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46 뮤직홀(2)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46 뮤직홀(2)
  • 조복행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1.07.17 21: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캔터버리 뮤직 홀 (출처:en.wikipedia.org)

뮤직 홀의 시간과 공간

18세기 이후 영국에서는 술을 마시면서 오락을 즐기는 펍이 늘어갔다. 사업자들은 오락을 주류판매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영국정부는 이러한 오락과 주류판매를 줄이기 위해 1751년에 허가받은 사업자만 술을 판매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그러자 작은 펍에서는 음악클럽을 조직하여 허가취득을 회피해 나갔고, 큰 펍에서는 전문 음악가를 영입하고 연극적 장치를 도입하여 영업방식을 개선해 나갔다. 펍의 외양은 화려해지고 내부장식도 세련되어갔다. 주류 소비를 억제하기 위해 취한 조치가 펍에서의 음악활동을 장려하는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렇게 펍에서의 음악과 오락은 더욱 활발해진다.

과거 영국에서 술과 음식을 먹거나 차를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던 엔터테인먼트 공간에는 펍, 태번, 인, 플레저 가든 등이 있었다. 18세기부터 오락과 레저는 상업화되기 시작한다. 17~18세기에 큰 인기를 모았던 커피하우스에서도 커피만이 아니라 술과 음식을 팔았다. 커피 하우스는 상거래를 상담하고 정보를 교환하고 학문을 논하는 사교의 공간이었고, 적은 돈만 있으면 좋은 강연을 들을 수 있는 ‘페니 대학’이었다. 태번과 인은 술과 음식을 팔고 숙박을 제공하였다. 펍은 대중적인 술집으로 인(inn)이나 태번이 그 기원이다. 그리고 18세기에 등장한 플레저 가든(Pleasure Garden)은 가장 혁신적인 야외 오락공간이었다.

1. 뮤직홀의 기원

플레저 가든

영국에서는 18세기부터 중산층이 성장하고 사회적 교섭이 많아지면서 이들이 만나서 이야기하고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플레저 가든은 이런 기능을 담당했던 18세기의 중요한 레저시설이었다. 플레저 가든은 오늘날의 디즈니랜드나 에버랜드와 같은 놀이공원의 일종이었다. 술과 음식을 판 식당 겸 주점이었고, 매춘부들이 집결하는 유곽이기도 하였으며 불꽃놀이와 산책이 가능한 오락공간이었다. 온갖 종류의 엔터테인먼트를 모아놓은 곳이었다. 플레저 가든의 기능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려운 것은 이렇게 많은 잡다한 형식의 오락과 놀이들이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밝았고 산책하다가 얘기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중심이 되는 공간은 ‘오케스트라’로, 2층으로 된 연주회장이었다.

플레저 가든의 특징은 새로움이었는데, 새로운 볼거리들이 생기면 바로 도입했고, 새로운 연예인들을 영입했고 큰 돈을 들여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독립적으로 놀이만을 위해 지은 건물과 태번이나 펍에 부수적으로 설치한 건물의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플레저 가든은 크게 세 가지 종류의 놀이를 제공하였다. 1) 불꽃놀이나 줄타기, 열기구 비행(Balloon Ascent)과 같은 스펙터클 2) 음악공연이나 연주, 그림 전시회 3) 사교춤 등이었다. 오페라를 공연한 극장이기도 했고, 윌리엄 호가스의 그림을 전시한 갤러리이기도 했으며, 헨델의 작품을 연주한 콘서트 홀이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건 서커스, 마술과 같은 대중적인 오락이었다.

플레저 가든의 스펙터클은 매우 다양했는데, 가장 화려한 스펙터클은 불꽃놀이였다. 불꽃놀이는 18세기 중반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하여 빅토리아 시대로 이어졌다. 크레몬(Cremorne)가든은 크림전쟁을 표현하는 불꽃놀이를 , 경쟁가든인 맨체스터의 벨 뷔 가든과 포모나 가든에서는 세바스토폴 함락을 제재로 한 불꽃놀이를 하였다. 불꽃놀이는 서커스의 배경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불꽃놀이를 하면서 서커스를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서커스 배우들의 주의를 분산시켜 큰 위험이 따르는 일이기도 했다. 줄타기는 자주 벌어졌던 스펙터클이었다. 여자 블론딘으로 불린 셀레나 영은 템즈강을 건너서 유명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하이베리 가든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불꽃놀이에 주의를 뺏긴 나머지 추락한 일이 있었다. 카를로 발레니오는 크레몬 가든에서 헐겁게 묶어놓은 줄에서 추락해 죽었다. 또 한 명의 여자 블론딘, 셀리나 파웰은 버밍험의 아스톤 홀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추락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타기는 플레저 가든의 주요한 레파토리였다.

