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격렬하게, 세련되게, 야심차게!
[공연리뷰] 격렬하게, 세련되게, 야심차게!
  • 정옥희 무용평론가
  • 승인 2021.07.19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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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대한민국발레축제

Soojinchoidance, 'register_시작의 시작' (c)BAKI
Soojinchoidance, 'register_시작의 시작' (c)BAKI

[더프리뷰=서울] 정옥희 무용평론가 = 6월 예술의전당은 발레로 가득했다. 어느덧 11년 차가 된 대한민국발레축제(6월 15일-30일)가 국공립단체부터 민간단체까지, 스타 무용수부터 중고등학교 전공생까지 한 자리에 모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 스페셜 갈라’, 수도권 지역 예술고등학교 학생들의 군무제, 유튜브 채널 운영과 오프라인 발레클래스 등의 부대행사도 마련되면서 오랜만에 축제의 분위기가 살아났다.

와이즈발레단, '유토피아' (c)김윤관
와이즈발레단, '유토피아' (c)김윤관

약 2주간에 걸쳐 선보인 다채로운 공연들에서 자연스레 한국 발레의 트렌드를 읽어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두드러진 경향은 ‘fast & furious’라 하겠다.

유회웅리버티홍, 'NO NEWS' (c)BAKI
유회웅 리버티홀, 'NO NEWS' (c)BAKI

시종일관 자동차가 질주하는 액션 영화 <분노의 질주 The Fast and the Furious>에서처럼 무용수들은 쉼 없이 팔다리를 휘저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격렬한 작품은 조주현댄스컴퍼니의 <D-Holic>이다.

‘MZ세대와 공진하는 발레예술’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D-Holic>은 클래식 발레의 원리인 당스데콜(danse d’ecole)과 젊은 세대의 취향과 움직임 경험을 매끄럽게 넘나들면서 무용수들의 재능을 뽐낸다. 발레에서 연상되는 여성성과 우아함은 지우고 분절적이고 타악적인 움직임을 입혔다. 무용수들은 몸의 수직축(aplomb)을 세우되 팔다리를 빠르게 휘두르고 꺾는다. 조명과 음악이 점차 클럽하우스처럼 과열되면서 그들은 단단히 고정시켰던 머리카락을 내려뜨리고 몸의 축마저 무너뜨리면서 무아지경이 되어 모든 관절을 풀어 던진다. 남은 것은 오직 단단하고 강력한 코어이다. 이렇게까지 텐션 높은 동작을 행하면서도 기본기를 유지한다는 점이 놀랍다.

조주현댄스컴퍼니, 'D-Holic' (c)이우성
조주현댄스컴퍼니, 'D-Holic' (c)이우성

붉은 튀튀는 여성 무용수들을 남성 무용수들로부터 관습적으로 구별시킨다. 그러나 새로운 움직임은 새로운 관계를 발생시킨다. 동작의 에너지가 커질수록 남녀의 성역할, 그러니까 남성이 여성을 들어주고 지지해주는 역할이 점차 완화되며 남녀가 동등해졌다. 모두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생인 무용수들이 특출한 테크닉으로 마음껏 끼를 발산한다는 점에서 관객의 호응이 높았다. 다만 작품이 논리를 가지고 전개되기보다 무용수들의 개인기에 기댄 채 상당히 오랫동안 흘러갔다. 뒤로 갈수록 에너지가 끝없이 고조되기만 하니 피로감이 쌓였다. 시끄러운 클럽에서 멍해지듯 말이다.

빠르고 격렬한 움직임은 정형일 Ballet Creative의 <Two Feathers>에서도 두드러졌다. <백조의 호수>의 주요 곡을 발췌하여 나열하는 동안 흑과 백으로 구분된 16명의 무용수들이 대칭/대조/통일/도미노로 등퇴장을 반복했다. 빠르게 팔을 휘두르기, 백조 모티브의 손목 꺾기, 관절을 분리하여 동작 분해하기, 남성 무용수가 여성 무용수를 쉴 새 없이 조종하기 등이 쉼 없이 펼쳐졌다. 하지만 동작이 과하게 많고 강약조절 없이 반복되다 보니 뒤로 갈수록 군무 무용수들의 집중력이 흐트러짐이 보였다.

