렇게 신선한 아이디어까지 가져갈 수 있다는 사실에 살짝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물론 나는 독일에서 받은 장학금으로 왔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개인적으로 비싼 수업료를 내고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조셉 코넬, 'Loveforever' (사진=김윤정)
쿠사마 야요이 'Loveforever' (사진=김윤정)

그때 우리가 그렇게 연구하고 작품으로 만들던 작가 조셉 코넬은 장애를 가진 동생을 보살피며 어머니와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어딘지 느낌적으로 게이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뜻밖에도 쿠사마 야요이 다큐에서 그토록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고 그가 죽는 날까지 끝없이 구애한 편지들을 보면서 나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셉 코넬은 초기 작품을 발표하면서 살바도르 달리의 표절이라는 말에 큰 상처를 받고 모든 작품을 박제하듯 상자 속에 담는다. 아무리 봐도 사실 달리하고는 정말 다른 코넬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평생 수집한 다양한 것들을 상자 안에 배치하여 작품으로 남겼던 것이다. 쿠사마 야요이 다큐를 보면서 또 다른 충격은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 조각가 클래스 올덴버그, 아방가르드 작가 루카스 사마라스 같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모두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를 보고 그녀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모방하거나 차용하거나, 좋게 말해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오르게 됐다는 것이다.

조셉 코넬이 야요이에게 보낸 작품과 자필 편지(사진=김윤정)
조셉 코넬이 야요이에게 보낸 작품과 자필 편지(사진=김윤정)

야요이가 자신의 작품사진들로 온 전시장 공간을 도배한 것을 보고 간 워홀은 그대로 자신의 전시장도 인쇄한 작품사진들로 전시장 내부를 도배한다. 야요이의 <천개의 배>라는 부드러운 소재로 만든 설치를 보고 난 후 올덴버그는 이전에 그가 하던 딱딱한 조각의 소재에서 벗어나 재봉틀을 이용해 부드러운 소재로 조각을 하게 된다. 야요이의 첫 번째 <무한 거울의 방> 전시를 보고 사마리스는 온통 거울로 만들어진 전시를 더 유명한 갤러리에서 하게 된다. 이들 모두 그 후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고 당시 백인 남성 위주의 미술시장에서 야요이는 배제되고 후원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녀는 극심한 좌절과 외로움으로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야요이의 '천개의 배'(사진=김윤정)
야요이의 'Dressing Table'(사진=김윤정)

여기서 나는 아나토미 릴리즈 테크닉(Anatomical Release Technique)의 창시자이며 나의 스승이셨던 메어리 오도넬 펄커슨(Mary O‘Donnell Fulkerson, 1940-2020)의 말이 떠오른다. 앤 보가트가 자신의 아이디어들을 가져다 뷰포인트를 창시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로서는 나의 스승의 말이 옳은지 증명할 길은 없다. 다만 뷰포인트 워크숍 수업을 들으면서 나는 분명히 메어리 선생님에게 배웠던 것들을 복습하는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검증할 수는 없지만 뷰포인트 시간이 나에게는 전혀 새롭지 않았음에도 그런 논리들을 적용해 조셉 코넬을 주제로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꽤나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나의 스승, 메어리 오도넬 펄커슨

여기서 잠시, 미국에서 태어났고 영국의 다팅턴 예술대학(Dartington College of Arts)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 교수였으며 EDDC(European Dance Development Centre, 현재 명칭은 ArtEZ University of Arts) 부학장이었던 메어리 펄커슨에 대해 이야기해 본다. 그녀는 늘 젊은 우리들보다도 너무 앞서가는 콘셉트와 아이디어로 무용가들에게 여러 가지 도전의 기회들을 주었다. 언젠가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에 의하면, 자신은 대학시절부터 늘 작품 시험을 보거나 발표를 하고 나면 선생님으로부터 “너는 그렇게 예쁜 팔다리를 가지고 왜 춤을 안 추고 이상한 걸 하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늘 외로웠다고 했다. 분명히 자기는 콘셉트에 맞는 작품을 연구하고 춤을 추었지만 그렇게 소외되곤 했다고 한다.

메어리 오도넬 훨커슨 과 함께한 어느날
메어리 오도넬 펄커슨과 함께한 어느 날 (사진제공=김윤정)

대학 졸업 발표회가 끝나고 누군가 무대 뒤로 그녀를 찾아와 그녀의 손을 잡고 “오늘 저녁 공연 중에서 네가 유일하게 진짜 예술적인 춤을 추고 있더구나“ 하고 간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바로 작곡가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였다고 한다. 늘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가 보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도 그녀의 무용단에서 작업을 했었던 시간들에 큰 감사와 경외심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 메어리와 함께했던 아주 특별했던 작업 이야기는 따로 지면을 할애해서 써보겠다.