또 하나의 스펙터클은 열기구비행(Balloon Ascent)이었다. 1783년 프랑스의 몽골피에(Montgolfier) 형제가 열기구를 띄운 이래 열기구비행은 영국에서도 인기있는 스펙터클이 되었다. 음악은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1836년에 찰스 그린은 복스홀 가든에서 독일 낫소까지 열기구 비행을 성공시켜 ‘위대한 낫소’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전문적인 열기구 비행가가 등장하였고, 이들은 이곳저곳의 플레저 가든을 순회하면서 열기구를 띄웠다. 그러나 열기구비행은 늘 사고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1824년에 해리스는 비행도중 아내를 잃었고 1852년에는 제임스 굴스턴이 건물에 부딪혀 사망했다. 열기구에 원숭이와 같은 동물들을 태웠다가 낙하산으로 내려보내는 볼거리도 있었다. 말이나 황소를 태우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들은 내려올 때쯤에는 기진맥진하여 사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는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동물보호단체로부터 동물학대라는 비판을 들었다.

복스홀 가든(출처=en.wikipedia.org)

첫 플레저 가든은 복스홀 가든이었는데, 이를 설립한 사람은 조나단 타이어스(Jonathan Tyers)였다. 그는 플레저 가든을 유료화했다. 매춘부와 소매치기의 출입을 통제하고 귀족과 부유층들이 하층민들과 어깨를 부딪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여기서 어김없이 술을 팔았다. 윌리엄 새커리의 <허영시장>에는 복스홀(Vauxhall)에서 조지프 세들리라는 젊은이가 라크 펀치 겨우 두 잔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처럼 레저시설에서의 술은 당연한 것이었다. 복스홀은 가장 유명한 플레저 가든이었고 플레저 가든과 동의어처럼 여겨졌다. 뉴욕에도 복스홀 가든이 세워졌다.

열기구 띄우기(출처=sciencephoto.com)

플레저 가든은 1850년대에 들어와 사라진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가장 큰 적은 새로운 오락이다. 플레저 가든의 오락은 한물간 조지아 시대의 유물이 되고 말았다. 향수만으로 지탱하기에는 놀이의 방향이 바뀐 것이다. 플레저 가든의 가장 큰 적은 뮤직 홀이었다.

펍의 극장화

19세기에 들어와 태번이나 플레저 가든은 술과 음식을 팔던 곳에서 극장으로 바뀌는 곳이 늘어간다. 그 원인은 오락수요의 증가와 1808년과 1809년에 있었던 드루리 레인과 코벤트 가든이라는 두 칙허극장의 화재였다. 갑자기 6천여 석의 극장좌석이 사라지자 새로운 극장에 대한 요구가 생겼다. 라이세움, 올림픽, 아델피 극장은 벌레타, 음악, 춤, 무대오락 등을 공연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물론 칙허극장에만 허용되어 있던 정극은 아직 허용되지 않았다. 1830년까지 30여개의 극장들이 매년 허가를 받아 대중적 공연을 하였다. 당시의 런던은 점점 인구가 증가하고 있었고 철도의 발달로 지방으로부터 오는 공연관객이 늘고 있었으며, 복스홀교. 워털루교 등 템즈강을 관통하는 다리가 잇따라 건설되었고 새로운 길이 개통되면서 공연관람이 편리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가스등이 설치되면서 치안도 안전해졌고, 이런 공연붐은 지방으로도 확산되었다. (『Consuming Passions』, 296-297, 372-374)

태번의 극장화 경향은 이미 16세기부터 나타난다. 영국 최초의 상설극장으로 알려진 제임스 버비지의 더 시어터(The Theatre)가 세워지기 전부터 태번은 극장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태번에서 술과 음식 이외에도 공연과 같은 오락을 제공하고 있었다. 뮤직 홀은 이런 펍에서 시작된 것이다. 뮤직 홀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들이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1558-1603)시대에는 뮤직 룸이라고 불렸고 자코뱅 시대에 뮤직 하우스라 불린 16세기의 태번이 기원이라는 설, 18세기의 펍에서 기원했다는 설, 그리고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펍에서의 음악과 춤에서 기원했다는 주장들이다. 뮤직 홀의 직접적인 출발은 19세기 초반부터로, 초라하고 불결한 공간이나 펍에서 제공한 엔터테인먼트로부터 출발한다.