정형일 Ballet Creative 'Two Feather' (c)옥상훈
정형일 Ballet Creative 'Two Feather' (c)옥상훈

여러 작품을 중첩해보니 컨템퍼러리 발레의 개념이 ‘빠르고 격렬한 움직임의 나열’로 추려졌다. 여기엔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던 윌리엄 포사이드의 <In the Middle, Somewhat Elevated>(1987)와 랄랄라휴먼스텝스의 <Amelia>(2002)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다. 한때 컨템퍼러리 댄스가 모던 댄스에서 멀어진 정도로 위계를 설정했던 것처럼, 컨템퍼러리 발레 역시 클래식 발레에서 멀어진 정도로 위계를 세우는 듯하다. 하지만 클래식 발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표이다 보니 모두들 비슷한 곳에서 만나는 게 아닐까.

빠르고 격렬한 작품들 사이에서 조금 다른 질감의 움직임을 보여준 작품은 다크서클즈 컨템포러리댄스의 <In Your Sleep>(안무 조현상)이다. 꿈, 즉 잠잘 때 생겨나는 잔상과 미래에 대한 기대라는 이중적 의미를 몽환적이고 서늘한 분위기로 구현했다. 조명이 꺼지기도 전에 검은 정장 차림의 남성이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등장해 관객을 응시하다 누워 뒤척거린다. 우리는 그의 꿈속으로 빨려 들어가 남겨진 상념 및 낯선 존재들과 조우한다. 꿈은 모호하고 기이한 곳이다. 양말을 신고 미끄러지는 움직임은 중력을 살짝 뭉그러뜨리며 낯선 무게감을 부여했고, 천천히 돌아보는 고갯짓만으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명확한 설정과 한 숨 고르는 정적인 움직임으로 서늘하고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 점이 돋보였다.

다크서클즈 컨템포러리 댄스, 'In your Sleep' (c)옥상훈
다크서클즈 컨템포러리 댄스, 'In your Sleep' (c)옥상훈

인상적인 장면은 플라잉 요가를 변형한 공중 움직임이다. 공중에 매달린 주머니 속의 인간이 마치 자궁 속 태아처럼 아늑하기도, 탄생하기 전의 에일리언처럼 괴기스럽기도 하다. 몸을 지탱할 바닥이 없는 상태에서 3차원으로 만들어내는 몽롱한 실루엣이 꿈 속 풍경이 되었다. 부드러운 클래식 음악과 신경을 긁는 전자음악, 전기에 감전된 듯한 조명과 불길한 실루엣을 만들어내는 후방조명, 자궁이자 시체 주머니 같은 소품 등이 인상적인 미장센을 만들어냈다.

다크서클즈 컨템포러리 댄스, 'In your Sleep' (c)옥상훈
다크서클즈 컨템포러리 댄스, 'In your Sleep' (c)옥상훈

한국발레의 또 다른 트렌드는 세련됨이다. 의상이나 무대장치, 미디어 프로젝션 등 시각적인 면에서 다들 ‘모던’하고 ‘엣지’있고 ‘힙’했다. 패션모델처럼 차려입은 무용수들이 사진도록의 풍경 속에서 현대미술 설치물과 춤추는 듯하다.

[크기변환]이루다블랙토_DYSTOPIA_@옥상훈 (1)
이루다블랙토, 'DYSTOPIA' (c)옥상훈

와이즈발레단의 <유토피아>(안무 김성민), 이루다 블랙토의 <Dystopia>, 다크서클즈 컨템포러리댄스의 <In your sleep>가 눈에 띄었지만 가장 세련된 작품은 최수진(Soojinchoidance)의 <register_시작의 시작>이다. 강렬한 디자인의 영상이 투사된 화이트 큐브 공간에서 단단한 몸의 무용수들이 낭비라곤 없는 의상을 입고 춤춘다. 일말의 허술함도 없는 만듦새엔 1mm의 오차 없이 딱 떨어지는 명품 가구를 만지는 듯한 쾌감이 있다.

Soojinchoidance_register시작의시작_@BAKI (11)
Soojinchoidance, 'register_시작의 시작' (c)BAKI