쿠사마 야요이 회고전

지난 7월 1일, 드디어 베를린의 현대미술관 그로피우스 바우(GROPIUS BAU)에서 열리는 야요이 전시를 보러갔다. 이 미술관은 독일 바우하우스(Bauhaus)의 창시자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의 큰아버지인 마르틴 그로피우스(Martin Gropius, 1824-1880)가 건축한 현대 미술관이다. 시기가 시기인만큼 몰림 현상을 막기 위해 관객들의 입장시간도 정해져 있었다. 입장객에게는 90분의 시간이 주어지는데 쿠사마 야요이의 회고전이다 보니 역사적으로 중요한 그녀의 1950년대 초창기 작품부터 스케일이 큰 작품까지 워낙 방대하고 볼거리 많은 전시 였기에 90분이 사실 부족했다.

전시장 입구부터 꽃핑크 색깔로 시선을 사로잡는 거대한 스케일의 설치가 미술관 일층 바닥에서 높은 천장까지 뻗어 있었다. 네오르네상스 건축양식의 미술관과 대조되면서도 묘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거대한 설치를 지나 이층으로 올라가면 전시관마다 시대를 나눠 그녀의 주요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반갑게도 조셉 코넬이 그녀에게 보넨 상자 안에 나비와 편지가 담긴 작품도 있어 나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쿠사미 야요이 전시에 와서 조셉 코넬의 작품과 자필 편지까지 볼 수 있다니 새삼 감격스러웠다. 사실 내가 왜 감격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나름 조셉 코넬을 표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녀의 고통이 승화된 내면이 보이는 <자화상>이란 페인팅 작품이 특히 와 닿았는데, 검은 바다를 배경으로 성충을 뚫고 나온 나비들이 그녀의 깊은 내면과 맞닿아 있는 느낌이었다.

전체적으로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는 생명과 자연의 입자들이 영원 속으로 날아오르는 이미지들로 관객을 무한대라는 세상에 빠지게 하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전시였다. 강박으로 몰려오는 집적을 테마로, 무한의 영속을 표현하는 일괄적인 그녀의 집착이 낳은 작품들은 예술적 장인정신을 초월하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겉에서는 작은 방으로 보이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무한대로 퍼져가는 불빛 속에 가만히 서있으면 “우주의 별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지구도 홀로 동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는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거울 조각으로 모든 공간의 경계를 허물고 관객의 집중도를 흐트러트리는 <거울> 시리즈는 그야말로 영원 속에 파묻히는 마법 같은 순간들이었다. <핍 쇼>라는 작품은 팔각형의 상자에 있는 작은 구멍으로 머리를 집어넣으면 무한적인 빛에 빠져들게 한다. 천장까지 달린 불빛들이 순차적으로 드르륵하면서 켜지는데 그야말로 정신까지 아득하게 하는 다차원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수많은 예술가들이 원근법과 무한대라는 주제를 연구하고 표현했었지만 관객을 이토록 입체적으로 에워쌀 수는 없었다. 쿠사마 야요이가 미술사에서 처음으로 경계를 초월한 도전과 전환점을 던진 것이다.

설치작품 '핍쇼'(사진=김윤정)
설치작품 '핍쇼'(사진=김윤정)

보수적인 집안과 일본이라는 환경에서 벗어나 일찍이 뉴욕으로 건너가 그토록 처절하게 자신의 세계를 펼치려 했지만, 현지 평론가들로부터 독창적인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남성 백인 중심의 뉴욕 미술시장에서 소외된 야요이는 극심한 환멸과 우울증을 안고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 지금까지도 정신병원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 귀국전시회를 다시 열지만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잊힌 중년 예술가에서부터 다시 시작한 그녀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생산적으로 승화시킨 위대한 작가로 뒤늦게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이십 여 년 만에 회고전으로 뉴욕에서 재조명을 받으며 세계적인 작가가 된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들은 현재 수백만 달러에 거래되고 있으며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활발하게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작품활동에 쏟아 붓고 있다고 한다.

쿠사마 야요이는 60년대 뉴욕에서 당대 예술가들에게 아이디어들을 빼앗기는 상처를 받고, 오리지낼리티가 있지만 표절이라는 오해로 상처받은 조셉 코넬은 그녀를 사랑했고, 나에게 조셉 코넬을 알게 해준 앤 보가트의 뷰포인트가 떠오르고, 뷰포인트는 원래 자신의 아이디어였다고 했던 나의 스승 메어리 펄커슨의 이야기들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 엉켜붙는 것 같다.

케이트 블란쳇이 1인 13역을 하는 영화 <매니페스토 Menifesto> 한 대사가 떠오른다.

"예술을 하면서 도둑질을 은폐하지 말라. 중요한 것은 어디서 왔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가져가야 하느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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