페니 개프와 스위니 토드

페니 개프(Penny Gaff)는 1페니의 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갈 수 있는 극장으로, 개프는 허름한 건물을 의미하는 당시의 속어였다. 개프연극은 잔인하고 자극적인 이야기가 중심이 되었다. 당시에는 고딕 스릴러물을 값싼 종이잡지에 시리즈로 연재하였는데, 이런 자극적인 이야기가 청소년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스위니 토드>는 페니 개프의 대표적 작품이다. 1846년 <진주목걸이>라는 원작을 각색한 작품으로 당시 영국에서 매우 인기있는 멜로드라마였다. 뮤지컬 <스위니 토드>는 이 작품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작은 돈에 눈이 먼 한 남자의 엽기적인 복수극이었지만 손드하임은 이를 비극적이고도 감성적으로 각색했다. 사랑을 넣어서 연극을 인간적으로 만들었다.

개프연극은 특히 런던에서 주로 제작되었는데, 그 특징으로는 1) 관객은 대부분 교육을 받지 못한 8살에서 20살 정도까지의 청소년과 젊은 노동자들이었고 여기에 매춘부, 도둑, 갱 등 하층민들이 가세했다. 2) 주제는 값싼 소설과 노래, 시각적 오락 등 대중문화에 바탕을 두었다. 살인사건을 비롯한 범죄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이를 페니 유혈극 또는 페니 공포극이라고 불렀는데 실제 범죄에서 따온 이야기들이 많았다. <스위니 토드> 뿐만이 아니라 18세기 초의 유명한 노상강도 딕 터핀(1705-1739), <거지 오페라>의 맥히스의 모델이 된 잭 쉐퍼드, 뱀파이어 등이 주요소재였다. 딕 터핀의 이야기는 무려 254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었고 2천 페이지 이상의 장편 스릴러였다. 붉은 헛간 살인사건(Red Barn Murder)도 단골소재였는데, 이 이야기는 마리아 마텐과 코더라는 두 연인이 사랑의 도피를 위해 붉은 헛간에서 만났다가 언쟁이 생겨 마리아가 살해된 실제사건이었다. 뱀파이어 이야기도 인기있는 주제로, 대표적인 이야기는 뱀파이어 바니(Varney the Vampire)였다. 이 소설은 제임스 맬콤 라이머와 토마스 페켓 프레스트가 공동으로 창작한 공포물인데, 뒤에 쏟아져나오는 공포물의 원형처럼 여겨지고 있다. 유명인의 교수형도 단골소재였다. 메리여왕이나 앤 볼린의 처형장면 같은 것들이다. 페니 공포극도 1890년대 들어 이보다 더 싼 반 페니 시리즈가 등장하면서부터 쇠퇴한다. 센티멘탈하고 인습적이며 선악의 이분법이 뚜렸했던 , 낭만적인 멜로드라마도 인기였다. 3) 개프는 너무나 강한 문화적 충격을 주었다. 곧 검열을 받았고 공연은 금지되었으며 배우들은 체포되었다. 만약 대화가 포함되면 공연은 취소되었다.

개프가 더욱 문제가 된 것은 공간의 위치와 분위기였다. 정통극장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의 마굿간이나 빈 가게, 버려진 창고 등 허름한 공간을 개조한 곳에 임시로 벤치를 설치하여 좌석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더럽고 혼잡했다. 관객들은 씻지 않아서 몸에서 냄새가 났고 장내는 담배냄새에 찌들어 있었다. 더욱 큰 문제는 공연이 끝난 뒤 개프의 바깥에서 벌어지는 무질서였다. 작은 밴드들이 등장하여 개프에서 막 나온 관객들을 유혹한다. 젊은 남녀들과 범죄자들이 뒤섞여 담배를 피우고 술마시며 춤추고 노래하다 보면 거리는 난장판이 되기 일쑤였다. 경찰은 개프를 청소년 범죄의 온상으로 보았다. 당시 경찰은 청소년들의 거리 썰매타기와 연날리기를 단속할 정도였고 무허가 개프는 가차없이 단속하였다.