<register_시작의 시작>은 규모의 차이를 가지고 노는 독특한 작품이다. 안무자를 포함해 단 네 명이 출연했으니 참가작 중 가장 적은 인원이다. 하지만 이 네 명(최수진 성창용 김지영 이재우)은 당대의 스타 무용수들이다. 개개인이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뿜어내면서 우주와 인류에 대한 신화라는 거대한 주제를 풀어낸다. 무대 전체에 미디어를 투사하여 공간을 무한히 확장하는 한편, 바이올린 연주자와 무용수가 교감하는 등 소극장의 아늑함을 활용할 줄도 알았다. 그 중에서도 작품의 도입부는 영리하게 규모의 낙차를 활용한다. 그래픽 선과 점들이 무대로 쏟아지는 가운데 이에 깔린 듯 최수진의 실루엣이 슬쩍 드러난다. 머리까지 덮는 흰 유니타드를 입고 바닥에 누워있는 그녀를 발견하는 데엔 꽤 시간이 걸리는데, 매끈한 공간에서 무언가가 응집되는 과정이 곧 우주의 시작인 것이다. 흔히 무용공연에서 미디어 프로젝션이 춤을 압도해버릴 때 비판을 받지만 아예 그 힘의 불균형을 우주의 시작으로 해석한 점이 설득력 있었다.

Soojinchoidance_register시작의시작_@BAKI (1)
Soojinchoidance, 'register_시작의 시작' (c)BAKI

대한민국발레축제는 서로 다른 단체들이 한데 모이고 경합하는 만큼 자존심 대결을 펼치는 장이다. 국립발레단의 경우 정기공연인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축제와 연계하여 발레의 대중화에 초점을 두었다면 광주시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단체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의욕을 드러냈다.

광주시립발레단이 선보인 <레이몬다> 3막 중 ‘결혼식 피로연’은 클래식 발레의 기본기를 다지려는 단체의 진지한 노력을 여과 없이 보여준 소중한 무대였다. 이 장면은 발레단의 갈라 공연에서 종종 선보이지만 우리나라에선 드물었다. 탄탄한 기량을 갖춘 솔리스트급 남녀 여덟 커플과 주역 무용수 한 커플이 완벽하게 호흡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주시립발레단의 선택은 까다로운 작품을 선택할 정도로 단체의 수준이 높아졌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이 작품을 준비하며 보다 수준을 끌어올리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무용수들은 이국적인 춤의 질감을 살리고 손끝, 발끝, 시선 처리 등을 정교하게 조율했지만 아직은 골반 정렬이 흐트러지고 팔과 목을 답답하게 사용하는 점이 아쉬웠다. 서울에서 개최되는 축제에 지역 무용단이 참가함으로써 ‘대한민국’ 발레축제의 의의를 높여준 점, 깔끔한 무대장치와 섬세한 의상으로 무대에 공들인 점, 주역 무용수를 두 캐스팅으로 나누어 여러 무용수들에게 기회를 준 점 역시 소중했다. 발레축제에서 클래식 발레는 낡은 것으로 폄하되는 분위기지만, 때로는 그 자체로 가장 동시대적인 선택이자 강한 메시지를 담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광주시립발레단, '레이몬다' (c)이우성
광주시립발레단, '레이몬다' 3막 (c)이우성

유니버설발레단의 경우 클래식 발레 레퍼토리 위주의 정기공연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컨템퍼러리 발레를 선보였다. 유병헌 예술감독의 2003년작 <파가니니 랩소디>에 중국 설화에 바탕을 둔 <Butterfly Lovers>, 한국의 정을 주제로 한 <Korea Emotion>을 더하여 트리플 빌로 구성했다. 기존 작품과 어우러지는 후속작품을 마련해 단독 공연을 채운다는 점에서 영리한 기획이다. 최근 무용수 숫자가 부쩍 줄어든 상황이지만 각 작품에 최대한의 인원이 출연했으며 주연, 조연 할 것 없이 안정적이고 깔끔한 기량을 보여주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내실을 기하려는 각오가 모두의 눈빛에 서렸다. 다만 동일 안무가의 세 작품이 출연자의 숫자(12-14명)와 구성(남녀 커플의 등퇴장), 동작 어휘(그랑 주테, 데블로페), 무대 운용(추상적인 무대와 영상 배경), 의상(여성의 원피스 드레스) 등에서 유사했던 점이 아쉽다.

유니버설발레단 '트리플빌_The Butterfly Lovers' (c)유니버설발레단
유니버설발레단 '트리플빌_The Butterfly Lovers' (c)유니버설발레단

대한민국발레축제는 크고 작은 단체들과 서로 다른 개인들이 서로를 응원하고 자존심을 겨루는 행사가 되었다. 해가 지나며 학생 무용수로 참가했던 이가 ‘해외무용스타’로 돌아오고, 한 단체에서 눈여겨 본 무용수가 다른 단체에서 활약하고, 무용수였던 이가 안무가로 변신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명절마다 모이는 친척처럼 서로가 성장하고 성숙하는 모습을 함께 나눌 수 있으니, 축제의 의의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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