개프연극은 세트와 의상을 사용하지 않았기때문에 일주일에 10여 편의 연극을 공연할 수 있었다. 페니 개프는 당시 전체극장의 5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특히 관객참여가 인기였는데, 관객이 무대위에 올라가 노래하고 춤추도록 허용하였다.

페니 개프(출처=alamy.com)

프리 앤 이지, 노래살롱

음악은 펍의 중요한 엔터테인먼트 소재였다. 그 중에서도 프리 앤 이지(Free and Easy)는 뮤직 홀의 초기의 형태에 해당한다. 프리 앤 이지는 누구나 자유롭게 입장할 수 있었고 식음료값도 저렴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프리 앤 이지의 바에는 노래하고 춤출 수 있는 플랫폼과 피아노가 설치되어 있었고 자유롭게 술과 음식을 먹고 담배를 피울 수도 있었다. 식탁 주위에 의자가 놓여있고 클럽의 규율이 벽에 붙여져 있었다. ‘ 작은 음악’이라는 이름의 엔터테인먼트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간단한 소품이 연주되고 참가자들이 합창을 하였다. 남자들은 이브닝 드레스를 입었다. 1부는 이중창, 합창 등 콘서트용 작품을 공연했고, 2부에서는 노래와 춤이 동반된 엔터테인먼트가 벌어졌다. 사회자가 매우 중요했다. 그는 행사의 전체적인 진행을 주도했고 참가자들의 등장을 조정하고, 합창을 유도하고 때로는 나라와 왕의 번영과 건강을 기원하는 건배사도 제안하였다. 이런 애국적인 스타일의 모임은 조지아 시대의 풍습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었다. 자주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외설스런 노래와 음란한 농담 역시 조지아 시대의 풍습이었다. 여성도 참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를 <수탉과 암탉클럽>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프리 앤 이지와 유사한 펍으로 노래와 저녁이 있는 집(Song and Supper Room)이 있었다. 노래하면서 술과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노래를 들을 수 있는 펍이었다. 이런 펍에 점점 연극적 장치들이 추가된다. 이를 살롱 극장(Saloon Theatre)이라고 불렀다. 세트가 도입되고 짧은 드라마가 공연되었다. 살롱극장의 출현은 1843년의 공연법과 관계가 있다. 찰스 2세때부터 구술연극은 칙허극장에만 허용되고 비주류극장에는 허용되지 않았는데 1830년대에 들어와 펍에서 불법적으로 연극적 퍼포먼스를 도입하면서 이런 구분이 모호해진다. 비주류극장들도 점점 대화가 삽입된 연극적 퍼포먼스를 공연하기 시작한다. 1832년에 공연에 관한 특별위원회는 이러한 공연계의 상황을 정부에 보고하고 공연법의 개정을 권유하였다. 영국정부는 현실을 반영하여 1843년에 공연법을 손질한다. 공연에 관한 전권을 쥐고 있던 시종장관(Lord Chamberlain)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였고, 지방정부에 권한을 이양하고 극장설립 허가권을 부여하였다. 칙허극장 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극장에 구술연극을 허용한다. 작은 비주류극장에서도 세익스피어나 말로우의 작품을 공연할 수 있게 되었고,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자유경쟁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공권력의 감시가 비주류극장에까지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술을 파는 비주류 극장에서는 구술연극을 공연할 수 없도록 하였다. 비주류 극장에서의 연극공연이나 무허가 펍에 대해 주민과 교회는 비도덕적이라는 이유로 불법영업을 고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적발되면 벌금을 물거나 허가가 취소되었다.

북부도시에서는 노래살롱(singing saloon)또는 콘서트 룸이 성행했다. 노래살롱에는 프리 앤 이지와 달리 전문 연주자들이 등장했다. 전문적인 공연을 제공함으로써 입장료도 징수할 수 있었다. 손님들은 공연에 참여하여 같이 합창을 하거나 때로는 노래경연대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래살롱은 유럽 전역에서 유행하고 있었다. 19세기에 산업화와 함께 노동자들의 오락욕구가 분출하면서 이를 흡수하기 위한 제도들이 생겨난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카페 콩세르나 카페 샹탕(Café-chantant)과 같은 노래살롱이 유행하고 있었다. 마시고 노래하고 얘기하고 쇼를 보는 일은 공통적이었다 . 쇼는 분위기를 높이는 배경역할을 했다. 캬바레는 프랑스적 장소로 1880년대에 파리에서 번창하기 시작하여 1885년 무렵에는 파리에 360개나 있었다. 몇몇은 고급시장을 겨냥했지만 대부분은 직공, 사무원, 숙련노동자들을 위한 곳이었다. 입장료는 없었지만 30분이나 1시간마다 음료수를 주문해야 했다. 캉캉춤으로 유명한 물랑루즈는 카페 콩세르의 일종이었다.

캬바레는 지적이고 예술적 분위기를 퐁기는 일종의 카페 콩세르였다. 둘이 달랐던 것은 그 곳의 손님들이었다. 시인, 미술가, 지식인들이 카페 콩세르에 품격을 더해주었다. 그들은 거기 모여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였다. 캬바레는 북유럽으로 네덜란드와 독일로 번져나갔고, 취리히와 빈을 포함한 독일어권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935년에 나치는 나치를 비판한다는 명목으로 캬바레를 금지시켰다. 처음엔 독일에서 나중에는 정복지 모두에서 금지하였다. 힌데미트, 에릭 사티 등의 음악가도 캬바레에서 활동했고, 다다의 출발은 츄리히의 캬바레, 볼테르(1916-1917)에서 시작되었다. ( 『유럽문화사 』 2권)

 

2. 뮤직 홀의 탄생

찰스 모튼 (1819-1904, lookanddream.com)<br>
찰스 모튼 (1819-1904, lookanddream.com)

일반적으로 뮤직 홀은 찰스 모튼(1819-1904)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가 1852년에 런던에 세운 캔터버리 뮤직 홀이 그 효시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강한 반론들이 있다. 뮤직 홀의 기원은 런던이 아니라 지방으로, 1832년 토마스 샤플즈가 볼턴에 콘서트 룸을 개설하고 1840년에는 스타 인으로 이전하였는데, 이것이 첫 뮤직 홀이라는 주장이다. 이어서 헨리 풀란은 브래드포드에서 1842년 콘서트 홀의 매니저를 하다가 1849년에 자신의 뮤직 홀을 오픈하였고, 조셉 홉슨은 1849년에 리즈에 카지노 홀을 오픈하였으며 처음으로 입장료를 징수하기 시작했다. 토마스 유단 역시 1849년에 쉐필드에 로열 카지노 홀을 오픈하였다가 2개월 후에 대형홀로 확장하였다. 이들은 모두 찰스 모튼의 캔터버리 홀보다 빠른 것이었다. 이 홀들은 모두 노래살롱과 달랐다. 대형화하였고 상업화하였으며 전문화된 공간과 인력을 갖추었다. 지속사업으로서의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이다.

런던에 첫 뮤직 홀을 개관한 것은 찰스 모튼이었다. 그는 뮤직 홀의 역사였다. 60여년에 걸쳐 펍과 뮤직 홀을 경영하면서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였다. 뮤직 홀이라는 이름은 이미 시중에 나돌고 있었지만 처음으로 그 이름을 붙여 큰 상업적 공간을 만들고 처음으로 신문에 뮤직 홀을 광고한 것도 모튼이었다. 그래서 모튼을 ‘뮤직 홀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모튼은 어렸을 때부터 공연에 매료되었다. 드루리 레인에서 윌리엄 맥크레디와 제니 린드의 공연을 보고 공연업에 종사하고 싶어졌다고 한다. 처음에는 태번에서 웨이터 생활을 하였다. 1840년 21살 때 캔터버리 인즈라는 펍을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일주일에 한번씩 노래를 부르는 모임이 결성되었다. 프리 앤 이지였다. 노래를 선호하는 소상공인이나 기계공 등이 주로 참가하였고 이들은 모두 아마추어 노래동호인들이었다. 100여 명이 참여할 수 있는 방을 설치해서 1주일에 한 번씩 노래모임을 가졌다. 나중에는 전문가수들도 영입하고 입장료를 징수하게 된다. 노래살롱으로 발전한 것이다. 부부동반의 방문객들은 매주 한번씩 정기적인 노래모임을 개최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모튼은 이에 동의하였다. 방이 작다고 느껴지자 400-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중형홀로 확장하였다. 그리고 치안판사에게서 정식 허가를 획득하고, 전문배우들을 영입하였다.

그는 태번과 노래공간을 분리하여 오락을 상업화하기 시작했다. 1952년에 캔터버리 암즈를 뮤직 홀로 바꾸어 런던 최초의 뮤직 홀을 오픈한다. 1855년에는 같은 장소에 두 번째의 캔터버리 뮤직 홀을 오픈하였고 1861년에는 옥스포드 뮤직홀을 설립한다. 이 홀은 웨스트 엔드의 중심가에 위치하였다. 뮤직 홀이 교외에서 점차로 시내중심부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튼은 여기서도 선구자였다. 관객구성은 3분의 2는 남성 노동자들이었고, 나머지는 여성과 아기를 데리고 오는 가족들도 있었다. 모튼은 1877년에 알함브라 극장의 경영자가 된다. 알함브라는 1870년에 음악과 춤공연허가를 받지 못해 재정적 위기에 빠져 있었는데, 모튼이 맡으면서 이를 극복한다. 1882년에는 화재가 나서 극장운영을 중단했지만 1884년에 재개관한다. 1891년에 은퇴를 선언했지만 팰리스 버라이어티 극장의 간곡한 요청으로 다시 이 극장의 경영을 맡는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뮤직 홀의 성격은 노래살롱과의 차별화였다. 기존의 펍과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어야 했다. 그는 출연자들에게 정장을 요구하였다. 세련되고 정돈된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프로그램의 차별화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다른 장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프로그램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과거의 오락, 즉 펍, 플레저 가든, 장터오락, 학교와 강의실의 오락 심지어 유곽의 오락까지 현대적으로 변용하는 시도를 계속했다. 전문지휘자가 대중앞에서 공개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모튼은 캔터버리 홀을 고급 문화공간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림을 전시할 수 있는 갤러리를 설치하였고, 오페라 공연도 하였다. 구노의 <파우스트>를 최초로 공연한 것도 모튼이었다. 뮤직 홀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지방의 노래살롱과 차별화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성공에는 샘 코웰(Sam Cowell, 1820-64)이라는 스타의 공로가 절대적이었다. 코웰은 뮤직 홀의 첫 스타였지만 이미 노래와 저녁이 있는 집에서부터 유명한 배우였다. 술과 음식보다 스타가 더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1855년에 캔터베리 홀에 또 하나의 뮤직 홀을 만든 것도 그의 인기에 의한 것이었다. 코웰은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서 자랐고 다시 영국으로 건너와 20살 때 데뷔했다. 그는 펍의 대스타가 되었고 이어 뮤직 홀에서도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1857년부터 영국과 미국, 캐나다 순회공연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어떤 의사는 환자에게 그의 공연을 관람하도록 권유하였다. ‘샘 코웰이라는 치료약을 드세요. 그러면 건강이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술이 없으면 공연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알콜중독자였다. 공연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리가 없었다. 서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몸이 쇠약한 가운데에서도 억지로 공연을 강행하다가 병을 얻었다. 지나치게 바쁜 일정과 과도한 음주, 공연실패로 인하 채무와 스트레스로 인해 1864년에 사망하고 만다.

모튼은 공연시작전에 국가를 연주하였는데, 이는 관객의 애국심을 자극하여 극장을 좀 더 품위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공동체의 이익에 봉사한다는 믿음을 주려는 의도였다. 일생을 주류 판매업과 뮤직 홀 경영에 바쳤지만 정작 그는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캔터버리 홀은 1921년에 영화관으로 바뀌었고 1955년에 철거되었다.

조지 크룩섕크(George Cruikshank, 1792-1878, 빅토리아 시대의 유명한 캐리커쳐 작가)가 그린 진 가게(출처=wikimedia.commmons)

3. 공간의 합리화

선술집에서 궁전으로

극장의 구조와 배치가 공연내용과 소비자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극장구속성’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 바 있다. 극장구속성은 뮤직 홀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초라한 펍이 화려한 뮤직 홀로 바뀌는 과정(from pothouse to palace), 오락의 상업화과정에는 건물의 변화가 있었다. 손님을 유인하려면 과거의 초라하고 불결한 공간에서 세련된 공간으로의 변화가 필요했다. 실제로 싸구려 술집은 거칠고 비위생적이고 위험했으며 하층민만 드나들었다. 이를 상업화하려면 공간을 보다 세련되게 꾸미고 운영방식을 합리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공간의 합리화’라고 부르기로 하자. 뮤직 홀에서의 공간의 합리화는 크게 건물의 규모와 내부장식, 그리고 실내구조물의 배치의 변화를 들 수 있다. 하찮게 보이는 의자나 테이블, 카운터 등의 배치와 운영방법 등의 차이에 따라 공간운영에 커다란 차이가 나타났다. 또한 어떤 공간을 설치하고 해체하느냐에 따라서도 운영과 프로그램 구성이 크게 달라졌다.

폭음으로 인한 폐해는 맥주보다 주로 독주에서 발생하였다. 영국에는 강한 반진(anti-gin)정서가 있었고, 진가게(Gin Shop)를 ‘자살의 거주지’라고 불렀다.맥주집에는 의자가 있는 바(tap room)와 편안한 응접실이 있었고 종업원들이 손님들의 주문을 받았다. 맥주집에서는 남성들이 앉아 있는 바를 통과하지 않으면 독주를 살 수가 없었고, 이는 여성들의 맥주소비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다.

영국정부는 맥주판매허가를 받은 펍에서만 독주를 판매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진가게에서는 맥주판매허가는 형식적으로 받아놓고 주로 독주를 팔았다. 법의 허점을 악용하는 방법이었다. 진가게에서는 좁은 공간에 카운터를 놓고 술만 팔았다. 손님회전을 빠르게 해서 수입을 높이려는 상술이었다. 카운터 서비스는 여러 펍으로 확산된다. 카운터는 커지고 여러 장식들이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카운터가 있는 진가게는 바를 거치지 않고 바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여성들도 진을 살 수 있어서 이들의 음주를 부추긴다는 비판이 있었다. 경찰은 이러한 진가게의 영업방식을 규제하였다. 거리에서 바로 진가게로 연결된 펍에 대해 허가를 취소한 경우도 있었다.

1830년대에 들어와 진 사업자들은 손님유인책으로 초라하고 불결하던 진가게를 진궁전(gin palace)으로 바꾼다. 수많은 가스등, 반짝이는 시계, 판유리를 설치하고 외벽을 장식하였다. 가스등은 런던 거리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야간통행을 편리하게 하고 범죄를 줄였다. 그러나 가스등은 진궁전으로 유혹하는 호객꾼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독주를 팔 수 있는 바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맥주집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이 화려한 변신은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는 주로 진궁전의 화려함과 우아함 때문이었다.

새뮤얼 톰슨은 <톰슨과 코우츠 Thompson and Coates> 라는 진가게를 열었다. 손님은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톰슨은 중산층의 주류 도매상까지를 포섭하기 위해 ‘품위’(또는 점잖음 Respectability)와 ‘ 화려하고 우아한’ 실내장식을 중요한 영업방침으로 내세웠다. 그는 건물을 개량했고 톰슨과 코우츠는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진가게가 되었다. 불과 세시간만에 1,400여명의 손님이 드나들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장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번잡해서 경찰들은 폭동과 혼란을 걱정하였다. 톰슨과 코우츠는 관광객들의 필수코스가 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아직 진궁전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이었지만 이미 진 궁전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진가게는 점점 화려한 진궁전으로 바뀐다.

진궁전의 출현에 대해 금주운동가는 새로운 적이 출현했다고, 기자는 도덕을 해친다고 비판하였고, 치안판사들은 허가취소를 하겠다고 위협하였다. 특히 폭음을 단속하고 허가를 관장하던 경찰과 치안판사들은 진궁전의 출현을 매우 우려하였다. 이들은 진궁전을 착취적이고 비도덕적이며, 사기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진 궁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고 찬반논쟁이 있었다. 1830년의 맥주법은 맥주소비를 촉진하기 위한 정책이었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맥주법이 통과되자 진 궁전에 대한 투자가 늘어났다. 맥주법은 맥주집의 영업시간을 10시로 제한하였다. 그러자 10시 이후에는 진 궁전으로 이동하였다. 결과적으로 진소비는 감소하지 않았고, 오히려 맥주소비가 감소하고 있었다.

진 궁전은 뮤직 홀 탄생과 관계가 있다. 과거의 노래살롱이나 펍은 어두컴컴한 방에서 술마시고 노래하는 사람들이 뒤섞여 무질서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런 펍을 화려하게 바꾸어나간 펍 경영자들은 보다 수익성있는 사업을 찾아나섰다. 그들은 펍에 노래를 도입했다. 1852년에 영국에서 퍼블릭 하우스에 대한 특별위원회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맥주집, 무도장, 커피하우스, 극장과 기타 대중오락장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음악살롱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음악살롱에서는 노래와 춤, 저글링과 텀블링등을 공연했다. 펍은 점점 상업화하여 산업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19세기에 산업화와 함께 노동자들의 오락욕구가 분출하면서 이를 흡수하기 위한 제도들이 생겨난 것이다

뮤직 홀들은 상업화하면서 연극과 경쟁하게 되지만, 오히려 건축적인 측면에서는 전통극장의 건축을 모델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1858년에 토마스 유단(Thomas Youdan)은 서레이 뮤직홀을 재건축하면서 코벤트 가든 오페라 하우스를 모델로 했다. 이는 유단의 개인적 취향이기도 했지만 오페라가 고급예술이라는 인식은 늘 있었던 것이다. 뮤직 홀은 강당, 극장, 박물관, 동물원, 볼룸 등에 사용된 다목적 홀이었다 .

17세기 영국의 커피하우스(출처=history.com)

공간의 합리화

뮤직 홀의 공간의 합리화는 집기의 배치와 운영방식의 변화에 의해서도 나타난다. 1870년대부터 식음료공간과 무대를 분리하고 테이블도 고정의자로 교체하였다. 그러자 관객의 이동통제가 용이해져서 질서가 잡히기 시작했고, 좌석예약도 가능해졌다. 이는 프로그램 구성을 용이하게 하였고, 하루저녁 2회 공연을 가능케 함으로써 수익성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이를 턴 시스템(Turn system)이라고 하였다. 또한 관객교체도 쉽게 이루어졌다. 사회자도 사라지고 출연자와 프로그램소개는 무대옆 설명판으로 대체하였다. 이런 모든 변화는 연극극장을 모델로 한 것이다. 뮤직 홀은 연극의 예술성과 극장운영방식을 모방하였고, 극장은 뮤직 홀의 대중적 프로그램과 스펙터클을 도입했다. 고급연극과 대중연극 사이의 이런 상호작용을 상호연극성(Intertheatricality)이라고 부를 수 있다. 1880년대부터는 독주판매도 금지하여 홀을 점점 문명적인 공간으로 변화시켜 나갔다.

이로써 초기 뮤직 홀의 특징이었던 인적 운영방식이 시스템적 운영으로 바뀌게 된다. 즉 사람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던 방식에서 조직과 시스템에 의한 운영방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런 공간과 조직의 합리화는 뮤직 홀의 상업화를 촉진한다.

뮤직 홀은 점점 대형화되고 숫자도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1850년 볼턴(인구 6만)의 스타 뮤직홀은 1,500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1860년대 맨체스터(인구 35만)에는 8,500개의 좌석이, 1866년 런던에는 3백개 이상의 소형 홀과 1,500에서 5천석에 이르는 대형홀 30여개가 있었다. 1890년대에 뮤직 홀은 버라이어티 극장으로 발전하여 모든 계층을 수용하는 대중오락이 되었다 . 프랭크 마참(Frank Matcham)은 당시에 뮤직 홀과 버라이어티 극장 설계에서 독보적인 건축가였다. 40여년간 90여개의 극장을 설계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오스월드 스톨(Oswald Stoll)이 경영하던 모스 제국과 20여년에 걸쳐 작업하면서 21개의 극장을 설계하였다. 엠파이어, 팰리스, 콜리세움, 히포드롬 등이 그가 설계한 극장이었다. 버라이어티 극장은 기존의 뮤직 홀을 한 단계 더 고급화한 것으로 샹들리에, 금빛꽃잎장식, 팔걸이가 달린 붉은 색 벨벳의자 등이 설치되었다. 테이블은 사라지고 고정석이 설치되었으며 프로시니움 아치를 달았으며 사전예약을 실시하였다. 연극극장과 같은 모습이었다. 버라이어티 극장의 효시가 된 것은 1885년에 개축한 런던 퍼빌리언이었다. 1904년에 건설된 런던 콜리세움은 가장 크고 화려한 극장으로 당시 유럽에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유일한 극장이었다. 대리석 계단과 각층의 찻집도 다른 극장과 다른 점이었다. 사라 베르나르도 여기서 공연한 바 있었다.

술집이 프리 앤 이지와 노래살롱을 거쳐 뮤직 홀로 발전하고 화려한 버라이어티 극장으로 변신한 것은 건축물의 변화와 운영방식의 합리화가 이루어낸 결과였다. 그러나 뮤직 홀은 운영과정에서 많은 반발과 저항에 부딪혔고, 시민사회의 개혁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과도한 상업화가 불러온 결과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